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 203 서바이벌 평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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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처럼 쭉쭉 잘빠진 몸매를 가진 박혜지는 그 어떤 싸구려 옷을 입어도 고급스럽게 보이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무심해 보이는 윤서아와 날카롭고 강해 보이는 강민지의 사이라고 할까.
윤서아 처럼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로 있는 그녀였다.
다른 사람에게 크게 관심이 없기도 하고, 억지로 누군가를 상대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무심한 표정으로 있다 보면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지 않아서 좋았지만, 가끔 윤서아를 따라 한다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날 때도 있었다.
안그래도 순위가 밀려서 화나는데, 그런 말까지 들으면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 없는 법.
‘3등인 것도 서러운데.’
두명에게 밀려서 순위가 3등이 되면서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했던가. 심지어 3등은 부르는 말도 없었다.
수석, 차석이란 말은 있지만 그 다음을 부르는 표현은 없었다.
특정 대학에서는 차차석, 삼석 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하지만, 그건 만들어 낸 말일뿐.
‘너무 없어 보이잖아.’
자신의 필기시험 점수가 조금 떨어질 뿐, 전투 능력만큼은 윤서아나 이다은 보다 떨어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한 문제도 안 틀리고 다 맞추는 녀석들이 이상한 게 아닌가.
저번 대결에서는 아쉽게 이다은에게 밀리긴 했지만, 그건 과거일 뿐. 그동안의 수련을 통해 지금 싸운다면 자신이 이길 자신이 있었다.
지금 중요한 건, 김시우가 박찬후를 쓰러트렸다는 사실이었다.
‘할아버지가 인정하긴 했지만, 이 정도 일줄은…’
그녀는 박찬후를 한번의 공격에 쓰러트린 김시우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생도를 다 아는 건 아니었지만, 50위 안에 들어가는 생도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찾아본 그녀였다.
성격이 좀 이상하긴 해도, 박찬후의 전투 능력은 상위권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었다.
섬세한 마력 컨트롤 능력을 잘 활용하기도 하고, 검술 실력도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실제로는 그 결과가 달랐다.
검술 실력만 놓고 본다면 어린아이와 성인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김시우 쪽이 압도적이었다.
‘아니… 검술 실력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부분에서 압도적이네요.’
최태수, 자신의 할아버지가 꼭 제자로 삼고 싶다는 말을 하긴 했어도 이정도 수준일 줄은 몰랐다.
자신은 제자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데, 할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했던가.
나이가 나이 다 보니 건강이 안 좋아서 사람을 잘못 본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도심지에 나타났던 붉은 설인을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걸 보고 그냥 몸만 빠를 뿐 별거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생각을 고쳐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특히 마지막 공격의 출력은…’
단순히 검을 휘두르면서 마력을 방출한 게 전부였다. 마력을 제어하여 복잡한 구조를 갖춘 것도 아니고, 그저 방출했을 뿐이다.
항마 능력 때문에 동급의 마력과 힘 싸움에서는 밀리지 않는 다고는 해도, 그건 압도적인 수준의 마력이었다.
거기다 말도 안 되는 속도까지, 일반적인 헌터라면 흉내도 낼 수 없을 거다.
‘할아버지께서 마력 회로가 특별하다고 하시긴 했지만, 저정도 수준일 줄은…’
하지만 상대가 박찬후 라서 두드러지는 걸 수도 있었다. 자신도 박찬후 정도는 일격에 쓰러트리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뭘 그렇게 경계해?”
“…”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까 멀리서 들었을 때도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가까이서 들으니 상당한 수준이었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박혜지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김시우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에게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란 말에 김시우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설마 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최태수님을 말하는 건가..?”
“혹시 제가 태수 할아버지의 손녀라는 걸 모르셨나요?”
“처음 듣는 말인데…”
자신 처럼 남에게 관심이 없는 타입일까?
아니면 설마 자신이 3등이라서 관심이 없었던 걸까.
박혜지는 무심한 표정과는 다르게 허리춤에 놓여 있는 검을 꽉 쥐었다.
완전히 무방비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최태수가 아무나 인정했겠는가.
실력이 떨어지지만 정 때문에 제자로 데리고 다니는 그 남자 말고는 별다른 제자가 없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최태수가 인정한 김시우를 쓰러트린다면, 최태수도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악감정은 없어요. 그냥 실력을 보고 싶을 뿐이지.”
박혜지는 그렇게 말하며 우아하게 전투 자세를 취했다. 오른쪽 허리춤에 꽂혀 있는 검을 당장에라도 뽑을 것 같이 자세를 잡고는 김시우를 노려보았다.
“감정이 잔뜩 실려있는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이야?”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김시우를 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감정의 동요가 일어났다.
목소리가 중후해서 가벼워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 앞에서 너무 여유로운 태도가 아니던가.
“방심하지 마세요.”
“알아서 할 거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
박혜지는 김시우의 태도에 화를 내며 검 하나를 잡아서 발도 했다.
최태수가 마력을 통해 무협지에 나오는 무공의 형태로 사용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발도를 통해 공격을 날렸다.
마법사 계열 헌터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 처럼, 근접 계열 헌터들은 특정한 동작을 통해 기술을 사용했다.
단순히 검을 뽑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내부에 있는 마력회로들이 복잡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 많은 연습을 통해 만들어진 그녀의 기술, 한 순간의 흐트러짐도 없이 내부의 마력이 복잡하게 움직이며 거대한 물보라를 만들어 냈다.
그 짧은 시간, 찰나의 시간에 만들어진 거대한 칼날 파도가 김시우를 덮쳤다.
일반적인 사람은 검을 뽑았는지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 빠른 속도였으나, 검을 뽑음과 동시에 몸을 움직여 피하는 김시우.
주변에 있던 게 모두 박살 나고 살벌하게 생긴 칼날 자국이 그 위력을 실감하게 했다.
“지금 표정 살벌한 거 알아?”
검을 피한 김시우가 웃는 모습을 본 그녀의 표정이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변했다.
단순히 공격을 피하는 건 실력이 뛰어난 헌터라면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범위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피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경고하긴 했지만 그 순간에 그걸 정확하게 파악하고 피하는 게 가능할까?
다음 공격을 하려는 순간 김시우가 달려와서 검을 휘둘렀다.
김시우를 막기 위해 근접에서 발도술을 사용했으나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피하는 김시우.
바로 옆에 공격이 날아가고 있음에도 전혀 동요 없이 달려와 검을 휘둘렀다.
__챙!!
납도를 포기하고 김시우의 공격을 받아치는 순간, 손목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김시우의 공격에 당황하며 검을 휘둘렀다.
얼마나 많은 전투를 통해서 만들어진 움직임일까.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보호막에 조금씩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아까 전투를 한게 여기서…!’
일반적인 대결이면 모를까, 보호막을 지켜야 하는 평가 시험.
아까 강민지와의 전투에서 입었던 피해 때문인지 벌써 보호막이 박살 나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싸우다가는 탈락할지도 몰랐다.
‘이대로 계속 싸웠다가는…!’
계속 근접전을 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거리를 벌릴 필요가 있었다. 마력을 이용해 김시우의 얼굴을 노리고 물을 뿌렸다.
빈틈이 생기진 않았지만, 거리가 벌어졌다.
‘지금이 기회에요!’
그 틈을 노려 검을 번갈아 가면서 뽑기 시작했다.
보호막 상태 때문에 근접전을 유지하는 건 무리였다.
그대로 끝낼 생각으로 계속해서 발도술을 날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물의 참 격 때문에 거리가 점점 벌어지자 마지막을 위해 몸을 숙였다.
“이걸로 끝이에요!!”
아까와는 다르게 대량의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로로 뽑던 것과는 다르게 칼집을 들어 가로로 검을 뽑자 거대한 파도가 만들어졌다.
모든걸 다 집어삼킬 것 처럼 필드를 뒤덮기 시작했다.
주위에 숨어 있던 생도들과 몬스터들은 갑작스러운 자연재해에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야 말로 압도적인 크기와 위력.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 거대한 파도 앞에 김시우는 가만히 서 있었다.
‘흠… 너무 압도적이라서 포기한 건가요?’
보호막 상태만 괜찮았다면 제대로 싸웠을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른건 몰라도 김시우의 검술 실력만큼은 진짜였으니까.
“하아.. 하아.. 이걸로 끝이에요.”
저기에 휘말린다면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파도의 중심부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일직선으로 그어진 푸른 빛.
모든걸 다 집어 삼킬 것 처럼, 청아한 검기가 파도를 가르기 시작했다.
검을 휘두른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던 김시우는 찢긴 파도를 넘어왔다.
“그걸 어떻게…!”
과연 항마의 힘이라는 걸까, 황급히 검을 뽑는 순간 김시우가 코앞에 있었다.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올리자, 망치로 때린 것 같은 충격이 전해졌다.
‘다음 공격은…!’
그 다음 공격을 막고 반격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반으로 잘려나가는 검.
‘평소에 쓰던 무기가 아니라는 걸 깜빡했네요.’
뒤늦게 움직이려 했으나 어느새 검이 목덜미 밑으로 들어와 있었다.
“…”
본래 사용했던 무기였다면, 이 앞에 전투에서 체력을 소모하지 않았다면, 보호막 상태가 좋았다면, 수 많은 이유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모든건 핑계에 불과했다.
생존을 평가하는 시험, 모든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그녀의 패배였다.
그녀는 패배를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__딱!
“아야…?”
“나중에 제대로 붙어 보자고.”
김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마석을 박혜지에게 던졌다.
순간 구름 사이로 햇빛이 쏟아졌고, 김시우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걸로 보호막 수복할 수 있어. 그럼 나중에 다시 만나자.”
아무렇지 않은 듯 사라지는 김시우를 보며 박혜지는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사람을 잘 보신 걸지도 모르겠네요…”
박혜지는 김시우가 건네준 마석을 꼭 쥐고는 자리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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