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 파견 임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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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먹었으면 뒤처리가 필요한 법.
주방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테이블 먹고 남은 그릇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은 음식물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다양한 양념이 묻은 그릇을 챙겨 주방으로 이동했다.
거실과 마찬가지로 현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주방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후우... 그 인간이랑 같이 있으니까 자꾸 말리는 기분이 드네요."
"누구 말하는데?"
"기..기척이라도 내고 다니도록 해요."
심호흡을 하고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표정관리를 하는 박혜지 였지만, 이미 이런저런 모습을 자주 봐서 그런지 괜히 웃음이 터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냥 좀 자존심 강한 부잣집 아가씨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승부욕도 강하고 덜렁거리는 모습이 많아서 그런가.
성격도 괜찮은 것 같고 나쁘진 않은 느낌이다.
테이블에서 가져온 그릇을 옆에 내려놓자, 고무장갑을 낀 박혜지가 시선을 한번 주고는 다시 설거지를 시작했다.
고무 장갑은 색상은 다 똑같은 거로 생각했는데, 일반적인 분홍색 고무장갑이 아닌 어두운 회색의 색상이었다.
박혜지 팔이 더 얇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일반적인 크기보다 더 큰 느낌이 들었다.
'주문 제작이라도 했나.'
남자 2명밖에 없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최태수가 설거지할 거 같지는 않은데.
나머지 그릇을 챙겨 오려고 했는데, 뭔가 자꾸 눈길이 가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딱 보기에도 이런 경험이 많이 없는지 서툰 움직임에 어딘지 모르게 시선이 갔다.
"내가 할까?"
"이 정도는 별거 아니니, 당신은 남은 그릇이나 챙겨 오도록 해요."
"일단 알았다.
뭐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상관없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왜 남들보다 더 느려 보이는 걸까.
남은 접시와 그릇을 챙겨오자 별로 진도를 나가지 못한 박혜지가 눈에 들어왔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자꾸만 시선이 간다고 해야 할까.
뭔지 모르게 아슬아슬해 보여서 하나 떨어뜨릴 것 같은 느낌이다.
"이게 마지막인데."
"당신은 저기에서 쉬고 있도록 하세요. 저는 할아버지의 손녀지만 당신은 손님이니까요."
본인이 고생하겠다고 하니 고맙긴 한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기름기가 있으면 온수로 하는 게 더 잘 닦여."
찬물로 몇 번이고 헹구는 모습을 보고 있는 모습에 나는 말없이 물을 온수로 바꿨다.
"그...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그래. 그래."
"당신 아까부터 그 열받는 목소리는 뭐죠!"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잠잠해진 박혜지가 분위기를 잡고 말했다.
"당신이 할 일은 없으니. 할아버님께 가보세요."
글쎄, 이제 와서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말하는 박혜지 때문에 주방에서 쫓겨났다.
느리긴 해도 꼼꼼하게 하고 있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뭐.
거실로 이동하자 김정호가 날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 거 같아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자 녀석이 손짓했다.
"스승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따라오도록."
*
아까 보았던 연못을 지나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자 넓은 수련장이 나왔다.
외부보다 더 커 보이는 공간, 이쪽도 일종의 게이트인 모양인가.
평평한 바닥 위, 최태수가 개량한복을 입은 중앙에 가만히 서 있었다.
"스승님! 김시우를 데리고 왔습니다."
"오 그래. 왔구나. 혜지는 같이 오지 않았느냐?"
"아직 설거지하고 있는데요."
"그런가. 내가 자네를 부른 건."
최태수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옆에 있던 검을 하나 던졌다.
칼집에 들어가 있는 검이 이쪽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들었다.
질 좋은 무기 인지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무기였다. 검이 의외로 무게 중심이 중요한 무기인데, 이건 밸런스가 좋은 편이었다.
손잡이도 그립 감이 나쁘지 않고 말이다.
"실력 확인을 하고 싶어서 말일세."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풀기 시작하는 최태수, 사실 의뢰는 없고 이게 목적이 아니었을까.
우드득 소리를 내며 본격적으로 몸을 풀기 시작하는 최태수 앞을 김정호가 가로막았다.
"스승님!"
"정호야. 왜 그러느냐?"
"어찌 일개 생도가 감히 스승님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녀석에게 무서움을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유일한 제자라고 들었으니 실력을 보고 싶기는 했다.
은근히 거슬리는 시선을 보내기도 했고 말이다. 실력 확인이나 해볼 생각으로 몸을 풀고 있자 최태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무 세게 하지는 말거라. 서로 다치면 안 되니 말이다."
김정호가 아니라 이쪽을 보고 말하는 최태수. 나보고 살살하라는 모양이다.
"걱정 마십시오! 저런 애송이는 본 실력을 보이지 않아도 됩니다!"
본인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자신의 가슴을 두들기고 있는 김정호.
뭐 싸우기 전에 몸풀기는 되겠지. 여차하면 본인이 말릴 생각인지 최태수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리를 잡았다.
자세를 잡고 이쪽을 노려보는 김정호는 내가 들고 있는 칼을 보고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왜 칼을 뽑지 않는 거지?"
"굳이?"
"이.. 이놈이!"
가벼운 도발에도 효과가 있었는지 김정호가 화를 내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솔직히 겉모습만 보면 어중이떠중이라 생각했는데.
걸음걸이만 봐도 꽤 실력이 있어 보였다.
한발 한발을 내 디딜 때마다, 전체적인 무게 중심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면서 앞으로 튀어나왔다.
최태수의 제자답게 무술이라고 부르던가.
무협지에 나오는 보법이라도 사용하고 있는 건지, 평범해 보이는 걸음걸이처럼 보이는 데, 단숨에 거리가 줄어들었다.
일반적인 헌터와는 다른 방식으로 마력을 운용하는 게 느껴졌다.
내부에서 움직이는 마력이 순간에 한 곳으로 모여 드는 순간, 김정호가 정권을 내질렀다.
별거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위력이 담겨 있는 김정호의 주먹.
한 템포 빠르게 들어 오는 주먹에 보통 녀석들이라면 바로 당할 것 같은 기분이다.
보통 녀석들이라면 말이다.
그 동안 괴물들만 상대해서 그런 걸까. 녀석의 움직임이 훤히 보이는 느낌이었다.
최태수를 생각해서 어느 정도 공방은 이어갈까 고민도 했지만, 좀 건방진 느낌이라 해야 하나.
나는 녀석의 움직임에 맞춰 칼집을 내질렀다.
놈이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
전투에 있어서 무기의 거리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단순히 상대방보다 더 긴 무기를 들고 있다는 것으로 많은 이점이 생겨난다.
정글 같이 주변에 장애물이 많아 휘두르는데 방해되는 요소만 없다면, 대부분 사거리가 긴 무기가 유리하다.
괜히 농민병에게 창을 쥐여 줬겠는가.
사거리가 짧을수록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아질 수밖에.
본인의 공격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내 검에는 반응하지 못한 모양이다.
녀석이 주먹이 닿기 전 내 칼집이 먼저 명치에 닿았다.
"크윽.."
마력을 사용한 건 아니지만, 튀어나오는 관성이 더해지자 충격이 강했는지 놈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후우.. 후우.."
"흠..."
너무나 싱겁게 승패가 결정돼서 그런 걸까. 김정호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아..아직 이다."
비틀 거리며 일어나는 김정호를 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마력을 사용했다면, 방금 그 일격으로 허무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내가 너무 방심했어.."
최태수의 얼굴을 확인하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패배시키라는 건가.'
생각보다 잔인한 영감이네.
뭐 본인 위치를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가볍게 손짓하자. 김정호가 조용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아까와는 다르게 더 맹렬하게 돌기 시작하는 김정호의 마력.
최태수에 비교하면 여전히 부족하긴 하지만, 어느정도는 유사한 느낌이 있었다.
진각을 밟으며 마력을 응집시키고, 아까처럼 정권을 내지르며 응집시킨 마력을 터트렸다.
별거 아닌 동작이지만, 그 위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렇게 사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을까.
보기에 쉬워 보여도, 저렇게 시간의 지체 없이 동작 하나로 기술을 사용하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지도 핵펀치를 제대로 사용하기 까지 엄청난 노력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 성장하는 중이니까.
하지만, 전투는 본인이 연습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__파앙!!!!
내가 있던 위치에 강렬한 파열음이 들려 왔다.
위력 만큼은 확실했으나,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법.
"위..위?!"
자신의 주먹을 피한 날 확인하고 다시 한번 정권을 내지르는 김정호.
놈은 승리를 확신한 듯 미소를 지었다.
일반적으로 허공에 있는 상태에서는 방향을 전향할 수 없으니까.
__파앙!!!
"아.."
놈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번에도 허공을 가르는 놈의 주먹.
아티팩트를 통해 익숙해진 하늘 달리기, 마력을 통해 얇은 벽을 만들어내 공중에서 방향을 비틀었다.
공격의 실패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순간이었다.
마지막 녀석의 표정은 복잡 미묘했다.
단순히 패배했다는 표정이 아니라, 절망에 빠진 표정.
괜히 미안한 감정이 생길 정도로 미묘한 표정.
__빠악!!!
놈이 쓰러지기 전, 옆에 있던 최태수가 달려와 놈을 붙잡았다.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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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김정호를 눕힌 후, 우리는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너무 정호를 미워하지 말았으면 하는구나."
"..."
설거지를 끝낸 박혜지도 옆에 서 있었다.
"그 아이는 내 친구의 아들이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지."
지금도 몬스터에게 당한 사람들이 심심찮게 나오는 만큼, 그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다.
"눈앞에서 무참히 도륙당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봤다고 하는구나. 운이 좋게 구조가 되었지만..."
최태수는 조용히 뒷말을 삼켰다.
그 고통을 직접 경험해본 입장에서, 어떤 느낌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여전히 떨고 있단다. 벼랑 끝에 내몰린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는 것처럼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려 그렇게 행동하는 것뿐이지."
그래서 최태수에게 더 집착하고, 날을 세우는 모습을 보였던 걸까.
뭐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최태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조금 빨리 찾아온 것 같긴 하지만... 뭐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말거라."
"..."
박혜지도 김정호의 사정을 알고 있는지 무거운 표정으로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이거 괜히 나만 나쁜 놈이 된 기분이네.
“잘 이겨낼 겁니다."
놈의 주먹은 가볍지 않았으니까. 최태수는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아무튼, 도착했구나."
최태수의 말에 주변을 확인하자, 무언가 이질적인 게이트가 보였다.
일반적인 게이트와는 본질이 달라 보이는 기이한 느낌의 게이트.
그리고 그 게이트는 아주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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