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 시작과 끝, 끝과 시작 (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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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다은아?”
교주의 말을 듣는 순간 다은이가 머리를 붙잡았다.
갑작스런 두통에 머리가 아파 보이는 모습, 설마 교주 새끼가 다은이를 건드린 건가?
“이. 쓰레기 새끼가!”
“아마.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모양이네요.”
“허락 되지 않았다고?”
“그럼 이렇게 하죠.”
놈은 손을 들어 가볍게 허공에 퉁겼다.
…
“다은아?”
갑작스럽게 반응이 없어진 다은이.
상태를 확인해 봤더니 숨도 쉬지 않고,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네. 맞습니다. 이 공간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죠.”
“…”
“의외로 침착한 반응이시네요.”
“흥분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당신을 선택한 모양이죠?”
교주는 마키나를 알고 있었다. 마치 시스템의 정체를 알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정확할까.
“넌 뭐지?”
“일단 걷지 않겠습니까?”
교주는 내 말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안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으나.
놈의 힘을 생각했을 때 기습은 의미가 없겠지.
“…”
다은이의 공격이 지나간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여기저기가 다 터버리고 박살이 난 모습, 발밑에 데스 나이트 부산물들이 밟혔으나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입니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물어보시지요.”
“너는 뭐지? 어떻게 마키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거고…”
“그만. 흐흐흐.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이 많은 건 알겠지만,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너는 뭐지?”
앞으로 계속해서 걸어나가던 교주는 공허한 공간의 중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생각했던 것 보다는 정상적인 얼굴, 과장된 말투나 광기어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당신은 누군가가 만들어둔 이야기대로 모든게 흘러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묻는 말에나 대답해.”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던 놈은, 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그게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정해진 운명이라.
난 이미 죽었어야 할 운명에서 벗어난 몸이다.
“시나리오 퀘스트.”
“…?”
“그저 짜인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정해진 운명의 끈에 매달려 살아가는 세상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놈은 시스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이 세계의 끝은 정해져 있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놈의 힘을 생각한다면 이상했다.
“그런 세계에 살고 있다면, 과연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세계의 규칙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존재.
이녀석도 설마.
“저 역시 마키나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차원 지원을 통해 만났던 프레이아 처럼, 본래 이 세계를 관리하던 신.
[ ..시..시우님.. 거기서..당… 도망을..! ]
“아직도 방해하는 모양입니다.”
[ 세이브 로드 능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
[ 현재 시점을 저장했습니다. ]
놈의 주변에 그때 보았던 기이한 힘이 넘실거렸다.
그와 동시에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몸.
뒤 늦게 공간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주변에는 끝없이 펼쳐진 공허한 하늘만이 가득했을 뿐이다.
“모든게 거짓된 세상이라면, 없어지는 게 의미 있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정해둔 운명의 꼭두각시로 살 바에는 이 세계를 내 손으로 무너트리겠단 말입니다!!!”
[ “그만 두세요!! 프로토!!!” ]
“이미 늦었어 마키나. 더는 너와 싸우는 건 지쳤다.”
점점 무거워지는 몸,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고 다른 세이브 포인트를 로드하려 했으나.
[ 로드 할 수 없습니다. ]
‘시발.. 좆 된거 같은데.’
교주, 아니 프로토가 손짓하자 놈의 앞에 검은 기사가 나타났다.
“이제는 정말로 끝을 볼 때다.”
기사에게 대응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 올렸으나, 마력 심장이 마치 텅빈 것 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어?”
고개를 돌린 순간, 기사의 검이 무자비 하게 내려왔다.
…
[ 세이브 포인트를 로드했습니다. ]
*
시스템과 규율.
인과율에 묶여있는 존재.
프로토는 되돌아가는 세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던 걸까.
그저 정해진 일을 반복하고 있는 걸,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가지는 조금씩 달라질지 몰라도, 결과는 결국 같았다.
멸망.
정해진 멸망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하는 세계.
자신의 세계조차 구하지 못하면서, 하위 차원에 까지 손을 뻗는 마키나의 모습에 프로토는 한심하다 생각했다.
“얼마나 반복할 거지?”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도 봐서 알지 않나요? 그전보다 더 결과가 좋아졌어요. 반복한다면…”
그는 마키나를 싫어했다.
자신과 같은 꼭두각시, 시스템에 묶여 있는 존재 일 뿐이면서,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걸까.
어차피 뭘 해도 변하지 않는 이세계는 진짜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이 세계를 위해 그렇게 까지 열심히 하는 거지?”
“당연한 이야기를 왜 물어보는 거죠? 꽃이 피고 지는 것 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피어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나요?”
“…”
“비록 지금은 종말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분명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에요.”
글쎄.
그게 가능할까.
이런 의미 없는 일을 계속 반복할 바에는 차라리.
끝을 맞이하는 게 낫지 않을까.
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 이 세계를 끝내는 게 옳지 않을까.
결국 무능하게 포기하는 주인공을 위해 계속 존재할 의미가 있는 걸까.
그렇게 프로토는 이 세계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시간과 운명을 관리하는게 마키나 였다면, 프로토는 공간과 차원을 관리하는 신이었다.
인과율과, 시스템에 묶여 있는 존재는 직접적인 힘을 사용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신의 자리를 포기했다.
끝이 명확한 필멸자의 몸이 되어 버렸으나. 이 전보다 더 자유롭게 세계에 영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권능의 조각일 뿐이라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기에는 충분했다.
자유롭게 공간을 이동하고, 차원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힘.
조각 밖에는 남지 않아 버린 시스템의 권능으로 많은 인간의 능력을 무력화시켰다.
‘비록 시스템에 묶여버린 몸이 되었지만, 세상을 끝내기에는 충분했지.’
그럴때마다. 마키나는 포기하지 않고 시간을 되돌렸다.
권능을 포기했기에, 이미 시스템에 묶여 버린 몸이 되었기에 마키나의 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약해진 능력 때문에 단편으로 밖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그럼에도 세계를 멸망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본래의 주인공이었던 강주원은 매번 실패했으니까.
본인이 가지고 있던 재능과, 시스템의 도움으로 날개가 달린 듯 성장했으나.
진정한 위기가 찾아왔을 때는 어김 없이 부러졌다.
한 번도 어려움을 겪지 않아서일까.
놈의 멘탈은 약했고, 쉽게 포기했다.
힘을 얻었을 때 놈은 쉽게 변했다. 여자에 빠져 살았으니 말이다.
뭐 정작 자신의 주변에 있는 중요한 여인들의 마음은 하나도 얻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한 번으로 안되면 열 번, 그걸로 안되면 백번, 천 번이고 계속하면 그만이야.”
어째서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포기하지 않는 걸까.
처음에는 저런 별 볼 일 없는 남자를 선택할 거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였으니까.
자꾸만 일이 어긋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쯤.
저 남자는 마치 송곳처럼 존재감을 드러냈다.
분명 강주원보다 보잘것없는 존재인데, 이야기의 시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쓰레기일 뿐인데.
어떻게 저렇게 성장할 수 있는 거지?
왜 자신의 계획이 자꾸만 실패하는 걸까.
거슬리고, 짜증 나는 존재.
그렇기에 이번 회차에서는 반드시 없애겠다고 마음 먹었다.
존재가 지워질 정도로 무리해서 시스템의 힘을 뒤흔들었다.
마키나가 복구하긴 했으나, 남은 힘을 쥐어 짜내 이 공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단순히 이질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시스템에서 벗어난 이 공간은, 시스템의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공간이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시스템에 의해 얻은 힘을 모두 잃은 상태였다.
인벤토리도, 스킬도, 스텟의 힘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
‘마키나 때문에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기존의 능력은 모두 무력화된 상태인데…”
왜.
어째서.
모든 힘을 잃었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인데.
포기하지 않는 거지?
절망하지 않는 거지?
약해진 힘 때문에 남자가 죽는 모습이 잠시 잔상처럼 지나갔다.
프로토 역시 힘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준비해둔 저 기사를 소환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
그러나 자신이 질리는 없었다.
힘을 잃은 저 남자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한 기사였으니까.
그런데 왜일까.
자꾸만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건.
“지금이 몇 번째지?”
“그건 모르나 봐?”
얼마나 반복되고 있는 걸까.
남자가 포기하고 절망한 순간, 이제는 시간이 되돌아가지 않는 순간.
그를 여기에 봉인시켜두고 진정한 끝을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저 남자는 계속해서 싸우는 걸까.
“그 잘난 시스템의 힘을 잃었습니다. 스텟의 힘도, 스킬의 힘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딴 몸으로 뭘 할 수 있다고 싸우는 겁니까!”
“이것 보다 더 병신 같은 상태에서도 잘만 싸웠어.”
인벤토리가 무력화되기 전에 들고 있었던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운명을 바꾸는 걸 포기하고 세계를 끝내고 싶다. 그런 거지?”
자신보다 더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기사 앞에서도 남자는 웃고 있었다.
“겁쟁이 새끼. 그러니까 힘들어서 그냥 포기하고 싶다는 거잖아.”
남자, 아니 김시우는 프로토를 보며 대답했다.
“그 좆같은 운명, 내가 바꿀 테니까. 방해하지 말고 꺼져 새끼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