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2
“형님.”
내 손을 잡고 카넨이 문을 열고 나가자 그곳은 복도가 아니라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집무실 안에는 부관들은 다 퇴근시키고 다크서클이 가득한 황제만이 혼자 사각거리는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또다시 갑작스러운 공간 이동에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마탑까지 간 것은 그렇다 쳐. 그런데 황제의 집무실? 심지어 황제가 바로 내 눈앞에 있네?
아직 미혼인 황제는 움직일 때마다 수많은 팬들을 몰고 다녔기 때문에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앉아라.”
고개도 들지 않고 펜을 움직이던 황제는 사각거리던 펜으로 빈자리를 슬쩍 가리켰다.
“나는 조금 쉬고 올 테니 필요하다면…….”
때마침 살펴보던 서류를 옆에다 치운 황제가 우리를, 정확히는 카넨의 옆에 서 있던 나를 보았다.
황제가 카넨에게 무언가를 던지려다가 멈칫하는 바람에, 그가 던지려던 것이 책상 앞에 툭 떨어지고 말았다.
빙긋 웃고만 있는 카넨과 그런 카넨을 바라보고만 있는 황제 때문에 뭘 해야 할지 몰라 우선 떨어진 물건을 주웠다.
‘반지? 왜 반지를 집어 던져? 화려하기는 진짜 엄청 화려하네.’
뭔 세공을 그렇게 정성들여서 했는지, 용 머리가 새겨져 있었다. 화려한 건 둘째 치고 평소에 하고 다니라고 하면 절대 못 하고 다닐 그런 디자인이었다. 내가 유심히 보고 있으니, 카넨이 반지를 잡은 나의 손을 덮었다.
“페리아, 그건 일의 요정이 쓰는 반지니 얼른 일의 요정에게 돌려주도록 하십시오.”
“일의 요정이요?”
“그 반지를 끼게 되면, 죽을 때까지 일 속에 파묻혀 살아야 합니다.”
뭐야, 그런 불길한 반지라니. 나의 이상적인 미래는 월급 도둑으로 살다가 건물주로 전향하는 것이었다. 월급 도둑은 아니어도 카넨과의 결혼을 통해 많은 위자료를 받는 것을 꿈꾸고 있는데 일의 요정이라니!
나는 잽싸게 들고 있던 반지를 황제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황제는 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끼우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인장을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뭐라고요? 인장? 혹시 황제가 윤허할 때 쓰는 그 인장이요? 어쩐지 세공이 정성스럽긴 하더라. 그런데 그걸 그렇게 막 던져도 되는 거야?
물론 지금 황제의 모습을 보면 정말 죽을 때까지 일만 해야 할 것처럼 보이긴 했다.
내가 놀란 표정으로 카넨을 바라봤지만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것이 인장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나한테 금싸라기 같은 땅이라도 하나 주라고 인장 찍은 후에 돌려줬을 텐데. 그래도 황제의 앞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진 않았다.
“그래서, 저 아가씨는 누구냐.”
황제가 엄지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물었다. 형제가 참 목소리에서부터 잘생김이 묻어 나온다.
“아, 결혼할 사람 생기면 말하라며. 그래서 데리고 왔어. 다른 놈들이 채어 가기 전에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라. 혼인 신고는 형이 허가해 줄 테니까 됐고. 결혼식은 로제 궁에서 하려고 하는데.”
카넨이 말을 이어 가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는 카넨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손가락으로 미간을 뚫을 기세로 눌렀다.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찮으니까 자기 손으로 그러고 있는 거겠지?
나는 괜히 민망해서 가만히 있었다. 황족 간의 대화에 감히 참여할 수 없는 신분이었으니까.
“그만. 일단, 저 아가씨의 신분은 무엇이냐.”
“신분이 무슨 상관이야, 내가 결혼하겠다는데.”
황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에 공기가 하나도 남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게 숨을 내뱉었다. 드디어 미간에서 손을 뗀 황제가 고개를 돌려, 카넨과 똑같은 붉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힘겹게 웃었다.
“이봐, 잠깐 나가 볼래?”
“네.”
“나가긴 어딜 나가. 얘 없을 때 못 할 말이면 하지를 마.”
카넨이 틱틱거리며 쏘아붙이자 황제에게서 깊은 분노가 느껴졌다. 이번에는 내게 양해를 구할 여유가 없었는지, 황제는 슬쩍 턱짓했다. 그의 턱짓을 따라 카넨에게서 거리를 벌리자마자, 황제가 손에 짚이는 것을 카넨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야, 이 멍청한 새끼야. 황족이 아무나랑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해? 저 아가씨가 노예인지 평민인지를 알아야 작위를 쥐여 주고 구색이라도 맞춰야 할 거 아니냐.”
황제가 그간 쌓인 게 많았는지 속사포로 카넨을 공격했다.
“네가 아무나랑 결혼한다고 그러면 귀족들이 잘도 가만히 있겠다. 그럼 너 그 사람들 어쩔래? 마음에 안 든다고 다 죽일래? 그러면 이 많은 일들은 나 혼자 하다가 과로사하라고? 너 그게 목적인 거냐? 결혼한답시고 황제가 되고 싶은 거야?”
황제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카넨이 질색을 하며 손을 휘저었다.
“지금껏 귀찮은 업무를 내게 다 떠맡기고 칠렐레 팔렐레 다니는 것도 눈감아 주었는데…….”
“칠렐레 팔렐레라니!”
“좀 닥쳐 봐.”
카넨이 항변하려고 했으나 곧바로 저지당했다. 역시 형은 형인 모양인지 카넨이 찍소리도 못 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도 너의 마법이 있으니 이 나라가 안전한 것이라고 몇 번이나 되새기며 참고 넘겼는데 말이다.”
“…….”
“이럴 줄 알았으면 그동안 오냐오냐하는 게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나를 오냐오냐했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카넨의 소심한 항변에 결국 황제의 인내심이 다했는지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다.
“그리고! 너 받아 준다는 사람이 세상 천지에 흔할 거라고 생각해? 노예라 할지라도 작위 쥐여 주면서 부디 저 새끼를 잘 부탁합니다, 해야 데리고 살아 줄까 말까 한 네 새끼를.”
황제가 던진 물건들을 카넨이 얄밉게 마법을 써서 막아 대니 그의 발치에 만년필이며 책이며 서류 같은 것들이 나뒹굴었다.
“…내가 그 정도야?”
“아버지께서 너 때문에 편히 눈을 못 감으셔서 내가 감겨 드렸어, 이 빌어먹을 새끼야.”
“그 정도는 아닐걸?”
황제가 답답함에 가슴을 치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이봐, 카넨이 권력으로 찍어 누른 적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권력으로 찍어 누르지 않았으면 결혼하지 않았겠지. 카넨은 나중에 남의 남자가 될 테고, 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버림받을 게 뻔한데 왜 결혼하겠어?
물론 그의 체력과 테크닉을 알게 된 지금은 말이 다르지만 말이다. 이제는 카넨이 권력으로 찍어 누르지 않는 이상 결혼하자고 내가 들러붙을 것이다.
카넨과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리자 다시 아래가 젖어 왔다.
”세상 저 혼자 사는 사람처럼 대하진 않던가? 일단 저지르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고? 배려하는 모습 따위 없지 않나?”
역시 가족이라 그런지 카넨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넨이 불쑥 끼어들었다.
“배려해 줬어!”
“언제?”
“그, 아까! 처음이래서…….”
나는 손바닥만 한 거미를 본 듯한 눈빛으로 카넨을 봤다. 그런 나의 얼굴과 황제의 표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황제는 또다시 손에 잡히는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생각 없는 새끼야, 너는 그걸 밖에서 말을 해? 네 혀는 있어 봐야 쓸모가 없으니 뽑는 게 어때?”
“그래도 마탑주인데 마법은 써야지…….”
“너는 진짜 마법 못 썼으면 어쩔 뻔했냐?”
씨근덕거리던 황제가 숨을 고르더니 손으로 옷을 탈탈 털어 매무새를 정리했다.
“후, 이봐. 잘 생각해 봐. 저런 놈이랑 결혼해서 살 수 있겠어?”
“…저한테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아마도.”
그 노력은 주로 침실에서 이루어지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만족하면서 지낼 수 있다. 침실에서 그와 시간을 보내면 없던 정도 생겨날 정도였으니까.
침실에서 있었던 일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천 년의 욕정도 식을 혓바닥만 고친다면 말이다.
“흐음… 그래, 일단 자네가 누구인지 들어 볼까.”
황제가 이제 와서 다시 근엄한 척하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미 산산조각 난 그의 이미지가 쉽게 붙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드레스를 양손으로 잡아 살짝 들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페리아 슬레인입니다.”
“페리아 슬레인… 슬레인 남작?”
“네.”
있는 듯 없는 듯한 이름만 귀족인 나 같은 사람도 알고 있다니……. 역시 일의 요정은 다르다.
“앞으로는 슬레인 자작이라고 불러야겠군.”
드레스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넨과 이혼하더라도 최소한 나의 작위는 자작으로 보장받은 것이다.
내가 꿈꾸던 문란한 결혼 생활과 더불어 작위까지 올라가다니, 카넨! 요 예쁜 것!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카넨의 양 뺨을 붙잡고 입을 맞춰 주고 싶지만, 나는 카넨과 달리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 참았다.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표하자, 황제가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 주었다.
“결혼식은 1년쯤 뒤에 올리는 것은 어떠냐, 카넨. 작위가 오르자마자 혼인하는 것은 자작에게 별로 안 좋을 것 같은데.”
“안 돼. 말했잖아. 다른 놈들이 쟤를 노리고 있다니까?”
“그러면 작위를 나중에…….”
황제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을 멈추었다.
아마 지금 내 표정이 세상 무너지는 표정이기 때문이겠지?
원래 준다고 할 때 덥석 받아야지, 시간이 지나서 ‘그때 올려 주기로 한 작위 주세요.’라고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는 힘들 테지. 게다가 나는 여자 주인공이 오면 버려질 신세이니, 여자 주인공이 오기 전에 받을 수 있는 건 모두 받아 놓고 싶었다.
“…주는 건 안 되겠지.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네.”
“황공하옵니다.”
“그러면 카넨, 자작을 노리는 이들을 죽인다는 선택지를 두지 않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감히 누가 왕제의 비를 노릴 수 있단 말이냐.”
황제가 피식 웃으며 오만한 얼굴을 했다. 태생을 속일 수 없는 재수 없는 미소였다. 그래도 얼굴이 잘생겨서 재수 없는 것까진 아니었고, 여유가 넘쳐 보였다.
“신전.”
피식 웃으며 오만한 얼굴을 하던 황제가, 카넨의 입에서 신전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멈칫했다. 나 역시 신전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움찔했다.
근데 정말 신전에서 나를 노릴까? 나는 여자 주인공이 아닌데?
“신전에서 왜.”
“신전에서 성녀가 올 거라는 신탁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형이 내게 해 준 거잖아.”
“그랬지.”
“페리아가 그 성녀야.”
황제가 머리가 아파 온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
“그걸 어떻게 아는데.”
“마력 색이 달라.”
또 나왔다 마력 색.
“그거 말고.”
다행히 나와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황제가 다른 증거를 요구했다.
“아까 전에 화염구 날렸는데 안 다쳤어. 마력이 통하지 않아.”
“…너, 슬레인 자작한테 화염구를 날렸다고?”
“어. 옷만 타고 멀쩡하던데?”
그랬지. 그 덕에 나는 카넨의 방에 가서 깊은 대화를 나눴지. 몸으로 하는 깊은 대화.
또다시 상념에 빠지는 나를 황제가 현실로 불러왔다.
“자작.”
“네.”
“진짜로 저딴 새끼랑 결혼해도 괜찮나? 저렇게 막 화염구 날리는 새끼인데?”
“…저도 그게 고민이긴 했는데, 일단 저한테 마력이 통하지 않으니까 괜찮은 것 같아요.”
물론 카넨은 그 뒤에 형장의 이슬이 어쩌구 하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황제는 카넨보다는 상식적인 사람이니 내 목을 치진 않겠지?
“카넨이 이런 걸로 거짓말할 리는 없고……. 흐음… 신전에서는 너의 마력을 없애기 위해 슬레인 자작이 필요하겠구나.”
“응. 그러면 신성 기사단을 몰고 제국을 침입하려 하겠지.”
“그렇다면 자작, 카넨이 쓰레기 같은 짓거리를 하거든 신전에 가기 전에 먼저 나를 찾아오게.”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라는 뒷배가 생긴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니까!
“그럼 결혼식은 최대한 빨리 잡도록 하지. 결혼식에 대한 준비는 황실 차원에서 돕도록 하겠다. 그럼 일단 슬레인 자작은 시종을 따라가 보물고에서 갖고 싶은 것을 집어 오게. 결혼 선물이니.”
“아무거나 집어도 되나요?”
“하나만.”
예쓰!!! 성군이야. 성군! 하나라도 그게 어디야!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종을 따라 집무실 밖을 나섰다.
***
“카넨, 번거롭게 하지 말고 그냥 죽이는 것은 어떠냐.”
“나도 그렇게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형도 알지? 내 체질?”
황제는 카넨이 말하는 체질이란 것이 그가 마력을 회복하는 방법을 뜻한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모를 수가 없지.”
“그러면 형도 이해할 거야. 페리아랑 하고 나니까 마력이 유지되는 수준이 아니었어. 마력이 늘었다고. 확연하게.”
“그게 가능해? 얼마나?”
황제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천 명 이상의 공간 이동 마법을 써도 괜찮을 정도야.”
카넨이 공격 마법을 쓸 경우 그 마법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의 생명력으로 자신의 마력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간 이동 마법 같은 보조 마법은 어떠한 마력의 충당 없이, 그의 생살을 도려내듯 마력만 이용하는 마법이었기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보조 마법을, 심지어 대규모로 써도 괜찮을 정도라고 답한 것이다.
“죽이기엔 아깝군.”
“걱정하지 마, 형. 내게서 벗어나면 내 손으로 죽일 거니까.”
카넨은 위험 요소를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야 페리아의 효용이 워낙에 크고, 자신에게 협력적이니 내버려 두는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페리아가 신전으로 가서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이 되면… 그때는 지체 없이 그녀를 죽일 것이다.
형제는 형제인 모양인지 생각하는 것도 똑같았다.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혹시나 내게 와서 신전으로 보내 달라고 하면 그때는 내가 처리하마.”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카넨은 페리아가 황궁까지 가는 여지를 남겨 두겠지만, 황제는 아마 페리아가 오는 즉시 죽일 것이다.
“고마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도록 하고.”
“응.”
형제는 핏줄이라고는 서로밖에 없는 것을 알고 있기에 티격태격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몇 해 전, 그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그를 뒤쫓듯 아버지가 떠났다. 선황제는 자신이 떠날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형인 카르파에게 안정적으로 황위를 승계하고 며칠 뒤에 삶을 마감했다.
마지막까지 안하무인인 카넨을 걱정했던 그의 아버지였기에, 카르파는 카넨을 챙겨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고 잠시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그때 마침 돌아온 페리아가 문을 두드렸다. 이미 가장 중요한 페리아의 향후 취급에 관한 논의는 끝났기에 황제는 거리낌 없이 들어오라고 했다.
페리아가 화려한 티아라를 머리에 쓰고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이거 가져가도 돼요?”
하지만 그녀를 바라본 형제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머리에 쓰고 온 티아라는, 선대 황후가 결혼식 날 선대 황제에게 선물 받은 것이니까.
황제에게 선물 받은 것이라 선대 황후가 제일 아끼는 물건임은 말할 것도 없고, 황실에서는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 황후의 티아라를 결혼식에 빌려주는 것이 더없는 영광을 상징했다.
그런 티아라를 빌려 가는 것도 아니라 ‘가져간다’고 하니 카넨이 난감한 얼굴로 자신의 형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것으로 골랐나? 더 화려하고 더 귀중한 것도 많았을 텐데?”
그의 말처럼 보물고에 갔던 페리아는 눈이 돌아가는 줄 알았다.
현대에서 살아 있을 때 갔던 명품관 1층의 보석들을 다 모아 놔도 이것들보다는 많이 부족할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박물관에 가야 견줄 만한 물건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티아라를 보자마자 저건 꼭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이 페리아의 머리를 지배했다.
반짝이는 검은 보석은 페리아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중간중간 포인트처럼 붉은 보석에 매료됐다. 게다가 백금으로 만든 왕관이 고급스러움을 더해 주었다.
간단히 말해서, 비싸 보인다는 말이다. 물론 티아라보다 비싸 보이는 물건도 많았지만, 티아라는 연회 때 슬쩍 써서 권위와 재력을 자랑하기 좋을 것 같았다.
“이게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황제라는 입장상 자신이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페리아의 표정이 매우 밝아졌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페리아가 죽고 나면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카넨에게 눈짓하자 그도 알았다는 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결혼식은 언제로 할 것이냐, 카넨?”
“가능한 한 빨리. 신전에서 알아채기 전에.”
“일정을 잡는 대로 말하여라. 로제 궁은 비워 놓고 있으마.”
“좋아. 그러면 한 3일 뒤면 될 것 같아.”
형제들의 대화를 듣던 페리아가 연신 웃던 얼굴을 굳혔다.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티아라로도 눈감아 줄 수 없었다.
“저기요?”
형제들의 붉은 눈동자 두 쌍이 페리아를 비추었다.
“프러포즈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저는 아직 드레스도 안 맞추었는데…요?”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카넨의 물음에 페리아는 질색하며 황제에게 다가갔다.
“폐하, 카넨이 쓰레기 같은 짓을 해서 신전에 가기 전에 폐하께 왔습니다.”
“카넨, 이 모자란 것아. 설마 입던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치르라는 거냐?”
카넨이 뭐가 잘못됐냐는 표정으로 황제와 페리아를 봤다. 황제는 크게 한숨을 쉬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황제의 바로 옆에 있던 페리아는 이게 시정잡배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헷갈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는 고귀한 백금발의 황제가 위엄 있게 앉아 있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종을 울리자 시종이 들어왔고 카르파의 지시에 따라 시종이 시녀들을 데리고 왔다. 시녀들이 페리아의 치수를 재며 카탈로그를 보여 줬다.
“남작님의 체형을 보면…….”
“자작.”
들어올 때는 남작이었지만, 황제에 의해 자작으로 작위가 올랐다. 이를 황제가 정정해 주자 시녀들이 곧장 바꾸어 말했다.
“자작님의 체형을 보면 이 디자인과 이 디자인 그리고 이 디자인이 가장 잘 어울리십니다.”
“자작님의 눈동자 색과 머리카락 색을 보면 이 색깔과 이 색깔이 어울리십니다.”
“자작님의 외모에 어울리는 장신구는 황실에서 갖고 있는 것 중에서 골라야 할 것 같습니다. 금속을 제형할 시간까지는 남아 있지 않아서…….”
페리아는 브로슈어에 있는 디자인 중 하나를 손짓해서 고르고 색깔은 그녀들이 추천해 준 대로 했다. 권력의 맛은 참으로 달콤했다.
“장신구는 제가 지금 머리에 쓰고 있는 걸로 하고 싶어요.”
황후의 유품을 확인하자 시녀들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빠르게 갈무리했다.
“알겠습니다.”
시녀들이 순식간에 나갔다. 그들에게 주어진 3일의 시간 동안 드레스를 완성하려면 의복 및 자수에 관련된 모든 시녀들이 달라붙어야 가까스로 맞출 수 있을 것이다.
페리아와 카넨은, 황제가 연락을 하면 바로 오기로 약속하고 마탑으로 떠났다. 시녀들이 가봉을 할 때 부르기로 한 것이다. 펭귄의 극진한 보살핌이 그리웠던 페리아를 위한 조치였다.
***
황궁에 갈 때처럼 카넨의 마법을 통해 곧바로 마탑으로 돌아왔다. 창밖을 보자 어두웠지만, 아까 전에 한차례 낮잠을 자서 그런지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진짜로 카넨의 기라도 빨아먹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 체력을 설명할 수가 없다.
“황제 폐하도 알현하고 왔으니, 이제는 나한테 성력 쓰는 방법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카넨을 보며 묻자, 벗고 있던 망토를 펭귄에게 건네던 그가 나를 보았다.
“피곤하지 않습니까? 괜찮으십니까?”
“그러게요. 시간이 늦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아요.”
카넨이 슬며시 웃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펭귄은 그에게서 옷을 받으려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지 그를 졸졸 쫓아왔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아까 전에 알려 준 대로 내가 옷을 벗는 것을 도와줄 수 있습니까?”
그냥 옷만 벗고 끝나지는 않을 것 같은 기대감에 얼굴이 붉어졌다. 분명히 아까 전에는 그렇게 하고 또 하면 짐승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짐승이었나 보다.
“…물론이죠.”
카넨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해 보라는 듯 눈짓하기에 떨리는 손으로 아까 전에 카넨이 알려 준 대로 매듭을 풀어 갔다.
중간에 순서를 틀릴 것 같자, 카넨이 나의 손을 끌어가 바른 순서대로 옷을 풀어 헤쳐 갔다. 나의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따뜻했다.
상의를 모두 풀고 그의 탄탄한 가슴팍이 모습을 드러내자 알 수 없는 충족감이 느껴졌다. 내가 우쭐해서 그를 보자 카넨이 피식 웃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하의를 해 보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후 다음에는 틀리지 않고 해 보려고 그의 하의를 집중해서 보았다.
인생 2회차의 자존심이 있지, 옷 하나도 제대로 못 벗기는 사람이라니! 모조리 외워서 다음에는 단숨에 벗겨 버리겠어!
그러나 내가 아무리 보고 있어도 그는 나의 손을 붙잡은 뒤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페리아…….”
위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카넨이 갑작스럽게 입을 맞춰 왔다. 얕게 입을 맞춰 오는 그에게 살짝 입을 벌리자, 그의 혀가 안을 헤집으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혀를 뿌리째 얽어냈다가 혀 아래쪽의 민감한 부분을 핥아 내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카넨은 입술을 떼어 내 목덜미에 묻고는 붉은 울혈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당신이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면 내가 흥분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손끝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나서 고개를 내려 보니, 어느새 그는 하의를 전부 탈의하고 있었다. 마법사라는 것을 의미하는 로브는 그대로 걸치고 있으면서도 하의를 벗은 채 기둥을 세우고 있는 모습은 정말이지, 여러모로 훌륭했다.
아래의 사정은 카넨이나 나나 그다지 다를 바 없겠지만, 겉으로는 아직 옷이 풀어져 있기만 하지 그래도 입고는 있는 나와는 달랐다. 카넨이 잡고 있던 나의 손을 당기자 따뜻한 살덩이가 손안에 들어왔다.
“움직여 보십시오.”
내 손을 카넨이 감싸 쥐더니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핏줄이 돋은 그의 페니스를 부드럽게 훑었다.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 드레스에 있는 매듭을 풀었다. 그가 힘주어 드레스를 젖혀 내자 코르셋이 힘없이 구겨졌다.
카넨은 이제 목 주변뿐만 아니라 쇄골과 가슴까지 혀로 핥아 내리며 울혈을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의 손은 쉴 틈 없이 피스톤질을 했다.
그의 페니스 끝에서 말간 쿠퍼액이 나오자, 뭉툭한 귀두 부분을 엄지로 쓸며 쿠퍼액을 바르면서 다른 손을 가져가 기둥을 계속해서 쓸었다.
카넨의 입에서 드디어 뜨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페리아…….”
그의 기다란 페니스를 손바닥으로 빠르게 마찰하며 쓰다듬으니 그의 호흡이 더 가빠졌다. 참을 수가 없는지 카넨이 페니스를 나에게 잡힌 채 허리 짓을 하기 시작했다.
“좋아요, 카넨?”
“좋습니다. 이름 더 불러 줘.”
카넨은 손으로 나의 가슴을 뭉개며 움직였다. 그가 나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자 나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계속 카넨의 이름을 부르며 빠르게 손으로 그의 살 기둥을 쓸어내렸다. 몇 번이나 움직이던 그에게서 마침내 한숨과도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 크흑…….”
그의 검붉은 기둥의 핏줄이 터질 듯이 맥동했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허리를 거세게 흔들어 대던 그가 올라오는 절정에 몸을 굳혔다.
그러나 나의 손은 그의 기둥을 계속해서 피스톤질했다. 이윽고 터져 나온 하얀 백탁액이 붉은 드레스를 검게 물들였다.
그가 사정을 하는 중에도 손을 멈추지 않으니 그의 목에서 짐승이 우는 듯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강한 사정감에 허리를 떠는 그의 모습이 지독히도 외설적이었다.
나를 잡아먹을 듯이 섹스했던 카넨을, 손만으로 가게 하자 기묘한 고양감이 피어났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니 그가 ‘하!’ 하고 짧게 웃으며 그의 정액으로 얼룩진 드레스를 끌어 내려 침대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그는 언제 사정했냐는 듯 또다시 기둥을 세우고 있었다.
한번 주도권을 잡으니 놓치기가 아쉬웠다. 게다가 내가 그의 위에 올라탔을 때 얻었던 쾌락은 엄청났기 때문에 또 한 번 경험하고 싶었다. 카넨을 밀쳐 침대에 눕히자 그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봤다.
남아 있던 슬립을 벗어 던지고 이미 축축하게 젖어, 제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린 팬티를 벗어 내리려고 몸을 일으켰을 때 펭귄 인형과 눈이 마주쳤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까 얘가 있었지.
펭귄은 아주 자연스럽게 바닥에서 옷을 주섬주섬 주웠다. 내가 뻣뻣하게 굳어 있자 카넨은 손을 잡아 손가락 끝에서부터 입을 맞추며 올라왔다.
“왜 그러십니까? 신경 쓰입니까?”
“…움직이는 앤데 신경이 안 쓰이는 게 이상하죠.”
“살아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래도…….”
그는 나의 팬티를 잡아 내리고는 뒤에서 나를 끌어안아 당겼다. 발끝에 걸려 있던 팬티마저 던져 버리고는 그의 무릎에 앉혔다. 펭귄은 당연하게도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바닥에 떨어진 팬티를 주웠다.
“그래서, 지금, 나를, 이 상태로 두고, 그만두려고?”
등 뒤로 느껴지는 완전히 발기한 그의 것은 쿠퍼액을 계속해서 흘리며 꺼떡대고 있었다. 게다가 말을 끊어서 뱉는 그의 낮은 목소리는 절대로 내가 그렇다는 답을 못 하게 했다.
“그러면, 밖으로 내보내 줘요.”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그가 사납게 웃었다. 카넨이 무어라 중얼거리자, 펭귄이 손에 든 옷가지들을 의자에 걸쳐 두었다.
그리고 나가는 줄 알았는데, 펭귄 인형은 우리에게 가까이 왔다. 정확히는 나에게.
“어, 어, 얘 왜 이러는 거예요? 왜 안 나가지?”
아무리 생명이 없는 인형이라지만 움직이고 있으니 부끄러워져 양팔로 가슴을 가렸다. 그러나 부질없게도 펭귄에게 손목이 잡혀 펭귄 인형을 향해 팔을 뻗은 자세가 되었다.
“카, 카넨! 얘 왜 이러는 거예요? 고장 났나?”
당황스러워하는 내게 카넨이 뒤에서 큭큭 웃더니 다리를 벌려 앉았다. 자연히 그에게 기대어 앉아 있던 나의 다리도 벌어졌다.
카넨은 앞으로 손을 뻗어 한쪽 팔로는 허벅지를 잡아 고정하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나의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 음모를 헤치고 나온 붉은 속살에 손가락을 올려 조금씩 누르며 원을 그려 나갔다.
“그것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흥, 그럼, 나가라고, 읏, 으흣, 해 줘요.”
“왜 그래야 합니까?”
그가 애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음핵을 자극하면서 말을 하니, 여유롭게 웃으며 말하는 그와 달리 나는 숨이 차올라서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부끄러워서…….”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서.”
“으응, 읏, 보는 게… 하읏!”
저절로 뜨는 허리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게다가 손목을 잡힌 채로 하는 것은 처음이라 괜스레 더욱 흥분되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몰랐는데 나는 은근히 강압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아까 전에 저게 나를 보고 있을 땐 신나서 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 부끄럽다고 하십니까.”
“그, 그래도… 그때는 몰랐단 말이에요.”
그가 음핵을 두 손가락으로 번갈아 가며 누르면서 자극하자 강한 자극에 다리가 오므라들었다. 그러나 그의 다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 데다가 한쪽 허벅지를 잡혀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극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대체 얼마나 집중했길래 모르셨던 겁니까.”
카넨이 큭큭 웃고 있었지만 나는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펭귄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아읏, 보, 보내 줘요!”
“분부하신 대로.”
그의 말을 듣고 드디어 펭귄 인형이 나가나 싶어서 안도했으나, 그는 음핵을 괴롭히던 손가락은 그대로 두고 허벅지를 잡고 있던 손으로 질 안쪽을 쑤시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손가락이 두 개가 들어와 교성이 터져 나왔다. 들어온 손가락들이 교차하면서 움직였다. 게다가 클리토리스를 계속해서 마찰하니 눈앞이 점멸했다.
“하윽, 읏, 카넨, 아응! 제, 제발, 보내 줘요!”
“노력하고 있잖아.”
카넨은 낮게 웃으며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빠듯하게 벌어지며 내부를 자극하는 그의 손은, 나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지점만을 계속 공략하며 나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아, 아, 아앗, 하으으읏!!!”
펭귄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고개를 뒤로 꺾어 카넨의 어깨에 기대며 교성을 내질렀다.
한차례 절정이 왔음에도 그는 여전히 손으로 음핵을 누르며 자극했다. 자극에서 벗어나려는 건지, 더 큰 자극을 원하는 건지 모르는 나의 몸은 허리를 저절로 움직이게 했다.
“으응! 그, 그만, 아읏, 카네엔!”
계속되는 자극에 두 번째 절정이 찾아와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마구 비볐다. 그러고 나서야 손목이 자유롭게 되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절정의 여운에 그에게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내 이름 부르면서 가는 거, 좋습니다.”
카넨이 웃으며 말하는 것을 듣고 몸을 틀어 그의 가슴팍을 팔꿈치로 찍었다.
“윽!”
“내가, 싫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감당할 수 없었던 쾌락에 생리적으로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따지는 그 순간에 맺혀 있던 눈물이 타이밍 좋게 흘러내렸다.
“그, 그렇게 싫었습니까? 낮에 했을 때보다도 더 느끼던데.”
그거야! 기분이 엄청나게 좋았으니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처음일 때보다야 그다음이 더 좋은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가, 보내 달라고 했었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안 보냈어요?”
“가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내 눈앞에 펭귄이 있건만 이게 무슨 개소리지?
“아까, 당신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펭귄을 내보냈어야죠!”
“무엇을 보내라는 말이 없어서 그만. 미안?”
카넨은 능글맞게 웃으며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수 없어. 기분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테크닉이 별로였으면 이건 뺨 맞아도 할 말 없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펭귄이 상처를 받은 것 같은데…….”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어? 얘 왜 이래?
카넨이 뭔 개소리를 하나 싶어서 펭귄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진짜로 어깨가 처져 있었다.
심지어 인형인데 눈꼬리가 내려갔어?!
“뭐, 뭐야, 왜, 왜 이래요?”
“아마 당신이 계속 나가라고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당황해서 카넨과 펭귄을 번갈아 가면서 봤는데, 펭귄의 어깨가 실시간으로 처지고 있었다.
아, 아니, 그래도 섹스할 때 구경하는 건 좀 아니지 않니? 근데 왜 내가 죄책감을 느끼는 거지?
“미, 미안. 그래도 누가 보는 건 싫어.”
펭귄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면서 말하니 뒤에서 카넨이 큭큭거리는 게 들려왔다.
아니, 우리 펭귄이 이렇게 슬퍼하고 있는데 왜 웃고 있어?
차갑게 노려보니 카넨이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왜 웃어요?”
“페리아, 내가 펭귄이 마법으로 움직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했죠.”
불길한 느낌이 든다.
“웃는 표정. 화난 표정. 찡그린 표정. 슬픈 표정. 페리아 표정.”
카넨의 말에 따라 펭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어 갔다. 마지막에 ‘페리아 표정’이라고 하자 입을 벌리고 놀란 내 얼굴이 그대로 나왔다.
“…야, 너 나가.”
내가 깊은 빡침을 꾹꾹 눌러 담으며 말하자, 카넨이 어떻게 했는지 펭귄이 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쉬운 양 뒤를 한 번 돌아보는 것까지 아주 가관이었다.
“나 이런 장난 굉장히 싫어해요.”
“…알겠습니다.”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을 참고 말하자, 카넨이 그래도 아직은 눈치가 남아 있는지 긍정의 답을 뱉었다.
이걸 어떻게 복수할까? 어떻게 복수해야 잘 복수했다고 소문이 날까?
신전에 가서 카넨의 마력을 빼앗을 정도로 분노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와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은 1년밖에 안 되는 시간이 아까웠다. 게다가 카넨으로서는 생명력을 받는 행위니까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칠 수도 없었다.
‘고민되네…….’
이걸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하고 있는 나를 힐끔 본 카넨이 말을 붙여 왔다.
“페리아, 무슨 생각을 합니까?”
“어떻게 복수할지.”
“…….”
내가 마법만 쓸 줄 알았어도 그의 페니스를 잘라 가서 요긴하게 쓸 텐데. 나중에 성력 쓰는 방법 배우기만 해 봐라. 어차피 여자 주인공의 도움으로 결계를 안정화하면 굳이 그렇게 섹스에 목숨 걸지 않아도 되니까.
카넨이 알았더라면 차라리 죽이라고 말했을 생각을 했지만 나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거였으니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역시 잘라야.”
“페, 페리아!”
갑자기 카넨이 깜짝 놀라 내 이름을 불렀다.
아. 혹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었나.
그의 페니스에 고정되어 있던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카넨이 황급히 다리를 모으며 손으로 그의 페니스를 가렸다. 어차피 아직은 성력을 쓸 수도 없어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테니 자르지 않을 건데.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 페리아.”
“그건 당연한 거고요.”
단호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카넨이 나를 무릎에 앉혀 가슴을 문지르면서 나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애교 부리는 그와는 달리 나의 몸은 이미 식어 버렸다. 고작 손으로 한 번 하고 끝낸 것은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면 일단 성력 쓰는 방법부터 좀 알려 줘 봐요.”
그나마 그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내 말에 카넨은 군소리 없이 옷을 챙겨 입었다.
“…저는 조금 엄하게 가르치는 편인데,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날로 먹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약에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 ‘성녀’라고 불리고 ‘성력’을 쓸 수 있다면, 고생을 해서라도 성력 쓰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만약 성력을 쓸 수 있게 된다면, 나중에 여자 주인공이 나에게 성력을 쓰려고 해도 맞받아치는 것쯤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카넨의 마력이야 어차피 내게 안 통하니까 그렇다 치고.
“괜찮아요.”
***
안 괜찮았다. 진짜 신전 가서 성력 배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왜 괜찮다고 말을 한 건지 후회가 됐다.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도, 상스러운 욕을 대놓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고 가라앉았다.
결혼식 날까지 3일간 나는 진짜 수면은 6시간, 매 식사는 1시간, 수업은 3시간, 쉬는 시간은 수업 마치고 20분씩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그나마도 하루 4시간씩은 카넨에게 붙들려 정사를 치러야 했기 때문에, 가봉을 할 때 꾸벅꾸벅 졸았다.
하루 안에 쓸 수 있는 성력의 양이 정해져 있어서 실기를 무한정 할 수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습을 하지 않을 때는 고대어 공부에, 성력을 이용한 사례들이 적힌 책을 달달달 외워야 했다.
‘카넨 이 악독하고 잘생긴 놈… 예쁜 쓰레기…….’
내가 진짜 이 세상에 오고 나서도 공부를 해야 할 줄이야. 빙의한 몸이 귀족에 공무원이어서 행복해했었는데!
그래도 3일간 벼락치기한 성과가 있었는지 기본적인 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봤자 가시에 찔린 상처 치유나, 꽃 만들어서 뿌리기, 손 씻기나 세수할 물 만들기 정도지만.
“부인, 가실까요?”
카넨이 얼굴을 잘 활용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진짜 이 얼굴 때문에 참는다. 세계관 최강자에, 최고 미남이 주는 심리적 만족감은 확실히 굉장했다.
그나마 이 여유도 결혼식 덕분에 성력 수업을 쉬기에 생긴 것이었다.
그의 손을 잡고 로제 궁 정원으로 나가자 수백의 사람들이 자리를 메웠다.
“…소박하게 한다면서요.”
“가능한 한 소박하게 한 건데, 마음에 안 드십니까? 내쫓을까요? 집에 가라고 명령하면 됩니까?”
얘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처음부터 그러면 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아니에요. 일단 가죠.”
황족의 소박하다는 개념은 서민으로 살아온 기간이 긴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결혼식이 식순에 따라 진행되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끌려 다녔다. 이후로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게 빨리 끝나 버렸다.
그래도 처음이라 이렇게 우왕좌왕했지, 다음에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 차례는 마차를 타고 백성들 앞에 나가서 손 흔드는 것이었다.
마치 정치인이 된 듯한 느낌으로 우아하게 손을 흔들고 있자니, 카넨이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내게로 몸을 기울여 한마디 했다.
“성력을 연습한 효과를 보여 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꽃 만들기 잘하시지 않습니까.”
“지금? 여기서?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요?”
카넨이 사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꽃을 만들어 뿌렸다.
내 손에서 하얀 빛이 나오면서 꽃이 생겨나자 관중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서, 성녀님……?”
“에이, 설마. 마력 아냐?”
마력이라는 말이 나오자 카넨이 왕성 앞을 가득 메운 관중들 위로 대량의 꽃비를 내렸다.
곧 그의 손에서 나의 손에서 나온 것과는 다르게 붉은 빛이 나왔다.
그리고 다시 내 손에서 새어 나온 빛을 본 누군가가 성녀님이라고 외치자, 수많은 관중들이 성녀를 연호했다.
여기서 진짜 성녀는 내년에 와요!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자포자기하고 손을 흔들었다.
“페리아, 계속 나와 함께 있어 준다고 약속할 수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카넨의 물음에 짧은 고민 끝에 답했다.
“사실 제 꿈은 놀고먹는 거였는데, 그래도 된다고 하면요.”
원래 인생의 목표는 임대사업자였는데, 숟가락을 잘못 물고 태어나서 못 했다.
이번 생애는 그래도 귀족이니 가능하지 않을까 했는데, 집에 집사 한 명, 하녀 두 명이 있을 뿐 놀고먹지 못하고 그들의 월급을 주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했다.
그래도 마탑주이며 왕제의 아내인데 놀고먹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1년 뒤에 쫓겨나지 않는 것이 대전제로 깔려 있지만.
“저와 같이 시간 보내면서 삼시 세끼 맛있는 거 먹고 적당히 사치를 즐기는 거라면 가능합니다.”
“적당한 사치라면……?”
“5천 골드 정도라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매년 5천 골드면 별로…….”
그래 봤자 원래 내 연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저축 없이 소비한다고 생각하면 큰 금액이지만 ‘사치’라고 할 만큼은…….
“어떻게 사람이 매년 5천 골드밖에 안 쓰고 살 수 있습니까? 매달 5천 골드 정도는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족인데.”
황실 만세 만만세! 세금을 낼 때는 아깝지만 내가 쓴다고 하면 말이 달라지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게요!”
그러자 카넨이 짙게 웃으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게 뭐지? 싶은데 나의 손을 가져와 손등에 입을 맞추더니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어느새 수많은 군중들도 숨죽인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서 만든 건데,”
마력을 왜 다 쏟아부어? 갑작스러운 퍼포먼스에 놀라서 카넨을 바라보았다.
“이제 당신에게는 성력도 통하지 않을 겁니다.”
“대박.”
나는 그럼 이제 마력도 성력도 안 통하는 거야?
완전 사기캐 아냐? 대박인데?
“고마워요, 카넨.”
“고마우면, 한 가지 부탁해도 됩니까?”
“뭔데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면 해 줄게요.”
카넨이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마력을 다 쏟아부어서.”
“네, 그랬댔죠.”
“마력이 고갈됐습니다.”
“그렇겠죠.”
그래서 뭐, 말을 해!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카넨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점점 가까이 오더니 입을 맞추었다.
‘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뭐 하는 거니?’
내가 눈만 깜빡이고 있자 카넨이 입술을 느리게 쓸었다.
그동안 그와 밤을 보내며 습관이 되었는지 자동적으로 입을 벌렸고 그 틈새로 카넨의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
몇 번이나 혀를 얽으며 타액을 교환하다가 그가 몸을 뒤로 물렸다.
군중들은 세기의 로맨스라도 본 것처럼 환호했고, 시끄러운 와중에도 카넨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히듯 들려왔다.
“마력, 보충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군중들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황궁으로 돌아오자 황제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결혼을 하는 날이 다 오다니.”
“형보다 먼저 말이지.”
“그러게. 심지어 나보다 먼저 하다니…….”
평소 카넨의 이미지가 어땠는지 황제의 표정은 정말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라도 찾을 기세였다.
“너도 가정이 생겼으니, 작위라도 하나 줘야겠지. 앞으로는 하만 대공이라고 부르도록 하지.”
“그럼 저는 대공비인가요?”
“그렇다.”
오! 대공비! 남작에서 자작에서 대공비라니!
이제 카넨을 쓱싹하면 내가 대공이 되는 거네?
…그런데 마탑주를 내가 무슨 수로 쓱싹하겠어. 그래도 대공이나 대공비나 누리는 건 비슷비슷하니까, 뭐…….
“그러면 이제 피로연을 위해 연회장으로.”
“커헉!”
카넨이 갑자기 ‘컥’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입가에는 피가 흥건했다.
오늘이 바로 내가 대공이 되는 날인가! 아니, 그보다 원작은 어떻게 되는 거야?!
남주가 지금 죽으면 어떡해! 완결이야? 이제 하단에 커피 광고 뜨면 되는 거야?
아무렴 내가 원작 따위 개나 줘 버리라고 했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카넨! 무슨 일이야!”
카넨이 공중에 힘겹게 ‘마력’이라고 적었다.
굳은 표정의 황제가 조금은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는 내가 수습하도록 하지. 우선 로제 궁의 최상층을 사용하면 된다.”
결연한 표정의 황제를 보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를 뒤로한 채 어깨에 기대 오는 카넨을 데리고 복도를 걸어갔다.
“페리아아아.”
“좀 어때요? 괜찮아요? 죽는 거 아니죠?”
계단 앞에서 이 덩치 큰 카넨을 어떻게 부축해서 가나 고민하는 찰나에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뭐, 뭐야? 카넨?”
“네.”
“괜찮아요?”
갑자기 공주님 안기를 하다니, 다 죽어 가던 사람이 그래도 되는 건가?
“황족의 결혼 연회는 일주일이 관례입니다.”
“그래서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힘들 텐데 내려 줘요.”
카넨은 슬며시 웃더니 성큼성큼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저는 연회를 아주 싫어합니다.”
“…그래서.”
지금 연회에 참여하기 싫어서 피 토하는 연기를 했다… 이건가?
내가 정색을 하고 쳐다보니 카넨이 슬쩍 미소 짓고는 눈을 피했다.
생각해 보니 얘는 테라스로 나오기 직전에 마력을 보충한다면서 키스를 했다.
물론 몸을 섞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게다가 마법으로 공중에 ‘마력’이라고 적은 것을 보면… 마력이 진짜 고갈됐으면 그렇게 하지도 못하겠네.
“하! 지금 나 속인 거예요?”
“새신부가 연회에 가면 언제 돌아오는지 아십니까?”
지금까지 결혼식을 네 번 참가해 봤는데, 네 번 다 신랑은 첫날밤을 치르는 방에서 신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신부를 언제 보낼지는 피로연에 참여한 사람들 마음이라서, 신랑이 잘 때쯤 보내 주기도 하고 이틀은 붙잡고 있다가 보내기도 했다.
그걸 떠올리니 굳이 나도 연회장에 가고 싶은 마음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카넨이 나를 속인 것이 화난다! 열 받는다!
한참을 씨근덕대다 보니 벌써 문 앞에 다다랐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카넨이 몸을 붙여 왔다.
“계속 화내고 있을 겁니까? 저 마력 진짜 없는데.”
“…얼마나 남았는데요.”
“한… 이틀? 정도면 고갈되어서 죽을 것 같습니다.”
생글생글 웃는 카넨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니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진짜로 마력이 없기는 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봐줘야지.
이건 모두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인 거지, 절대 카넨의 얼굴에 설득된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죠.”
그가 씨익 웃으며 얼굴에 수차례 뽀뽀 세례를 내렸다.
카넨의 품에 안겨 뽀뽀를 받으면서 그의 인도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니 어느새 침대가 코앞이었다.
“이럴 여유는 있으신가 봐요?”
“…급하다고 건너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명색이 첫날밤인데.”
“뭐 어때요, 진짜 처음인 것도 아닌데.”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카넨이 짙게 미소 지으며 드레스를 태워 없앴다.
“…카넨, 마력 없지 않아요?”
“아마 제 수명은 이제 하루도 채 안 남았을 겁니다.”
“그러면 마력을 좀 아껴요…….”
내가 조금은 한심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하자, 카넨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저는… 분위기를 굉장히 타는 사람입니다. 첫날밤이라고 하니까 마음이 좀 급하네요. 그리고 어차피, 당신이 제 마력을 채워 주시지 않습니까.”
뭐야, 얘 이렇게 귀여운 사람이었어? 그러고 보니까 얼굴에 여린 홍조가 떠 있다.
“안 되겠다.”
내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하자 카넨이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예?”
“내가 원래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아닌데.”
원래 나는 연상이 취향이지만, Young, big, rich and handsome이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거지.
카넨은 오늘 결혼식을 위해 평범한 연미복을 입었다. 물론 옷이 평범하다는 거지, 그의 핏이 평범하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소싯적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 그에게 입을 맞추면서도 착실하게 단추를 풀어 나갔다.
나는 이 타이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좋더라.
가만있어도 돼. 오늘은 누나가 리드할게!
그에게서 입술을 약간 떼 내어 숨소리가 얽히는 가운데 말했다.
“옷, 태워 없애지 마요. 슈트 입은 거 잘 어울리네.”
“페리아도 드레스 입은 거 잘 어울렸습니다.”
“그럼 뭐 해요, 이미 사라진걸.”
당혹으로 물든 카넨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니 더 놀려 주고 싶었지만, 앞으로 할 것이 많았다.
“다음에 새로 사 줘요. 더 예쁘고, 더 화려하고, 더 잘 어울리는 걸로.”
“알겠습니다. 드레스쯤이야.”
나는 싱긋 미소 짓고는 그의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내렸다.
글자 그대로 오늘내일하고 있는 카넨이라 혹시나 안 서면 어떡하지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예의 그것이 바지를 내리자마자 튕겨 나오듯 곧추섰다.
“오늘은, 첫날밤이니까 기분 좀 내 볼까요?”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뺨을 쓰다듬으니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나는 그의 어깨를 밀어 침대에 앉히고는 단단한 허벅지를 벌리고 그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페, 페리아?”
“내가 뭘 할지 다 알면서, 왜 당황한 척하는 거예요.”
빳빳하게 선 기둥을 양손으로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한 손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양손으로 하자 그의 미간에 고운 주름이 생겼다.
“아니… 이럴 줄은 몰라서.”
“그러면요?”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묻고는 쿠퍼액이 흐르고 있는 그의 선단을 입에 담았다.
오랜만에 하는 것이 문제였는지, 그의 크기가 문제였는지 어색하기 짝이 없게 움직였다.
빙의 후 처음 하는 것이니 정말 오랜만이기는 했다.
“아흑, 페, 페리아……!”
이에 힘을 주지 않고 최대한 입 안으로 넣는데도 한참이나 남아 있는 그의 것은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크기에 턱이 뻐근했지만, 언제나 여유롭게 나를 잡아먹던 카넨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듣는 것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얼마 뒤 갑자기 그의 것이 부풀어 오르며 절정이 왔다는 것을 알렸다.
‘아, 맞다!’
나는 급하게 그의 것을 입에서 빼고 손을 멈췄다. 그러자 카넨이 원망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페리아… 왜, 왜……?”
“아니, 입에다 해도 마력 보충되는 거 맞아요? 안에다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입 ‘안’에다가 해도 됩니다.”
“아, 그렇구나. 저기 그럼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갑자기 떠오른 질문이라 조금 쓸데없는 것이긴 했어도, 지금이 아니면 물어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빠, 빨리…….”
“얼른 물어볼게요.”
다급한 건 카넨이지 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위험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 뒤로 해도 마력 보충되는 거예요?”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들은 거지?”
“아뇨, 이건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에요. 뒤로 해도 좋다는 건 아니에요. 거긴 그런 용도가 아니잖아요.”
“저도 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되지 않겠습니까?”
“아아~”
다행이다. 카넨도 뒤로 안 해 봐서. 뒤로 하는 건 아프기만 하고 기분이 좋지도 않다고 하는데, 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갑자기 팔이 잡힌 채 몸이 쑥 들렸다.
“페리아, 이만 저 좀 살려 주지 그러십니까?”
“내일까지는 괜찮다면서요?”
“목숨을 말하는 거라면 분명 그렇지만, 나오기 직전에 멈추는 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 정도면 제가 마력으로 가득해도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앉아 있던 그대로 나를 위에 올렸다.
“그래서, 복수할 거예요?”
“…페리아가 계속 저를 말라 죽게 만든다면.”
말라 죽는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적어도 나는 달뜬 숨을 내쉬는 카넨을 말라 죽게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황실의 일원이 되었을 뿐, 카넨보다 좋은 남자가 이 세계관에 또 있을까? 그래도 남주인데.
“흐윽!”
안에 찔러 넣기 위해서 윤활액이 질질 흐르는 곳에 끝을 맞추는 것을 보고 확 주저앉아 버렸다.
갑작스러운 삽입으로 가벼운 절정에 올랐다.
그에게서 입맞춤을 받을 때부터, 그의 것을 핥아 올릴 때에도 착실하게 젖어 내려간 그곳은 우악스럽게 찔러 넣은 카넨의 것을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카넨, 갔어요?”
눈가에 눈물방울까지 맺힌 붉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참, 괴롭히는 보람이 있게 생긴 얼굴이란 말이지.
내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S의 피가 날뛰는 느낌이다.
한 번 사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그라들 줄 모르는 그의 것을 품고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역시 위에 올라왔을 때는 더욱 깊숙하게 박혀 안쪽에 숨겨진 예민한 곳을 강하게 자극할 수 있어서 좋다.
그의 양쪽 어깨에 팔을 얹고 거세게 움직였다. 내가 가장 잘 느끼는 곳을 찾아 허리를 흔들면서 굵고 단단한 것으로 자극하니 금방 절정을 향해 갔다.
“아흣! 좋아아! 읏!”
하지만 또다시 내게 찾아온 것은 가벼운 절정이었다. 이곳에 온 뒤로 계속 카넨이 무자비하게 박아 주는 것에 익숙해졌는지, 혼자서 움직이는 걸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페리아, 아직 부족하지 않으십니까?”
카넨이 내 마음을 엿듣기라도 한 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꽉 잡으십시오.”
“꺅!”
카넨이 양쪽 다리 밑에 팔을 넣어 고정한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것도 잠시, 더욱 깊은 삽입에 눈앞이 점멸하는 것을 느꼈다. 하필이면 지금 꾸욱 누르고 있는 곳이 가장 예민한 곳이었다.
허리가 뒤로 꺾이며 고개를 젖히자 카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카, 카넨, 내려 줘요…….”
“글쎄요, 어떻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떡한다…….”
카넨이 웃으면서 발걸음을 떼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내벽을 쿵쿵 찧는 그의 것 때문에 자꾸만 입에서 교성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카넨은 그걸로 모자라서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신음을 내뱉는 나의 엉덩이를 붙잡고 조금씩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조금 움직이는 것 같은데, 내 입장에서는 매번 빠지기 직전까지 그의 것이 나왔다가 한 번에 쑥 들어오는 바람에 미칠 지경이었다.
“제, 제발…….”
“제발 뭐?”
…원작에서도 이런 장면이 있었다. 얼굴을 붉히고 있는 여주에게 자꾸만 수치스러운 말을 요구하는 카넨.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여주가 아니니까. 나는 그저 엑스트라일 뿐인데.
하지만 그러면 뭐 어때서? 그와 결혼한 것은 나고, 나는 내 손에 들어온 것을 놓을 생각이 없다.
‘여주는 어떻게 했더라… 부끄러워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을 보고 카넨이 귀엽다며 박아 댔던 것 같은데.’
“깊이, 넣어 줘요. 세게.”
일부러 여자 주인공과는 다르게,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했다. 그런데 그것도 카넨의 취향이었는지 그가 얼굴을 붉히면서 옆에 있던 화장대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화장대의 거울에 기대어 있는 내게 거세게 박기 시작했다.
“페리아,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까.”
더욱 얼굴이 새빨개진 카넨을 보니 왠지 귀여웠다. 어쩌면 여주에게 수치스러운 말을 시키는 카넨의 마음이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싫어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너무 좋아서 그렇습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페리아는 여린 몸을 엎드린 채 여전히 카넨의 것을 받아 내고 있었다. 방 안에는 온통 찌꺽찌꺽하는 젖은 물소리와 그녀의 새된 교성으로 가득했다.
“하악!!”
또다시 절정에 오른 페리아의 안에 그의 것을 묻어 두고, 내벽이 그의 것을 끊을 듯 조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정하게 되었다. 참으려면 참을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일주일은 이곳에 있는 그들을 건드릴 이는 없었기에 여유롭게 파정했다.
‘하아, 마력이 들어오고 있군.’
벌써 마력이 10분의 1은 찼다. 그가 지닌 마력의 양이 일반적인 마법사의 수십 배인 것을 생각하면 정말 경이적인 회복 속도였다.
그녀에게 파정을 할 때마다 성적인 충족감은 물론 마력이 차오르는 것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굉장했다.
페리아와 계약에 대해 처음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첫째, 결혼 전의 여자들은 신경 쓰지 않을게요. 결혼 전이니까.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딴 여자는 안 돼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이제 자신은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하는 시간과 정성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대체 왜 이 여자는 이제야 나타난 건지. 이전까지는 살기 위해서 다른 여자들과 몸을 섞었다면, 이 여자와 하는 행위는 엄청난 충족감을 주었다.
‘…형에게는 페리아를 죽이겠다고 말했는데…….’
아무래도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처음에는 그저 신전 놈들이 얼마나 배 아파할지 그 얼굴이 보고 싶어서 데려왔을 뿐인데.’
그런데 데려와 보니 페리아는 자신의 예상보다도 훨씬 매력이 있는 여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를 탐하고 나면 엄청난 양의 마력이 들어오기까지 했다.
그렇다 보니 그녀가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더라도 그녀를 죽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탑 안에 가둬 놓고 하루 종일 그녀를 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결혼 생활 동안에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아끼고, 애정하고.’
아무리 카넨이 공감능력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탑 안에 가둬 놓고 미칠 듯이 탐닉하는 것이 아끼고 존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게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때는 저 좋을 대로 누구도 오지 않는 곳에, 혹시 도망을 치더라도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그런 곳에 그녀를 가둬 놓고 둘이서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이혼하고 싶으면 그냥 이혼해 달라고 말씀해 주세요. 권력을 동원하거나, 군사를 동원하거나, 마력을 동원하지 마시고.’
하지만 지금의 카넨은 페리아가 황실의 이름으로, 신성제국의 군사를 동원하고 성력을 동원해서 이혼해 달라고 하더라도 싫다고 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페리아가 나에게서 빠져나가지 않을까.’
이 매력적이고 쓸모 있는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 되었다.
“아흣! 아! 카넨!”
카넨은 어느새 그녀를 제 품에 가둔 채 소중하다는 듯 꼭 끌어안고 있었다. 거칠기 짝이 없는 허리 짓을 하는 와중에도.
저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안겨 오는 하얀 팔이 만족스럽다.
“하아… 페리아, 너무 좋아.”
페리아는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듯했으나, 더 이상은 밀려오는 수마를 막을 수 없었는지 눈을 감았다.
결국 그들이 궁을 나선 것은 연회가 끝나고도 이틀이 더 지난 뒤였다.
궁에서 나오는 그들을 본 궁인들은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의 피부에 윤이 흐르더라며 아주 좋은 시간을 보낸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