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탑주의 가짜 아내가 되었습니다-1화 (1/11)

Chapter1

“아앙! 너무 커! 흣, 좋아!”

날씨가 너무 좋은 것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이런 날씨에 일을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걸까? 그도 아니면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업무 시간인데도 잠시 휴식을 취하겠다고 실천한 것이 잘못된 거였을까?

“당신이 이렇게 밖에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줄 몰랐어요, 레이첼.”

“아흑! 좋아, 아앙!”

내가 소설 속에 빙의한 지도 어느덧 1년 차……. 처음 빙의했을 때도 어리바리해서 시행착오가 많았는데 이제는 나름 베테랑 빙의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익숙하지가 않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생긴 일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면…….

근무지인 황성 도서관이 갖고 있는 단 하나의 장점은 맛있는 커피를 직접 내릴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온 정성을 다해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제대로 여유를 즐기기 위해서 뒤뜰에 찾아왔는데, 먼저 온 손님들이 혹여나 내가 적적할까 봐 배경음악을 깔아 주고 있었다.

분명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아서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마음 편하게 왔었다. 그러나 무방비하게 다가온 나와 그들의 거리가 좁혀지자, 어느 순간부터 내가 못 알아차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여자의 교성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당신이 좋아할 줄 알았으면 자주 나올 걸 그랬어요.”

“시, 싫어! 아아! 아앙!”

“싫다고는 해도… 평소보다도 훨씬 엄청나게 조이고 있는걸요.”

남자는 여자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게끔 여자의 골반을 양손으로 붙잡고 거세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이곳을 가득 채웠다.

벤치에 엎드린 여자는 드레스를 허리 위까지 올린 채 남자를 향해 엉덩이를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익숙하게 남자에게 허리를 흔들며 더욱 큰 쾌락을 달라고 요구했다. 남자는 여유롭게 웃으며 그녀의 몸속에 자신의 성기를 박아 넣고 있었다.

한 번씩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그의 검붉은 성기가 얼핏얼핏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제자리에 못 박혀 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동영상도 아닌 사람이 라이브로 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고, 섣불리 움직였다가 그들의 여흥을 방해라도 한다면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여자의 뒤에서 세차게 페니스를 찔러 넣고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북부의 냉혈 공작이라는 트라비안이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는 한없이 다정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지독히도 차갑다는데.

과연 소설 속의 냉혈 공작다웠다. 저 사람이 주인공인 외전을 보면 아내와의 관계를 방해하는 사람한테는 진짜 뒤끝이 장난이 아니던데… 들키면 어떡하지?

‘대체 왜 수많은 방을 내버려 두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냐고! 차라리 마차도 있고, 황궁 내 공작의 방도 있고! 좋은 곳 많잖아!’

“사, 상관없으니까, 빨리! 더, 더 해 줘!”

그러나 나의 마음속 외침과 엎드려 있는 공작 부인의 요구는 전혀 달랐다. 남자가 웃더니 페니스를 질구에 가까스로 걸릴 만큼 빼내었다가, 한 번에 안쪽까지 깊이 찔러 넣었다. 그러자 여자가 절정에 다다르며 비명을 지르듯 교성을 질러 냈다. 벤치를 짚은 팔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그들의 행위가 끝을 향해 갈 때쯤에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이곳에 계속 서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의 여흥이 끝나기 전에, 공작의 눈에 띄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 발짝 뒷걸음질 친 순간, 공작이 나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분명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나에겐 억만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안녕, 나의 즐거웠던 빙의 생활.

‘처음에는 공무원이라고 마냥 좋아했는데… 공작이 나를 가만둘 리 없으니 또다시 예전처럼 거지같은 상사를 위에 두고 개고생하는 인생이 시작되겠구나.’

그러나 나의 예상과는 달리 공작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눈앞이 어두워졌다.

‘내 미래를 보여 주는 건가? 어둡고 캄캄하고 그늘진 미래를?’

그러나 그것이 나의 미래라고 단언하기는 아직 일렀던 것인지, 그저 어두운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 나와 함께 공작의 괴롭힘을 받게 될 사람이 누군지 확인해 보니, 그는 공작이 차마 괴롭힐 수 없는 인물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현 황제의 동생이자 미친 자들의 성이라고 불리는 마탑의 주인이자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 카넨 드 바르칸이 나의 눈앞에 있었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그가 나의 입을 막았다.

‘쉿.’

뒤를 돌아 공작과 시선을 주고받은 카넨에게 공작이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저리 가라고 손짓했다. 카넨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공작도 그를 어찌할 수 없는 데다가 어지간히 자신의 아내와의 행위를 방해받기 싫었나 보다.

공작이 나와 카넨에게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거세게 추삽질하기 시작하자 공작 부인의 입에서 교성이 터져 나왔다.

“아앗, 제, 제발! 아앙!”

“제발, 뭐?”

“가, 갈 것 같아, 아흑!”

내가 안 보이도록 가려 준 카넨이 그대로 내 몸을 돌려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저 멀리에 다른 사람이 지나가는 것이 보일 정도로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방금 전 공작과 마주쳤던 곳은 농땡이 치기 최적의 장소였는데… 아쉽지만 두 번 다시 그쪽으로는 발걸음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인생은 무조건 평안하게 사는 게 최고거든.

위기에서 구해 준 카넨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황급히 떠날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카넨이 아니었다면 진짜 지옥 같은 생활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하필이면 걸려도 그런, 지 여자에게만 따뜻한 놈에게 걸릴 뻔했으니까.

“갚을 방법이야 다양하지.”

카넨이 내 어깨에 슬쩍 손을 얹으며 말했다.

“네?”

이건 그냥 성의를 표시할 때 쓰는 빈말이었는데요? 별로 안 친한 친구에게 ‘우리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하는. 그런데 그걸 진짜 갚으라고?

물론 갚을 만큼 큰일이기는 했다. 나의 평안한 삶을 잃지 않게 해 줬으니까. 약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카넨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자 일단 이야기나 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를 쫓아다니는 여자들이 많은지 단번에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내 방으로 가지.”

“여기서 대화를 나눠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너랑 하고 싶어서. 너도 하고 싶잖아? 아니면 여기가 좋아?”

뭘 한다는 거야,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거라면 물론 나도 지금 하고 싶기는 한데! 그런 장면을 보고도 그럴 마음이 안 들면 사람이 아니기는 한데!

그래도 너랑은 아니야! 여기서도 아니야! 그거 조금 걸어왔다고 실외가 실내가 되는 건 아니니까! 심지어 아까 전보다도 사람이 오갈 가능성이 높아!

“죄송한데, 저는 이제 업무를 하러 가야 해서…….”

내 어깨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끌어 내리며 도망치기 아주 적절한 핑계를 대었다.

그에게서 빠르게 도망가야 했다. 그는 여자 주인공을 만나기 전까지 아주 굉장한 난봉꾼이었다.

물론 여자 주인공을 만나고 나서 그녀에게 정착했지만,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아무리 이 동네가 남녀의 인권이 평등하다고는 하지만, 결혼할 때 한정으로 첫 경험을 하지 않았을 때는 프리미엄이 붙었다. 그런데 이걸 여주한테 갈 게 뻔한 남주에게 간단히 내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결혼을 안 한다면 모를까, 한순간의 치기로 손해 보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전쟁에서 최전방으로 자원해서 사람을 도륙하러 가는 미친놈이기까지도 했다.

“마탑주의 명령이야.”

“마탑주라고 하시더라도, 저는 행정처 소속이니 명령하실 권한은 없-”

“황족의 명령으로 바꾸지. 마탑주라는 말이 너무 익숙해서 잘못 나왔어.”

황족의 명령을 그렇게 막 써도 되는 것인가요!

황족의 명령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니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그렇다 치고, 대체 나를 왜 붙잡아 둔 것이지?

“저 말고도 다른 여자분들 많으시잖아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 봐?”

그럼요. 제가 이 소설을 다섯 번이나 재탕 뛰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말 안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카넨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앞으로는 다른 여자랑 안 할게.”

“아뇨? 굳이 왜요? 하고 싶으면 하세요.”

저는 남의 성생활에 참견할 만큼 꽉꽉 막힌 사람이 아니랍니다.

“에이, 아무리 나라도 아내가 있는데 다른 여자랑 할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야.”

아내가 있다고? 왜? 아직 여자 주인공은 등장하지도 않은 거 아니었어? 그럼 누구랑 결혼한 거지? 내가 알고 있는 그 소설이 아닌가?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카넨 드 바르칸의 외양 묘사와 일치했다.

“결혼, 하셨었어요?”

나는 깜짝 놀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여주가 등장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등장하지 않는 것인가, 이것이 말로만 듣던 평행세계인 건가, 남자 주인공이 바뀌는 건가 고민하면서.

“너랑 하려고.”

“예?”

내가 아직 이 소설 빙의 1년 차라 잘 모르겠는데, 혹시 이 소설에서는 결혼을 혼자서 할 수도 있나?

내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카넨이 쐐기를 박았다.

“너랑 결혼할 거라고.”

“저랑요? 왜요?”

“너, 다른 세상에서 왔지?”

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내가 이 소설에 빙의했다는 것은 부모님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알려져서 좋을 것이 단 하나도 없는 일이니까. 특히나 남자 주인공쯤 되는 메인 캐릭터라면 더더욱.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냐는 질문을 할 줄이야. 우선은 시치미를 떼어야겠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너, 바보야?”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아주 황족이라고 안하무인…….

“황족에 대한 기만행위는 목이 잘리는 걸 모르나 봐?”

…젠장, 빌어먹을 신분제 사회.

내가 황족이고 네가 남작이었으면 네 목이 잘렸을 거야!

현실은 쟤가 나한테 시비를 걸어도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귀족 사회의 말단인 남작이었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사실은 제가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떠 보니…….’라며 이실직고할 수는 없었다.

밝혀진다고 해서 좋을 것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믿을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카넨 드 바르칸 님이시죠?”

어이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마탑주’라느니, ‘황족’이라느니 제 입으로 말해 놓고…….

아, 그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마탑주였다.

점점 새하얗게 질려 가는 얼굴을 본 카넨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 내가 누구지?”

“…마탑주님.”

카넨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약속받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런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

“…아니요.”

내 어깨에서 내려갔던 손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잘 대답했다면서.

그래, 빌어먹게도 저 인간은 마탑주였다.

이 나라에서 마법과 그것을 위한 마력 운용에 가장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그래, 잘 알고 있잖아. 딱 보면 마력 색깔부터가 다른데 어떻게 모르겠어.”

마력 색깔은 또 뭡니까……. 다른 로맨스소설 보면 남자 주인공들한테 잘 안 들키던데!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안 들키던데!

이미 들켜 버렸으니 더 이상 잡아떼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런데 저랑 왜 결혼하시려는 건지…….”

“내가 얼마 전까지 참전해 있어서 몰랐는데, 돌아와 보니까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신기한 마력 색깔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구.”

“…….”

그놈의 마력 색깔은 진짜 뭔지. 원작에서는 이미 성력을 사용하고 있던 여자 주인공을 카넨이 발견했기 때문에, 마력 색이라는 것이 언급되지도 않았다.

그것이 뭔지 알았더라면 공무원이고 뭐고 다 때려치웠거나 도서관 내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신기해서 눈여겨봤는데, 마침 신탁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제가 알고 있는 그 신탁은 아니겠지요? 제발 아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다른 세상에서 성녀가 올 거라던데? 그 이야기를 딱 듣자마자 알았지. 너구나.”

젠장, 망할! 말도 안 돼! 카넨이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그 신탁이 맞았다.

카넨은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것처럼 즐거워하다가, 갑자기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그리고 나는 신전이 내 마력을 없애기 위해 성녀를 이용할 것이라는 정보 또한 갖고 있지. 성녀는 마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전해져 오니까. 감히, 주제도 모르고.”

실제로 원작에 나오는 성녀도 신전에 이용당하다가 진실을 깨닫고 카넨과 도피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신전에 대해 카넨이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이었다.

신전을 떠올리며 분노한 카넨에게서 으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그 성녀가, 내 손아귀에 있으면 어떨까? 신전 놈들이 꽤나 배 아플 거야?”

카넨은 개구지게 웃으며 나의 인생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는 성녀가 아닌데요?

그 신탁은 여자 주인공인 성녀를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마탑주님, 상식적으로 제가 만약 성녀라면 여기서 이렇게 일하고 있지 않겠죠?”

“덕분에 신전에서 아직 모르는 거겠지. 그 멍청한 놈들. 이렇게 마력 색이 다른데 그놈들은 왜 아직까지 못 찾았을까?”

카넨이 다시 즐겁게 웃으며 말하는데 내 속은 타들어 갔다.

‘대체 그 마력 색깔이 뭐냐고요…….’

카넨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왜 내가 성녀가 아니라는 선택지는 없는 건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스포일러를 싫어해서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요.”

“스포일러?”

“그런 게 있어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 중 하나예요. 여하튼, 다른 세상에서 온 여자가 저 말고도 또 있을 거예요. 그분이 성녀예요. 제가 아니라.”

“누구?”

카넨이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성녀의 이름을 말하려다가 입술만 달싹였다.

‘왜 지금은 원작 시작 전인가요! 여자 주인공이 아직 차원 이동해서 건너오지 않았잖아!’

성녀의 이름을 말해 봤자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일 터였다.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원망하며 외쳤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게, 아직 그분이 안 오셔서…….”

아니나 다를까 카넨은 나를 비웃었다.

“다른 세상에서 온 여자가 둘이나 될 것 같아?”

어흑, 어흑. 원작에서도 여자 주인공 한 명뿐이었지만, 제가 와서 둘이 된 것이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여기 어떻게 왔냐고 물으시면 저도 할 말은 없고요……. 그래도 이제 1년 정도 뒤면 정말 여자 주인공 오는데…….

‘여자 주인공에 대한 힌트라도 주시지 그러셨어요, 작가님!’

그러나 속으로 흐느끼는 나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작가님의 구원의 말이 아니라, 굵고 낮은 카넨의 목소리였다.

“나랑 결혼할 거지?”

“거, 거절해도… 될까요?”

“그러면, 내가 죽인 사람 수가 한 명 추가되겠지.”

즐겁게 웃던 카넨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결혼을 안 하면 죽는다니, 말도 안 돼.’

내 표정이 굳어 가자 카넨이 다시 싱그럽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이미 많이 죽여서 하나쯤 늘어도 티 안 날 테니까.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존중할게.”

“그 하나가, 저한테는 티가 엄청나게 많이 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내 목숨이 붙어 있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거니까.

“설마 내가, 나에게 해가 될 사람을 남겨 둘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카넨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거부하면 내 목숨은 사라질 것이라는 것.

그러면 적어도 멀쩡한 선택지를 두 개는 주고 물어봐 주지 그랬니…….

“…살려 주세요.”

나는 너무나도 절박하게 말했다. 이전 생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다가 이곳에 처음 빙의했을 때는 정말, 그동안의 고난에 대해 신이 보답해 주는 줄 알았다. 이곳에 와 보니 안정된 직장에, 귀족에, 괜찮은 외모까지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빙의한 지 1년 만에 남주한테 죽을 위기가 올 줄도 모르고.’

“내가 언제 죽인다고 그랬어. 선택하라니까? 나는 너의 선택을 존중해.”

“결혼을 하면 살려 두고, 하지 않으면 살해되는 저의 선택이요?”

그가 당연한 것을 물었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눈은 얼른 답을 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생명은 소중한걸요…….”

어렸을 때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서 배우지 않았나 보다.

생명, 그 무한한 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함부로 잔디도 밟지 말고, 꽃을 꺾어서도 안 되는. 그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

“내 마력도 소중해.”

지금 당장 결혼을 할지, 말지 결정하지 않으면 목숨이 사라지는 내가 제일 불쌍하구나!!

마음속으로 절규하다가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1년 뒤에 진짜 성녀가 나타날 텐데, 그래도 결혼하고 싶어요?”

카넨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의 손바닥 위에 붉은 구체를 만들어 냈다. 이렇게 가까이서 마법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신기하여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 커진 붉은 구체가, 그의 손에서 둥실둥실 떠오르더니 내게 날아왔다. 그리고 내 몸에 닿는 순간 펑! 하고 터져 버렸다.

“꺄악!!!”

“진정해, 일부러 천천히 보냈잖아. 놀라지 말라고.”

“지금 제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아도 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옷이 다 불타 없어졌다.

당황스러워 옷의 잔해를 끌어와 몸을 가리려고 했지만 옷이었던 것은 가루로 부스러질 뿐 턱도 없었다. 결국 두 팔로 중요한 부분만 겨우 가렸다. 심지어 오늘 입은 옷은 내가 아끼는 옷이었는데! 날씨가 좋아서 기분 내려고 꺼내 입은 비싼 옷이었다.

옷만 태우는 마법이라도 개발한 거야? 미쳤나 봐! 남주가 변태, 사이코, 또라이였을 줄이야! 작가님, 왜 이런 얘기는 안 적어 주신 거예요!

“왜 옷만 태운 거예요? 변태예요? 밖에서 섹스하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내가!”

“옷만 탄 것은 너한테 마력이 안 통하기 때문이야. 성녀 맞잖아, 너. 성녀 아니었으면 넌 뼈밖에 안 남고 다 탔을걸?”

“지금 나 죽이려고 한 거예요? 와, 진짜 인간망종 쓰레기…….”

감히 나를 죽이려고 해? 지가 황족이면 다야? 내가 성녀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라고? 내가 마력이 안 통했기에 망정이지! 나의 소중한 목숨을 함부로 빼앗으려고 하다니! 기본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미개한 사회가 문제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게 중요해요? 옷이나 새로 만들어 줘요!”

누가 지나가면 어쩌려고!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나는 결혼도 못 하고, 직장에 계속 다니기도 힘들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허울뿐인 작위에 이렇다 할 재산도 없는데 직장까지 없으면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그런 세세한 건 못하는데…….”

옷이 없어서 패닉에 빠진 내가 세게 말하자, 카넨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역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틀림없다. 이곳에서도 먹히는 것을 보니.

“심지어 무능력하기까지 해!”

카넨의 표정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그래 봤자 야외에서 발가벗게 된 나보다는 표정이 괜찮을 것이다.

그가 어깨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내 몸에 둘러 주었다. 몸집 차이가 워낙 크게 나다 보니 그의 망토만으로 몸 전체가 가려졌다. 그래도 움직이거나 바람이 불 때마다 혹여나 몸이 보일까 봐 걱정이 되어 양손으로 꼭 붙들고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심호흡한 뒤에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까운 내 커피는 고열로 인해 이미 증발하고 없었다. 그나마 도자기 컵인 덕분에 컵이 녹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내 심혈을 기울여 내린 커피가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저한테 마력 안 통하는 거 알았으니까, 저 결혼 안 할래요.”

나는 저 예쁜 또라이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내 것도 아닌 남의 것인데. 게다가 마력이 안 통하는 걸 알았으니 마탑주는 무섭지 않았다.

마력이 통해야 마법이 무서운 거지! 공격 마법도 조금 놀랄 뿐 안 통하는 것을 알았으니까 더 이상 무섭지 않…….

“너, 아까 전에 나보고 변태라며?”

카넨이 여전히 삐뚜름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여유 있게 물었다.

“벼, 변태냐고 물어본 거예요.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어요.”

물불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쏘아 댔는데, 그걸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다니. 당황스러움에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무능력하다고도 했었지?”

이건…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 그래도 마법도 안 통하는 마탑주 따위!

옷을 태우기만 하고 다시 만들어 주지도 않는데! 변태, 사이코, 또라이라고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그랬었…나요?”

“이 나라의 황족에게 말이야?”

…이런 제기랄! 이곳의 빌어먹을 신분제 사회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 허울뿐인 남작도 귀족이라고 세금은 많이 뜯어 가면서 귀족 사회의 가장 바닥에 있고! 백작 영애만 되었어도 집에서 부모님 등골 빼먹으면서 편하게 살았을 텐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카넨은 맑게 미소 지으며, 그 아름다운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었다.

“마력이 안 통해도 괜찮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들 수 있으니까.”

이 예쁜 또라이는 내가 그런 말을 안 했어도 했다고 주장할 놈이었다. 오히려 내가 하지 않은 말까지 덧붙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여자 주인공한테 집착할 때는 좋았는데, 나한테 이상한 방향으로 집착하니 좋기는커녕…….

심지어 그는 황족이고 나는 고작 남작이었으니 내가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 봤자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것이다.

이쯤 되면 상황 파악이 안 될 리가 없었다.

“…저, 저와… 결혼해 주세요.”

카넨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썩어 들어가는 표정의 나와는 달리 아주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주 탁월한 선택이야.”

‘빌어먹을! 말도 안 돼! 내가 유부녀라니!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온 내가 유부녀라니! 심지어 내 남편이 예쁜 또라이라니!’

불현듯 내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지금 내 남편이 될 사람이 또라이인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내가 지금 여자 주인공의 자리를 빼앗은 거잖아?’

원래 원작에서의 ‘페리아 슬레인’의 역할은 그냥 성녀인 여자 주인공이 도서관에 와서 카넨에 대한 자료를 찾을 때 그녀를 안내하는 것이었다. 엑스트라는 엑스트라답게 그저 카넨이 성녀와 눈이 맞았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그 소문을 입에서 입으로 옮겨 주기만 하면 되는 건데!

‘나중에 카넨이 나를 죽이려고 들면 어떡하지…….’

잘못한 것 하나 없지만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아니야. 난 당당해! 난 분명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말했어!’

그럼 성녀가 나를 죽이려고 들면 어떡하지……. 하지만 걔도 성녀가 아니라 사실은 다른 세상에서 살던 사람이잖아. 나랑 다를 바 없는. 설마 그런데도 나를 죽이려고 하겠어? 같은 세상에서 왔으니 추억팔이라도 하면… 되지 않을까?

“마탑주님.”

“카넨.”

“네?”

“부부 사이에 마탑주님은 너무 먼 것 같잖아. 이름으로 불러. 네가 나를 친밀하게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보는 대신관의 표정이 궁금하네.”

말을 마친 카넨은 굉장히 화사하게 웃었다.

언제나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이기에, 내 얼굴에 엄청난 그늘이 지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아니, 그래도 결혼도 하기 전부터 그러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이름 부르는 것이 뭐가 대수겠어? 하지만 카넨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 싶었다. 결혼하겠다는 이유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상대도 성녀와 결혼할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결혼식 날짜도 최대한 미루면서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주장하면 나중에 어느 정도 참작이 되지 않을까?

그런 나를 빤히 보던 카넨이 한마디 툭 던졌다.

“너 아까 전에 행정처 소속이라고 그랬지?”

“네.”

“바르칸 제국의 법률에서 황족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것도 황족에 대한 기만죄에 포함되는지 좀 알려 줄래?”

‘이 아름다운 새끼야!!!!!’

진짜 거지같은 것은, 기만죄에 포함되는지 유무는 황족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다. 즉, 정치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처벌은 황족의 마음……. 고작 사서인 남작 하나 처벌한다고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기진 않을 테니, 나는 빼도 박도 못하고 기만죄가 성립된다.

이것을 물어보는 이유는, 법률을 몰라서가 아니라 협박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다.

‘거리를 두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다니…….’

나는 그늘진 얼굴로 이를 악물고 애써 밝게 웃었다.

“황족으로 태어나지 않으셨으면, 증믈 으쯜 쁜흐싔으의……(정말 어쩔 뻔하셨어요).”

말을 할수록 어금니를 악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그러게, 황족으로 태어나서 다행이지?”

“네.”

만약 네가 황족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너는 목숨이 많이 위태로웠을 거야. 그러니 너한테 있어서는 다행인 것이 맞지!

“나는 운이 정말 좋아. 황족으로 태어난 데다가 아내에게 청혼도 받았잖아?”

“그러게요. 운이 정말 좋으시네요. 저는 나중에 남편 될 사람한테 어떤 청혼을 받을지 꿈꿔 왔던 것들이 죄다 무용지물이 되었는데.”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나를 집에 데려다주는 마차 안, 그곳에서 들려주는 진심을 담은 고백. 가문과 직위와 자신의 이름을 모두 걸고 나를 지켜 주고 싶다고 담담하게 전하는 목소리.

앞으로 평생을 함께하며, 만약 우리에게 힘든 일이 올지라도 서로 지탱하며 살아가자는 약속. 시간이 흘러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 같이 소소하게 손잡고 정원을 산책하며 함께하자는 소박한 미래.

뭐, 그런 것들을 꿈꿨는데!

‘하지만 이건 나의 바람일 뿐이었지……. 미래를 꿈꾸는 동안 행복했다…….’

현실은 1년 뒤에 나타나는 여자 주인공으로 인해, 진짜 성녀는 네가 아니었다며 어디 가짜 아내 행세를 했냐고 추궁당하겠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주장해 봐야 듣기 싫다며 그냥 황족 기만죄에 괘씸죄까지 적용되어 지하 감옥신세…….

‘이렇게 된 이상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면 깔끔하게 이혼해 줘야지.’

그리고 나는 평범한 남자와 해피 해피 라이프. 기사 만나는 것이 내 꿈이었으니 기사와 재혼해야지. 왜냐하면 운동하는 남자가 밤일을 그렇게 잘한다니까… 이혼하기 전에 미리 기사단이랑 친하게 지내 놔야겠다.

이혼 후에 황실 기사단장님 같은 몸 좋고 외모도 훌륭한 기사와 결혼해서 밤일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카넨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어 내 생각을 방해했다.

“어떤 건데. 말해 봐.”

“말하면요?”

“내가 해야지 뭐 어쩌겠어.”

“아니에요. 다음 남편한테 해 달라고 할게요.”

기사! 기사! 물론 지금은 황실 기사단장, 제국 기사단 부단장이 제일 좋은데… 그분들은 황족의 전 아내를 만날 만한 분들이 아니셔서 아쉽다. 이혼이 흠인 세상도 아닌데!

게다가 내 작위는 남작밖에 안 되는데, 저분들은 카멜리아 후작이나 에스텔 백작이 노리고 있어서……. 경쟁자들이 너무 쟁쟁해! 그럼 나는 눈을 조금 낮춰야지. 제국 기사단원이나, 트라비안 공작가 기사단 부단장 정도!

“다음 남편?”

“네. 1년 뒤면 진짜 성녀가 나타난다니까요. 그때 저는 두 분의 사랑을 응원하며 물러나 드릴 테니까요!”

나는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며 당당하게 말했다.

나중에 성녀가 나타났을 때, 내가 이런 말을 했었다는 것을 기억해 두렴!

“…만약에 1년 뒤에 진짜 성녀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쩔 건데?”

카넨이 목소리를 꾹꾹 눌러서 말을 한다. 화를 참아 내는 것 같았다.

‘이혼 얘기를 하니까 자존심이 상했나? 왜? 황족도 이혼할 수도 있지, 뭐!’

아리아나 공작님도 원래는 아리아나 공작 부인이었는데 공작님이 돌아가시고 공작이 된 데다가 원래는 그분도 황제의 고모이고, 재혼을 세 번 한 끝에 공작이 된 것이다.

게다가 스토리 전개상 성녀인 유리나가 나타나지 않을 리 없다. 카넨이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나타날 건데요?”

“그러니까,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라도 나타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으면? 그러면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데…….

내가 무어라 대답하지도 못하고 계속 고민만 하고 있자 카넨이 예의 그 악당 미소를 찬란하게 지었다.

“그러면, 그때는 네가 인정할 건가? 인정하고 나와 계속 결혼 생활을 지속할 거냐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예쁜 또라이가 어떤 캐릭터인지. 그의 말대로 계속 결혼을 지속할 만한 사람인지.

나한테는 변태, 사이코 쓰레기지만 여자 주인공에게는 한없이 다정했다. 심지어 신분도 황족! 돈도 많아! 황족이 아니더라도 마탑주라 권력도 엄청나!

‘게다가, 밤일도 굉장히 잘한다는 말이 소설 내내 몇 번이고 반복됐었지.’

다 괜찮은 이 남자의 한 가지 문제점이, 카넨의 설정을 만든 작가 또한 또라이였다는 점인데……. 카넨은 마력을 쓸 때마다 생명이 깎여 나가는데, 이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타인의 생명을 없애서 자신의 생명으로 가지고 오는 방법, 즉 살인. 그가 전쟁의 최전선에 나간 또라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둘째는 생명을 만드는 행위. 다시 말해 섹스. 자세히 말하자면 여성의 몸 안에 사정하는 것이었다. 원작에서도 본편에는 그런 말이 없었지만 외전에서는 키스를 해서 타액을 주고받아도 마력이 회복되긴 했다. 아주 미세해서 문제지.

그래도 다행인 점은 그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마력을 얻는 동안에는 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점? 그렇다고 마력을 안 쓰면 된다고 하기에는 그는 마탑주였던 데다가, 나라를 보호하는 결계 마법은 매일매일 24시간 돌아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여자 주인공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여자, 저 여자 갈아타 가면서 매일 하거나, 살생해야 했다. 여자 주인공의 성력으로 결계를 치다가, 도서관에서 찾은 자료를 이용해 영구 결계 마법을 써서 그가 해방되기 전까지는.

그의 캐릭터 설정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쁘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오히려 기대가 되기까지 했다.

‘누군가에게 엑스트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을 것인가, 권력 있고 돈 많은 미남과 즐거운 섹스라이프를 즐길 것인가 묻는다면 당연히 후자일 수밖에 없지 않겠어?’

솔직히 1년 동안 임시로, 가짜 아내가 된다고 하더라도 해 볼 만했다. 카넨의 말대로 여자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계속 지속할 의향도 있었다.

‘엑스트라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임신 걱정 없이 소설 속에서 섹스를 그렇게나 잘한다고 하던 카넨과 즐거운 생활이라니. 어딜 비교하겠어? 만약 그가 예쁜 쓰레기만 아니라면.

그래, 카넨이 예쁜 쓰레기라는 것이 문제다.

“조건이 있어요.”

“인정하는 조건?”

“네.”

“뭔데?”

예쁜 쓰레기가, 쓰레기가 아니라면? 그냥 예쁜 거잖아. 원작의 여자 주인공도 이 예쁜 쓰레기를 그냥 예쁜 또라이로 재활용해서 잘 썼잖아? 나라고 못 할 게 뭐가 있겠어?

하지만 아무리 성에 자유로운 나라라고는 해도, 내게는 이전 세계에서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 결혼 전의 여자들은 신경 쓰지 않을게요. 결혼 전이니까.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딴 여자는 안 돼요.”

“쉽지.”

쉽다고? 설마, 마력 회복을 위해 수도에서 학살을 벌이려는 것은 아니겠지?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돼요.”

카넨이 조금 고민하는 듯했다. 아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 그렇게까지 고민할 일인가.

“전쟁에 참전하시는 건 괜찮아요!”

말하고 나서도 표정이 이상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전쟁에 참전하라는 것은 목숨을 걸라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카넨은 세계관 최강자니까 죽지 않을 테니 괜찮겠지?

“전쟁에 굳이 갈 필요가 뭐가 있어. 네가 있는데.”

카넨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가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도 명백해 나도 모르게 눈을 피하고 말았다.

역시 19금 소설 남자 주인공의 퇴폐미는 남달랐다.

“둘째, 이혼하고 싶으면 그냥 이혼해 달라고 말씀해 주세요. 권력을 동원하거나, 군사를 동원하거나, 마력을 동원하지 마시고.”

“네가 말하는 1년 뒤에?”

“뭐, 그렇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이미 지금부터 얌전히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굳이 권력이나 군사를 동원해서 억지로 끌려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분명 1년 뒤에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았나.”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게 혹시 모르니까…….”

“이혼 안 해.”

뭘 믿고 그렇게 자신하시나. 나는 결혼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이혼하고 딴 남자 만날 건데. 어쩌다 보니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짧은 인생, 그중에서도 맘 놓고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그 시간 동안 별로인 남자랑 몇 년이나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중에 마음 바뀌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안 바뀌어. 이쪽은 마력이 걸려 있는 문제니까.”

“그, 그래요.”

그렇다고 칩시다.

“그 두 가지 조건만 지키고, 1년 뒤에 성녀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대로 살아가는 거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요.”

사실 내가 결혼 생활을 하면서 바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랑 알콩달콩 살아가는 것. 물론 신혼에야 그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뒤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는 하지만.

“결혼 생활 동안에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아끼고, 애정하고. 1년 뒤에도 당신이 이런다면 나도 인정할게요.”

나는 평생 사랑받으면서 살고 싶었다.

그전 삶에서 나는 오빠가 있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항상 오빠만 대우해 주었고, 나는 그저 집안일하는 사람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면서도 맨날 제사에, 명절에. 그때마다 오빠는 TV만 보고 엄마와 나는 허리 한번 펼 새 없이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오빠도 몇 번인가 도와주려고 했으나 할머니가 어디 남자가 부엌에 가느냐며 호통을 치셨다.

그래서 나는 이쪽에 빙의하고 나서 너무 좋았다. 남자나 여자나 인권이 동등했으니까. 지난 삶과 같은 삶을 또다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비록 이곳에서 나의 첫 결혼은 마탑주와 내 목숨을 걸고 시작하는 것이지만, 이번 생애는 죽기 전까지 그런 사람이랑 한 번쯤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말한 세 개면 충분한 거지?”

“네. 저 중에 하나라도 어기면 깔끔하게 이혼해 주세요.”

“좋아.”

의외로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약서로 남겨 주세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카넨이 허공에서 계약용 두루마리와 펜을 꺼내어 내가 말한 내용을 쓰고 보여 줬다.

“마탑주님은 저에게 바라시는 게 없으신가요?”

“많지.”

많기까지 해? 나는 나만 조건을 줄줄이 읊어 대서 예의상 물어본 거였는데.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일단 너는 신전에 못 가. 가더라도 나와 동행하지 않으면 안 돼.”

신전에서 나를 이용해 카넨을 죽이려고 할 테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겠지. 어차피 나는 이곳에 와서 신전을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상관없었다.

“그리고요?”

“내게 마력을 주는 것에 최선을 다해 줘.”

키스만 해도 마력을 줄 수 있는데 뭐, 그 정도쯤이야.

고개를 끄덕이자, 카넨이 씨익 웃으며 계약서에 내용을 추가했다.

내가 요구하는 조건 세 가지와, 카넨이 요구하는 조건 두 가지. 그 밑에는 조항의 수정 및 삭제는 합의 후 가능하다든지 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를 모두 확인한 뒤 혹시 몰라 뒷면도 살펴봤지만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뒷면은 왜 살펴본 거야?”

제가 살던 세상에는 이면계약이라는 게 있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냥 얼버무리며 웃고 말았다.

나의 간결한 사인 옆에 카넨의 화려한 사인이 적혔다. 마치 ‘나 남자 주인공이야.’라고 밝히는 것 같은 화려한 사인에 그만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나의 웃음은 카넨의 말 한마디에 끝장나 버렸다.

“그럼 이제 이름으로 부르고, 말 편하게 해. 아내잖아.”

“이름을 부르는 건 노력해 볼게요……. 결혼하고 나서부터 해도 되는 거죠?”

“아니, 지금 당장.”

“당장 하라고 하셔도, 방금 전까지 목숨을 위협하신 분께 어떻게 그게 되겠어요.”

“그전까지 목숨을 위협했지만, 방금 전에 결혼하자며.”

그거야 제 목숨이 위태로우니까 드린 말씀이고요…….

“…그건 그렇다 치고, 말은 못 놓겠어요. 황족에게 불경죄라고 그러면 어떡해요.”

“아냐, 안 그래.”

“정말요? 그냥 존대를 계속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카넨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 때마다 그의 기나긴 검정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이름을 부르는 건 친근감의 표시니까 그렇다 쳐도, 말을 놓는 거야 뭐, 기다렸던 바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를 불렀다.

“야.”

나의 몸속에는 내가 나고 자란 전투 민족의 혼이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몰랐겠지.

“어, 어? ‘야’라고 하기보다는 이름으로 부르지 그래?”

카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만 깜빡거리다가 이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입을 열었다.

“왜? 내가 야라고 해서 당황스럽니? 말 놓게 된 김에 말하자면, 너 한 번만 더 사람 죽이네 어쩌네 운운하기만 해 봐. 네가 말 편하게 하라고 했으니까 황실 기만 어쩌고 이런 거 다 안 되는 거 알지?”

“…….”

내가 카넨의 생각보다 말을 세게 했는지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서렸다.

지금이야 결혼 전이니 아직은 신분의 차가 있는 것이 맞지만, 결혼하면 부부가 평등하다는 게 대전제니까 이 정도로는 황실 기만죄에 걸리지도 않는다. 결혼하면 나도 황실의 일원이 되는 거니까.

황족에게 말을 못 놓을 줄 알았나? 안타깝게도 나는 신분제도 없는 곳에서 와서 전혀 신경 안 쓰는데!

“다시 말 높일까?”

나도 예의상 한 번은 물어봐 줘야지.

카넨의 표정을 보아하니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한 번이라도 편하게 말을 했으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긴 했다.

“한번 뱉은 말을 다시 되돌리는 것이 조금 그렇지만, 그러도록 해.”

“알겠어요. 그런데 왜 마탑주님은 저한테 반말하세요?”

카넨의 얼굴에 당황한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렇겠지. 누가 황제의 유일한 혈육에게 왜 반말하냐고 묻지는 않을 테니까.

“그야 나는 황족이고.”

“결혼하고 나면 저도 황족인데요.”

심지어 결혼하자고 요구하는 것은 카넨이었으니 당연히 말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결혼 안 했잖아.”

“그러면 마력 충전도 결혼하-”

“저도 경어를 쓰겠습니다.”

카넨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어를 쓰겠다고 말했다. 역시 마력이 걸려 있는 문제이니 곧바로 반응이 오는구나 싶었다.

원작에서는 여자 주인공은 물론 황제인 형에게도 반말을 했다. 그나마 황제인 형에게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만 황권을 위해 존댓말을 썼는데, 그런 카넨이 내게 존댓말을 하니까 듣기 좋았다.

“그냥 말 편하게 하셔도 되는데요.”

“그… 아까 전에 하신 말씀 중에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자고 하셨잖습니까.”

“말 좀 편하게 한다고 존중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

내 목숨 가지고 협박하던 카넨에게 장난을 치니까 굉장히 재밌었지만, 지금은 우물쭈물하는 카넨이 언제 또 손바닥 뒤집듯이 갑자기 ‘황족 기만죄! 죽어라!’ 할지 모르니 이제 슬슬 그만둬야겠다.

이러다 선 넘고 나서 카넨이 내 목을 친 뒤에야, ‘어이쿠 선을 넘었었네? 허허허.’ 할 수는 없으니까 알아서 조심해야지.

“그러면, 상호 존대할까요?”

내가 물어보자마자 카넨은 아주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얘가 예쁜 또라이만 아니었어도 엉덩이에 붙어 있는 꼬리가 좌우로 힘차게 움직일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럼 일단 저 옷 좀 만들어 주세요.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서 이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니, 돌아갈 필요 없다.”

“없다?”

“돌아갈 필요 없…습니다.”

“그냥 말 놓지 그래요?”

카넨이 고개를 좌우로 붕붕 저었다. 아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왜 돌아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다 저 짤려요.”

“누가 당신을 짜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카넨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잇새로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물론 마탑주님이랑 결혼하면 모를까, 저는 아직은 남작에 불과한걸요. 결혼하기 전에 도서관장님한테 짤리지 않을까요?”

이혼한 뒤에 제가 다시 이곳에 취직해야 할 수도 있어서 말이죠.

관료 취업을 위해 다시 개처럼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이전에 공부하던 기억은 빙의하기 전이라 흐릿했고, 잘 알지도 못하는 제국의 역사를 비롯한 시험 과목을 공부할 자신도 없었다.

“제가 직접 도서관장과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행정처 소속이라지만 도서관장한테 가서도 마탑주가 아닌 황족으로서의 신분을 운운하면서 괴롭힐 게 뻔했다. 도서관장님은 내가 땡땡이 치는 것도 어지간하면 넘어가 주시던 좋은 분이라 이런 예쁜 또라이한테 당하게 하긴 너무 심했다.

그러고 보니, 딱 좋은 제물이 있었다.

“제 바로 위 상사가 스텐베르크인데, 그 사람한테 말하면 관장님께 잘 전해 줄 거예요.”

“스텐베르크. 알겠습니다.”

낄낄낄낄낄낄낄낄! 커피 안 마신다고 해 놓고 내가 공들여 커피 내리면 그때 내 커피 가져가던 상사 놈! 자기가 할 일 은근슬쩍 나한테 미뤄 버리는 상사 놈! 너나 나나 남작인 건 똑같은데 말이지! 근데 이 몸은 지금 카넨을 움직이고 있다고! 낄낄낄낄낄낄낄낄! 어디 한번 당해 봐라!

권력의 맛은 참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페리아.”

“네?”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표정이……?”

“제 표정이 어때서요?”

“어지간한 악당도 울고 갈 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들켰네?

“그런데 마탑주님은 제 이름 어떻게 아신 거예요? 알려 드린 적 없는데.”

할 말이 없을 때는 말 돌리기가 최고지!

그렇다고 내가 ‘너를 이용해서 나의 상사 놈을 괴롭힐 생각이었단다!’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전까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석 달 전에 와 보니 마력 색이 혼자 다른 사람이 한 명 있더군요.”

또 나왔다. 그놈의 마력 색. 카넨이 말하는 석 달 전이라는 건, 아까 카넨이 마치고 돌아왔다던, 토파니 왕국이 지도에서 사라지던 전쟁이었나 보다.

“대체 그 마력 색이 뭐길래…….”

“마법사들은 대체로 색이 붉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하얀색에 금색이 섞여 있습니다.”

앞으로는 전혀 안 궁금할 것 같다. 들어도 모르겠으니 그냥 카넨의 눈에는 그런 세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덮어 두자.

“그럼 그냥 그때 말 거시지 왜…….”

“그런데 페리아.”

말하기 싫다는 분위기가 폴폴 풍기는, 전형적인 말 돌리기의 수법이었다. 계속 물어볼까 하다가 나도 방금 전에 말 돌릴 때 카넨이 넘어와 줬으니 슬쩍 넘어가 주기로 했다.

…사실 더 물어볼 만큼 궁금한 것이 아니어서 그런 게 더 크다.

“제가, 저의 이름을 불러 달라고 벌써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지 알고 있으십니까?”

“그… 글쎄요? 여러 번 말한 것 같긴 한데.”

“정확히 세 번입니다.”

“그래요?”

얘는 왜 이렇게 이름에 집착하는 거지? 마탑주나 카넨이나 예쁜 또라이나 다 너를 가리키는 것은 똑같은데?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런데 왜 너는, 아까 전의 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건데?

그의 악랄한 얼굴을 보고 지레 겁을 먹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호오…….”

카넨의 얼굴을 보자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물러선 나를 보더니 더욱 짙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나를 둘러멨다.

“꺄악!! 이게 뭐 하는 거예요!”

“마법이 안 통하니 별수 없지 않습니까.”

내가 무겁지도 않은가 성큼성큼 걸어가니, 얼마 안 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서 시체처럼 널브러져서 조그맣게 말했다.

“저보고 이제 고개를 어떻게 들고 다니라고 이러는 거예요……. 당신 아내 얼굴을 이렇게 팔리게 해도 괜찮은 거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저와 붙어 있으니 우리가 속해 있는 공간이 안 보이도록 하고 있습니다.”

나한테 마법이 안 통하니까 내가 속한 공간 자체에 마법을 걸어 버렸구나. 내가 이 동네에 온 지 꽤 됐는데도 불구하고 마법은 아직도 굉장한 것 같다.

“그러면 잘 붙어 다닐 테니 내려 주시는 게 어때요? 사실 이렇게 둘러메는 거, 배 눌려서 되게 아프거든요.”

오장육부가 단단한 어깨에 눌려 엄청난 통증을 자아냈다. 내 말을 듣자마자 카넨이 나를 내려놓았다.

“가까이 붙어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일 수 있으니 주의해 주십시오. 안 그러면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당신이 될 것 같아서.”

“…어떻게 그렇게 할지 방법은 묻지 않을게요. 별로 들어서 좋을 것은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카넨의 옆에 딱 붙어 섰다.

“잘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러게나 말이야. 굳이 따지자면 황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죄일까……?

“아마 저쪽 어깨부터는 보일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사람이 손을 내밀어 잡기라도 한다면…….”

‘그놈의 세상에선 빛이 사라지겠지.’라고 그가 말하지 않아도 이어질 말이 예상되었다.

나는 그에게 더욱 붙기 위해서 그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팔짱을 꼈다. 그러자 잠깐의 고민을 끝낸 카넨이 근처에 있는 아무 문이나 붙잡고 들어갔다.

그런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무리 봐도 1층은 아니었다. 적어도 5층 이상. 그럼 공간 이동을 했다는 건데… 나 마법 안 통하는 거 아니었나?

“저, 마법 안 통하는 거 아니었어요?”

“공간을 연결한 것 안으로 뛰어든 것이니 당신한테 마법을 쓴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수틀리면 사막 한복판이나, 드래곤의 레어 같은 곳에 나를 데려다 놓을 수도 있다는 거네? 나대지 말아야겠다…….

나는 깝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가늠할 수가 없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봐도 황궁 내는 아니었다. 못해도 고위 귀족의 집…이라고 생각한 순간 카넨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제 방입니다.”

“어디요?”

“마법사의 탑 안에 있는 제 방입니다.”

…혹시 미친 자들의 성이라고 불리는 그곳이요? 그런데 주변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마법사들이 사는 곳이라기에 온갖 기괴한 것이 모여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내가 마음을 놓기에는 아직 일렀는지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쾅쾅쾅!!!

“마탑주님! 오셨지요? 저 수식 한 번만 봐주세요!”

“제 거 먼저 봐주세요! 마탑주님 마력을 제일 먼저 느낀 건 저예요!”

“아니야, 나야!”

아무리 봐도 선생님을 귀찮게 하는 어린아이들처럼 느껴지는 쟤네들이, 그 ‘미친 자들’이라고 불리는 마법사가 맞겠지? 마탑주도 고생하는구나…….

“나가 보세요.”

“싫습니다.”

나는 그래도 나름 배려한다고 말한 건데, 카넨은 단호하게 대답하면서 오히려 문에서 멀어졌다.

“저 사람들 계속 문 두드릴 것 같은데요.”

“하아…….”

한숨을 내쉰 카넨이 문을 보고 무어라 중얼거리자 노크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뚝 멎었다.

“이따가 찾아오라고 한 거예요?”

“비슷합니다.”

카넨이 나를 보고 나른하게 웃었다. 표정과 분위기, 말투로 보건대 정중하게 ‘조금 뒤에 오세요.’라고 전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되는데.”

“제가 그래야 합니다.”

“왜요?”

“왜일 것 같습니까?”

카넨의 손이 내가 입고 있는 그의 망토로 향했다. 딸깍, 소리가 나자 망토를 고정하고 있던 버튼이 분리되었다. 자연스레 나의 발치로 그의 망토가 떨어지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 드러나게 되었다.

카넨의 상징과도 같은 붉은 눈이 타오를 듯한 정염을 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두꺼운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와 점막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치열을 샅샅이 핥으며 자극하는 것을 유쾌한 기분으로 즐겼다.

그의 혀에 나의 혀를 얽자 카넨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카넨의 목에 팔을 감고 끌어당기자, 그가 나의 엉덩이를 받쳐 안아 올렸다. 순식간에 그보다 높아진 시야가 마음에 들었다.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키스만 할 거예요?”

그와의 섹스를 기대했던 만큼, 애도 아닌데 키스만 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만약 소설에서 그와의 섹스가 끝내주게 좋았다는 묘사가 자주 나오지 않았다면 내가 그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을까?

그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가 방심하는 틈을 타서 대신전으로 들어가 기간제 성녀 행세를 해도 됐을 테니까. 그리고 여자 주인공이 오면 성녀 자리도 내어 놓고 카넨도 떠넘기고 나는 위자료를 갖고 사라져서 모두가 해피엔딩.

“그럴 리가.”

그가 낮게 웃자 묘한 색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침실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얼굴 때문인 건지.

카넨이 나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나도 그의 옷을 벗기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이 해괴하게 생긴 옷은 어떻게 벗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셔츠였다면 단추만 톡톡톡 풀면 되는 건데, 대체 이 옷은 뭐지?

카넨이 나의 손을 잡아 끌어갔다. 그에게 잡힌 나의 손이 매듭을 풀어 갔다.

“맞습니다. 맨 처음에는 옆구리 쪽에 있는 이 매듭을 먼저 풀어야 합니다.”

그저 매듭의 한쪽 끝만 당기면 되게끔 묶여 있어서 매듭은 순식간에 풀렸다. 하나의 매듭이 풀릴 때마다 카넨은 다시 나의 손을 끌어 가 단추를 풀기도 하고, 지퍼를 내리기도 했다.

그를 따라 손을 움직이면서 점점 그의 옷이 흐트러져 가는 모습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그리고 나의 하복부에도 열기를 전해서 나도 모르게 다리를 슬쩍 꼬아 허벅지를 비비적대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카넨이 매듭이 다 풀린 옷을 벗어 던졌다.

“하의는 다음번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더 이상은 못 참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아주 공감했다. 더 이상은 나도 참을 수 없었다. 전생에서 남자 경험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곳에 와서 지난 1년간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혼과 재혼에 관대한 세상이라고는 하나, 아직도 ‘처음’은 결혼 시장에서 크나큰 메리트로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나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러니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처음’을 단순한 쾌락을 위해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몰랐으니까. 물론 얕은 자제력 때문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지금까지 잘 지켜 왔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니 몸이 더욱 달아올랐다.

그가 나의 허벅지를 벌리고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멱살을 붙잡고 탈탈 털면서 ‘빨리 하라고!’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이미 상의를 탈의한 뒤라 붙잡을 멱살이 없었다. 그렇다고 머리채를 잡으면 흥이 식을 것 같았다.

그가 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키스 마크를 남기며 점점 내려갔다. 그리고 정성들여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한쪽 가슴은 손으로 쥐며 유두를 자극하고, 다른 한쪽은 축축한 혀로 유두를 빨아 당기면서.

아니,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니까?

고작 그 정도로는 내가 지금 원하는 쾌락까지 닿을 수가 없었다.

“빨리… 해 줘요.”

“정말이지 당신은… 옷을 벗기는 방법도 모를 만큼 순진해서 잘 모르시나 본데, 제대로 풀어 주지 않으면 다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냥 셔츠는 저 진짜 잘 벗겨요! 내가 순진하다니, 이게 몇 년 만에 들어 보는 소리야? 지금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혹시 누군가 말한 ‘그와의 밤을 잊을 수 없었다’는 말이, 너무 큰 분노로 인한 거였어?

내가 한쪽 다리를 움직여 그의 허벅지를 쓸었다. 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져서 또다시 그의 허벅지를 쓸었다.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 언제? 그런 말을 했었나?

나는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나지 않아 의아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그가 대체 무슨 오해를 했는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렇게 순진한 당신을 잡아먹어도 되겠습니까?”

응! 그럼! 완전 괜찮지! 원하는 바야!

하지만 나도 대외적인 이미지가 있는 사람이니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서 열기에 들뜬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랬더니 카넨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난감함을 담은 표정으로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나를 순진하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조금 죄책감이 듭니다…….”

“그럼 그만하려고요?”

어림없는 소리! 여기까지 와서 그만둔다니 말도 안 돼!

내가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카넨의 커다란 손이 내 눈을 덮었다.

“…최대한 안 아프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것을 듣자니, 아무래도 내가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했나 보다. 그렇다고 ‘좋아요! 이제 시작합시다!’ 할 수는 없으니 얌전히 누워 있었다.

말을 마친 카넨이 온몸에 잘게 입맞춤하면서 머리를 내렸다. 그의 숨결이 비부에 닿았을 때는, 나도 모르게 기대가 되어 움찔 떨었다. 그의 축축한 혀가 예민한 부위에 닿자 간드러진 목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아, 아응, 하… 아읏!”

내 손가락 이외에 다른 것이 닿아 본 적 없는 예민한 곳에, 능란하게 움직이는 그의 혀는 정말이지 강렬한 자극이었다.

음핵을 굴리는 혀가 교성을 자아냈고, 타액과 뒤섞인 애액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이미 쾌락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에 계속해서 더 큰 쾌락을 얻는 것을 기대했다.

“역시 멈추는 것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카넨이 입을 떼고 곧바로 흥분으로 움찔거리는 밀부에 기다란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남자 없이 보내던 1년 동안 외로움에 손장난을 친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나보다 훨씬 굵고 긴 손가락이 들어오자 낯설었다.

“원래 입으로 조금 더 해 주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의 망토가 벗겨지면서부터 기대를 해 왔던 나의 몸을 알고 있기 때문에 왜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그가 굳이 혀로 하지 않아도 흥건하게 젖어 있었을 테니까. 곧바로 삽입해도 될 정도로.

그럼 바로 넣어 주지, 왜 손가락을 넣냐! 감질나게!

나의 생각에 답이라도 해 주려는 듯 그는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말했다.

“고작 손가락 한 개 정도도 이렇게 빠듯하게 조이면, 나중엔 어떡하려고 그러십니까.”

밤기술이 끝내준다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게 그의 손가락은 나의 예민한 곳만 쿡쿡 찔러 대었다. 그러면서 다시 고개를 숙여 입 안에 음핵을 넣고 굴렸다. 그의 딱딱한 이가 음핵을 스칠 때마다 비명과도 같은 교성이 절로 나왔다.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강한 자극에 눈물이 맺혀 흘렀다.

“그, 그만. 더 이상은…….”

얼른 넣어 줬으면 좋겠다. 지금도 기분이 좋긴 한데, 그래도 직접 넣는 것만 못하다. 허리를 들썩이면서 그의 손가락을 더 깊이 받으려고 해도, 손가락은 손가락일 뿐이다. 빨리 안쪽을 쑤셔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허리를 들썩이면서 그만이라니요.”

카넨이 색정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니, 손가락 그만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자니까? 계속 손가락으로만 할 거야?

그러나 카넨은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내 손가락으로는 세 개 정도 넣은 것보다 더 굵게 느껴졌다. 그가 손가락을 제각각으로 움직이자 내가 혼자서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쾌감보다 컸다.

하지만 내가 전생의 기억이 없다면 모를까,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내게서는 계속해서 앓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의 손가락이 진퇴를 반복하면서 내벽을 긁어내리자 쾌락으로 인해 전생에서의 기억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이전까지는 손가락보다는 당연히 본게임이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부로 바뀌었다. 그가 손으로 하는 것이 전생에서 내가 했던 그 어떤 섹스보다 나의 쾌감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움직임을 반복하며 내가 느끼는 곳만 정확하게 찔러 대는 카넨은 정말, 손만으로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명성은 손으로 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점점 높아져 가는 목소리를 오케스트라의 선율이라도 되는 듯이 귀 기울여 듣던 카넨은 손가락을 한 개 더 찔러 넣었다. 이곳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굵기에 전율이 흘렀다.

“아앗, 앙, 하앙! 아읏!”

“너무 예쁩니다, 페리아. 지금 얼마나 조이는지 아십니까?”

세 개의 손가락은 각기 다른 부위를 자극했다. 흥건한 애액이 그의 손가락에 휘감겨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게 해 주었고, 카넨의 좆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채 쿠퍼액을 흘렸다.

결국 내가 파들파들 다리를 떨며 한차례 절정에 오르자 그의 손가락이 다리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절정의 여운을 즐기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일 것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이것이 끝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이제 슬슬 된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아프면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그만둘 거예요?”

그렇다고 하면 절대 말하지 말아야지. 이 몸으로는 처음인데 당연히 아플 것이다. 그래도 아픔은 잠깐이요, 앞으로 얻을 쾌락은 그의 아내로 지내는 1년 동안 즐길 수 있을 텐데 포기할 수는 없다.

“음, 그만둘 수 있으면?”

그가 조금은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심장이 직격으로 맞은 기분이었다.

절대로 아프다고 말하지 말아야겠다. 분명 카넨이 아까 전에 ‘그만두는 것은 무리’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만둘 가능성은 없겠다. 안심이야.

카넨이 침대에서 내려와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바지는 상의보다도 푸는 것이 복잡했다. 이미 나른해진 머리로는 기억하기 힘들 것 같아서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페리아?”

“네.”

“자면 안 됩니다.”

이 상태로는 잠도 자기 힘들다. 그저 손장난 한 번에 내가 잠을 잘 것이라고 생각한 거야? 아직 본편은 시작도 안 했는데!

그런데 카넨의 몸동작이 빨라진 것이 느껴진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매우 빨라지더니, 내 위에 그림자가 졌다. 그가 자신의 남성을 나의 예민한 부분에 비볐다.

그가 옷을 벗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나의 몸은 전혀 식지를 않았다. 몇 번 비비던 그가 아직 내 안이 충분히 젖어 있다는 것을 알고 중심을 맞추었다.

“페리아, 최대한 안 아프게 해 볼게요.”

나는 기대에 찬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바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대로 그와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버리고 말 테니까. 차라리 그 정도면 다행이지, 당장에 침대에 눕히고 그의 위로 올라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위에 올라탄 카넨의 머리카락이 내 몸을 간질이는 느낌이 좋았다.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이 나의 가슴께를 간질였다.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악!”

아니, 이게 뭐야! 나는 너무나도 엄청난 통증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말았다.

그가 귀두의 끄트머리를 넣는 느낌이 들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격통. 주먹을 넣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넨이 나를 끌어안으며 안으로 조금씩 넣기 시작했다. 그가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너무나도 아파 고통에 찬 신음을 냈다.

“괜찮습니까, 페리아?”

“…괜찮아 보여요?”

나 역시 그의 어깨를 꼭 붙잡고 그를 받아 냈다. 그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내가 아픈 것에 비하면 이 정도쯤이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속이 빠듯하게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카넨은 내가 익숙해지길 기다리는 것인지 가만히 있었다.

이제 이 엄청난 굵기에 익숙해지고 나면 쾌락이 동반될 것이다. 아픈 만큼 보람이 있기를 바라며…….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빨리 움직여 줘!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도 없다!

내가 카넨이 허리 짓을 하며 피스톤 운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그는 더욱 밀고 들어왔다.

아니, 대체 어디까지 밀고 들어오려고 그러는 거야?

“…다 들어온 게 아니었어요?”

“그럴 리가.”

카넨이 웃음기를 숨기지 못하며 말하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후우, 페리아.”

“으으… 네.”

“몸에 힘 좀 빼 주시죠. 나를 미치게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연히 아프니까 힘이 들어가지! 와, 진짜 너무 아프네? 어떻게 이렇게 아플 수가 있지?

카넨이 나의 이마에 몇 번이나 잘게 입을 맞추고 한쪽 손에 깍지를 끼었다. 그의 행동에 마음이 놓이며 조금씩 몸에 힘이 빠지자 그가 얕게 추삽질을 하며 살짝살짝 진퇴를 반복했다. 그가 점점 깊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고통 사이에 점점 쾌감이 섞이기 시작했다.

“탑주님, 이제…….”

“페리아, 여기에 왜 오게 됐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

이제 괜찮은 것 같다고 말하려던 나의 말허리를 카넨이 무참히 끊었다.

“…이야기하자고?”

“무슨 이야기였는지는 기억 안 나는가 봅니다?”

“어… 그게.”

내가 뭐였는지를 떠올리며 고민하고 있자, 카넨이 갑자기 안으로 그의 단단한 살 기둥을 확 찔러 넣었다.

“아읏!”

“이름. 제 이름 말해 보십시오.”

카넨은 이름을 핑계로 자신의 욕심껏 허리 짓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조금 나아졌기에 망정이지, 처음부터 이랬으면 정말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통증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에 확 쑤셔 넣는 것도 괜찮네. 좋아, 아주 만족스러워.

“제 이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페리아.”

카넨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달라며 허리 짓을 하자, 괜히 더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싫었다. 지금이 너무 좋아서. 이름을 불러 주면 다시 살살 할까 봐.

뭔가 그가 나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좋아서. 내가 사랑받는 기분이 드니까. 내가 말할 듯 말 듯 망설이고 있자 그가 더욱 거세게 추삽질을 했다.

카넨은 나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지점만 정확하게 자극했기 때문에 통증은 곧 느껴지지 않고, 쾌락만이 남았다.

“으, 흐읏!”

그가 손가락을 안에 넣어 움직여 절정에 달할 때만 하더라도 그가 유명한 것은 손으로 하는 테크닉 때문인 줄 알았는데, 손은 정말 ‘전희’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인데도 이렇게까지 만족스러운 섹스를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못했었는데, 정말이지 너무나도 훌륭했다.

그가 나의 가슴에 손을 얹고 주무르는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그전에 혼자 할 때는 물론이고 이곳에 오기 전에도 가슴으로는 전혀 느끼지 못했었는데,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입에서 자연스럽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손가락 사이에 유두를 끼워 가슴을 주무르면서도 간혹 손가락 끝으로 튕겨 자극하기도, 혀로 핥아 내어 빨아들이기도 했다. 전생에서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그가 가슴을 자극할 때면 나의 안쪽 근육이 그를 더욱 움켜쥐기 위해 조여 대었다.

“페리아는 가슴을 만져 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으읏, 조, 좋아, 아앗, 좋아요.”

“솔직하니까 좋군요.”

나도 내가 그런 걸 좋아하는 줄 몰랐지만,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밑을 자극하면서 위를 만져 대는 것은 엄청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을. 카넨의 잘생긴 얼굴이 후후 웃으며 말을 하니 자연스레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내게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지만, 실제로 카넨은 내게 말 한마디 할 여유를 주지도 않았다. 그저 가쁘게 숨을 쉬고 교성을 내지르며 좋다는 말만 반복해서 할 수 있었다.

“페리아, 페리아.”

귓가에 감미롭게 나의 이름을 속삭이는 목소리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쾌락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내게 카넨이 숨 돌릴 틈을 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입술에 자국을 남기는구나 싶었지만, 계속되는 쾌락에 키스 마크를 남길 때 특유의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카넨이 내게 주는 ‘숨 돌릴 틈’은 말 그대로 약간의 여유를 줄 뿐이지, 그가 내게 주는 쾌락은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계속되었으니까.

“아, 아, 아읏, 카, 카넨. 아앙!”

“또 이름 불러 보십시오, 페리아.”

“카넨, 아응, 읏, 하윽!”

나는 잠깐의 틈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이름을 불러 주면 더 약하게 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카넨은 이전보다도 훨씬 거세게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것이 더욱 단단해지며 부풀었다.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읏, 으응! 하악……!”

하지만 나의 시야가 점멸하며 절정에 오르는 것이 먼저였다. 카넨이 몇 차례 추삽질을 더 하더니 그의 것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나의 위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내게 주는 무게감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섹스는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카넨이 밤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의 얼굴, 테크닉, 체력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으니까.

“페리아…….”

아래에서 자신의 것을 빼낸 카넨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라도 할 것처럼 밝은 얼굴로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마력이 충전돼서 기분이 많이 좋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캐릭터 설정을 생각해 보면 매일 이런 밤을 보내게 될 텐데, 전희도 본편도 후희도 완벽하니 1년을 아주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1년 뒤에 그와 헤어지면 밤이 너무 외로울 것 같았다. 이만큼 밤에 훌륭한 남자가 또 있을까. 잘해 주었다가 나중에 헤어질 때 마력을 담아 버튼만 누르면 움직이는 딜도나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카넨.”

카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실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느낌에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후희도 받을 만큼 받았으니 그의 품 안에서 체온을 느끼다가 잠에 들면 정말 꿀 같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던 카넨이 마지막으로 나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떨어지려고 하자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입을 맞추었다.

내가 후희를 해 주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나의 행동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가 굳은 것이 느껴졌다. 놀린 것 같아 즐거워 팔을 풀며 웃었다.

“카넨, 안아 줘요.”

밖은 여전히 환했으나, 나는 아직도 쾌락이 채 가시지 않아 나른했기 때문에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밖이 밝은 낮이면 무슨 상관이고, 어두운 밤이면 무슨 상관인가. 졸리면 자는 거지.

하지만 카넨이 예상과는 다르게 나의 어깨를 안아 일으키더니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카넨의 두꺼운 허벅지를 사이에 두고 다리를 벌린 채 그의 위에 앉게 되니, 안에 있던 적나라한 정사의 흔적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아무리 뻔뻔한 나라도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 몸에서 빠져나간 백탁액이 다시 그의 허벅지를 적시고 있었으니까.

“페리아.”

나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 있는 그 때문에 그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갈 수가 없었다. 얼른 그에게 놓아 달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카넨이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빨랐다.

“네?”

“당신은 처음이고, 순진해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배려해 줬는데.”

워후, 이게 배려해 준 거였어? 배려해서 이 정도면 배려 안 하면 대체 얼마나 엄청난 거지?

기대감에 몸이 떨려 왔다. 실상은 전혀 순진하지 않지만, 순진한 여자 취급 해 주는 것도 기분이 꽤나 괜찮았다.

나의 실체를 알고 나면 그가 얼마나 놀랄까 두근거리는 마음이 들었으니까.

그래도 한 번에 밝히진 말아야지. 그러면 재미없잖아?

나중에 밝히게 되면 얼마나 놀랄까.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당신이 내게 안아 달라고 한 거였으니까요.”

언제 다시 단단해졌는지 모를 그의 것이 속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별다른 애무를 하지 않았어도 아직 안에 흥건하게 있던, 누구에게서 나온 건지 모를 액체들에 뒤섞여 부드럽게 들어갔다.

“아읏!”

카넨이 나의 허리를 잡아 내리자 밑에서부터 꿰뚫리는 감각에 진저리쳤다. 더 이상은 들어갈 것 같지 않아 힘을 주고 버티려고 해 봤지만, 그가 얕게 쳐올리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그를 받아들여야 했다.

“으, 흐으… 카넨…….”

내가 위에 올라앉은 자세였기 때문에 완전히 앉게 되었을 때는 조금 전에 누워 있었던 자세보다 훨씬 더 깊이 들어왔다. 그의 것이 안쪽 끝에 닿는 부분이 정확하게 성감대였는지, 앉는 것과 동시에 갈 뻔했다.

“하윽, 페리아. 아까 전보다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밑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더 이상 그가 파정한 백탁액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애액이 뒤섞여 흐르는 것은 그의 허벅지를 지나 시트까지 적셨다.

카넨이 쳐올릴 때마다 몸의 중심이 흔들려 결국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팔에 맞닿는 그의 단단한 어깨,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밭은 숨소리, 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내부를 긁어내리며 다시금 빠듯하게 들어가는 그의 굵은 페니스까지.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그의 것을 조여 대는 것이 나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크윽!”

쾌락에 들떠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슬쩍 허리를 틀었다. 그러자 카넨과 나의 입에서 동시에 물기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고 싶었던 과거의 나는 이미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은근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그를 자극하자,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참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귀여워 손을 들어 카넨의 입술을 쓸자 그의 윗니가 입술을 놔주었다.

허리를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니 안 그래도 그가 나의 가장 기분 좋은 곳만 자극을 했는데, 허리를 움직이며 더욱 깊이 들어가게 되어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허리를 조금씩 틀며 움직일 때마다 그가 밭은 숨을 내뱉었다.

“하아, 페리아…….”

그가 흘러 내려오는 애액을 손가락에 묻혀 클리토리스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안을 짓쳐 대니 눈앞에 밝게 빛이 터졌다.

“앗, 아앗, 카넨! 아읏, 안 돼요!”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뇌가 쾌락에 녹을 것만 같았다. 내가 위로 올라가도, 밑에 누워도 좋았다.

카넨은 내가 절정에 올라도 무자비하게 나의 예민한 곳을 자극해 왔다. 내가 세 차례나 절정에 오른 뒤에야 안에 파정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그의 몸에 기대어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골랐다. 몸이 흐물흐물 녹아 없어진대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가 멍해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이 만족스러웠다.

“페리아.”

“네에…….”

그가 나의 몸을 안고 침대에 누웠다. 몸 위에 올라탄 그가 나의 뺨을 손으로 쓸었다. 살짝 눈을 떠 보니 그의 붉은 눈동자가 타오를 듯이 빛나고 있었다.

“페리아, 아까 전에도 말했지만.”

무슨 말을 했더라? 우리 만나서 섹스하기밖에 더 했나요?

“배려는 이제 하지 않을 겁니다.”

***

오전부터 시작된 그와의 정사는 해질 무렵까지 이어졌다.

그전에도 오랫동안 섹스를 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운동하는 애들은 꽤나 길게 했으니까. 그러나 체력이 좋아 장시간 하는 애들은 대개 테크닉이 부족했다.

그런데 카넨은 그 긴 시간을 하면서도 테크닉까지 받쳐 주니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는지 셀 수가 없었다.

“이제 더는 못 해요…….”

“한 번만…….”

“진짜로.”

결국 나른해진 몸이 기절하듯이 잠든 후에야 카넨이 놓아주었다.

그러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잠에서 깨어 무거운 눈꺼풀을 올리니 카넨의 얼굴이 보였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침대를 덮고 있었다. 그 와중에 보이는 붉은 눈동자는 남자 주인공이라 그런지 참 잘생겼다.

밤일을 잘하니까 카넨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어차피 나중에 다른 여자에게 가면 뭐 어떤가. 연애하다 보면 헤어지기 마련이고, 결혼해서도 헤어지기 마련인 것을. 그냥 만나는 동안에 잘 즐기면 되는 거지.

여자 주인공으로 갈아타기 전까지는 내 거니까 그동안 뜨겁다 못해 불타는 밤을 보내면 되겠지. 마음 같아서는 여주를 만난다 하더라도 종종 밤에 만나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캐릭터 설정상 여주만 좋아하니 그건 힘들겠지. 너무 아쉽다.

“잘 잤습니까?”

“네.”

엄청 잘 잤지. 침 흘리거나 코 안 골았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아주 푹 잤다. 게다가 평소보다도 개운한 느낌이 드는 게, 내가 카넨의 체력을 빨아먹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배고프지 않으십니까? 식사하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만 간단하게 먹고 출근했던지라, 지금까지 커피 한 잔… 그조차도 반 이상은 카넨이 증발시켜서 거의 빈속이나 다름없어 배가 고팠다.

“기왕이면 맛있는 걸로 주세요.”

카넨이 나를 마주 보며 웃었다. 아니, 웃지만 말고 먹을 걸 달라니까……?

그래도 내가 굶은 시간에 비해서 아직 배가 엄청 고픈 것도 아니라서 늘어져서 누워 있었다. 남녀가 이불 속에 헐벗고 누워 있는데도, 아까 전의 섹스가 너무 만족스러웠던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하고 지금 또 하고 싶으면 그건 짐승이지…….’

똑똑, 문을 두 번 두드리는 소리에 카넨이 들어오라고 했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체로 있었던지라,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페리아.”

내가 아무리 뻔뻔하다고는 하지만, 남의 앞에서 헐벗은 몸을 보여 줄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는 않다. 대체 왜 들어오라고 한 건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욕했다.

“페리아, 이러고 있는 것도 아주 좋지만 잠깐만 뒤돌아 보십시오.”

너 같으면 돌 수 있겠니? 아무리 남편 될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 품에 안겨서 다른 사람을 쳐다보는 게?

나는 카넨의 말과는 반대로 그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아예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카넨이 이불을 살짝 걷었다. 행여나 누가 볼세라 더더욱 파고들었다.

하지만 내가 파고든 것이 무색하게도 이미 등에는 찬 공기가 닿았다. 민망해서 미칠 것 같은 나의 코끝에 음식 냄새가 맴돌았다.

그와 동시에 카넨이 나를 이불로 감싸 들어 안았다. 꺄악 소리를 지르며 그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의 품 안에 앉게 되었을 때, 나의 앞에는 커다란 펭귄 인형이 있었다.

사람이 아닌 인형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웬 펭귄 인형……?

펭귄은 카트를 밀고 와 테이블에 음식을 차리더니 나에게 손을 뻗었다. 나는 홀린 듯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자 나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어, 어지러워요!”

카넨이 주문을 읊자 땀에 젖었던 몸이 깨끗해졌다. 내 몸이 깨끗해지고 나서야 펭귄이 나를 돌리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카트 밑에서 옷을 꺼내어 입히기 시작했다. 펭귄은 손가락도 없으면서 어떻게 된 것인지 복잡한 드레스를 잘 입혔다. 등에 붙어 있는 리본도 꼭꼭 당겨서 예쁘게 묶기까지 했다. 우리 집 하녀보다 괜찮은데?

빗으로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빗더니 깔끔하게 정리해 주기도 했다. 이 경이로운 광경을 입도 못 다물고 바라보자, 펭귄이 음식을 한 입 먹여 줬다.

“맛있어! 혹시 음식도 펭귄이 다 만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은 마탑에서 일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왜요?”

“…아시다시피 마법사들 상태가 일반적이지 않아서 기피합니다.”

“아, 그렇죠. 확실히.”

괜히 ‘미친 마법사들의 성’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마법사들의 건강관리가 주목적이라, 안 씻으면 계속 빙글빙글 돌리고 안 먹으면 숟가락을 들고 쫓아오고 그렇습니다. 목적에 충실하죠.”

아니나 다를까 펭귄 인형이 내 입가에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포크로 면을 둘둘 말아 숟가락 위에 얹은 것이었다.

“그런데 계속 돌리면 어떻게 씻어요?”

“보통 마법으로 씻습니다. 페리아도 성력으로 할 수 있지 않으십니까?”

“…그런 편리한 것을 할 수 있었으면 저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갔을걸요?”

특히 저런 펭귄 인형은 나중에 카넨이랑 헤어지더라도 하나쯤은 데리고 가야겠어. 먹여 주고, 옷도 입혀 주고, 요리도 해 주고. 하녀가 따로 필요 없을 것 같다. 하녀도 저렇게 음식을 먹여 주진 않는다.

“알려 드리길 원하십니까?”

“뭘요?”

“성력 쓰는 방법 말입니다.”

“네?”

성력이 나에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성력 쓰는 방법을 알려 준다고? 이제 와서 성력 없다면서 갑자기 이혼하자고 쫓아내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혹시 쓸 수 있는 거라면 알고 싶은데…….

그에게 가르쳐 달라고 대답하려고 입을 벌리자 펭귄이 음식을 다시 쏙 넣었다.

대체 왜 얘는 카넨의 입에는 음식을 안 넣고 내 입에만 넣는 거지!

열심히 씹어 삼키자 이번에는 물잔을 가져다 댔다. 어쩐지 목이 마르긴 해서 꿀꺽꿀꺽 마셨다. 물이 살짝 흐르자 냅킨으로 입까지 닦아 주었다. 펭귄이 숟가락에 다시 음식을 얹는 사이에 재빠르게 말했다.

“대체 왜 얘네들은 나만 먹이는 거예요? 당신은 왜 안 먹이고? 돌리지도 않잖아요!”

“주인이 누군지는 알아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펭귄이 다시 입에 넣어 준 음식을 우물우물 씹으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덧붙여 설명해 줬다.

“저를 귀찮게 하지 않도록 설정해 두었습니다.”

이 편한 것을 왜 하지 못하게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법사들의 건강관리가 주목적이라면서요!”

“그냥 마법사가 아니라, 마력이 적은 마법사들만입니다.”

즉, 자신은 마력이 넉넉하니 대상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카넨이라고 마력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어차피 나중에 여자 주인공이 다 해결해 줄 테니까 상관없겠지.

나는 궁금한 것을 해소하자 우선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펭귄이 입에 넣어 준 음식을 먹으면서 손가락으로 다른 접시를 가리키자 그 접시에 있는 음식을 먹여 주기 시작했다. 음식을 다 먹자 다른 펭귄이 디저트를 카트에 밀고 왔다.

디너가 담겨 있던 접시를 한쪽 날개에 척척 쌓더니, 테이블 위에 디저트를 놓고 들고 있던 접시를 카트에 담아 다시 가져갔다. 설거지까지 하는 훌륭한 펭귄 인형인가 보다.

디저트를 포크로 찍어 먹었더니, 그 맛은 거의 천상의 맛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디저트를 만들 수 있다니! 배가 불렀음에도 남기지 않고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역시 펭귄은 나중에 하나쯤은 데려가야겠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나서 카넨과 차를 마시면서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성력 쓰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고요?”

“물론입니다.”

“마력과 다르지 않나요?”

“본질적으로 쓰는 방법은 같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나는 이곳에 와서 아주 평범한 남작으로서 살아왔는데, 성력이라는 능력을 쓸 수 있게 되면 당연히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피곤에 찌든 밤에 굳이 샤워를 하지 않아도 마법으로 씻을 수 있게 되는 것 하나만 있더라도.

“성력과 마력은 모두 한 사람이 쓸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력과 달리 성력은 한 번에 많은 양을 쓰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회복되니, 조금씩 쓰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에 다 쓰면, 두 번 다시 성력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즉, 100만큼의 성력 중 하루에 회복되는 성력의 양이 10이라면 매일 10씩 사용하면 평생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력이든 성력이든 하루에 100을 다 써서 완전히 고갈되면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신관이 보통 100의 성력을 지니고 있다면, 마법사는 마력이 회복되지 않는 만큼 그보다 많은 양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마력도 아껴 써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면.”

“회복하는 방법이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그 방법은, 오늘도 열심히 실천하지 않았는가. 그것을 떠올리자 괜히 얼굴에 열이 올랐다. 하지만 캐릭터 설정에 대한 것이지 그가 내게 말한 적이 없었으므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침을 뚝 떼었다.

카넨에게 ‘그게 뭔데요?’라며 물을 수도 있었지만, 멍청하게 한밤중에 그것을 다시 물어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쾌락에 대해 지극히 만족감을 느꼈고, 지금은 성력 쓰는 방법을 알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니까.

“그럼 저 성력 쓰는 방법 알려 주세요.”

“오늘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니, 내일부터 해도 괜찮겠습니까?”

이 늦은 밤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무엇인지 예상이 가는데 외면하고 싶었다.

아니, 아무리 나라도 하루의 절반을 하는 건 좀……. 게다가 자고 일어나서 밥만 먹고 또 하는 건 좀……. 게다가 지금 시작하면 언제 끝날 줄 알고?

“페리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만, 아닙니다.”

“…그거 말고 또 할 게 있나요?”

카넨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내 형님을 보러 가야 합니다.”

아, 그렇구나. 형님. 카넨의 형이면 카넨만큼 잘생겼겠지?

나도 모르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카넨의 형? …잘생겼지. 엄청 잘생겼지. 어떻게 아냐고? 실제로 봤으니까. 카넨의 형이 두 명이 아니라면, 그의 형은 이 나라의 황제인 카르파 드 바르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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