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4
카넨이 페리아를 가볍게 뒤집고는 어깨를 눌러 내렸다. 졸지에 엉덩이만 높이 뜬 페리아가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목소리로 고개를 뒤로 돌려 자신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카, 카넨!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이렇게 생긴 게 맞습니다.”
여기서 더 두꺼워진다면 삽입 자체가 힘들 것 같아서 돌기만 나오도록 했다. 그 마수에 대한 정보를 더욱 잘 알았더라면 제대로 재현했을 텐데. 촉수를 갖고 있다면 그녀의 질 안으로 한 번에 두 개는 넣었으려나. 아니면 앞뒤로 동시에 넣었으려나. 알아봐야겠다.
“…진짜 기분 좋을 것 같긴 한데, 혹시라도 아프다고 하면 바로 빼 줘야 해요?”
“물론입니다.”
“혹시 아플지도 모르니까 살살 넣어야 해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성력 쌓아 둬야 하니까 해 뜨기 전에는 자야 해요!”
“알겠습니다,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페리아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팔꿈치로 침대를 짚었다. 이미 흥건하게 젖어 애액이 흐르고 있는 음부에 귀두를 맞췄다.
그리고 그녀의 요청대로 천천히 삽입을 시작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귀두가 들어가고, 돌기가 솟아오른 기둥이 조금씩 진입했다.
페리아의 몸이 바짝 굳으며 그녀가 흐읍 하고 숨을 삼켰다. 그녀의 질 내벽이 제 좆을 끊어 버릴 듯이 씹어 삼키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토해 낼 것 같은 사정감도 문제였지만, 그녀가 뭐라 하든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고 페리아를 쾌락에 떨게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도 문제였다.
“윽! 페리아.”
“하아, 읏!”
어린 시절 교육받을 때 이후로 제대로 읊어 본 적도 없는 건국이념을 속으로 읊었다.
페리아는 너무나도 큰 쾌락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질 벽 주름 사이사이를 돌기가 헤집고 들어와 그녀를 미치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요청에 따라 그녀가 기다리는 쾌락의 늪으로 그녀를 빠뜨려 주지도 않았다. 그저 페리아가 숨을 헐떡이며 침대를 짚고 있는 팔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여유롭게 지켜보았다.
페리아의 질 내벽이 이전보다 더욱 거세게 자신의 것을 조여 왔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쾌락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내게서 떠나가지 못하겠지?’
결국 참지 못한 페리아가 몸을 앞뒤로 흔들며 제 것을 더욱 깊숙이 받아들였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질 근육이 요동치는 걸로 보아 그녀가 아마 가벼운 절정에 오른 것 같았다.
“먼저… 먼저 움직인 건 당신입니다.”
페리아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으나, 그녀가 바라는 것이 제가 얌전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의 무언의 허락에 페리아의 허리를 붙잡고 강하게 밀어붙이자 그녀는 또다시 절정에 올랐다. 그녀가 절정에 오르며 질 내벽이 강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바람에 몇 번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 역시 사정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계속 제 것을 쥐어짜듯 움직이는 쫀득한 안쪽의 근육 때문에 곧바로 몸집을 키우며 다시 그녀의 안을 자극했다.
“하아… 페리아, 페리아……. 나의 페리아…….”
강한 쾌락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녀의 위로 엎드렸다. 한쪽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다른 한쪽 손에 다 담기지 않는 그녀의 가슴을 감싸 문질렀다. 그리고 페리아의 목덜미와 어깻죽지를 잘근잘근 씹으며 붉은 울혈을 남겼다. 자국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가슴을 문지르던 손을 내려 그녀의 음핵을 문질렀다.
“아흑! 아아! 카넨! 카넨! 으읏! 제발!”
몇 번이나 연달아 절정에 오르는 그녀의 안을 느끼며 카넨이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다 제 좆이 그녀의 안쪽 깊숙이 위치한 성감대를 몇 번이나 연달아 찌르자 페리아의 음부에서 애액을 길게 쏟아 냈다.
그걸로도 모자라 자신이 허리 짓을 할 때마다 내부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애액이 찰박이며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를 보고 더욱 거세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페리아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카넨! 흐앙!”
“왜. 왜 그러십니까?”
페리아가 쾌락에 눈물을 글썽인 적은 있어도 눈물을 흘린 적은 없기에 당황하여 멈추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가 걱정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죽을 것 같아요. 너무, 너무 자극이 강해요.”
“하아, 그렇습니까.”
난 또 뭐라고. 갑작스러운 그녀의 눈물에 당황했지만 그런 이유라면 괜찮았다.
하지만 다음에 또 그녀를 안기 위해서는 타협할 줄 알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페니스에 걸린 마법을 해제하고는 또다시 그녀의 안에 삽입했다.
“페리아, 아직 마력이 채워지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요. 응?”
“…조금만이에요.”
“알겠습니다.”
답은 그렇게 했지만 제 마력은 채워질 예정이 없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았다고 할 것이었으니까.
결국 해가 뜨는 것보다 페리아가 지나친 쾌락에 정신을 잃는 것이 먼저였고, 카넨은 이를 빌미로 다시 그녀를 잡아먹을 생각에 신이 났다.
***
페리아의 예상이 조금 벗어나 9일이 되는 날, 전염병 환자가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카넨이 페리아가 눈을 뜨기를 기다려 하루 종일 잡아먹은 날로부터 딱 일주일 뒤였다. 차라리 일이 터질 거면 빨리 터지라고, 이러다가 말라 죽겠다고 생각하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들은 일주일간 꼼꼼히 대책을 세워 놨었다.
우선 전염병 발병자의 격리 구역은 수도 외곽이 되었다.
신관들은 병에 걸리지 않으니 수도 내 신전으로 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마법사를 반기지 않는 데다가, 그들이 전염병에 걸린 시신을 반입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신전과의 미묘한 관계를 생각해 보면, 고생이란 고생은 황실에서 다 하고 신전에서 열매만 가져갈 가능성 또한 있었다. 그렇다고 황궁 내에 자리를 잡았다가는 국정이 마비될 수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일단 초기 대책을 잘 세워야 해요. 저는 성력을 능숙하게 사용할 줄 몰라요. 그러니 초기에 전염병이 가볍게 걸렸을 때 치유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에요.”
“각 지역의 경비대에 순찰을 강화하도록 지시하지. 전염병은 불행 중 다행으로 피부에 푸른 반점이 생긴다고 하니 구분이 쉬울 거야. 근데 문제는 경비대가 여기까지 환자를 데리고 오는 것을 싫어할 것 같은데.”
“환자를 돌보거나 이송하다가 전염병에 걸릴 경우 최우선적으로 치료해 주겠다는 조건을 붙여 주세요. 만약 안 된다면 그 가족까지 최우선으로 해 주겠다고 하면 하겠다는 사람이 없진 않을 거예요.”
“그러도록 하지.”
그리고 마법사들은 물의 마법을 이용해 환자들의 청결을 유지하고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업무, 환자들에게 사용했던 물품을 태우고 신관을 부르지 못하는 이들을 빠르게 화장하는 업무, 공간 이동 마법을 이용해 필요한 물품을 수급하는 업무 등으로 나누었다.
황실의 의사들도 전원 대기 상태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격리 구역에 배치했다.
“환자들은 3단계로 나누도록 하죠. 경미, 중도, 심각. 경미한 이들은 의사분들의 경험에 따르면 청결한 환경에서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약만 복용해도 충분히 낫는다고 했어요. 그리고 중도의 경우 약간의 성력을 사용해서 치유를 하면 괜찮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심각한 이들은 성력을 많이 사용하게 되니, 가능한 한 심각으로 번지기 전에 처리하는 것이 관건이에요.”
짧은 시간 내에 이 정도로 준비했으면 많이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승리를 쉽게 따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처음엔 아주 순조로웠다. 병에 걸린 이들을 찾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하고 양질의 음식을 제공하고 약을 지어 줬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피부에 일부러 푸른 멍을 만들고 찾아와 자신이 환자라고 주장하며 쉴 곳과 음식을 내놓으라고 하는 부랑자들이었다.
“나도 병에 걸린 환자라고! 이곳에서는 신분에 관계없이 환자를 받아 준다며? 얼른 내게 식사를 내놔!”
어차피 이곳에서 죽으나 길바닥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배짱을 부리며 들어오려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이들이 진짜 환자일 가능성이 있으니 의사들이 붙어 가며 꼼꼼히 검사를 마친 후에야 치료소에 들여보내기도 하고, 감옥으로 보내 버리기도 했다. 그동안 의사들은 꼼짝없이 그들에게 매달려 있어야 하니 인력 낭비가 컸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이들이 차마 일을 놓지 못하고 치료소에 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들은 부양할 가족이 있으니 쉽게 일을 놓지 못했다. 그나마 피부에 푸른 반점이 오르는 증세가 나타나면 외적으로 티가 나니 경비대가 데려왔지만 다시 일을 해야 한다며 도망치기 일쑤였다.
“우리 가족이 먹을 것까지 다 제공해 주지 않을 거라면 놓아주세요!”
“하지만 다른 지역에는 이미 이 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했다구요!”
그러나 아직 수도 내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것도 아니니 이들의 위기의식은 너무나도 낮았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는 죽기 직전이 되어 일을 못하게 되자 그제야 치료소를 찾아왔다.
“…살려 주세요. 제발!”
그러나 페리아의 치유 마법은 아직 심각한 병을 치유하는 것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살려 달라고 빌었지만 그녀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사망한 뒤 가족들에게 연락해 그들의 동의를 얻고 나서야 화장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일하는 동안에 이미 전염병이 공기 중으로 퍼지고 있었다. 게다가 집으로 돌아간 뒤 가족들에게도 옮아 차례차례 진료소에 실려 왔다.
또한 신전에서 훔쳐간 시신의 행방을 알지 못해 이미 발생한 환자의 주변인이 아니더라도 수도 전역에서 전염병 환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비전하! 폐하께서 짐작하신 대로 구 시가지에 있었습니다! 폐가에 보존 마법이 걸린 시신이 있었습니다.”
“처리는 잘하고 오셨죠?”
“그럼요. 지시하신 대로 집까지 통째로 불태우고 왔습니다.”
페리아 일행이 치료소에서 치료를 하고 있는 동안 환자들의 발병 상황을 보고받은 황제가 시신이 숨겨져 있을 법한 곳을 찾아 후보지를 추려 보냈다.
그곳을 마법사가 공간 이동 마법으로 빠르게 훑어보며 시신을 발견할 경우 곧바로 화장해 버리고, 환자가 있을 경우 경비대에 넘겨 치료소에 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집 내부에 병균이 가득할 수 있으니 집까지 깔끔하게 태워 버렸다. 이 역시 황제와 논의된 사항으로, 어차피 신전에서 꼬리가 밟힐 만한 곳에 시신을 두지 않았을 테니 큰 문제가 없을 것이고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길 경우 황실에서 물질적인 보상을 해 주기로 했다.
‘집 한 채가 얼마인데……. 신전 놈들 이 대가는 똑똑히 받아 낼 거야!’
벌써 두 구의 시신을 찾았으나, 아직 세 구의 시신을 찾지 못했으며 조기에 치료받지 않은 이들로 인해 전염병이 엄청나게 확산되고 말았다.
그 결과 수도 내에 처음 발병한 지 일주일 만에 어느새 치료소에는 환자들로 가득하게 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에서 일하는 모두가 열심히 한 덕분에 페리아의 성력도 아슬아슬하게 바닥내지 않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녀님!”
“아니에요, 부디 돌아가시고 나서는 충분히 휴식하시고 잘 먹고 청결하게 지내세요.”
환자였다가 완쾌해 퇴원하게 된 이가 머리를 몇 번이나 숙이고 인사하면서 떠나갔다.
“페리아, 잠깐 쉬십시오.”
“고마워요, 카넨. 이제 슬슬 성력이 바닥이 나고 있었거든요.”
카넨이 페리아를 긴 소파에 눕게 하더니, 그의 허벅지를 베게 했다. 그의 허벅지가 워낙에 단단해 목이 아팠지만 몸을 옆으로 틀자 그래도 괜찮아졌다.
페리아는 잠시 그녀를 찾는 이가 없는 그 짧은 시간에 잠이 들었었다. 그러나 곧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하만 대공! 대공비!”
“페리아는 계속 쉬고 있으십시오. 제가 보고 오겠습니다.”
페리아는 너무나도 피곤했으나 또 환자가 왔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그들에게 존칭 없이 ‘대공’과 ‘대공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적이었기에 고개를 내젓고 그에게 기대어 나갔다.
그곳에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트라비안 공작과 공작 부인이 있었다.
‘…저분들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카넨이 나를 협박하고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사이가 좋아진 건지.’
감상에 젖어 있으려고 했으나, 공작 부인의 안색이 심상치 않았다. 얼굴은 베일로 가리고 있었으나, 가릴 수 없는 목에 보이는 푸른 반점은 전염병에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
“레이첼이 병에 걸려 버렸어, 내 아내를 치료해 줘. 초기에 알아내고 주치의가 여기서 하는 것처럼 했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가라앉지 않아.”
“페리아, 괜찮겠습니까?”
지금 성력의 남은 양을 생각해 보면 아슬아슬하게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페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는데, 마법사가 공간 이동 마법으로 경비대원과 그의 딸을 데리고 왔다.
보고를 하려던 마법사가 트라비안 공작과 공작 부인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보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경비대원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의 딸과 성녀인 페리아만 보였다. 그는 재빨리 딸을 안고 페리아의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성녀님! 제 딸이 병에 걸렸습니다! 이 아이는 원래 몸이 좋지 않아 오래 버틸 수가 없어요! 부디 치료해 주세요!”
페리아는 공작 부인과 아이를 번갈아 가면서 바라봤다. 공작 부인의 증상으로 보건대 병이 꽤 진행된 것이었으나, 증세가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공작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치료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트라비안 공작님.”
페리아가 무어라 말할지 알았는지 공작이 그녀에게 호소했다.
“아니, 아니야. 내 아내가 죽을지도 몰라. 내 아내를 치료해 줘. 제발 부탁이야.”
그리고 공작에 비하면 신분은 보잘것없었으나 제 자식을 지키고 싶은 경비대원도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성녀님! 분명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최우선으로 치료해 주신다면서요!”
“공작님, 우선 아이를 치료한 뒤에 제가 조금 쉬면서 성력을 회복하고 공작 부인을 치료해 드릴게요.”
페리아는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여기서 아이를 외면한다면 이곳에서 일할 사람은 남지 않게 된다.
공작을 등지게 되면 황제도 카넨도 힘들어지지만, 우선 전염병을 잡는 것이 우선이었다.
“만약 성력을 회복한 뒤에 또 이런 이가 나타나면 어떡할 거지? 그때는 내 아내를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나?”
“그건…….”
상황을 관망하던 카넨이 공작에게 말했다.
“신전은? 공작 부인은 신전의 신관에게서 치유받을 수 있지 않나?”
“하! 그딴 쓰레기 새끼들, 헌금만 받아 처먹었지. 나라고 신전에 안 들렀을 것 같나? 그자들은 대신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며 대신관이 이곳에 올 때까지 일절의 치료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말도 안 돼…….”
공작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들은 많은 이들이 그의 말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페리아는 신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리라고 생각했다.
“내 아내를 치료하라고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꿈쩍도 않더군. 그런 와중에도 혹시 내가 무릎이라도 꿇고 매달려야 할지도 몰라 칼로 베어 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 환멸이 나더군.”
트라비안 공작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공작이면 무얼 하나, 아내도 살리지 못하는데.”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라비. 그보다 나는 당신이 걱정이에요, 나랑 이렇게 붙어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 얘기는 이미 끝난 거잖아, 레이첼.”
가쁘게 숨 쉬고 있던 공작 부인이 공작을 달래며 힘없는 손으로 그의 뺨을 쓰다듬자 그가 울 것처럼 미소 지었다.
페리아는 그것을 보고 결심했다. 이 빌어먹을 신전 놈들을 조지기로.
“제가 신전에 가서 어떻게든 해 볼게요. 카넨, 같이 신전에 가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그래도 제가 성녀라고 하는데, 어떻게든 되겠죠.”
“…부디 레이첼을 살려 줘. 뭐든 할게.”
페리아는 안간힘을 다해 성력을 쥐어짜 내 경비대원의 딸을 치료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으나 카넨이 잡아 주어서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카넨, 신전으로 데려다줘요.”
“알겠습니다, 같이 가도록 합시다.”
“카넨, 나와 레이첼도 데려가 줘! 혹시, 혹시라도 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지금까지 공작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럴 가능성은 굉장히 낮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카넨은 한 가지 조건을 걸고 그들과 동행하기로 했다.
“…페리아에게 치료하라고 목에 칼을 들이밀지 않는다면.”
“죽어 가는 이의 치료조차 안 하는 신관은 제 의무를 저버렸으니 그들을 베도록 하지. 그 정도는 괜찮겠지?”
“내가 공이라면 그것보다 심할 테니 그 정도야, 뭐.”
카넨이 으쓱이더니 붉은 마력을 끌어 모았다. 공작 내외가 타고 왔던 마차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신전 입구가 나타났다. 이전처럼 공간을 연결한 것이었다.
페리아는 크게 심호흡한 뒤 카넨과 트라비안 공작 부부와 함께 신전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한 신관이 그들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나를 이미 알고 있군요.”
“예.”
심지어 페리아를 부르는 말이 ‘성녀’였다. 하만 대공비 같은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페리아를 성력을 사용하는 성녀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네들이 하는 시험은 끝난 것 아닌가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관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했다.
“로테카트의 마수 건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내가 성녀인지 확인하기 위한 거잖아요. 그럼 확인이 끝났으니 이 일을 수습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미 죽은 목숨은 어떻게 수습할 건가요?”
“저는 고작해야 하급 신관이라 성녀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미친. 결국 이 일에 대한 건 고위 신관이랑 이야기하라는 건가.’
페리아는 다 뒤집어엎고 싶어졌다. 제게는 그럴 성력이 없으니 카넨과 공작을 앞세워서. 하지만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신관들의 도움이 필요하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제일 높은 신관은 어디 있는데요?”
“대신관님은 남부에서 이곳으로 오고 계시는 중이고, 이곳에는 고위 신관이신 상급 신관 리히엔 님이 있습니다.”
“지금 만나고 싶은데요.”
“성녀님의 뜻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예배당에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후우, 다른 신관들도 최대한 많이 모아 줘요.”
“성녀님의 뜻대로.”
신관들을 모아 치료에 힘을 보태 달라고 설득을 할 생각이었다. 하급 신관은 순순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나갔다.
잠시 뒤, 페리아 일행은 다른 신관의 안내를 받아 예배당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성녀와의 대면을 위해 모인 신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는 스무 명 남짓.
‘이 많은 신관들 중에 바깥에서 전염병에 고통받는 이들을 치료할 사람 한 명이 없었단 말이야?’
기가 찼다. 혼란스러운 바깥과는 다르게 이곳은 차분하고 경건했다. 그것이 더욱 역겨웠다.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상급 신관 리히엔입니다.”
어쩐지 서늘한 인상의 신관이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뭐 좀 물어보고 부탁할 겸 왔어요.”
“말씀하십시오.”
“지금 바깥에 전염병 돌고 있는 거 알고 있죠?”
“예. 저도 얼마 전에 남부에 다녀와서 잘 알고 있습니다.”
페리아의 질책이 가득 담긴 날 선 질문에도 고위 신관은 마치 그녀가 날씨를 물어보기라도 한 듯 여상스럽게 답변했다.
“그런데 왜 신관들이 신전에만 있고 치유를 하지 않는 거죠? 치료소에 많은 환자들이 있는데요.”
“아직 대신관님의 말씀이 없으셨기 때문에, 저희는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놈의 대신관. 에녹이랬지. 단 두 번 편지를 받았을 뿐인데 뇌리에 박혀 잊히지도 않는다.
‘분명 내가 봤던 원작 소설 속 세계관에 따르면 성녀는 신의 사자. 그러니 대신관보다 위에 있는 것이 맞는데…….’
물론 원작에서의 여자 주인공은 신관에게 발견된 후 신전을 의지하며 생활했기에 신전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그래도 신관들이 성녀를 이렇게까지 무시하지는 않았다.
“신의 사자인 성녀가 당신들이 치료소에 있는 환자들을 치유하길 바라는데.”
그러나 페리아의 바람과는 달리 리히엔은 한쪽 입꼬리를 재수 없게 올리며 그녀를 비웃었다.
“죄송합니다만 성녀님께서는 성력의 양이… 저희 하급 신관과 비슷하거나 더 적은 것 같군요. 성녀인지, 신관인지부터 확인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미친…….”
“언행이 천박한 것으로 보아 신관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트라비안 공작이 참지 못하고 검집에서 칼을 빼내었다.
“더 이상은 못 들어 주겠군. 당장 나의 아내를 치료해.”
“공작님, 검을 집어넣으시지요. 신전 내에 있는 모든 성기사들을 상대하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공작 부인도 계신데.”
리히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예배당으로 성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수도에 있는 모든 신전에는 마력을 봉쇄하는 신성석이 다량으로 있으니, 마탑주도 허튼 생각 말고 있으시지요. 곧 저희 대신관님께서 오실 겁니다.”
카넨이 욕설을 낮게 중얼거렸다.
이것들이 지금 우리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협박을 하고 감금을 하려고 하는 꼴을 보니 분노가 차올랐다. 게다가 카넨을 대공이 아닌 존칭조차 생략한 ‘마탑주’라고 부르고 있었다.
“…리히엔 신관?”
보다 못한 페리아가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뭐가 문제라도 있냐는 듯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예.”
“그래서, 지금 뭐 하자는 건가요?”
“대신관님이 오실 때까지 일종의 보호랄까요.”
고위 신관의 여상하게 말하는 답변에 더욱 분노했다. 차오르는 분노로 인해 손이 덜덜 떨렸다.
“지금 바깥에는 전염병이 창궐해서 사람들을 치유하는 속도보다 전염병에 걸리는 속도가 더 빠른 것은 알고 있어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치유하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는 것도 알아요?”
“신관들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성녀님뿐이셨겠지요.”
고위 신관은 전염병 사태가 터진 이후 신전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나, 이미 외부의 정보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페리아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이대로 내가 이곳에 갇힌다면 바깥이 어떻게 될지 예상하지도 못하는 건가?’
페리아는 자신이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이라고는 할지라도 저가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외면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관이라는 놈들이 이 정도로 인류애를 상실한 사람들이었을 줄이야.
“…그런데도 나를 여기에 가둬 두겠다고요?”
“가둬 둔다니요. 보호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장난해? 지금 밖에서는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다고!”
페리아의 분노에 찬 외침이 예배당에 울렸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이 하얘지며 예배당의 유리창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리고 페리아의 주변을 금빛 성력이 감싸고,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성력이 차올랐다. 많은 신관들이 처음 보는 성스럽기 그지없는 광경에 숨을 들이켰다.
“만약에 내가 이번에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다른 일을 준비했겠지요. 그래도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렇게 성녀님을 만나 뵙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페리아를 시종일관 무시했지만 리히엔은 지금 페리아를 감싸는 금빛 마력이 그녀가 성녀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었기에 더 이상 그녀를 홀대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신관이 페리아에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지만, 그 가증스러운 몸짓이 오히려 화를 부추겼다.
“이미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은 어떻게 하고 다른 일을 준비한다는 거지?”
“만약 당신께서 정 나서지 않으신다면, 당신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저희가 나타났겠지요.”
“마지막?”
“예. 마지막의 마지막. 저희는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어쨌든 신전이 등장을 한 것이고, 이번에도 성녀님께서 치유를 하신 것이니까요. 저희로서는 이러한 결말도 나쁘지 않습니다.”
결국 이놈들은, 환자들이 모두 죽기 직전에서야 등장한다는 거였다.
‘미친 것들이…….’
그때, 갑자기 처음 듣는 목소리가 분노한 그녀의 입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그렇다면 너에게는 성력이 필요 없겠구나. 써야 할 곳에 쓰지 않는 힘은 돌려받겠다.”
분명 페리아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이건만,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예배당에 있던 모두가 당황하는 것이 보였지만 페리아는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그녀는 손을 들어 손끝으로 리히엔 신관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로부터 새하얀 마력이 흘러나와 그녀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페리아가 리히엔의 성력을 앗아 간 것임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성력을 뺏는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지만 분명했다.
리히엔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성력을 끌어내려고 애썼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 신관이라고 불리며 신관의 정점이라는 대신관까지 단 한 발자국만을 앞두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성력이 사라진 것이다.
“이, 이럴 수가, 내 성력이! 말도 안 돼! 내, 내 성력을 돌려주십시오!”
리히엔이 달려 나와 페리아에게 매달리려 하는 것을 카넨이 막아섰다.
그가 페리아에게 돌려 달라고 한다 한들, 그녀조차도 방금 전에는 어떻게 된 일이었는지 전혀 감도 못 잡고 있었다.
‘설마, 내가 진짜 성녀야? 말도 안 돼. 그럼 여자 주인공은 어떻게 되는 건데?’
그러나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태연하게 받아쳤다.
“성력이 있다 한들 써야 할 곳에 쓰지 않는데 굳이 필요가 있나요?”
“그러나, 대신관께서!”
“그만. 대신관이라 해 봤자 일개 신관일 뿐. 신의 사자인 성녀의 말을 무시했으니 성력이 사라질 수도 있는 거죠.”
그렇다. 대신관은 신관. 성녀는 성녀였다. 무려 다른 세상에서 성녀가 온다고 신탁까지 받지 않았는가.
그러나 성녀가 온다고 했던 시점은 극비에 붙여졌지만, 지금보다 훨씬 뒤였다.
그러니 신전에서도 확인 절차를 까다롭게 거칠 수밖에 없었다. 그 방법이 마수라거나 전염병이라는 과격한 방법이긴 했어도…….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신관을 보고 페리아가 차갑게 내뱉었다.
“무엇들 하십니까? 성력이 없는 이에게 신관복이 가당키나 하단 말입니까. 저자로부터 신관복을 거둬들이고 신전 밖으로 내쫓으세요.”
신관들이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우물쭈물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위 신관은 고작 셋밖에 없는, 모든 신관들이 우러러보는 존재였다. 페리아가 하는 수 없이 신관이 아니라 예배당을 에워싸고 있는 성기사들에게 시선을 주자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자가 나와 리히엔으로부터 신관복을 빼앗고, 저항하는 그를 신관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또 성력이 필요 없는 자가 있나요?”
신관들은 그저 눈치를 살피며 서로 시선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의 현신인 성녀의 재림이었다. 페리아는 몰랐지만, 그녀의 몸에 성력이 가득 찰 때 이미 신관들은 압도되어 버렸다.
또한 리히엔 전 신관으로부터 성력을 거둬들일 때 페리아의 몸에 차마 다 담지 못한 성력이 갈무리되지 못하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갖고 있는 성력을 마땅히 써야 할 곳에 써야겠죠?”
페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관들이 밤늦은 시각에도 불구하고 한시바삐 예배당을 빠져나갔다.
대부분의 신관들이 예배당을 빠져나갔지만, 그들 중 한 하급 신관이 페리아의 앞으로 걸어와 무릎을 꿇었다.
“뭔가요?”
“리히엔 신관… 아니 리히엔이 벌인 짓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남았습니다.”
“말해 보세요.”
“얼마 전 남부에서 온 테리스 상급 신관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수도 내에 있는 민가 근처의 빈집에 두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선물의 위치도 알고 있어요?”
이 신관이 말하는 것은 고작 리히엔 개인의 일탈이 아니었다. 남부에서 온 신관에게서 받은 ‘선물’을 신전이 아닌 민가 근처의 빈집에 두어야 한다니. 그것이 무엇인지 예상이 갔다.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던 이들의 시신이겠지. 데라크에서 사라졌던 시신들. 우리가 두 구를 찾았으니, 남은 것은 최소 세 구.’
“당신, 이름이 뭐예요?”
“하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하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기쁘네요. 상황이 수습된 뒤에 마저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하일은 우리에게 시신이 숨겨져 있는 곳을 모두 말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떠나갔다.
그가 원래 맡았던 업무가 리히엔의 보좌였다고 하는데, 적절한 이가 눈치 빠르게 행동해 줘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