Chapter5
우리가 곧바로 신전을 나오자마자 카넨이 치료소로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카넨은 하일이 말했던 장소에 시신과 시신이 보관되어 있는 집을 불태우러 갔다. 걱정된다며 눈을 떼지 못하는 그를 본 트라비안 공작이 실소하며 자신이 이곳에 있을 테니 가 버리라고 하자, 마지못해 간 것이었다.
치료소에 오니 많은 신관들이 일사불란하게 치유를 하고 있었다.
“…대충대충 하면 진짜 화날 뻔했는데, 그래도 생각보다 잘하고 있네?”
내가 작게 중얼거린 말을 가까이 있던 신관이 들었는지 그가 억울한 듯 말을 붙여 왔다.
“모든 신관들이 파문된 리히엔과 같은 뜻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또한 질병 치유는 저희가 주로 해 왔던 것이기 때문에 익숙합니다.”
“그래요. 제가 실례되는 말을 했네요. 미안해요.”
내가 깔끔하게 사과를 하자 오히려 그가 놀란 눈을 뜨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잘못은 내가 했는데 왜 그쪽이 사과를 해요. 치료하셔야 하니 일어나세요.”
“…예.”
많은 수의 신관들이 성력을 이용해서 치유하고 있으니 그동안 고생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환자가 줄었다.
성력이 다 되어 회복이 필요한 신관들은 환자들이 빠져나간 빈 병동에 모여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그들이 휴식을 취하는 중에도, 나는 아까 전에 신전에서 성력이 충만하게 차올랐기에 그것을 이용하여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공작 부인, 이쪽으로 오세요.”
“네, 성녀님.”
초조한 기색으로 아내의 치료를 기다리고 있던 트라비안 공작이 앉아서 쉬고 있던 자신의 아내를 냉큼 눕혔다.
숨을 쌔액쌔액 쉬고 있는 공작 부인이 베일을 벗자 발병한 지 시일이 꽤 지났는지 푸른 반점이 목 위에도 올라온 것이 보였다. 드레스와 장갑 틈으로 보이는 손목도 푸르게 보이는 걸로 보아 아마 온몸을 뒤덮고 있을 것이 뻔했다.
아무래도 많은 성력을 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손에 성력을 모았다.
‘증상이 심각하니 어쩌면 여러 번 성력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런데 어쩐지 아까 전보다도 훨씬 쉽게 성력이 모였다. 뭐랄까, 이전까지는 성력을 빌려 오는 기분이었더라면 지금은 맡긴 걸 찾아오는 느낌?
원작에서 여자 주인공이 썼던 표현을 빌리자면 ‘숨 쉬듯이 자연스러웠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녀보다는 그냥 대공비라고 불러 주세요.”
성녀는 따로 있으니 나는 대공비라는 직함이면 충분했다. 물론 대공비도 여자 주인공의 자리였긴 하지만… 그래도 결혼했으니 내 자리다. 그러나 성녀는 내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곧 긴장한 공작 부인의 얼굴에 손을 대고 성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별안간 황금색 빛이 터져 나왔다.
“레이첼!”
트라비안 공작이 밝은 빛으로 인해 눈이 부셔 제대로 눈을 뜰 수 없는 중에도 팔을 뻗어 공작 부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의 아내의 몸에 있던 성력이 그에게도 흘러들어 갔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이래?’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갑작스러운 밝은 빛에 당황한 나는 성력을 거두었다. 그제야 밝은 빛이 사그라들며 우당탕탕 하며 신관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어서 달려와! 무슨 일인지 나한테 좀 알려 줘!’
우선 그보다도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놀랐을 공작 부인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다.
내가 아무리 대공비라지만, 원작을 봤던 사람 입장에서는 트라비안 대공 무섭다고…….
“괜찮아요, 공작 부인? 많이 놀랐죠?”
“…네, 정말… 놀랍네요.”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공작이 물어 왔지만, 내가 답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떡해……. 저도 이런 건 처음이라!”
성력이었기에 망정이지 이게 일반 빛이었으면 눈이 멀어 버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좋은 일 하려다가 되레 욕만 먹는다고 생각하면서 사과하려고 했다.
트라비안 공작이 날카로운 어조로 묻는 건 연약한 내 심장이 버틸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내 편인 카넨도 없었다.
아무리 내가 대공비라지만, 외전에서 트라비안 공작은 황제도 어쩌지 못한다고 했단 말야!
“라비, 그렇게 말하면 남들이 오해한다고 했잖아요.”
오해라뇨. 당치 않습니다. 오해할 여지가 없는 제 목이 뎅강 잘리기 직전의 분위기였는걸요.
“죄송합니다, 비전하. 우선 레이첼을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비전하.”
혹시 빛만 요란하고 치유력은 없으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그들의 반응을 보니 다행히 치유는 제대로 된 것 같았다.
성력을 거둬들이는 것이 너무 일러서 한 번 더 치료해야 하나, 그러면 또 그런 빛이 터져 나오려나 고민했는데 다행이었다.
“다행이네요, 정말. 하. 하. 하. 하.”
“그런데…….”
트라비안 공작이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에 신관들이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성녀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성녀님 성력은 제가 먼저 눈치챘습니다! 저 먼저 들어가게 해 주십쇼!”
“아, 아니야! 내가 먼저 눈치챘다고!”
어디서 많이 들어 봤던 말인데……. 그, 마탑 내라든가… 카넨의 방문 앞이라든가… 마탑 최상층의 문 앞이라든가…….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다행이다! 계속 그대로 있었으면 숨도 못 쉴 뻔했어! 역시 북부의 냉혈 공작! 그 분위기는 사실이네!
공작 부인이 일어나 앉아 매무새를 정리한 뒤에야 문을 열려고 갔다. 가능하면 이 방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신관들은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문 틈새로 밀고 들어왔다.
결국 내가 뒷걸음질 치고 문이 완전히 열리자 대체 이놈의 신관들은 치유도 안 하고 왜 다 여기 왔나 싶을 정도로 하나도 빠짐없이 몰려왔다.
방에 들어오지 못한 신관들이 복도를 가득 메웠다. 뿐만 아니라 신관들 사이사이에는 환자도 섞여 있었다.
뭐야……. 반란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왜 그래. 반란을 일으킬 거면 나한테 오실 게 아니라 황성으로 가셔야죠.
“성녀님!”
그놈의 성녀 소리 진짜. 성녀는 아직 이 세계에 안 왔다고…….
“성력 한 번만 보여 주십시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뭐예요.”
환자들 치료하는 사람들인 데다가, 중간중간 환자들도 섞여 있으니 욕할 수도 없고.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하지만 눈을 빛내는 수십의 눈동자에 주춤해서 결국 작게 한숨을 쉬고 손끝에 성력을 모았다.
그랬더니 수십 개의 입이 동시에 ‘오오’ 하기 시작했다.
“…보셨으면 나가 주시죠.”
“가, 가호 한 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도요!”
“저도, 저도요!”
“나는 중급 신관이라고! 하급 신관은 뒤에 서!”
이게 대체 뭔 일이야…….
“일단 중급 신관이라고 하신 분은 제일 뒤로 가시고요. 가호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 어쩌죠? 다음에…….”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성력을 사용하시면서 ‘신의 가호를!’이라고 해 주시면 됩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신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 손을 얹으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난데없는 접촉에 놀라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확인하니 카넨이었다.
“카넨! 언제 왔어요?”
돌아온 카넨을 웃으며 반기니 그도 마주 웃었다. 그러나 곧 표정을 굳혔다.
“가호, 하지 마십시오.”
“왜요?”
“지금 당신이 하는 건 진짜 신의 가호니까.”
“네?”
가호가 가호지 진짜는 또 뭐야. 그럼 가짜 가호도 있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는데, 카넨의 의견에 트라비안 공작이 동조했다.
“카넨의 말이 맞습니다. 현재 상황을 확실히 모르시는 것 같은데, 아직 신전과 사이가 별로 안 좋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죠.”
대신관 에녹. 그 새끼만 생각하면 저절로 이가 갈린다.
“레이첼이 어떤지를 모르겠습니다만, 비전하가 성력을 사용하시는 동안에 레이첼과 접촉했던 저로 말씀드리자면… 어릴 적 뭣 모르던 시절에 검을 휘두르다가 생긴 흉터까지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만성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근육통까지 전부요.”
“그런 게 있었어요, 라비?!”
깜짝 놀라는 공작 부인을 보고 공작이 옅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달달하네. 역시 트라비안 공작. 아무 말 없이 머리카락만 넘겨 주어도 애정이 뚝뚝 묻어 나왔다. 카넨도 좀 보고 배웠으면.
“그런데 저도 그래요. 출산하고 나서 허리도 아프고 손목도 아프고 여기저기 다 아팠는데, 전혀 없어요. 피부도 더 좋아진 것 같아요!”
“레이첼, 왜 그런 걸 말하지 않은 겁니까!”
“원래 출산하면 다 그런 거라고 하는데, 너무 유난인 것처럼 보일까 봐서요……. 하지만 이제 괜찮아요!”
…이 만담꾼 같은 부부는 그렇다 치고. 결국 그들이 하는 말은, 내가 단순히 치유하려고 했던 것이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된 건가.
이게 가능해? 뭐, 그런걸로 따지면 마법이나 성력도 내 상식 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
“그럼 일단 정신없는 것 같으니 우리는 가 볼게. 레이첼과 나눌 대화가 많거든. 오늘의 일은 꼭 나중에 갚도록 하지.”
“저희 남편을 치료해 주셔서 감사해요, 비전하. 기회가 된다면 꼭 저희 저택에 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찻잎이 있거든요. 못 마시고 죽는 줄 알았는데…….”
“그래요, 다음에 불러 주세요. 꼭 갈게요.”
트라비안 공작 부부의 세기의 로맨스는 이곳에서도 아직 회자되고 있었다. 내가 읽었던 소설에서는 원작 주인공이 카넨과 유리나였기 때문에 트라비안 공작 부부의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대체 어떻길래 세기의 사랑이라는 건지, 원작에서 다 나오지 않은 그들의 연애담이 궁금했기에 초대를 기꺼이 수락했다.
그런데 문제는 신관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발 디딜 틈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배웅해야 하니, 지나갈 수 있게 길을 좀 터 주시겠어요?”
“예, 예!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신관들이 마치 모세가 바다를 가르듯 복도의 양옆으로 붙었다. 권력의 단맛은 이런 거라고 생각하면서 착실하게 걸어갔다. 내 뒤로 카넨과 트라비안 공작 부부가 따라왔는데, 의학 드라마에서 교수님이 회진하는 것 같았다.
건물에서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치료소를 에워싸고 있었다.
왜 다들 나와 있나 의아했지만 우선 공작 부부를 배웅하기로 했다.
“그럼 다음에 편지해요.”
“네, 네! 물론이죠!”
아이고, 예뻐라. 여자 주인공인 유리나를 실제로 못 봐서 모르겠지만, 레이첼이 여자 주인공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예뻤다.
레이첼이 아쉬워하면서 계속 뒤돌아보는 것을 트라비안 공작이 기다리지 못하고, 그녀를 훌쩍 안아 마차에 태워 갔다.
이제 남은 것은 신관들이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자니 갑자기 내 손을 카넨이 잡아챘다.
“…그럼 이제 급한 불은 끈 겁니까?”
“그렇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우선 신관들이 치료한다고 했고, 심각한 환자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또 할 말이 남아 있지 않느냐는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신관을 카넨이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럼 저한테도 신경 좀 쓰십시오. 계속 환자들만 보지 말고. 이게 며칠째입니까.”
카넨이 뾰로통한 얼굴로 틱틱대는 것이 귀여워서 피식 웃으니 카넨이 언제까지 웃나 보자며 나를 안아 올렸다.
“성녀님!”
신관들이 나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곧바로 아공간과 연결을 해 마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카넨은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었다. 그러자 치료소에 온 신관과 대립해서 예정보다 일찍 마탑으로 돌려보낸 마법사들이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기대에 찬 눈빛의 마법사들을 보고 카넨은 아공간에 보관해 두었던 마력 결정을 한 개씩 꺼내 그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일주일 동안 찾지 마.”
“그럼요, 그럼요!”
문을 쾅 닫고 돌아온 카넨이 나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저 열흘이나 참았습니다.”
“벌써 그렇게나 됐나요?”
“벌써? 버얼써어? 지금 벌써라는 말이 나오십니까?”
카넨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흘겨봤다. 그래도 나는 정말 억울했다.
갑작스럽게 몰린 환자들로 인해 성력을 바닥낼 때까지 치료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잠이 들었다가 위급한 환자가 오면 다시 성력을 쓰는 것을 반복했다. 내가 원래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더 피곤했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성력 한 번에 일정 금액씩 돈을 받았으면 나는 떼부자가 됐을 것이다.
…그럴 걸 그랬나?
진지하게 후회하면서 고민하고 있는 나의 눈앞에 부드러운 천이 나타나 눈을 가렸다. 의아해하며 손으로 끌어 내리고 카넨에게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일이 수습된 뒤에 일주일간은 저와 함께 있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으음, 그래도 그 신관들이 치료 잘하는지도 궁금하고…….”
“그것들이 어딘가 모자란 게 아니라면 당신이 시킨 일은 잘할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신관과 마법사는 사이가 굉장히 안 좋은데, 카넨이 어떻게 그들을 이렇게까지 철석같이 믿을 수 있는 거지?
“그거야 당신이 트라비안 공작 부인을 치유할 때 쓴 성력이 신의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성력은 원래 신의 것 아니에요?”
“원래는 영혼에 담겨 있는 만큼의 성력만 쓸 수 있습니다. 이전에 당신이 성력이 고갈될 때까지 연습했던 것처럼요.”
“그럼 지금은요?”
“신한테서 받아서 쓰게 됐으니 성력을 쓸 때 전보다 효과가 좋고, 성력이 고갈될 일이 없습니다.”
오……! 그래서 아까 전에 트라비안 공작 부부가 만병통치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행동했던 거구나!
“그래서 당신 말을 함부로 거스를 수 없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신의 대리인이 된 것이니까요.”
“좋네요! 엄청 좋네요! 그러면 대신관도 내가 막 내쫓아도 되는 건가?”
“그건 아마 힘들 겁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성녀는 존재하지 않고 대신관이 신전을 총괄했으니 세력은 아직 건재할 겁니다.”
아, 아쉽다……. 사람 목숨을 우습게 아는 대신관은 내쫓고, 그 자리에 내가 올라 신전을 장악한 뒤 헌금 받아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삶을 생각했는데.
짧은 시간 동안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행복했다.
“다시 같은 질문인데, 그러면 치료소의 신관들이 대신관을 따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당신이 있던 치료소에서 거대한 성력이 흘러나오는 모습이 수도 내에서는 다 보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쓰는 황금색의 성력은 신의 색이기에 당신의 성력을 직접 목격한 이들은 다른 생각을 품기 힘들 겁니다.”
카넨은 그래서 신전에서 보내온 편지에 금색 자수가 놓인 것이라고 덧붙였다.
“게다가 당신이 다른 신관의 성력까지 강탈한 모습도 보지 않았습니까. 같은 꼴을 당하기 싫으니 지시에 잘 따를 겁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성녀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면 원래 성녀가 이곳에 오면 어떡하지? 그럼 그때는 황금빛의 성력도 못 쓰고 빼앗기게 되는 건가?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뻗쳐 나가려고 할 때, 카넨이 다시금 부드러운 천으로 눈을 가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내게 집중하세요.”
카넨이 내 머리 뒤로 끈을 단단하게 묶어 고정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다른 감각들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화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연기 냄새가 났다. 그리고 몸을 답답하게 감싸던 드레스의 촉감이 사라졌다.
“옷 좀 태우지 말고 평범하게 벗기라니까…….”
“저한테 그럴 여유가 있을 것 같습니까?”
카넨의 손가락 끝이 페리아의 뺨에서부터 목을 따라 가슴으로 내려갔다. 전염병을 잡아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새로운 능력을 얻은 것에 대한 충족감이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오랜만에 그와 보낼 열락의 밤에 대한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카넨이 페리아를 안아 들어 침대로 올라갔다. 자신이 누운 뒤에 앞이 보이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녀를 자신의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카넨이 그녀의 하체를 끌어당겨 자신의 얼굴 위에 오게 했다.
페리아는 아래에서 자신의 허벅지를 단단히 잡아 고정시키는 데다가, 밀부에 닿는 카넨의 숨결로 인해 그녀가 카넨의 얼굴을 깔고 앉은 것을 알았다. 카넨이 두 개의 손가락을 이용해 음핵이 잘 보이도록 그녀의 밀부를 열어젖혔다. 혀를 넓게 펴서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몇 번 문지르자 단단해진 음핵을 혀로 굴렸다.
“아, 아아! 카넨, 아흣!”
페리아가 본능적으로 허리를 튕기려고 할 때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카넨이 혀를 뾰족하게 세워 그녀의 질 안을 헤집었다. 어느새 그의 것은 단단해지는 것으로 모자라 끝에서 윤활액이 흘러나와 기둥을 타고 내려갔다.
카넨의 혀가 길어 봤자 그의 손가락이나 페니스만큼 긴 것이 아니었기에 줄 수 있는 자극에는 한계가 있었다.
“카넨, 넣어 줘요! 으읏… 혀 말고…….”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요구하는 페리아에게, 카넨이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되물었다.
“혀 말고 뭘 넣고 싶으신 겁니까?”
“… 당신 거.”
“저의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거?”
그가 페리아의 허리를 세워 그녀의 안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하나로는 부족할 것을 알기에 세 개를 한 번에 집어넣을까 하다가, 왼손과 오른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집어넣었다.
양손의 손가락이 서로 교차하며 안을 찔러 넣는 것은 처음이라 페리아는 그의 머리맡에 있는 침대의 헤드를 붙잡고 바들바들 떨었다.
손가락을 찔러 넣으면서도 혀로 그녀의 음핵을 굴리니 페리아는 절정과 함께 애액을 쏟아 내며 무너져 내렸다.
카넨이 쾌락의 여운에 덜덜 떨며 숨을 몰아쉬는 페리아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위에 쏟아져 내린 그녀의 애액을 손으로 대강 닦아 내고 입가에 묻은 것을 혀로 핥아 냈다.
“손가락으로 만족하시나 봅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페리아가 아직 쾌락에 잠겨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의 반응 하나하나에 카넨의 좆이 더욱 단단해지는 것을, 눈을 가린 페리아는 알지 못했다.
“그럼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카넨이 즐거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하니 페리아가 져 줬다. 손가락이라고 답하고 계속 손으로 해 달라면서 카넨을 애태우는 것도 좋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이 아니었으니.
“…내가 말하길 바라요?”
“네.”
“뭐라고 말해 줄까요?”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워낙 다양해서.
“편하실 대로.”
“당신의 좆. 자지? 아니면 페니스라고 할까요? 성기? 남근? 어떤 게 맘에 들어요. 골라 봐요.”
카넨은 잠시 당황했다. 페리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고작 이 정도로 당황하며 얼굴을 붉히는 여자가 아니었는데.
오히려 그녀의 눈이 가려져 있어 제 얼굴이 붉어진 것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씩 넣어 드릴 테니 올라오십시오.”
카넨은 이전에 그녀가 ‘내가 올라가면 너무 깊이 들어가서 못 버티겠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 냈다. 힘들어서 잘 못 하겠다던 페리아가 위에 올라타서 허리를 흔드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때 혼자서 자위하던 페리아를 떠올리니 그의 것이 더욱 몸집을 키웠다.
“…다 같은 건데 한 번씩이라뇨?”
“아시면서 뭘 그러십니까.”
페리아는 다섯 번은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대감을 안고 앞이 보이지 않으니 손으로 더듬더듬 침대를 짚어 가면서 움직였다.
그러다 손이 그의 페니스를 만지게 되었을 때, 페리아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얘가 원래 이런 크기였나?’
페리아가 카넨의 위에 올라타 그의 성기를 자신의 아래에 맞추고 조금씩 내려앉았다. 귀두를 막 삼켜 냈을 때, 카넨은 페리아의 어깨를 붙잡고 눌러 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기 위해서 모든 인내심을 동원해 괜히 손에 잡히는 시트를 구겼다.
“하아… 하아, 카넨…….”
페리아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그녀가 좋아하는 곳을 자극했다. 카넨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조금 더 느낄 수 있게 그녀의 가슴을 손에 쥐고 목덜미에 잇자국을 남겼다. 머지않아 페리아가 절정에 다다르며 카넨의 위로 풀썩 쓰러졌다.
긴 기다림이었다.
페리아가 움직이는 것은 카넨의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깔짝대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허리를 짓쳐 올리고 싶은 것을 참아 낸 것은, 페리아가 자신의 위에 올라타서 스스로 허리를 돌리는 것을 보는 게 육체적인 쾌락보다 훨씬 앞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페리아가 움직일 때의 이야기지, 지금처럼 숨을 고르며 쉬고 있을 때의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카넨은 달아오른 몸으로 자신에게 안겨 오는 페리아를 마주 안아 주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내가 짐승처럼 쑤셔 박아도 똑같이 내게 안겨 오겠지. 어쩌면 울면서 매달릴지도.’
카넨이 큭큭큭 웃자 페리아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그의 가슴팍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좋았습니까?”
페리아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쾌감.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가끔은 이런 날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매달려 보십시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의문을 갖기도 전에 카넨이 밑에서부터 세게 쳐올렸다. 페리아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이 아닌, 내장을 밀어 버릴 듯이 깊숙하게 들어오면서 질 안을 꽉 채웠다.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거, 알고 있으니.”
카넨이 페리아가 도망갈 수 없게끔 골반을 붙잡고 세게 쳐올렸다.
“흐앙!”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녀의 허리를 위로 들었다가 아래로 놓으면서 그 박자에 맞추어 추삽질을 반복했다. 페리아는 안쪽 깊숙한 곳까지 무자비하게 찔러 대는 카넨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카넨은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녀를 안은 채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페리아가 더욱더 제게 매달리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다리, 감으십시오.”
페리아가 이전보다도 더욱 깊이 들어오는 그의 페니스 탓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카넨이 직접 그녀의 하얀 다리를 제 허리에 감았다. 페리아는 자신의 팔을 카넨의 목에 겨우 둘렀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깊이 들어오는 그의 것을 느끼며 더운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숨결을 느끼자, 더욱 몸이 달아올랐다. 어째 그녀가 제게 매달리기를 바랐는데, 제가 그녀에게 매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과연 페리아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전에는 페리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마력을 채워 넣을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이자, 신전을 조롱하는 용도에 불과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처음에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듯 그녀도 제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페리아도 과연 그러할까.
페리아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지만, 직접 물어보았다가 부정적인 답이 나올까 두려웠다. 자신은 그녀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데 그녀는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볼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의 보랏빛 눈은 제가 가린 까만 천으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가 가린 것이건만, 페리아의 마음이 궁금했던 카넨은 그녀의 안대를 획 벗겨 버렸다.
갑작스러운 빛에 노출된 페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서서히 뜨고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맑은 눈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자 알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카넨?”
“응.”
페리아는 그녀의 얼굴에 뽀뽀 세례를 내리는 카넨을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것이 카넨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그녀에게 솔직하게 답을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카넨은 그것마저 즐거웠다.
그러다 곧 페리아가 몸을 틀면서 그를 재촉했다. 카넨도 점점 자신의 하체에 피가 몰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별다른 애무를 해 준 것도 아니지만 그는 페리아에게 짧게 입을 맞추는 동안에도 허벅지가 단단해지며 힘이 들어갔으니 말이다.
“참기 힘들면 말을 하지 그랬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니에요.”
페리아가 절정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를 배려한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건데, 페리아는 되레 제 것을 먹어치우려고 벌써부터 아래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카넨은 그런 페리아가 귀여워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 얼굴을 비추고 있는 눈동자를. 손으로 그녀의 등허리를 쓰다듬으면서.
이전의 자신이었으면 이미 그녀를 잡아먹기 위해 기절할 때까지 몰아붙였겠지만, 가만히 이렇게 끌어안고 있는 것도 좋았다.
‘마력이 아닌 다른 것이 충족되는 기분.’
가만히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게 페리아가 카넨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더욱 세게 감아 그의 얼굴을 그녀의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를 눈꺼풀 속에 감추고 카넨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언제나 그가 섹스하기 전에 제게 그래 왔듯, 혀로 입술을 톡톡 두드려서 입을 벌리게 하고 그 안으로 자신의 혀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카넨이 했던 것처럼 치열을 고루 훑고 점막을 핥아 내며 그의 혀를 얽어내기 위해 그의 혀 아랫부분을 맛보려고 했다.
‘페리아가 왜…….’
페리아가 키스를 하기 시작하자 그녀를 품 안에 가두고 있던 카넨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것은 비단 팔뿐만이 아니었다. 페리아가 그의 위에서 아무리 허리를 흔들어도 부족해하던 카넨이었으나, 지금은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 당장이라도 파정할 것 같은 느낌에 그조차 당황스러웠다.
그것을 알아챈 페리아가 지근 거리에서 키득키득 웃자, 결국 카넨이 낮게 목을 울리면서 페리아의 안에 파정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몇 번이나 절정에 올라야만 겨우 한 번 파정해 왔는데, 벌써…….
‘고작 키스에? 내가?’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페리아가 먼저 키스한 것에 설레어서 파정하는 꼴이라니. 페리아 역시 놀란 건지 입술을 떼어 내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역시 예상하지 못한 것이기에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페리아는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가 피식피식 웃는 것이 못마땅했다.
“…매달려 보십시오.”
페리아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게 깔더니 카넨의 흉내를 냈다. 그는 자신의 화려한 여성 편력이 무색하게도 고작 여자의 키스 따위에 파정해 버린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
페리아의 이어지는 말에 카넨은 크게 흠칫했다. 분명 그가 한 말이었다. 그녀를 잡아먹을 요량으로 아주 자신만만하게. 그런데 현실은 페리아의 키스 한 번에 녹다운됐지만.
“…알고 있다면서요.”
“…….”
카넨에게는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 시급했다. 지금껏 다른 마법사들이 시간을 돌리는 마법에 대해 말을 할 때마다 왜 그런 게 필요한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번 사건으로 시간 회귀 마법을 반드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카넨이 매달려 볼래요? 그러면 혹시 모르죠, 내가 또 키스할지.”
페리아가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마치 그녀가 키스하면 또다시 카넨을 사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처럼.
카넨이 이 상황이 더욱 어이없는 건, 고작해야 키스 예고에 자신의 것이 다시 힘을 받아 섰다는 것이다.
“아주… 우스운가 봅니다, 제가?”
페리아가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그냥, 조금 귀엽다 싶어서요.”
귀엽다는 그녀의 말에 카넨이 얼굴을 구겼다. 다 큰 성인 남자한테 귀엽다는 말이 썩 기분 좋게 들릴 리가 없었다.
“어디, 계속 귀여워해 보십시오. 할 수 있으면.”
카넨이 허리를 짓쳐 올리며 다시금 고개를 쳐올린 자신의 것으로 그녀의 안을 찔렀다. 풀려 있던 분위기에 마음을 놓고 있던 페리아가, 갑작스러운 충격에 허리를 떨었다.
페리아는 그래도 그에게 귀엽다며 놀리려다가, 결국 모든 뒷감당은 온전히 그녀가 하게 될 것이기에 그저 쾌락에 몸을 맡겼다.
“귀엽습니까?”
카넨이 그녀의 허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그 박자에 맞춰 자신의 것을 쳐올렸다. 그녀가 누워서 그를 받아들일 때보다 훨씬 깊게 들어와 안쪽 깊은 곳을 꾸욱꾸욱 눌러 대는 바람에 페리아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교성이 터져 나왔다.
“아아! …읏, 아읏… 하앙!”
“귀여운 건, 이런 걸 귀엽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움직이는 대로 느끼는 당신 같은 사람.”
그가 계속해서 쳐올리다가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신의 목에 매달려 있던 페리아의 몸을 돌렸다. 쾌락에 떨고 있는 페리아가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대어 앉자, 카넨이 자신의 것을 단번에 다시 찔러 넣었다.
“흐윽!”
페리아가 머리를 들고 허리를 휘며 가벼운 절정에 올랐다. 하지만 카넨은 아직 멀었다는 듯 그녀의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 그녀의 허벅지까지 타고 내려온 애액을 손가락에 묻혀 음핵을 유린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손가락을 받아들이자, 빠르고 가볍게 추삽질을 시작했다.
“아, 아아! 카넨! 아읏! 으…흣!”
페리아가 과한 쾌락을 버티지 못해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으나, 그의 허벅지에 걸려 소용이 없었다.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그녀의 음핵을 지그시 누르며 원을 그려 페리아를 미치게 만들었고, 동시에 카넨의 페니스는 그녀의 질 내벽을 깊숙한 곳까지 자극했다. 페리아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쾌락에 기대고 있던 카넨의 가슴팍에 머리를 비비며 도리질 쳤다.
“아읏! 카넨, 아, 카넨! 좋아! 하읏! 아! 좋아!”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싫다는 것이 아니라 좋다는 말이었으니……. 카넨 또한 자신의 쾌락을 찾아 페리아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결국 그녀의 질 내벽이 강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그의 것을 사정없이 주물러 대어 페리아에게 절정이 왔음을 알렸고, 그녀의 아래에서 애액이 분수처럼 쏟아 낸 것이 그날 밤 페리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아, 죽겠네. 정말 죽겠다. 카넨과 결혼하기 전까지는 복상사를 걱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진지하게 걱정을 할 때가 된 것 같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고 높은 지위가 있다 한들 요절하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다. 기왕 가지게 된 거 다 쓰다가 죽어야지.
페리아는 일주일 동안 버틴 자신을 칭찬했다. 사실 해가 뜨는 것을 세 번 보고 난 뒤로는 며칠째인지 헷갈렸지만, 카넨이 지난밤 오늘이 마지막 밤이니까 특별한 밤을 보내고 싶다고, 이 중에서 고르라며 각종 도구들을 꺼내 놓고 고르라고 해서 알았다.
그리고 페리아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이는 허리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의 품에 파고들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으면 씻고 식사를 해야지, 2차전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말이 2차전이지 지난 일주일간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계속해 왔으니 이게 몇 차전인지 셀 수도 없었다.
“카넨, 일어나 봐요. 나 이제 나갈 건데.”
페리아가 나간다는 말을 하자마자 그가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딜 간다는 겁니까?”
“치료소 가 봐야죠.”
“…아. 페리아,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신전을 그냥 다 없애 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네?”
페리아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대체 무슨 사고 과정을 거쳤길래 신전을 없애겠다는 말이 나온 건지. 게다가 신전을 없애다니 안 될 말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위치가 대신관 바로 밑이었다. 각종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대신관만 끌어내리면 제가 가장 높은 위치로 올라가게 되는데, 없앤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신전에서 또 이런 일을 안 꾸민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도 종교인데 신전을 없애면 안 돼요! 게다가 이제 수도의 신전은 내가 가질 거란 말이에요!”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왜 이렇게 강하게 반대하는 거지? 나는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 성력을 활용해서 떼돈을 벌 건데. 그걸로 번화가의 상가를 한 채가 아닌 거리 단위로 사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제가 신전에 들어가면 마력이 더 빨리 닳습니다. 안에서는 마법도 못 쓰고.”
“…그런데요?”
그게 뭔 상관이야. 하지만 마력이 더 빨리 닳는 건 몰랐네.
그런데도 지난번에 신전에 같이 가 줘서 고마웠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그러면… 페리아는 저를 두고 혼자 신전에 갈 생각이었습니까?”
이건 또 무슨 의식의 흐름인지.
“제가 신전에 왜 가요? 필요하다면 출퇴근하고 평소에는 여기서 계속 생활할 건데.”
우리 펭귄이가 차려 주는 식사가 얼마나 맛있는데! ‘너희 마법사들은 식사 따위 하지 않을 게 뻔하니 일단 뭐라도 먹기나 해라’는 마음이 담긴, 건강이 아닌 순수하게 맛만 생각한 음식들이었다. 청소 같은 거야 성력으로 하든, 마법으로 하든, 신관이 해 주든 상관없지만.
그리고 내 잘생기고 밤일 잘하는 남편을 두고 굳이 별거할 필요가 있나? 신전은 내가 돈을 벌기 위한 직장이라고 생각할 뿐이니, 구태여 거처를 옮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의 말을 들은 카넨이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해맑게 미소 지었다. 마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처럼 빛나는 미소였다.
‘…눈부셔.’
“그럼 가시겠습니까? 얼른 치료소 다녀오도록 합시다.”
“…얼른 가는 건 좋지만, 얼른 올 필요가 있나요?”
“물론입니다.”
카넨이 나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굳이 그걸 내가 말로 해야 아니? 라고 말하고 있었다.
“…일단 출발하죠.”
“알겠습니다.”
씨익 웃으면서 카넨은 마법을 이용해 치료소로 단번에 이동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사람이 넘쳐 났던 치료소는, 일주일 만에 돌아오니 텅 비어 있었다. 대체 이게 뭔 일인가 싶어서 당황하고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 달려 나왔다.
“성녀님!”
이 신관은 분명 이전에 ‘선물’의 위치를 알려 줬던 사람이었다. 분명 이름이…….
“하일 신관?”
“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치료소에는 각종 집기만 남아 있을 뿐, 하일을 제외하면 단 한 명의 신관도, 또 단 한 명의 환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성녀님께서 계신 곳으로 서신을 보냈습니다만, 도착이 잘 안 된 것 같군요. 어쩐지 답신이 없으셔서 혹시 몰라 제가 자원해서 남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일은 권력욕이 무척이나 센 사람인 것 같았다. 그래도 이런 사람은 나쁘지 않다. 적당한 권력만 쥐여 주면 나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 줄 테니까. 오히려 어려운 건 바라는 게 없거나, 그들이 바라는 것을 내가 충족해 주지 못하는 사람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그전 리히엔 신관도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대신관에게 줄을 섰던 것 같다. 그가 잡았던 줄이 썩은 동아줄이었다는 게 문제였지.
그나저나 서신이 도착을 안 한 이유라면… 아마 카넨이 마법사들에게 일주일간 우리를 찾지 말라고 해서 그랬겠지. 대체 어떤 내용의 편지들이 와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하지만 하일 신관은 내가 편지를 읽지 못한 것을 알고 현재 상황을 요약하여 보고했고, 그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현재 환자들에 대한 치유는 모두 마쳤습니다. 환자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고, 추가로 발병한 사례는 근 이틀간 없었습니다. 그간 환자들을 치료 못 한 것이 마음에 걸려 있기도 했고, 성녀님께서도 환자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시는 것 같아 신관들이 조금이라도 증상이 있는 이들에게 모두 치유 마법을 걸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의견은 제가 제시했고요!”
가슴을 펴며 말하는 하일을 보면서 조금 우습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환자들을 성력을 바닥내 가며 혼자 볼 정도로 신경을 쓰긴 했다. 그래도 신관들이 그들을 잘 돌봐 줘서 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증상이 있는 이들에게 모두 치유를 해 주었으니, 환자들이 병에 걸린 초기에 잘 잡은 것 같았다.
“그래요, 제가 없는 동안에 모두들 고생이 많았네요. 그럼 대신관은 왔나요?”
하일이 놀라 조금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대신관이 오기로 한 날짜가 이미 지났습니다만,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신관들 사이의 추측으로는 아마 리히엔 전 신관의 연락을 받고 오지 않은 게 아닐까… 합니다.”
대신관이라는 작자가 쓸데없이 촉이 좋았다. 오기만 해 보라고, 그러면 성력을 뿌리째 뽑은 후 신관복을 회수한 뒤에 쫓아내 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카넨에게 ‘가라, 카넨! 너로 정했다!’ 하면서 요절을 내라고 하고 싶었다. 그도 아니면 황제에게 저 새끼 순 나쁜 새끼예요! 하면서 지하 감옥 밑바닥행을 요구했을 수도 있고.
“그래요. 혹시나 대신관에게서 연락이 온다면 말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성녀님.”
“네?”
“리히엔의 방을 정리하다가 발견된 문서들이 있습니다. 신전에서 반출하면 안 될 것 같아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되도록이면 지금 바로 신전에 가셔서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원래 계획은 딱히 없었다. 실제로도 전염병이 모두 정리된 것이 맞는지 확인도 하고 이런저런 사항을 보고할 겸 황궁에 가서 황제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했던 거고. 그리고 내가 확인하지 못한 서신들 중에는, 아마도 높은 확률로 황궁에서 보낸 것도 있겠지.
한숨을 내쉬고, 나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카넨을 노려봤으나 그는 무해하다는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어이구, 저 예쁜 또라이 같으니라고. 쾌락에 휩쓸려 바깥을 전혀 신경 안 쓴 나도 할 말은 없지.
“후… 됐어요. 지금 말해 봤자 뭘 어쩌겠어요.”
“잘 생각했습니다.”
카넨이 씨익 웃으며 말하는데, 그 모습을 보니 등짝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성녀님이니까 참아야지.
‘내가 성녀라니 오그라들어!!! 난 유리나가 아닌데 왜 성녀인 거야! 이러다 유리나가 오면 성력 다 빼앗기는 거 아냐?’
불현듯 유리나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도 지금은 원래 하려던 일을 해야 했다. 유리나는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신전으로 가야지.
물론 신분제 사회니까 황궁에 가는 것이 먼저겠지만, ‘리히엔의 방에서 나온 문서’를 ‘성녀가 빨리 확인해야 한다’고 할 정도면 거의 시한폭탄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언제나 대신관은 내게 성가시기 그지없으면서도 해결하기 까다로운 과제를 던져 줬고, 리히엔은 대신관의 끄나풀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번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빨리 확인해야지.
“카넨, 신전으로 데려가 주세요.”
내가 카넨에게 공간 이동 마법을 부탁하자 하일이 깜짝 놀랐다.
“성녀님, 신전으로 공간 이동 마법을 아직 못 쓰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아직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왜 못 믿겠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거냐! 너도 리히엔처럼 너 성녀 맞냐고 하려고 그러냐!
“성녀님께서 그저 신전 내에서 봤던 풍경을 떠올리기만 하셔도 될 텐데요?”
“…그러다 이상한 곳으로 떨어지면 어떡해요.”
나처럼 심장이 콩알만 한 사람은 그런 거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어디로 갈 줄 알고 그런 걸 무작정 하라는 거야?
“괜찮습니다, 페리아. 한번 해 보십시오. 이상한 데로 떨어져도 제가 지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카넨이 나의 손을 잡아 왔다. 확실히 드래곤 레어도 혈혈단신으로 털어 버리는 세계관 내 최강자 카넨이 있으면 어디로 가더라도 문제가 없을 것 같긴 했다. 그럼 속는 셈 치고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혹시 알아? 내가 의외로 재능이 있어서 한 방에 신전에 딱! 갈지?’
정신을 집중해서 성력을 모으려고 하는데, 카넨과 맞잡은 손이 아니라 반대쪽에서 옷깃을 잡는 느낌이 나서 고개를 돌려 보니 하일이었다.
“저, 저도 데려가 주시면…….”
“…하일은 신전으로 이동 못 해요?”
너 그러면서 나한테 그것도 못 하냐는 식으로 쳐다본 거야……?
내가 눈에 모든 감정을 담아서 말했더니, 하일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급하게 부정했다.
“아, 아닙니다! 신전은 가능합니다!”
“그런데 왜?”
카넨이 날카로운 눈으로 내 옷깃을 잡은 하일의 손을 노려봤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숨기지 않은 그의 목소리에 하일은 조금 주춤할 뿐, 절대 손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카넨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내가 구할 사람은 페리아뿐이야.”
“저, 저도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호오…….”
카넨이 어디 지켜보겠다는 듯 흥미롭게 중얼거렸다.
“그럼 내가 어디 좀 들러도 되나? 마수의 근원이라 추정되는 곳도 있었고, 한창 정세가 어지러워 반란군이 매일같이 폭탄을 터뜨리는 곳도 있는데. 아, 그러고 보니 퓨리의 알이 깨어날 때가 됐는데.”
얼굴이 점차 새하얗게 질려 가는 하일의 표정을 바라보며 카넨은 즐겁게 말을 이어 갔다.
“알이 태어나기 직전과 직후의 실버 드래곤은 굉장히 성격이 포악하지.”
“…그냥 따로 가도록 해요, 하일.”
카넨 진짜 유치하다. 원작에서는 이렇게 유치한 애가 아니었는데? 이것도 나랑 결혼해서 그래? 그런 거야?
“예…….”
하일은 눈물을 머금고 옷깃을 잡은 손을 놓았다.
“그러면 먼저 가서 성녀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저도 바로 갈 거예요! …할 수 있다면.”
하일은 ‘성녀님은 할 수 있어요! 아자아자!’를 몇 번이나 외친 뒤에야 공간을 열고 갔다.
이제는 내 차례인가……. 습습후후, 습습후후.
카넨이 끈기 있게 내가 심호흡하며 마음의 준비를 마치는 것을 기다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온 정신을 집중해서 성력을 끌어모은 후 신전을 떠올렸다.
‘수도, 신전, 수도, 신전, 수도, 신전!’
그리고 질끈 감았던 눈을 슬쩍 떠 보니 어쩐지 계속 치료소였다.
“…뭐지? 이동이 안 되는 건가?”
“어떻게 하신 겁니까?”
“수도, 신전 계속 떠올렸는데 그대로예요!”
“어떻게 떠올렸습니까?”
“수도! 신전! 수도! 신전!”
나는 아주 당당하게 한 단어씩 끊어서 외쳤다, 진짜로 엄청나게 집중해서 한 거였으니까. 어쩌면 나는 공간 이동 마법에는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아무리 성력이 넘쳐흐른다고 해도 못하던 마법을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그래도 연습하면 되겠지. 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우울해졌다. 새로운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또 카넨의 지옥 같은 훈련을 견뎌 내야 하는 건가 싶어서. 그렇다고 신관들에게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고.
“저기, 페리아. 혹시 수도랑 신전만 떠올린 겁니까?”
“네!”
카넨이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큭큭대며 웃었다.
대체 왜 웃는 거야. 나 엄청 진지하다고. 궁서체야!
“페리아, 수도와 신전만 떠올리면 수도 안에 있는 신전을 폭발시키고 싶은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는 허튼 짓 못 하게 다 죽여 버리고 싶은지 어떻게 압니까?”
웃으면서 속마음을 드러내는 카넨의 말을 듣고 조금 당황했다. 쟤는 무슨 예시를 들어도 꼭 저런 걸 들어…….
“그, 그러네요. 그러면 수도 안에 있는…….”
수도 안에 있는 신전에 <안전하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되나요? 라고 물어보려는데, 한순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신전이었다. 좀 어두침침하긴 해도 조각상이나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면 영락없는 신전이었다.
…아, 내가 가고 싶다고 생각을 안 해서 안 간 거였구나……. 그냥 수도와 신전만 생각해서 못 간 것을 알게 되니 헛웃음이 나왔다.
“오! 성공했어요! 나 천재인가 봐!”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는 걸 쓰다니! 진짜로 내가 성녀인가? 유리나가 돌아온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괜찮은데? 신전을 유리나에게 뺏기더라도 성력이 남아 있다면 배달만 해도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성력을 그렇게 쓰면 너무 낭비인가?
“잘했습니다, 정말 잘했습니다.”
“여기 신전 맞죠? 신전 모양 던전 이런 거 아니죠?”
“예, 아닙니다.”
뿌듯해하며 발걸음을 떼었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이 적막. 이 고요. 일주일 전에 봤던 신관들이었다면 내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현수막 걸고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성녀님!’ 하면서 부담스럽게 눈을 반짝이며 뛰어올 것 같았는데. 그리고 그건 방금 전에 봤던 하일의 모습이기도 하고.
“신전 지하일까요?”
“…아니. 이곳은 예배당입니다. 예배당은 지상에도 있는데, 이상하군요. 굳이 지하에 예배당을 또 만들어 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으스스한데 다시 공간 이동을 해 볼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왠지 으스스한 게 무서워 카넨에게 들러붙다시피 해서 걸어갔다.
햇살 한 점 들지 않는 예배당은 꽤나 넓었다. 아마 사오백 명 정도는 거뜬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불을 따로 밝히지 않아도 성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 군데군데 미약한 빛이 내부를 밝혔다.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것에 비하면 내부는 먼지 한 톨 없이 관리가 잘되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가장 가까운 좌측 문을 통해 나갔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거대한 창고… 아니, 무기고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 안에는 관리가 잘되어 있는 무기들이 줄지어 있었다. 칼과 도끼에 철퇴까지. 아주 다양한 무기들이 열을 맞춰 있었다.
“성기사들이 쓰는 건가 보네요. 상태가 꽤 괜찮네요. 마수들이랑 싸워야 해서 그런가?”
여기가 신성제국인가 생각되어 조금 실망했다. 수도에서 신성제국이라니. 이 몸의 넘쳐흐르는 성력을 어찌한단 말인가!!! 어차피 제대로 제어도 못 하는데!
다시 무기고를 빠져나와 우측 문으로 가니 대량의 보존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수들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벌이려고 그러나 싶었다.
그러면 로테카트에도 성기사들 좀 파견해 주지 그랬어!
마지막으로 예배당의 정면에 있는 문으로 나가 보았다. 그리고 나와 카넨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성력을 잘못 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똑바로 수도 내에 있는 신전에 온 것이었다. 다만 우리가 이 신전의 존재를 알고 있지 못했을 뿐이었다.
“대체… 여기가 왜……?”
카넨이 드물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배당의 문을 열고 나온 우리의 눈에 보인 것은, 황궁의 정원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