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탑주의 가짜 아내가 되었습니다-3화 (3/11)

Chapter3

탑에 도착하자마자 마법사들이 이전과 똑같이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마탑주님!! 마탑주님!!! 수식 좀 봐주세요!”

“탑주님!! 저 먼저요!! 탑주님 오신 건 제가 제일 먼저 알았어요!”

“저 새끼는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이야! 내가 먼저 알았잖아!”

페리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카넨, 저 좀 조용히 쉬고 싶…….”

“페리아 님께 편지 온 것 받아 놓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제일 먼저요!”

편지? 나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나?

방금 전에 궁에서 나왔으니 황궁은 아닐 테고… 연회에 참석한 이들이 보낸 건가.

카넨의 사역마들이 대강 편지 써서 보낸 걸로 알고 있는데…….

“일단 편지는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카넨이 문을 열자 마법사들은 마치 어미 새를 만난 참새들처럼 짹짹댔다.

“편지.”

“드… 드리겠습니다!”

카넨이 짧게 본론만 말했는데도 마법사는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양손으로 공손하게 편지를 내밀었다.

“그리고 너.”

“네!”

탑의 마법사는 기대에 찬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페리아의 이름을 입에 한 번 더 올렸다가는 마력을 다 뽑아 버릴 줄 알아.”

“허억…….”

마법사는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치며 사라졌다. 다른 마법사들도 자신에게서 마력이 사라지는 것을 상상했는지 안색이 새파래져서는 내려갔다.

“여기 있습니다.”

“…마탑주가 마법사들 관리를 그렇게 막 해도 괜찮아요?”

“이 나라에서 마법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이 저니까 괜찮습니다.”

“별로 안 괜찮을 것 같은데.”

페리아는 대강 답하며 페이퍼 나이프를 사용해서 황금색 인장이 붙어 있는 새하얀 종이봉투를 열었다.

처음 페이퍼 나이프를 사용할 때만 해도 신기했는데, 지금은 별 감흥이 없다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멈칫했다.

“카넨, 이 편지… 신전에서 온 거예요.”

그 순간 페리아를 따사로운 눈으로 보고 있던 카넨의 눈이 시리도록 빛이 났다.

봉투에 있는 새하얀 편지지를 꺼내자 부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황금으로 수놓은 듯한 장식이 가득 붙어 있었다.

페리아 바르칸 대공비 전하께.

안녕하십니까, 대공비 전하.

신전을 대표하여 대공비 전하의 결혼을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비전하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 염치불구하고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서부 사막지대의 로테카트에 마수가 출현하여 많은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불쌍한 이들을 구원해 주소서.

대신관 에녹.

“…이게 뭐야?”

뭐지, 이 새끼들은? 결혼을 축하한다고 할 거면 선물을 보내든가, 아니면 마음이 담긴 편지를 쓰든가.

서부 사막지대에 마수가 출현하면 성기사단이 가면 될 것을 나를 오라 가라 해? 내가 왜?

페리아의 표정이 구겨지자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면서도 사적으로 받은 편지를 차마 훔쳐볼 수 없어 안절부절못하는 카넨이 눈에 띄었다.

그의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나보고 서부에 가서 마수들을 잡아 달라는데요?”

카넨에게 편지를 내밀면서 직접 보라고 했다. 카넨이 궁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직접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무엇보다 나중에 카넨이 편지 받았을 때 그녀도 슬쩍 같이 보려고 미리 밑밥을 깔아 놨다.

카넨이 편지를 재빨리 훑어보더니 실소했다.

“신전이 드디어 미친 건가?”

“제 생각도 그래요.”

“당신이 성력을 쓴다는 소문을 듣고 성녀인지 검증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아… 역시? 그때 성력 괜히 썼나.”

그래도 페리아는 결혼식 날 많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이 성력을 쓰는 게 제 입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전에서 가당찮게 자신을 마수들이 있는 서부로 몰아가려고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문제는 당신이 진짜 성력을 쓰고 성녀라 할지라도 마수들이 난폭한 것으로 유명한 서부에 가면 죽을 수 있습니다.”

“이 미친 새끼들이!”

감히 소중한 나의 목숨을 담보로 시험을 해?

담보로 걸 거였으면 공평하게 내 목숨뿐만 아니라 지들 목숨도 걸었어야지!

물론 제 목숨이 걸린 내기를 할 마음은 없지만.

그냥 서부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내걸게 하다니, 분노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 어떡하죠? 이대로 가만있으면 성녀가 아니라느니 가짜라느니 없는 말 지어낼 텐데.”

“부탁은 성녀가 아니라 대공비에게 한 거잖습니까.”

“그렇죠.”

“그럼 당신은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대공비가 대공에게 부탁한 걸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오, 오오……!

페리아는 순간 카넨의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이제 갓 성력을 쓰기 시작한 자신보다는 세계관 최고 마법사인 카넨이 가는 게 낫기는 했다.

하지만 결혼 당시 마력이 고갈됐던 카넨이었다.

‘아직 마력 충분하지 않을 텐데 가도 괜찮나?’

페리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카넨에게 물었다.

“…위험하지 않겠어요?”

“서부의 마수들까지 걱정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이곳에 남게 될 당신이 위험할까 봐 걱정이 되는 겁니까?”

“선택지에 당신 이름이 없는 건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어… 저 말입니까?”

“당신 마력도 이제 막 보충했는데, 위험하지 않겠어요?”

카넨이 얼마나 실력 있는 마법사인지는 아마 자신이 제일 잘 알 것이다.

그래도 자신이 가서 죽을 수 있는 자리에 마력이 없는 카넨이 간다면 그가 죽을 수 있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넨은 깜짝 놀란 얼굴로 페리아를 바라보았다.

“…걱정해 주는 거야? 나를?”

“당연한 거 아니에요?”

카넨도 결국 사람이다. 마력이 다 닳으면 죽게 된다는 점이 평범한 이들과 다르긴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똑같다.

“원래 이렇게 이 사람 저 사람 걱정해 주는 성격이었습니까?”

“제가 뭐가 아쉬워서 개나 소나 걱정해요. 나 먹고살기도 힘든데.”

“그러면 왜… 저를?”

이어질 말은 아마도 자신을 왜 걱정하냐는 거겠지?

얘가 왜 이러나 싶었는데, 설정상 황제인 카르파도 카넨을 전쟁터에 열심히 보냈었다.

처음 카르파가 나라를 지탱하게 되었을 때, 아직 나이 어린 카르파와 카넨을 우습게 보고 다른 나라에서 침략하러 온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 기사단과 카넨을 함께 보냈고, 기사단 세 개 이상의 능력을 가진 카넨을 황제가 아주 살뜰하게 부려 먹었다.

‘남자 주인공이라 죽지 않았다지만, 황제도 어지간히 쓰레기였네.’

하지만 페리아가 이곳에 등장하고, 카넨과 결혼하면서 원작이 틀어져 버렸다.

그렇다면 외국의 모 드라마처럼 주인공이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보냐! 높은 지위! 잘생긴 남편! 쾌락에 허덕이는 밤! 부유한 하루하루!’

하지만 페리아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간단하게 말했다. 아무리 얼굴이 두꺼운 자신이라도 이런 말을 면전에서 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걱정되죠. 내 남편인데.”

카넨의 뺨에 손을 살짝 얹으며 말했더니 얼굴이 더없이 붉어졌다. 그가 자신의 뺨에 닿은 페리아의 손을 잡고 뺨을 비비더니 입술을 묻었다. 카넨의 애교에 굳어 있던 얼굴이 저절로 풀렸다.

“페리아.”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당겨 품에 안았다. 졸지에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게 되어 숨을 쉬려고 고개를 들자, 카넨이 그녀의 턱을 받쳐 들고는 입술을 맞댔다.

코에도, 뺨에도, 눈썹에도, 이마에도. 입술이 닿았던 모든 곳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카넨의 갑작스러운 애교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고작 걱정하는 말 한마디 한 걸로 이런 반응이라니. 그러니 여주가 다정한 말 몇 마디 한 것 가지고 그렇게 빠진 거겠지.’

서로의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카넨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당신이 걱정하지 않게,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언제 갈 건데요?”

“오늘 밤에는 돌아오겠습니다.”

가는 시점을 물었는데, 오는 시점이 돌아왔다. 적어도 몇 날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카넨은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게 가능해요? 아니면 같이 갈까요? 마력이 부족할 수도 있잖아요.”

카넨이 개구지게 웃었다.

‘…난 연상이 취향인 줄 알았는데, 그냥 잘생긴 사람이 취향이었구나.’

“그러면 페리아, 부탁해 보십시오.”

“뭘요?”

“대공비가, 마탑주에게 부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부의 마수를 처치하고 오라고.”

이미 말 다 끝난 거 아니었어?

“빨리요. 서부의 로테카트에 사는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데.”

얘는 뭘 기대에 찬 눈빛으로 보고 있는 거야. 요 예쁜 아이의 기대에 벗어날 수는 없지.

“그거 알아요? 나 부탁하는 거 되게 잘해요.”

뭐부터 해 줄까?

오히려 페리아가 눈을 반짝이자, 카넨이 꼬리를 내렸다.

“부탁… 받은 셈 치겠습니다.”

“정말요? 나 부탁하는 거 되게 잘하는데?”

얘가 웬일이지? 여기 돌아오기 전까지 충분하게 해서 그런가?

“이따 돌아오면 마력 채워 주십시오.”

“알았어요!”

페리아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 ‘마력을 채워 주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기에 은근히 들떴다.

‘카넨은 사지로 가는데 들뜨다니…….’

하지만 카넨이 웃음기를 머금고 무어라 중얼거리자 붉은 빛이 반짝였다.

“괜찮습니까?”

“마법 쓴 거예요?”

카넨이 페리아의 여기저기를 살피더니 또다시 무어라 중얼거리자 다시 한번 붉은 빛이 반짝였다. 같은 행위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당신 주변에만 마력의 농도를 올렸습니다. 음… 여기에 성력도 한 번 더 두르면 좋은데.”

“…나 그거 할 줄 몰라요.”

“배우면 됩니다.”

…다시 시작인가.

결혼식과 함께 끝난 줄 알았는데, 정작 끝난 것은 그녀의 놀고먹는 생활이었다.

분명 나 놀고먹게 해 준다면서……. 그래도 일 시키는 건 아니니까 그냥 해야지……. 신전 놈들이 난리이기도 하고.

결국 페리아는 카넨이 자리를 비운 동안 다시금 성력을 활용하는 연습을 해야 했다.

***

서부 사막지대의 로테카트.

카넨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생각보다 마수가 많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적었다. 마을에 피해가 없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성녀보고 오라 가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근처에 보이는 하얀색의 성력은……. 성녀가 언제 올지 모르니 신전에서 사람을 심어 놓았구나.’

신전에서는 정말 페리아를 시험할 목적뿐이었는지, 혹시나 성녀가 맞는데 다칠까 봐 이미 상당수의 마수를 정리한 뒤에 이곳으로 정한 것이다.

“이것들이 감히…….”

결혼식 당일 군중들 앞에서 페리아에게 성력을 쓰라고 했을 때부터, 신전이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접근하리라 예상했었다.

사실 성력을 쓰는 것 자체가 성녀가 이미 제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신전이 알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너희들이 그토록 죽이고 싶어 하는 나를 죽일 수 있는 성녀는 이미 나의 아내가 되었다고.’

마력은 성력과 달리 더럽다며 마법사들을 모두 몰살시키고 싶어 하는 신전을 조롱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건 생각보다 기분이 많이 더러웠다.

페리아는 고작 신전 따위가 의심해서는 안 되는, 진짜 성력을 가진 이였다. 지금 여기 숨어 있는 하얀 성력을 가진 일반 신관들과는 달리, 금빛이 섞여 있는 성녀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성녀라고 하지만.

‘하지만 성녀가 동시에 둘인 적은 없었지. 한 명도 없던 시간이 대부분이었고.’

마음 같아서는 마수들은 물론이고 신관들까지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괜히 신전에 빌미를 만들어 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들과는 페리아를 두고 계속 부딪히게 될 것이다.

카넨은 싸늘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또다시 마수가 마을로 쳐들어오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각자 무기가 될 수 있는 것들을 들고 나왔다. 그래 봤자 농기구나 무딘 칼이 전부였다.

마수들이 마을에 쳐들어오자 마을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그러나 여전히 신관들은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성녀가 없다는 것을 알면 마을 사람들을 도울 줄 알았건만.

“쓰레기 같은 새끼들.”

카넨이 낮게 읊조리자 하늘에서 아공간이 열렸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공포에 질렸고, 신관들은 주변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에 질색했다.

열린 공간에서 아주 커다란 붉은 손이 나왔다. 그 손이 어찌나 큰지, 마을에 있던 마수 두 마리를 한 손에 잡아채어 들어갔다. 아공간에 끌려들어 간 마수는 어찌 됐는지, 끼이익!! 하는 굉음과 함께 우드득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또다시 나온 붉은 손이 마을 주변에 있던 마수들을 차례로 잡아갔고, 남아 있던 마수를 모두 잡아가자 공간이 닫혔다.

엎드려 신께 목숨을 구걸하던 마을 사람들은 조용해진 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수가 마을을 침입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공포에 억눌려 엎드려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마수의 비명 소리가 나고 그것들이 사라졌을 뿐 마을의 인간들에게 그 어떤 피해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리둥절해서 서로의 눈만 바라보며 무어라 말도 못 하고 있는 그들의 앞에 카넨이 나타났다.

“성녀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부디 마수들로부터 안전하기를 빌며.”

카넨이 한쪽 손을 가슴에 얹고 인사하자 그제야 사람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성녀님이요? 성녀님이 나타나셨단 말입니까?”

“얼마 전 대공 전하께서 성녀님과 결혼하셨다는 소문은 들었네!”

“성녀님은 신전의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사실이었구먼!”

“그러면… 신관님이신 겁니까? 감사합니다, 신관님!”

마을 사람들이 모두들 신관을 연호하자 카넨이 싱긋 미소 지으며 정정했다.

“성녀님은 신전에 소속되어 계시지 않습니다. 저는 성녀님께서 개인적으로 보냈을 뿐, 신관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준 잘생긴 청년은 신관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마수를 처리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는 신전은 무얼 하고 있는가.

그에 대해 분노하기보다는 우선 목숨을 구해 준 이에 대한 인사가 먼저였다.

“그렇다면 저희 마을을 구해 주신 분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변변한 감사 인사는 못 하더라도…….”

“카넨, 이라고 합니다. 카넨 드 바르칸… 아니, 이제 카넨 드 하만이 되었군요.”

카넨이 평소의 재수 없는 말투와는 다르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만약 제 형인 카르파 드 바르칸이 봤더라면 재수 없다며 치를 떨었을 것이다.

“바, 바르칸……! 왕제 전하!”

“아닙니다. 그저 성녀님께서 보낸 마법사 정도로만 알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모두 카넨의 계획대로였다. 신전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심고, 성녀에 대해 좋은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그들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은 신전이 아닌 성녀. 그리고 성녀가 보낸 마법사라는 것을 알린다.

또한 이름을 일부러 틀려서 그 마법사는 황제의 동생인 자신이라는 것을 밝혔다. 성녀는 마법사와 인연을 맺고 있고, 신전이 아닌 황실의 소속이라는 것까지 확실하게.

‘일부러 마수의 수가 적은데도 불구하고 이목을 확실하게 끌 수 있는 대형 마법을 쓴 보람이 있군.’

카넨은 자신의 잘생긴 얼굴에 대외용 예의 바른 미소를 띠고는 자리를 떠났다.

마을의 여자들은 성녀님과 마탑주로 알려진 왕제의 연애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고, 신전의 사람들은 똥 씹은 얼굴로 빠르게 신전에 연락을 해야 했다.

마을에서 멀어진 카넨이 신전을 물 먹였던 것을 곱씹으며 사악한 얼굴로 신나게 돌아가는 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마력을 아껴 쓸 필요도 없이 대형 마법을 맘 편하게 쓰니까 진짜 기분 좋네.”

곧바로 페리아에게 돌아가려던 카넨은 공간 이동 마법의 시전을 중단했다.

그리고 좌표를 바꾸어 자신이 그전에 털었던 드래곤 레어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카넨은 자신의 마력을 결정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결정화 작업에서 마력 손실이 20퍼센트 정도 일어나기 때문에 소모하는 양에 비해 보충할 수 있는 양이 적은 과거에는 굳이 필요 없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마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페리아가 엄청난 양의 마력을 매번 제공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손실률을 아쉬워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혹시 모를 나중을 대비해서 미리 결정화시켜 두는 쪽이 더 이득이지 않을까?

“내 손에서 떠나지 않게 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생각한 것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페리아가 저 쓰레기 같은 신전 놈들과 같이 있다니.

카넨은 생각을 털어 내고 마력 결정을 쌓아 놨다가 혼자서 신전을 짓밟고 페리아를 다시 데려오는 상상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결국 페리아는 제 곁에 있었으니.

공간 이동 마법을 시행하고, 아주 약간의 마법만 쓸 수 있을 정도로 마력을 남겨 두고 마탑으로 향했다.

***

“카넨!”

페리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카넨이 걱정되어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다 공간 이동 마법으로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며칠은 못 본 기분이었다.

아무리 자신보다 그가 가는 게 낫다고는 하지만 사지로 내몬 것 같아 그가 없는 동안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페리아.”

카넨이 또다시 식은땀을 흘리며 나타났다.

‘이 빌어먹을 신전 놈들! 세계관에서 제일 쎈 카넨이 이렇게 될 정도라면, 내가 갔으면 무조건 죽었을 거야!’

카넨이 식은땀을 흘리는 것은 진짜였다. 그녀에게 선물로 줄 반지를 만들어서 마력이 고갈되었을 때와 거의 비슷했다. 마물이 그렇게 기승이라면 마을 사람들도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저 빙의하기 전 국제난민이나 결식아동을 보는 정도의 연민만을 느낄 뿐이었고, 눈앞의 카넨이 더 걱정되었다.

“페리아, 저 지금 조금 힘든데.”

카넨이 허리를 숙여 페리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카넨은 그녀의 체향을 맡은 순간부터 마력이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페리아가 그의 안위를 걱정하여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다행히 피가 묻어 나오거나 하는 곳은 없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였다.

“윽!”

“카, 카넨? 괜찮아요?”

페리아가 놀라서 미약한 성력으로 치유의 힘을 사용했다. 그래 봤자 가시에 찔린 상처를 치유하는 정도의 능력밖에 안 되었지만. 그러나 카넨은 그것마저 못내 귀여워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

“왜요, 왜요? 많이 아파요?”

“그게…….”

“의사 부를까요? 황궁의 불러 달라고 황제 폐하께 전갈 넣을까요?”

“섰다…….”

“네?”

뭐라고? 뭐가 선 거지? 상처가? 혓바늘이? 지금 카넨의 안색으로 봐서는 그 정도가 아닌데. 혹시 몸 안에 이상이 생긴 건가?

“…이게 섰습니다.”

카넨이 페리아의 손을 끌어 도착한 곳에 무언가 서 있긴 했다. 아주 많이. 굉장하게 힘을 받아서.

그러니까 이게 왜……?

흔들리던 동공으로 카넨의 얼굴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던 페리아가 마침내 답을 찾았다.

‘남자는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할 수 있다더니…….’

“마력… 채워 주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 뭐예요! 그런 건 걱정하기 전에 미리미리 좀 말해 줘요! 걱정했잖아!”

페리아가 짜증 내며 그의 허리를 꼬집자 또다시 윽! 하는 소리가 났다.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픈 척하지 마세요!”

“아닙니다, 제게 마력이 없는 건 진짜입니다. 그리고 잘 모르나 본데, 당신이 꼬집는 거 진짜 아픕니다.”

페리아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있던 카넨이 깊게 숨을 쉬더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올라가고, 사르륵하는 소리를 내며 등에 묶여 있던 드레스의 끈이 풀렸다.

그리고 카넨의 커다란 손이 등을 쓰다듬으며 내려갔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허리를 틀자 카넨의 웃음이 짙어졌다.

아. 그녀는 카넨의 장난 때문에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카넨, 나 봐요.”

“예?”

카넨이 목덜미와 쇄골 부근에 붉은 울혈을 남기던 입술을 떼어 내어 눈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남자 최고야. 빙의 만세… 아, 아니, 이게 아니지!’

페리아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카넨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미 혀를 넣고도 남았을 텐데 가만히 있는 것이 의아했다. 벌어진 입술 틈새로 혀를 넣어 그의 혀를 빨아 당겼다.

‘그런데 뭐지.’

카넨이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었다. 의아해서 눈을 슬쩍 떠 보니, 정말 얼어 있었다.

“카넨?”

“…어?”

“마력 채워야 한다면서요. 안 부족해요?”

마력을 채워야 한다던 카넨이 멍하니 있다니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력 채워 달라며 갖은 애교를 다 부렸었는데.

“부족합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채워 넣는 게 낫지 않아요?”

카넨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어요? 안 괜찮다면서?”

“아니… 맨날 내가 먼저 뽀뽀하고, 내가 먼저 침실로 데리고 오다가…….”

“풉. 아, 미안해요. 당신이 그런 거 신경 쓸 줄 몰랐어요.”

카넨은 그제야 얼굴이 붉어져서 눈을 피했다.

“카넨, 나 봐요.”

“싫습니다.”

“나 보라니까.”

“황족한테 마음대로 말 놔도 되는 겁니까? 황실 모독죄입니다, 그거!”

“당신이랑 결혼해서 나도 황실의 일원이잖아. 나 좀 봐 봐요.”

카넨이 반박할 말을 못 찾았는지 마지못해 눈을 마주 보았다. 이제는 눈가도 붉어졌다.

‘귀엽기는. 얘 여자 주인공 제외하고 쓰레기미 넘치는 애 맞아?’

카넨이 귀여워서 키득키득 웃자, 그가 표정을 굳히더니 페리아를 안아 올렸다. 표정 굳혀도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게 웃겼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심정으로 카넨과 결혼한 것이었는데, 적어도 1년간은 즐거운 결혼 생활이 될 것 같았다.

“페리아.”

카넨이 낮게 무어라 읊조리자 서랍이 저절로 열리면서 보라색 약병이 카넨의 손으로 날아왔다.

‘뭐지… 갑자기 불길한 이 기분은.’

“저 놀리니까 즐거우셨습니까?”

“아, 아니, 즐거웠다기보다는…….”

“충분히 즐겼으면 이제 본격적으로 해 봐야지 않겠습니까?”

페리아는 순간 카넨의 뒤집히기 직전의 눈을 보고 눈치챘다. 지금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라고. 살려 달라고 빌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본격적이라니, 무얼……?”

“당신이 직접, 스스로, 자발적으로 말해 놓고 잊은 겁니까?”

“…….”

“제가 이걸 쓸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그러면 영원히 안 쓰는 것도 방법인 것 같습니다만…….”

“싫습니다.”

암요… 그러시겠죠…….

보라색 병의 뚜껑을 열자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왔다. 페리아가 저도 모르게 킁킁 하며 냄새를 맡자 달콤한 맛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페리아는 속지 않았다. 냄새로는 우주 최강인 참기름도 맛보면 별로였다. 하물며 저런 얼굴의 카넨이 들고 있는 것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도 않았다.

“그렇게 여유 있게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왜요?”

“싫다면 미리 말하십시오. 아직 쓰기 전이니까 한번 재고는 해 보겠습니다.”

“뭔지 설명은 해 줘야 고르죠…….”

카넨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더니 약병의 뚜껑을 닫았다.

“이거, 미약입니다.”

“네?”

“특. 제. 미약.”

‘뭐?’

페리아가 이 세상에 오고 나서 미약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진짜 로판이구나 싶었다. 빙의하기 전에 봤으면 약간 범죄 느낌이었을 텐데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 심지어 절륜하고 테크니컬한 카넨이 말을 하니까… 꼴깍.

‘아, 망했다.’

침 삼키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카넨의 표정을 슬쩍 보니 긴장해서라고 말해 봤자 믿어 주지도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미약이라고! 내가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미약! 미약 쓰면 진짜 기분이 그렇게 끝내주나? 그런데 미약을 안 써도 끝내주는데, 미약까지 쓰면 어떻게 되는 거야? 궁금하잖아!’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미약을 쓸 때는 약효가 엄청 뛰어난 것 같았기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그녀가 뭐라 말도 못 하고 망설이는데 뜬금없이 카넨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흡, 페리아. 지금 어떤 표정 짓고 있는지 아십니까?”

“어? …제가 무슨 표정을 지었다고 그러세요.”

“죽기 전에 한 번은 써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런 표정이었습니다.”

칫. 난 너처럼 눈치 빠른 꼬맹이는 싫어.

“미약 같은 건,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다구요.”

도서관에서 앉아 있다 보면 쓸모없는 이야기도 굉장히 많이 듣게 되는데, 그중에 귀족들의 밤놀이에 대한 것도 있었다.

연회가 무르익으면 그날 눈이 맞은 사람들끼리 밤을 보내게 되는데, 간혹 미약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근데 부작용이 심해 억지로 할 때 아니면 잘 안 쓴다고도 했던 것 같은데…….

“저도 아직 써 보지는 않았습니다. 책에서 보고 만들기만 한 거라.”

“부작용 심하다던데…….”

“저를 뭘로 보는 겁니까. 그런 부작용이 있는 하품을 쓸 거였으면 굳이 제가 만들지도 않았을 겁니다.”

왜 안 만든다는 선택지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이전 생에서도 사실 소설에서 나온 미약을 보고 흥미가 동했지만, 써 보고 싶어도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그럼… 조금만 써 볼까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카넨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뚜껑을 열고 나서 병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마실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마시는 건 좀 긴장이 된달까.

“카넨.”

“왜 그러십니까? 긴장되는 겁니까?”

“네. 혹시 카넨이 먼저 먹어 보면 안 돼요?”

“…왜… 그러십니까?”

카넨이 답을 하기까지의 짧은 침묵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독이라도 들었을까 봐?”

“독을 왜 넣어요? 카넨이 나를 죽여서 득 될 게 뭐가 있겠어요.”

페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자신이 카넨의 마력을 빨아먹고 있는 이 나라를 지탱하는 결계 마법을 성력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죽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왜 그러십니까?”

“…맛없을 것 같아서요. 미약도 약이잖아요. 맛없는 건 먹기 싫다고요.”

맛있는 것만 먹고 살아도 죽을 때까지 다 못 먹는데, 라고 중얼거리자 카넨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참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큭큭큭 웃었다.

페리아는 정말 진지하게 말했기 때문에 표정이 샐쭉해졌다. 카넨이 힘들게 웃음을 참아 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마시겠습니다. 아무 맛도 안 날 테지만.”

“그런 거라면 그냥 제가 마…….”

하지만 페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넨이 한 모금 꿀꺽 마셔 버렸다. 표정이 일그러지지도 않는 걸 보니 그의 말대로 맛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페리아는 카넨이 건네는 병을 받아 마시려고 입을 댔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페리아는 이미 병에 입술을 대고 그것의 끝을 살짝 들어 액체를 입 안에 흘려 넣고 있었다.

‘뭘 물어보려고 괜찮냐고 묻는 거지? 미약은 나도 한번 써 보고 싶었던 거라 괜찮은데.’

하지만 카넨이 걱정스러운 척하며 물어보는 것은, 페리아가 걱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미약을 쓴 나를, 감당할 수 있겠어?”

꿀꺽. 당황으로 얼룩진 페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 안에 든 액체를 삼켜 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그런데 의외로 미약을 마시고 나서도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 그런데 막 제가 알고 있던 거랑 다른데요? 별로 다른 거 없는데요?”

분명히 책에서 봤을 때는 막 마시자마자 몸에 열이 오르고, 다리가 배배 꼬인다는데… 정말 놀라우리만치 평소와 같아서 오히려 실망스러웠다.

“다른 게 없다고 하셨습니까?”

카넨이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유두를 튕겼다.

“하앙!”

‘……? 뭐야. 이 낯간지러운 목소리는?’

순간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카넨을 봤더니 씨익 웃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페리아라…….”

카넨이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추었다. 또 이상한 반응이 나올까 긴장했던 그녀의 몸에 힘이 조금 빠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은 카넨이 입 안의 점막을 혀끝으로 자극했다.

입 안에도 성감대가 있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미약의 효과로 입 안에 성감대가 생겼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나 그가 혀를 얽어맨 후 쓸어 나갈 때면 신음이 절로 나왔다.

물론 그것은 카넨에게 소리까지 먹혀 버려서 밖으로 새어 나오진 못했다.

키스를 하며 정신 못 차리는 사이에 언제 움직인 건지, 그의 책상이 등 뒤에 있었다. 악당처럼 미소 지으며 카넨이 페리아를 의자에 앉혔다.

“앉으십시오.”

“왜, 왜요?”

“앉는 게 좋을 겁니다.”

엉거주춤 뒷걸음질 쳐서 의자에 앉자 카넨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치마 끝을 들어 치마 속으로 들어온 카넨은 그녀의 양다리를 어깨에 얹고 빠르게 자신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카넨의 더운 숨이 밀부에 닿았다. 속옷 위로 그의 손길이 닿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아앙! 자, 잠깐만요. 카넨, 이거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뭐가 이상합니까?”

페리아가 여태껏 들어 왔던 미약은 머리도 멍해지고 몸도 달아올라서 무조건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냥 예민하기만 하지, 평소와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니까 미약을 써도 쓴 줄 모르지 않겠습니까?”

카넨이 말하면서 음핵을 지그시 누르자 페리아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 미칠 것 같은 것이 미약을 마신 것 같기는 했다. 그의 손가락이 부풀어 오른 음핵을 누른 채로 위아래로 살살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새된 교성을 내뱉었다.

속옷을 한쪽으로 밀어내자 그녀의 밀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음부를 양옆으로 고정시키자 붉게 달아오른 클리토리스가 단단해져 있었다.

그것에 카넨이 혀를 대자마자 페리아는 허리를 뒤틀며 의자의 팔걸이를 세게 쥐었다. 평소보다도 훨씬 가벼운 애무만으로도 이미 밑에서 흥건하게 흘러나온 애액이 드레스를 적시고 있었다.

검지와 중지로 음부를 벌리고 있었기 때문에 엄지손가락을 안쪽에 삽입했다. 바깥쪽만 휘저을 수 있어서 그녀는 더 큰 쾌락을 바라며 다리를 교차해 그를 끌어당겼다.

“아앙! 더! 더 깊이 넣어 줘요! 하앙!”

이전까지의 페리아는 ‘읏’ 하면서 신음을 삼키려고 했는데, 오늘은 미약의 탓인지 목소리가 더욱 달콤해졌다.

카넨은 왼손으로 음부를 벌린 채로 클리토리스를 희롱하면서 오른손으로 검지와 중지, 두 개의 손가락을 넣었다. 고작 손가락 두 개를 넣는 것만으로도 질 내벽이 수축하며 무섭게 조이는 것이 절정에 오른 것 같았다.

카넨 역시 미약을 먹기는 했지만 아직 그에게 어떤 자극이 가해진 것도 아니어서 비교적 여유롭게 그녀를 몰아갔다. 이 미약의 효과는 성욕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몸을 예민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카넨이나 페리아나 굳이 미약에 기대지 않더라도 성욕이 증진될 필요는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가 두 손가락을 교차해서 움직이며 질 내부를 사정없이 벌려 대었고, 질 벽을 긁어내리자 페리아의 아래에서 애액이 터져 나오며 그에게 애원했다.

“이제, 들어와 줘요…….”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카넨은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오늘은 새롭게 해야 할 것이 많았으니까.

그는 그저 손가락을 하나 더 넣고 빠르게 왕복 운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예민한 곳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으니, 손가락 끝이 닿을 때면 뇌가 녹을 듯한 쾌락에 흐느꼈다.

“카넨, 제발…….”

그녀는 곧 몸이 무너지며 치마 속에 있던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자연히 엉덩이가 뒤로 빠지자 손이 움직이기 힘들어진 카넨이 짧게 혀를 차고 아쉬운 대로 음핵을 혀로 굴렸다.

또다시 절정에 오르며 나온 하얗고 진득한 애액을 모두 핥은 뒤에야 풍성한 치마 속에서 카넨이 빠져나왔다.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그녀를 일으켜 책상에 엎드리게 했다.

그리고 카넨이 드레스를 거둬 허리까지 들추고 속옷을 내린 후 자신의 바지에 있던 벨트를 풀었다. 허벅지에 걸쳐진 바지만큼만 딱 드로즈를 내려 성기를 꺼냈다.

이미 단단하게 세워진 그의 것은 그 끝에서 쿠퍼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두어 번 두꺼운 기둥을 훑다가 손을 멈춘 카넨이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젠장… 한 모금 마셨는데도 이 정도면 페리아가 마신 만큼 마셨더라면…….’

넣자마자, 어쩌면 넣기도 전에 사정해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페리아의 안에 천천히 삽입했다.

느릿하게 들어오는 카넨 때문에 그의 성기 모양을 주름 하나 돋아난 핏줄 하나까지 느끼겠다고 생각한 페리아는 죽을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삽입만 했을 뿐인데 다리에 힘이 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넨이 점점 그녀의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눈치챘는지 골반을 양손으로 잡고는 추삽질을 시작했다.

정말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그녀가 느끼는 부분만 찔러 대니 페리아의 입에서 교성이 쉴 틈 없이 나왔다.

“아! 아앙! 앗! 좋, 좋아…….”

이미 삽입 전부터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던지라 지금의 쾌락은 너무 과했다. 언제나 페리아에게 그녀가 느낄 수 있는 최대치 이상의 쾌락을 선사해 왔던 카넨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미약까지 마시고 나니 정말 복상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페리아는 그만해 달라고 요구할 생각이 없었다. 미약이란 본디 그런 것 아니겠는가. 정신이 아득해지며 머릿속이 곤죽이 되어 가는 와중에도 현재 상황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이곳에 빙의하지 않았더라면 미약을 쓸 일이 없었을 테니 배덕감도 들었다.

“페리아, 이제 움직이겠습니다.”

‘어? 누가 들으면 방금까지 멀뚱히 서 있기만 한 줄 알겠는데?’

카넨 또한 미약을 사용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느린 추삽질이 반복되면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페리아가 조금씩 엉덩이를 흔드는 것이 이제는 그가 마음껏 움직여도 될 것 같았다.

카넨의 선언을 들은 페리아가 긴장을 했는지 몸에 힘이 들어갔다. 자연히 그녀의 내부가 그의 것을 더욱 조였다.

“큭!”

카넨이 허리 짓하며 자신의 욕심을 채워 나갔다. 페리아의 교성 소리를 감미롭게 들으며. 자신이 마신 미약으로 예민해진 데다가, 페리아는 그보다 훨씬 많은 양의 미약을 섭취해서 안 그래도 감도가 좋은 몸이 더욱 좋아졌다.

그녀가 느낄수록 그 역시 더 큰 쾌감을 얻을 수 있으니 파정의 시기는 평소보다 훨씬 이르게 찾아왔다.

그러나 괜찮았다. 이제야 한 번 파정했을 뿐, 밤은 길고도 길었고 그들에게 있는 시간은 오늘 하루가 아니었으니.

***

내가 눈을 떴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뒤로하고, 내 눈앞 가까이에는 아직 눈을 감고 있는 카넨이 있었다.

‘그래, 너도 사람이면 잠을 좀 자야지…….’

베개는 또 어디 갔는지 카넨의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보나 마나 카넨이 섹스하는 데 방해된다고 어디다 집어 던졌겠지.

그보다 평소에는 카넨의 나신을 구경할 일이 잘 없었는데, 이 기회에 눈에 담아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내가 먼저 잠에 들고, 눈을 뜰 때면 카넨이 나의 몸을 더듬고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단단한 대흉근, 잘 갈라진 복근, 섹시한 장골이라니……. 누구 남편인지 몰라도 너무 훌륭하잖아.’

잘생긴 얼굴에서 출발한 나의 시선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만족스러웠다.

만약 카넨이 내가 빙의자라는 걸 못 알아봤으면 이렇게 잘생기고 절륜한 남자랑 한 번도 못 자 보고 그저 그런 남작이랑 결혼하거나 자작의 후처로 들어갔을 것이다. 간혹 남작 중에서 백작의 첩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대공비라니.’

눈앞에 자리 잡고 있는 행운이 현실성이 없어서 믿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1년짜리 섹스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카넨은 내가 아니더라도 여자 주인공과 만났을 것이다.

황제의 동생에 마탑주에 돈도 많으니 여자야 널리고 널렸을 터. 혹시 결혼 시장에 팔릴 때를 대비해서 손장난으로 외로운 밤을 지새우던 나와는 경우가 다르다.

그때는 여자 주인공이 오면 곱게 물러나고, 이혼하며 받은 위자료로 행복하게 잘 살려고 했는데.

‘과연 내가 다른 남자로 만족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오기 전에 누군가 나에게, 집과 차는 다운그레이드하지 못한다는 말을 했었는데.

나는 여자 주인공이 와서 카넨이랑 헤어지게 되면 집도 마차도 생활 전반이 다운그레이드될 것이 확실했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대책을 세운다고 해 봤자, 현재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결국 내게 주어진 것 중 가장 값어치 있는, 특별한 것은 바로 성력이었다.

여자 주인공도 처음에 등장한 직후에는 성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는 신전에 가서 이용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니 나는 그녀와 다르게 신전에 이용당하지 않고 성력을 제대로 활용하는 걸로 노선을 잡았다.

‘성력…을 활용해서 내 가치를 높여야 하는데, 어쩌면 좋을까.’

고민하며 카넨의 허리를 슬슬 쓰다듬자 해질녘 하늘보다 더욱 붉은 그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잘생긴 게 최고야. 짜릿해. 늘 새로워!

“카넨, 나 성력 쓰는 방법 알…려 줄 사람이 당신 말고 또 없을까요?”

카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고! 성력을 쓰는 방법은 익히고 싶은데 카넨은 진짜 스파르타식이라고!

“왜입니까?”

“뭐, 뭐가요.”

“왜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찾는 겁니까.”

“…당신 가르치는 거 따라가기 너무 힘들어요.”

조금 고민하던 카넨이 진지하게 말했다.

“누가 가르치건 연습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배운다면 따라가기 힘들 뿐만 아니라 알아듣기도 어려울 겁니다.”

“누군가 한 명쯤 잘 가르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그게 접니다.”

자신감 봐…….

“저 말고 또 누군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찾을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괜찮겠습니까? 그리고 마력에 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저입니다.”

그의 말을 잘 뜯어보면, 마력이 아닌 성력에 관해서 잘 아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여자 주인공도 신전에서 배웠으니까. 그렇다고 신전에 갈 수도 없으니 고민이 되었다.

책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성력을 쓰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개월 후…’로 서술되어 있었던 행간에 이런 피나는 노력이 있었을 줄이야…….

그렇다고 신전에 가서 배우고 싶지도 않았다. 나 죽이려고 했던 새끼들이 뭐가 좋아서 그들에게 간단 말인가.

게다가 내가 간다고 하면 그냥 알려 주고 끝일까? 결국엔 나의 성력을 이용해서 카넨의 마력을 무력화시키려 할 것이다.

책에서도 성녀를 이용해 카넨을 죽이려 들지 않았는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 카넨이 죽게 되고 나는 성력도 없는… 대공이 되겠네?

‘아냐, 황제 성격상 내가 신전에 간 즉시 곧바로 이혼 절차를 밟을 거야. 그러면 난 성력도 없는 평범한 자작이 되겠지. 그리고 카넨이 죽고 나서 황제가 나를 안 죽일 리가 없어.’

결국 카넨에게 배우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단 말인가…….

슬픔에 젖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것부터 부탁드려요…….”

“그럼 말 나온 김에 지금 시작합시다. 안 그래도 보호 결계 치는 것부터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안 까먹으셨군요…….

하지만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것을 부탁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에 수긍했다.

“그거랑 치유 마법도 좀 괜찮은 걸로 알려 주세요. 당신 그전에 피 토하는 걸 본 게 꽤 충격적이었거든요.”

“…알겠습니다.”

카넨은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달싹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피나는 훈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만약 내가 여자 주인공이었으면 소설에서 ‘몇 개월 후’라고 생략해 버리면 깊은 분노를 느낄 것 같다.

***

몇 주 후.

평소와 같이 성력을 사용하는 훈련을 하다가 오늘은 황제의 부름에 따라 카넨과 함께 입궁을 하고 있었다.

카넨 혼자였다면 바로 황제의 집무실로 공간 이동을 해서 갔겠지만, 황제가 아직은 나를 불편해하는지 황제궁 안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

몇 주간은 정말이지 ‘카넨, 이 악마 새끼’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는 일의 연속이었다.

하루는 진짜 너무 힘들어서 “저 악마 새끼…….”라고 했다가, 카넨이 진짜 악마가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며 성력이 바닥날 때까지 훈련하고, 바닥을 낸 뒤에는 이론 공부를 하면서 하루 온종일 훈련을 빙자한 괴롭힘을 당했다.

그래도 카넨이 진짜 잘 가르치기는 하는지 성력을 사용하는 것이 많이 늘었다. 아직 여자 주인공이 올 때까지 시간이 꽤 남았는데, 이대로라면 그녀가 왔을 때는 꽤나 능숙하게 성력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종장이 황제의 집무실을 노크하고는 나와 카넨이 왔음을 알렸다. 그러자 황제가 묘하게 들뜬 기색으로 우리를 반겼다.

“하만 대공, 하만 대공비! 어서 오게!”

…저 대공비라는 칭호는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마탑주의 마법사들이 간혹 우리 방…이 아니라 마탑주의 방에 올 때면 대공비 전하라고 하기는 했지만, 여기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어색했다.

“카넨, 너 로테카트 갔었냐?”

시종장이 나가며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황제가 편하게 말했다.

“응, 얼마 전에. 좀 일이 있어서.”

로테카트라면 거기지? 신전에서 나 보내려고 했던 마수가 출몰하던 서부 지역.

“거기서 이번에 세금을 내면서 꼭 대공과 대공비에게 전해 달라는 물품이 있어서 말이야.”

황제가 종을 울리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이 상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안에 있는 물품은 이미 안전을 확인했으니 편하게 열어 봐도 돼.”

카넨이 상자를 들고 나를 봤다. 눈치껏 내가 뚜껑을 열었더니, 상자 안에는 잘 세공된 새카만 부토니에와 브로치 세트, 그리고 편지가 한 통 들어 있었다.

편지는 신전에서 받은 편지 이후로 처음이라 뭔가 떨떠름한 기분으로 그것을 열었다.

하만 대공 전하 부처께.

이전에는 대공이 되신 줄 모르고 결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지방이라 아직 대공 전하에 대한 소식이 닿지 않아 그러한 실수를 했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날, 대공 전하께서 저희 지역과 그 주변에 있던 마수를 모두 퇴치해 주신 덕분에 이제는 아이들이 바깥에 나가도 안심이 됩니다.

그전까지 신전에 아무리 마수 퇴치를 요청해도 묵살되는 바람에 굉장히 불안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저희 마을을 구해 주신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께 약소한 선물을 보냅니다.

마수가 서식하던 곳에서 발견된 광산에서 발굴한 광물로 세공했습니다. 보시기에 미흡하실지 몰라도 마음만이라도 받아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공 부처의 앞날에 언제나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로테카트 시장 및 시민들 모두의 마음을 담아.

이건 좀 의외다. 많이 의외다.

나는 그저 내 목숨이 아까웠고, 신전에서 요구하는 것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나와 카넨이 피곤해질 것 같아서 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받으니 어쩐지 굉장히 부끄러워졌다.

“…제가 이걸 받아도 되는 걸까요?”

“대공과 대공비 앞으로 온 거니까 자네들이 받지 않으면 누가 받겠는가.”

카넨이 상자에서 브로치를 꺼내어 드레스에 달아 주었다. 분명 조막만 한 브로치일 텐데도 무게감이 느껴졌다.

다음에도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신전의 요청이 없더라도 갈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력 훈련을 열심히 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감동적인 와중에 미안하네만.”

“네?”

“내 이전에 카넨에게 이야기를 듣기로는, 로테카트의 마수를 처리해 달라고 한 것이 신전이라지?”

“네, 맞아요.”

“그런데 다시 신전에서 편지를 보냈어. 이번에는 황실에 직접.”

…미친 새끼들은 약도 없다더니, 내 감동은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1분도 채 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황제도 굉장히 멋쩍어하며 이야기를 꺼냈지만, 이미 들어 버린 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편지에서도 신전이 마수 퇴치도 안 해 줬다고 그러던데, 인성 파탄난 놈들 같으니라고.

신전 놈들 하는 꼬라지를 보면, 신도 이런 인간들은 모른다며 외면할 것이다.

‘차라리 내가 신전을 세우고 말지…….’

“편지는 받자마자 형이 이미 읽어 봤겠지?”

“그렇다.”

“어색하니까 그 말투 좀 집어치워. 무슨 내용인데?”

“네가 대공비한테 존댓말 쓰는 것보단 안 어색해. 대공비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어색할 거 아니야, 이 멍청한 새끼야.”

좀 전부터 카넨의 표정이 굉장히 미묘하다 싶더니 황제의 말투 때문이었나 보다.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런 말투셨는데요, 뭘. 친숙하고 좋네요. 마치 침대에 누워서 불 끄라고 시킬 것 같고 물 떠 오라고 할 것 같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제 느낌이라서 아주 친숙했다.

“불이나 물은 하녀를 부리면 되는데 왜지?”

쯧. 이래서 귀족… 아니 황족 놈들이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신분이라는 것을 잊을 뻔했다.

그래도 마법이나 하녀의 존재로 편하게 지내고 있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아닙니다. 편지 좀 볼 수 있을까요?”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자 황제가 자신의 책상 위에 미리 꺼내 두었던 편지를 건넸다.

받아서 펼치자 카넨이 눈치껏 바로 옆에 달라붙어 함께 편지를 읽어 내렸다.

바르칸 제국의 태양께.

바르칸 제국의 태양이시여, 여신 에트니아 아이가 여신을 대신하여 축복을 드립니다.

남부의 데라크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저희가 손을 보태고 있습니다만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계신 수도는 이와 같은 전염병으로부터 무탈하기를 바랍니다.

바르칸 제국에 영원한 광명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대신관 에녹.

읽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성력을 활용해서 신전이 주로 하는 업무는 치료와 마수로부터의 방어, 정화에 있다. 그러니 편지에 있는 내용은 전혀 이상하지 않아야 하는데 뭔가 찜찜했다.

“…다른 소식은 없어?”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는지, 카넨이 황제에게 추가적인 정보를 요구했다.

“없었으면 굳이 편지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지.”

이번엔 또 어떤 계략을 꾸민 것인지. 아무래도 그들은 이전에 마수를 퇴치하는 것으로 내가 성력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카넨을 보내자, 이번에는 카넨이 마력으로 할 수 없는 방법을 택한 모양이다. 내가 직접 나서서 치유력을 쓰게 하려고.

“데라크는 지금 외부와 교류가 완전히 막혀 있어. 데라크의 시장이 전염병이 퍼진 것을 알고 문을 봉쇄했거든. 그런데 데라크에서 통신석을 통해 연락이 왔는데, 시신이 최소 다섯 구가 사라졌다고 하더군.”

이런 제기랄. 이곳에서는 보통 전염병으로 사망하게 될 경우 신관을 불러 정화를 한 후 땅에 묻는다.

그러나 이것은 귀족에 해당하는 것이고, 신관을 부를 돈이 없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관리의 참석하에 화장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시신이 다섯 구가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신관의 손을 거친 시신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된다.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들 중 신관을 부를 정도의 사람이 그리 많지도 않을 텐데 그게 티가 나지 않았을까요?”

“이례적으로 신관들이 대거 파견되어 발생되는 모든 시신들에 대한 정화를 맡았다고 한다. 전염병을 조기에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고위 신관의 말에 일반 시민들은 고마워하며 눈물을 흘렸다더군.”

결국 신전은 전염병에 걸려서 사망한 모든 시신에 손을 댈 수 있는 권한을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심지어 시민들의 감사 인사를 받으면서.

그렇다면 그중에는 당연 무연고자나 시신의 사후 처리에 신경 쓰지 못한 이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이라면 당연히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전혀 티가 나지 않을 것이고.

무연고자의 시신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그러면 시신이 사라진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이건 데라크 시장이 이야기한 건데, 아무리 정화를 거쳤다고는 하나 전염병에 걸린 이가 아닌가. 그러니 그가 지니고 있던 물건들은 그대로 매장했겠지. 그리고 그걸 도굴하려던 이가 발견한 거야. 빈 무덤을.”

그래서 그는 시장에게 이를 신고하고 입을 다무는 대가로 보상금을 받았다, 뭐 그런 이야기였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넨이 의문을 던졌다.

“시신이 신관들의 손에 이동했다는 증거는?”

“데라크에서 출입문을 통제한 이후에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들은 고위 신관밖에 없어. 성력이 넘쳐흐르는 고위 신관들은 애초에 전염병 따위에 걸리지 않으니까.”

새로운 이야기였다. 성력이 많이 있으면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다니. 내가 이곳에 온 뒤에 감기 한번 앓지 않은 것이 소설 속이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고위 신관이 선의로, 신성 제국도 아닌 바르칸 제국에 치유를 목적으로 왔는데 그들의 마차를 수색할 수도 없었겠지.”

“그러면 확실한 거 아니에요?”

“확실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지금 상황에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답답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신성 제국이 치유를 목적으로 한 일을 우리가 물증 없이 심증으로만 압박하는 것은 큰 부담이 간다.”

정말, 신전 그 쓰레기 새끼들은 시신도 이용하는구나.

어떻게 신을 따른다는 이들이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는 거지? 그들이 따르는 신은 내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신이 아닌 것 같았다.

신은 선하나, 그 뜻을 해석하는 이들의 잘못인 걸지도 모르지만.

손에 들린 편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폐하.”

“왜지?”

“편지… 누가 가지고 온 것이죠?”

“당연히 황제를 알현하는데, 고위 신관이…….”

황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으면서 하던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멍청했군.”

고위 신관의 수는 많지 않다. 그러니 그들이 갖고 있는 권위가 높은 것이고, 바르칸 제국쯤 되는 곳에서도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고위 신관이 전염병 발생지인 데라크에서 시신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어떤 고위 신관이 수도에 와서 황궁에 입궁했다.

이 고위 신관이 동일인이라면? 동일인이 아닐지라도, 그들이 빼돌린 시신을 함부로 다른 이들에게 넘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뜻을 같이하는 고위 신관에게 전달되었겠지.

“그래, 확실히 고위 신관쯤 되는 이가 아무 이유 없이 수도에 들어올 리는 없지. 그러나 황궁에 입궁하는 것이라면 이상하지 않으니 의심을 사지 않겠지.”

“이미 시신이 수도 내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충분하겠네요.”

세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결론을 도출해 낸 것은 나였지만, 좋은 내용은 아니었기 때문에 무어라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침묵이 가라앉은 가운데, 제일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카넨이었다.

“형, 미안. 이건 순전히 내 탓이야. 신전에서 페리아가 실제 성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해서 로테카트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던 걸 내가 대신 간 거거든.”

“아니에요, 카넨. 그렇게 따지면 모두 제 탓이죠. 만약에 제가 직접 갔으면 저는 죽었을지도 몰라서 카넨이 대신 가게 된걸요. 그때 저는 성력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으니까.”

이야기를 듣던 황제가 한쪽 손을 들어 더 이상 말하는 것을 저지했다.

“너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제가 성력을 갖고 있는 탓에…….”

이 빌어먹을 놈들이 내가 진짜 성녀인지 확인하려고 한 것이니 카넨이 아닌 내 탓이었다. 카넨은 나를 도와주기 위해 갔었던 것뿐이니까.

“아니. 자네가 성력을 갖고 있는 것은 자네가 다른 세상에서 왔기 때문이고, 카넨이 로테카트에 간 것은 당신을 걱정해서 그런 거겠지. 저 이기적인 새끼가 당신이 위험할까 봐 그랬다는 게 믿어지진 않지만.”

…그러고 보니 그렇네? 카넨이 대신 가 준다고 해서 마냥 고마워했는데, 왜 내 대신 간 거지? 왜 나를 도와준 거지?

카넨을 쳐다보니 카넨이 얼굴을 붉히면서 ‘왜. 뭘 봐?’ 했다.

…내가 뭘 본 거야, 지금?

황제도 나와 생각한 것이 다르지 않은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신전이 수도에 전염병을 퍼뜨리려고 하는 것은 신전 탓이지, 자네나 카넨의 탓이 아니야. 그러니 서로 자책은 말게. 아직은 전염병이 퍼졌는지 확인하지 못했기도 하고.”

“아마 치사율 높고 전염성까지 있는 질병이니 잠복기가 있을 거예요. 일주일에서 이 주일 정도는 시간이 있을 테니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요.”

“그래. 이쪽에서도 이미 전염병이 일어났다는 가정하에 준비하도록 하지.”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후 카넨과 황제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생각할 것이 많았다. 수도에 전염병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아직 여자 주인공이 등장해서 원작이 시작하기도 전의 이야기니 참고할 것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 원작에서도 신전이 이렇게까지 쓰레기였나?’

이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내가 봤던 원작에서는 신전이 이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었다.

이것도 혹시 내가 카넨과 결혼한 탓에? 아니면 원작과 달리 ‘성녀’의 등장 시기가 일러서 그런 건가?

혹시 모르니, 나의 미래에 대한 대비는 해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

마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앞으로 계속해서 쓰게 될 치유와 정화를 미친 듯이 연습했다.

그리고 카넨은 나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내가 쉴 시간이 줄어들면 성력을 회복하지 못하니까.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괜히 나 때문에 휘말린 사람을 생각하면 최소한의 도리는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마법사들을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법사분들.”

“대, 대공비 전하…….”

“민망하게도 이제야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네요.”

마탑주의 방은 말이 방이지, 한 층을 전부 다 썼기 때문에 그렇게 답답하지도 않았었다.

게다가 외출을 할 때도 굳이 문을 열지 않고 공간 이동 마법으로 했고, 나와 카넨이 방에 있을 때는 대부분 불붙어 있거나, 불붙기 직전이거나, 이제 막 불이 꺼졌을 때라 항상 카넨이 마법사들을 쫓아냈었다.

’그러니 마법사분들과 마주칠 일이 없었지…….’

마법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내 뒤에 있던 카넨을 슬쩍 보더니 아니라고 도리질 쳤다. 보나 마나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부탁하는 입장이니 카넨은 얌전히 좀 있어 줬으면 좋겠다. 지금껏 인사도 없다가 도와 달라고 말하기 위해 인사하고 있는 거니까.

“염치없지만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어서요.”

“도움이라뇨?”

마법사들이 생전 처음 듣는 말에 깜짝 놀랐다. 카넨이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이 없었을 테니 이해는 갔다.

“곧 수도에서 연락이 올 거예요. 전염병이 돌 예정이라서요. 그때 마법사분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카넨이 나와 인사를 시킨 마법사는 총 세 명이었다. 그들이 마탑주의 방 바로 아래층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마법 실력에 따라 쓰는 층이 다르다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마탑주 바로 밑에 층에 살 정도니 지금까지 모자란 모습만 보여 줬어도 실력은 아주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전염병이 돌 수 있는지 알았냐는… 질문은 무의미할 것 같네요. 탑주님께서 없는 말을 하실 분은 아니니.”

“저희는 성력이 아닌 마력을 쓰는 이들이라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비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마력은 살면서 쓸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어서…….”

그래, 마력은 성력과 달리 쓸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다고 카넨이 말해 주었었다. 카넨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원래 갖고 있는 마력의 양이 많기도 하고, 살육이나 섹스를 통해서 마력을 충전한 덕분이기도 하고.

“혹시, 여러분들은 마력을 보충받을 수는 없는 건가요?”

“저희가 알고 있기로 그게 되는 것은 탑주님만 가능한데요…….”

모든 마법사들이 되는 것이 아니었나? 이것도 남주 버프였다니… 충격적이다.

그러면 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너희 생명을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살리라는 건데… 그런 부탁을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장 나만 해도 내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남을 도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 몸이 소중한걸.

마법사들에게 전염병으로 인한 시체가 나왔을 때 곧바로 화장을 하거나, 환자들이 깨끗한 물을 쓸 수 있게 물을 만들어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나와 카넨과 황실의 재산으로 수도 내의 전염병을 막을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 같았다.

“마력을 보충할 방법이 있다고 하면, 협조할 생각이 있는가?”

카넨의 말에 마법사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력을 보충한다는 것은, 생명이 늘어난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더욱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마법사라는 생물은 자신의 생명 연장보다 연구에 더 관심이 많은 이들이었다.

“방법이… 있습니까?”

마법사들이 떨리는 눈빛으로 카넨을 바라봤다. 나 역시 카넨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마법사들의 도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테니 말이다.

카넨은 공중에서 갑자기 무언가를 꺼내어 보여 줬다. 그것을 본 마법사들의 동공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아, 아니! 그것은 마력 결정 아닙니까?! 그 비효율적인 마법을!”

“그래. 내가 그전에 만들어 뒀었지.”

“그것을 만들면서 손실될 마력이면 저한테 좀 주시지!”

“아, 아니, 그보다! 마… 만약 저희가 돕는다면…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래.”

짧은 침묵이 생겼다. 그러나 곧 서로 눈을 마주 보던 마법사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전염병이라니, 저는 희생정신이 강한 사람이라 예전부터 그런 사람들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어요.”

네? 아니, 방금까지는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제가 도움을 드려야겠네요.”

“저는 물의 마법이 특기라서요. 환자들에게는 깨끗한 물이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뭐, 뭐지? 아까 전까지 머뭇거리던 사람들이 탐욕에 물들어서는 각자의 효용에 대해서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넨, 마력 결정 몇 개나 있는 거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줄 만큼은 됩니다.”

“이 세 분으로 될까요?”

도와주는 사람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

“페리아, 당신이 맨날 저만 봐서 잘 모르나 본데, 얘네들도 괜히 여기까지 올라온 애들이 아닙니다.”

“그럼요! 그런데 탑주님, 혹시 결정에 마력을 얼마큼씩 담았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마법사들이 너무 눈을 반짝이며 물어봐서 카넨의 옆에 있던 나까지 부담스러웠다.

“계산하기 편하게 내 마력의 10분의 1 정도씩 담아 놨어.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10분의 1이나!!”

“비전하, 저희면 충분합니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10분의 1 정도밖에 되지도 않는데 뭐가 그렇게 만족스러운지 그들은 다른 마법사들은 필요 없다며 자신들끼리도 충분하다고 했다. 오히려 서로 자기 하나만 있어도 된다고 우기는 것을 각자 물, 불, 바람 마법을 맡아서 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나중에 마법사에게 슬쩍 물어보니, 카넨이 가지고 있는 마력의 1할이면 자신의 마력이 전부 회복되고도 남는 수치라고 했다. 다른 마법사가 갖게 된다면 마탑 내의 위계질서에도 거대한 지각 변동이 있을 테니 막아야 한다고도.

“그, 그래요. 그럼. 나중에 갈 때 잘 부탁드릴게요.”

“네!”

***

“카넨, 그렇게 마력을 많이 나눠 줘도 되는 거예요?”

마탑주의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카넨에게 가장 의문인 점을 물었다.

마력은 카넨의 생명력과도 같은 것인데, 그렇다면 위험할 때를 대비해서 갖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중요한 것을 쓰다니. 이전에 마수 건도 그렇고 계속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래도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고마워요.”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이 주는 마력에서 줄 거니까.”

내가 해석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면 마력을 받아 가겠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내가 줬던 마력이 아니라 내가 주는 거라니, 그렇잖아?

“언제나 그랬지만, 당신은 이해가 빨라서 좋습니다.”

카넨이 싱긋 미소 지으며 허리에 팔을 감았다. 잘생긴 얼굴도 그대로고, 매력적인 미소도 그대로인데, 요즘 들어 카넨이 조금 이상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카넨이 몇 번이나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카넨, 왜 이렇게 내게 잘해 주는 거예요?”

“내 아내에게 잘해 주는 게 그렇게 이상합니까?”

물론 원작에서도 카넨이 여주인공에게 굉장히 잘해 주기는 했었다. 그런데 원작에서는 카넨이 여주와 몇 번이나 마주치고 썸 타는 기간도 길었는데, 나는 그렇지 않잖아.

“그게 그렇게 신경 쓰이면 당신도 저한테 잘해 주십시오.”

“잘하고 있지 않아요?”

“잘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더 잘.”

뭐야, 이 뜬구름 잡는 소리는?

“여기서 뭘 얼마나 더 잘하라고.”

시선을 살짝 피하며 뾰로통하게 말하는 것을 듣더니 카넨이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여기서 더 잘할 게 있진 않습니다. 그럼 계속 이대로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니 또 좀 그렇네요. 사실 한 것도 없는데.”

“한 게 없긴 왜 없습니까. 우리가 보낸 시간들이 있는데.”

…한 게 있긴 했구나. 한 가지라서 그렇지. 그래도 이 체위 저 체위 다 세어 보면 많이 하긴 했을 거야!

그런데 카넨과 점점 몸이 밀착되는 것이, 곧 분위기가 달아오를 것 같았다. 그럴 여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카넨을 슬쩍 밀어내었다.

“…저 성력 회복해야 하는데.”

“알고 있습니다. 마력 결정은 이전에 만들어 놨으니까, 지금은 아직 괜찮습니다. 마력은 나중에 보충해 주십시오.”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더듬거리나……!

카넨은 아까 전보다 더욱 성애의 농도가 짙은 손길로 허리께를 슬슬 쓰다듬으면서, 그의 솟아오른 기둥을 은근하게 내 몸에 문지르고 있었다.

“입으로라도 해 줘요?”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입으로 끝낼 자신이 없습니다.”

“그, 그러면 그냥 얌전히 자도록 하죠.”

위기감을 느끼고 황급하게 발을 뺐다. 카넨의 눈은 이미 포식자의 것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고 있는 포식자.

나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는지, 카넨은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단단해진 살덩이를 나의 배에 문지르면서.

“페리아, 아직 일주일 남았으면 휴식은 6일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일주일이란 건 대략적인 거고,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럼 왜 입으로 해 준다는 이야기를 한 겁니까! 이미 서 버렸잖습니까!”

“내가 입으로 해 준다는 이야기 하기 전부터 서 있었잖아요! 이게 어디서 나한테 떠넘기고 있어?”

“이거라니? 이거라니! 황족이자 마탑주이자 당신 남편한테 이거라니!”

카넨이 건수라도 잡았다는 듯 나에게 따져 왔다.

내가 그런다고 질 것 같아?

“나도 황실의 일원이고, 당신이 마력 있는 것처럼 나도 성력 갖고 있고, 당신 아내거든요?”

“그,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예요! 성력 쓰는 방법부터 알려 주세요! 마법사가 치유를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전염병 옮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이번 일 무마되기만 해 보십시오. 여기서 적어도 일주일은 나갈 생각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런 말을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해도 별 감흥은 없었다.

“당신이야말로. 일주일 동안 출근 안 한다고 폐하께 미리 휴가 내 놓으시죠. 저도 내보낼 생각 없으니까요.”

카넨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얼굴에 홍조가 피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드레스를 고정시켜주는 등에 묶인 리본 끝을 살살 매만지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살짝이라도 끄덕이면 금방이라도 잡아당길 것처럼.

“역시 6일만 쉬어도 괜찮지 않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이미 카넨이 마력이 충분히 있다는 걸 안 이상, 내 성력만 준비해 놓으면 되는 거였다.

아직 성력을 사용하는 것이 부족해 이를 연습해야 하니 쉬는 시간은 되도록 많이 필요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음, 잘 생각해 봤는데 안 돼요. 그냥 제가 입으로 해 준다니까요?”

“내가 정말 못 참겠으면 어떡합니까?”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에요. 본능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짐승이 아니라 사람인 거죠.”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력 결정 만들어 놓고.”

입으로만 해도 마력이 어느 정도 차오르니 카넨은 미리 마력 결정을 만들어 놓을 생각인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넨의 손에서 빨간색 마력이 연기처럼 피어나더니 별 모양이 만들어졌다.

그냥 별 모양이 아니라 정말 반짝반짝하면서 예쁜 모양이었다. 장신구로 하고 다녀도 좋을 만큼.

“오!! 신기해!! 진짜 예쁘다! 한 번만 더 보여 주세요!”

“제가 이거 만들 때마다 마력을 10분의 1씩 쓰는데… 몇 개까지 만들어도 됩니까?”

“…한 개만 더요.”

카넨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이번에도 카넨의 손에서 빨간색 마력이 연기처럼 피어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별이 아닌 행성 모양으로 만들면서 행성의 고리까지 만들어 줬다. 마력은 마력인지 고리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면서도 행성과 떨어지지 않았다.

“우와!!! 어떻게 이게 안 떨어지지? 진짜 너무 신기하다!”

“당신 남편이 마탑주인 건 잊었나 봅니다?”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우와!”

내가 너무 신기해해서 뭐라고 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펴보고 있었더니, 카넨이 피식 웃었다.

“당신이 너무 좋아해서 하나 더 만들어 주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습니까?”

“어… 네?”

“당신이 그렇게 아이처럼 신기해하면서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고민이 됐다. 마력 결정은 처음 보는 건데 이렇게 모양까지 만들어 내니 너무 신기하고 예뻤다.

그냥 만들어 내는 거라면 그저 계속해서 만들어 달라고 했을 텐데, 만든 후에 하는 뒷감당은 내가 하는 것이었고.

‘어떡하지. 그렇게 해 주고 싶다고 순박하게 미소 지으면서 말하는데 여기서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 개만 더 하라고 하자니 벌써 두 개나 만들었다. 그 말은 전체 마력 중 20퍼센트나 사라진 것이었다. 여기서 더 만들어 달라고 하면 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지금 만든 건 두 개잖아. 어차피 마력 결정을 줘야 하는 마법사가 셋이니까 세 개 만들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저 예쁜 걸 다른 마법사들한테 줄 생각을 하니까 좀 아깝고…….’

게다가 입으로 하면 카넨은 기분 좋겠지만, 나는? 욕구 불만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그전에 만들어 둔 마력 결정도 이렇게 생긴 거 아니에요? 그거 보여 주세요.”

“아닙니다, 그때는 그냥 동그랗게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당신에게 보여 주려고 일부러 예쁘게 만든 겁니다. 마력도 훨씬 더 많이 듭니다.”

카넨은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아공간에서 사탕처럼 생긴 새빨간 공 다섯 개를 꺼냈다.

“그럼 이거를 마법사들한테 주고, 당신이 지금 만들고 있는 건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줄 수 있어요?”

“굳이? 그냥 그때그때 만들어도 됩니다.”

그리고 나는 그때그때 뒷수습을 해야 하겠지.

내가 짜게 식어 가자 카넨이 얼른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 더 만들어도 됩니까?”

“…태양 모양으로요.”

“이것과 똑같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카넨이 이전에 만들어 둔 새빨간 마력 공을 들었다.

내가 고작 저런 거 보려고 그런 줄 알아!

“아뇨! 이렇게 생긴 거요!”

나는 카넨에게 이글거리는 태양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러자 카넨이 예의 그 싱그러운 미소를 짓더니 만들기 시작했다. 행성만큼 신기하진 않지만 그래도 예쁜 모양이 만들어졌다.

“하나 더?”

“…아뇨. 더 이상은 힘들 것 같아요.”

“왜 그러십니까아. 채워 주면 되지 않습니까아.”

카넨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되도 않는 애교를 부렸다. 물론 잘생긴 사람이 그러니 두근! 거리는 게 있기는 했지만.

“언제 수도 내에서 발병할지 모르잖아요! 세 개 만들었으니까 30퍼센트죠?”

예쁜 모양에 혹해서 넘어가 버렸다. 30퍼센트라니. 절대 입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10퍼센트짜리 만들 때마다 마력 손실이 2퍼센트가량 일어납니다. 아까 전에 마법사들도 ‘만들면서 손실될 마력’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지나가면서 했던 말들까지 다 기억하지는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카넨은 마저 설명을 이어 갔다.

“그리고 아까 말했다시피 예쁜 모양을 만들 때는 마력이 더 사용됩니다. 하나당 15퍼센트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세 개를 만들었으니 제가 사용한 마력의 총량은 제가 가진 마력의 45퍼센트 정도가 될 겁니다.”

“…뭐라고 말할지 미리 생각해 뒀죠?”

“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당했다…….

카넨이 가볍게 입술을 부딪히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저는 마력이 절반밖에 안 남았습니다.”

“…55퍼센트잖아요.”

“그거나, 그거나.”

분명 원작에서의 카넨은 성녀와 이어지기 전에 마력을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남은 양을 계산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5퍼센트 따위는 쿨하게 버리다니.

어이가 없어서 카넨을 바라보는데, 그가 별안간 드레스에 불을 붙여 버렸다. 한동안 얌전하게 잘 벗기더니 왜 또 아깝게 옷을 태워 버리나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를 노려봤다.

그러나 카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그의 커다란 손으로 내 가슴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제가 마력 결정을 만들면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으읏… 뭔데요?”

“당신은 병에 걸린 사람들을 꽤나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신경이 안 쓰여요?”

내가 성력이 있다고 인정했으면 전염병이 수도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잘못한 건 내가 아닌 신전이라고 해도, 그래도 그들에게 죄책감 비슷한 감정은 있었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런 감흥도 없었겠지만, 로테카트에서 고맙다는 편지를 받은 것이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저는 전혀 안 쓰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으나, 굶어 죽으나 제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얘는 이런 놈이었지. 인성 쓰레기, 또라이.

“어차피 당신은 성력이 있으니 병에 걸리지 않고, 저도 마력이 남아 있으면 마력이 다 닳을 때까지는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습니다. 아, 형이 문제인데… 뭐, 설마 황제가 쉽게 죽겠습니까?”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천 년의 욕정도 식을…….

“당신만 살아 있으면 됩니다. 당신만. 페리아, 당신만 중요합니다.”

리가 없지. 잘생긴 남자가 그렇게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너만 중요하다고 그러면… 없던 것도 설 것 같았다.

나만 특별하다고, 내가 제일 특별하다고, 내가 제일 소중하다고 그러는데 가슴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그의 손가락이 꼿꼿하게 선 유두를 사이에 끼고 음란하게 움직였다.

이런 분위기에, 이런 대화에, 이런 행위까지. 어느 것 하나 취향이 아닌 것이 없다. 다리 사이로 무언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그런데 말이지, 당신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흐읏!”

부드럽게 움직이던 그의 손이 별안간 가슴을 콱 쥐었다. 통증으로 인해 고통이 섞인 목소리로 흐느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고 상황이 끝날 때까지 저를 거들떠도 안 볼 거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아, 이번에는 내가 만족할 만큼 당신을 안아야겠다고.”

대체 왜 결론이 그렇게 되는 건지…….

그런데 확실히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까지 나왔는데 거기서 한가하게 카넨과 희희낙락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부정하지도 못하고 있자, 카넨이 알 만하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대체 왜 허탈해하는 거야?

“입 벌리십시오.”

카넨과 맞부딪히던 입술을 벌리자마자 그의 추축한 혀가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뭉툭한 혀끝으로 입 안에 얼마 되지도 않는 예민한 부분을 부드럽게 쓸어 가며 앞으로 할 행위를 암시했다.

그러면서도 나의 다리 사이로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벌어진 다리 사이로 손을 내려 질구에서 흘러 내려온 애액을 손가락 끝에 묻히며 숨어 있던 음핵을 손가락으로 슬며시 누르며 자극했다. 곧 단단해진 음핵을 카넨의 손가락이 마구 굴려 댔다.

“으읏, 카넨…….”

나의 허리가 튀어 오르며 더 큰 쾌락을 바라고 본능적으로 그의 허벅지에 음부를 문질렀다. 하지만 갈증만 더욱 커져 갈 뿐, 내가 바라는 쾌락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럴 거면서, 일주일이나 저를 내버려 두겠다고 한 겁니까?”

그 순간 카넨이 기다란 손가락을 질 안에 푹 찔러 넣는 것이 느껴졌다. 카넨의 손가락이 예민한 부분을 꾹꾹 눌러 댔지만, 손가락이 주는 쾌락은 그의 페니스가 주는 것에 비하면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한순간 사악하게 미소 짓던 카넨이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침대로 가서 넣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넨의 손을 잡고 걸어가 침대에 누웠다. 카넨이 옷을 벗어 던지고는 침대 위로 올라가 나의 다리를 벌리고 들어가 조금은 성급하게 그의 것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이미 녹진하게 녹은 음부는 아무런 저항감 없이 그의 것을 받아들였다.

“아, 읏……!”

얇은 손가락과는 비교도 안 되게 두껍고 울퉁불퉁한, 그리고 손가락이 채 닿지 않는 곳까지 닿는 끝이 살짝 휜 그의 것이 들어왔다. 그것이 주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세가 바뀔 때마다 자극하는 지점이 바뀌어 언제나 커다란 쾌락을 안겨 줘 왔다.

이번에도 휘몰아치는 쾌락을 기대하며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 짓에 맞춰서 엉덩이를 흔들어 댔다. 처음에나 그의 것이 주는 쾌락을 받아들이기 벅찼던 것이지 이제는 그가 들어오고 나가는 박자에 맞춰 아래에 힘을 주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아! 좋아… 흐응! 거기, 더 세게……!”

카넨이 나의 허리를 붙잡고 더욱 세차게 진퇴를 반복했다. 들어올 때마다 눈앞에 빛이 반짝이는 기분이었다. 가벼운 절정에 올라 숨을 헐떡이는 도중에, 카넨이 어금니를 악물어 버티며 제 것을 빼내었다.

“후우, 페리아…….”

“아앙, 왜……?”

나는 절정으로 다다르기 직전에 갑자기 빼낸 그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지금쯤 그의 페니스를 안에 넣은 채 쾌락에 허덕여야 하는데, 지금 내게는 그의 페니스는커녕 손가락조차 없었다.

“제가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분위기로 보아서 카넨이 한다는 생각은 절대 멀쩡한 생각일 리가 없었다.

어쩐지 선언했던 말과는 다르게 부드럽게 섹스한다 싶더라니.

“당신이 올라가 봤자 얼마 못 버티고 쓰러지고.”

“그, 그거야……!”

“그거야?”

“…당신 게 너무 깊이 들어와서…….”

카넨이 한숨을 내쉬더니 그의 검붉은 기둥을 느릿하게 위아래로 훑었다.

“지금 누구는 좆질하고 싶은 거 간신히 참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라고?”

그의 중심에서 묽은 액체가 울컥 하고 쏟아졌다. 나는 갑작스런 그의 발언에 놀란 것도 잠시, 야해 빠진 카넨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당장이라도 그를 쓰러뜨린 뒤 올라타고 싶은 충동을 가라앉혔다.

“…신기하십니까?”

“보기 좋네요. 계속 흔들어 봐요.”

카넨이 어이없어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남자가 자위하는 것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물론 지금 당장 제 안에 넣고 싶었지만, 그가 자위하는 것을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몰랐으니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다.

나는 여유롭게 침대의 헤드에 기대어 자리를 잡았다. 침대의 중앙에 무릎 꿇고 선 카넨이 그의 손에 다 담기지도 않는 페니스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페리아, 당신은?”

“열심히 구경하고 있잖아요.”

“구경만 할 겁니까?”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자위를 하고 있는 카넨 때문에 아래가 더욱 젖어 들었다.

“그럼요?”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거 본 사람은 당신밖에 없는데, 그저 보기만 하겠다고?”

카넨이 흥분했는지 존댓말까지 집어치웠다. 눈이 붉어진 것을 보아하니 엄청나게 흥분한 것 같았다.

“영광이네요.”

여유롭게 누워 계속 구경하자, 카넨이 땀에 젖은 머리칼은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럼 당신도 해 봐. 나도 구경하게.”

네가 지금 하라고 하는 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건 아니겠지?

하지만 카넨은 기어코 내가 자위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모양이다.

“당신도 보여 줘야 공평하지. 그러면 나도 계속 보여 줄게.”

“…아쉽게도 저는 당신이 계속하는 걸 보고 싶으니, 저도 보여 줘야겠네요.”

확실히 누구나 탐낼 만큼 멋진 남자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자위하고 있는데, 당연히 구미가 당긴다. 심지어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카넨은 아마 내가 부끄러워하며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 생각했겠지만, 그런 걸로 부끄러워할 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계속 보고만 있으니 다리 사이가 근질거리는 게, 가만히 있기가 힘든 상태이기도 했다. 그가 보란 듯이 다리를 벌리고 한 손으로는 음부를 벌리고, 다른 손으로는 손가락으로 음핵을 문질렀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문질러도 어느 정도 이상의 쾌락은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단단한 페니스로 가기 직전이었는데 고작 손가락으로 하는 클리토리스 자위가 성에 찰 리가 없었다.

“카넨, 뭐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왜 그러십니까, 넣어 드렸으면 좋겠습니까?”

그가 빠르게 흔들어 대던 손을 다시 느릿하게 움직이면서 물었다.

“아뇨, 나는 당신이 하는 거 계속 보고 싶은데요.”

“그럼?”

“당신 거만 한 딜도 좀 만들어 줘요.”

“딜도?”

“음… 모조 성기?”

카넨이 풉 하고 웃더니 마력으로 만들어 주었다. 나도 저런 거 할 줄 알면 좋을 텐데.

“진동 기능도 넣어 줘요. 있는 거랑 없는 거랑 차이가 크더라구요. 단계별로 세기를 설정할 수 있으면 더 좋구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써 본 사람이 아는 거죠. 빨리 만들어 줘요.”

카넨이 떨떠름한 미소를 짓더니 새로이 기능을 수정한 것을 내게 건네주었다. 빙의 전에 쓰던 것보다는 못해도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그의 페니스가 조금은 힘을 잃은 것 같아 보이는 것을 외면했다.

‘그래도 괜찮아. 나에게는 카넨의 것과 비슷한 크기의 전동 기능까지 탑재한 대체품이 생겼으니까!’

***

카넨은 페리아가 등허리에 베개를 덧대어 푹신하게 만든 뒤에 침대 헤드에 기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페리아는 다시 제 앞에 다리를 벌린 채로 바이브레이터를 핥았다. 제 것과 비슷한 크기라 입에 다 담기지도 않았지만, 그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반신에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페리아가 기둥 부분까지 혀로 핥다가 고개를 들어 저와 눈을 마주치는 모습이 미칠 것 같아서 더욱 세게 좆을 흔들었다.

‘하아, 그냥 다 집어치우고 쑤셔 박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페리아를 쓰러뜨리고 그녀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거칠게 박아 넣고 싶었다. 하지만 페리아가 저렇게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데 그깟 광대 짓 한 번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결국 저와 페리아의 밤에서 승자는 언제나 자신이었으니, 어떻게 잡아먹을까 고민하면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도 재밌겠다 싶었다.

’신전 그 쓰레기 놈들만 아니었더라도.’

훨씬 더 여유롭게 페리아를 잡아먹을 수 있었을 텐데. 신전만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페리아는 나른한 미소를 띠며 자신의 음부에 바이브레이터를 비볐다. 그녀의 가느다란 교성과 함께, 곧 가장 두꺼운 귀두 부분이 기대에 부푼 페리아의 질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이 넣었더라면 단번에 뿌리까지 박아 그녀를 가벼운 절정에 이르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흥분되었다.

“아흣! 아! 아읏……!”

바이브레이터의 기둥을 붙잡고 안으로 찔러 넣을 때마다 교성이 흘러나왔다. 자신도 점점 버티기가 힘들어져 한쪽 손으로 침대를 짚고 몸을 지탱하며 다른 손으로 빠르게 훑었다.

페리아가 딸깍하며 버튼을 눌러 진동 기능을 켜자, 그녀의 내부를 가득 채운 바이브레이터가 사정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진동 기능을 넣은 것이 아니라 앞쪽이 휘어 평소와는 다른 부분을 자극하자 페리아의 허리가 사정없이 떨리며 교성이 흘러나왔다.

“아, 아! 카넨! 아앙! 아! 조, 좋아! 응!”

페리아가 이제는 바이브레이터를 잡을 생각도 못 하고 양손으로 침대의 시트를 잡은 채로 본능적으로 허리만 흔들어 댔다.

“…….”

페리아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관능적인 페리아의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그것이 그녀가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딜도 때문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제 손으로 페니스를 흔들어 대 봤자 그녀가 제 좆을 입에 물거나, 질 내벽의 근육으로 조일 때보다 느낄 수 있는 쾌감이 훨씬 적었다.

결국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페리아의 한쪽 손목을 잡아 끌어 당겼다. 갑작스럽게 무게중심을 잃은 그녀가 앞으로 넘어지자, 그녀의 눈앞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꺼떡이는 그의 페니스가 있었다.

페리아는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중에도 제 페니스를 입에 담고 머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그녀가 부드러운 혀를 넓게 펴서 그의 귀두를 핥자 카넨이 밀려오는 사정감에 그녀의 머리를 붙잡고 허리를 흔들어 댔다.

그러다 그녀의 음부에 박혀 있는 딜도가 진동하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것을 보자 알 수 없는 짜증이 솟구쳤다.

페리아의 입 안에 있는 것은 제 좆이었다. 이 정도로 자신은 만족할 줄 알았건만, 그녀의 음부가 삼키고 있는 게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쌀 것 같았으나, 자신이 넣고 싶은 곳은 그녀의 입이 아니었다. 물론 입도 황홀할 정도로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그건 저놈의 딜도가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결국 쿠퍼액이 질질 흐르는 좆을 그녀의 입에서 빼내고 페리아의 몸을 뒤집었다. 엎드린 채로 높게 든 엉덩이가 자신을 향하자 페리아가 오물조물 삼켜 내고 있던 바이브레이터를 꺼내 집어 던졌다.

“하읏! 아…….”

또다시 느껴지는 상실감에 페리아가 짜증이 난 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카넨, 이번이 벌써 두 번째예요. 만약에 한 번 더 한다면 저는 정말로 진지하게 짜증이 날 것 같아서 신전에 찾아가기 전에 황궁에 들어가 황제 폐하를 알현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괜한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페리아. 이제는 당신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놓아줄 생각이 없으니.”

만들어 달래서 만들어 주긴 했으나 왜 만들었는지 후회되었던 바이브레이터가 있던 자리에 제 좆을 쑤셔 넣었다. 그러자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리던 페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새하얀 다리를 제 허리에 감아 왔다.

더운 숨을 흘려보내며 그녀의 안 깊숙한 곳까지 순조롭게 삽입했다. 입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기분 좋은 그녀의 내벽에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곤란하군요. 당신이 너무 야해서 벌써부터 나올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움직일 게 아니면 빼 줘요. 저거나 갖고 놀게.”

페리아의 눈이 카넨이 집어 던진 바이브레이터를 향했다. 저도 모르게 표정 관리가 안 되어 페리아의 시선이 닿은 바이브레이터를 불태워 버렸다.

페리아에게 제 대신이 될 것이 있어서는 안 됐다. 오로지 자신만이 그녀를 충족시켜야 했다. 왜냐면, 자신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 역시 페리아뿐이었으니.

“아아!! 아깝게!!!”

“왜 아깝습니까?”

페리아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그런 게 아까워서는 안 되지. 쑤셔 박고 싶다면 제 좆이 있는데 그깟 딜도 따위를 아까워해서야 되겠는가.

괜한 심술이 들어 그녀의 골반을 잡은 채로 거칠게 추삽질했다.

“왜 아깝다는 겁니까?”

“아읏, 아……! 아앗!”

“내 좆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까?”

방 안에는 애액이 찰박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더, 더 해 줘요. 더 세게 해 줘요!”

페리아의 골반을 잡고 세게 쳐올리자, 페리아가 그에 맞춰 허리를 흔들어 대며 요구했다. 더운 숨을 내뱉으며 짜증 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내부를 찔러 댈 때마다 그녀는 자지러질 듯 교성을 내질렀다.

“제가 평소에 많이 부족했나 봅니다. 당신이 저걸 아깝다고 하는 걸 보면.”

“아, 아니이! 으흣! 아니야아!”

“미약 드릴까요? 아니지, 미약 먹고 저걸 쓸 수도 있겠지요. 어떡하길 원하십니까.”

생각해 주는 척, 다정다감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허리 짓은 무자비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는데, 어떤 마수에게는 우둘투둘한 촉수가 있다고 합니다. 근데 웃긴 건, 그 마수에게 농락당한 여자가 사흘 뒤에 실종이 됐었습니다.”

동부 수풀 지대에 있는 어느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마수에게 능욕당한 여자를 발견한 기사단은 대량의 마수를 처치하는 데는 실패하고 여자만 겨우 구출해서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찾으러 가 봤더니 그 마수랑 보냈던 시간을 잊지 못하고 제 발로 간 거였습니다. 그때는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는데…….”

기사들은 가족들의 신고로 인해 그녀를 다시 한번 구출했다가, 그 뒤에 다시 사라진 뒤로는 찾으러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의 허망함을 설명하던 기사의 표정은 아주 가관이었다.

계속된 쾌락에 온몸에 열이 올라 붉어진 페리아를 보자, 딜도로도 만족 못 하는 페리아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그때 그 여자처럼 다시금 자신을 찾아오게. 그렇게라도 제 곁에 두고 싶었다.

“아마 그때 그 마수의 촉수가 이렇게 생겼다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어……?”

페리아가 쾌락에 절어 있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눈에 보이는 건, 온통 돌기가 올라온 그의 페니스였다.

“…이게 뭐야.”

페리아의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을 보자 자연스럽게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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