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040 운명의 저울 (2)
* * *
***
[ 히로인 '강민지'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
[ 현재 위치 : 스타드 은행 ]
“후우..”
이런 상황일수록 더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너무 흥분하면 제대로 된 판단이 힘들고, 실수하는 경우도 생긴다.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
그 앞에 동굴에서도, 일대일 대련에서도 질리도록 한 경험이다.
동굴에서 살아나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개복치도 아니고.. 하아'
히로인 시스템을 조작해 확인하니 아직 강민지의 이름은 활성화되어 있었다.
'죽지는 않았어... 시간은 아직 있다.'
히로인 시스템이 있어서 다행이다. 아직은 구할 수 있다.
은행에서 위험한 상황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은행 강도가 떠올랐다.
스타드 은행의 규모를 생각하면 강도들도 보통 강도는 아니겠지.
'테러리스트? 빌런?'
각성자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건 같은 각성자 밖에는 없었다.
무슨 개복치도 아니고,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위험이 찾아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키나! 아는 거 없어?'
[ ... ]
나는 윤서아에게 인사를 하고 곧장 달렸다.
“서아야 나 일이 있어서 가볼게!”
“어... 잠..”
뒤에서 윤서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강민지가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살아만 있어라. 제발!'
스타드 은행은 여기서 30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아카데미 근처에 있는 포탈을 이용하면 15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거다.
'15분은 너무 길어!'
1분 1초가 아까웠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내려가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트레이닝 룸이 아카데미의 안쪽에 있어서 시간상의 여유가 없었다.
[ 사용자 김시우 님 ]
'지금 시간 없어!'
[ 알려드려야 할 정보가 있습니다. ]
'민지가 왜 그런 건지 알고 있는 거야?'
[ 저 역시 규칙과 법칙에 묶여있는 존재로 자세한 정보를 드릴 수 없습니다만.. ]
'만?'
신호가 바뀌지 않은 건널목을 곧장 달렸다. 옆에서 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어서 위로 도약해서 피했다.
뒤로 지나가는 자동차는 뒤늦게 불쾌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섰고, 운전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달렸다.
[ 먼저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
[ 운명의 등급이 높은 수록 더.... 죄송합니다. ]
“?”
[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습니다. ]
[ 이 이상 진행할 경우 시스템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
[ 그래도 김시우 님이 원하신다면 더 알려드리겠습니다. ]
“아니! 괜찮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날 도와주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서 세이브 로드가 안 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머릿속을 비우고 강민지가 있는 은행을 향해 달려갔다.
모든 힘을 다해서 달리자 금세 포탈이 보였다. 다행히 대기 줄은 없어 보였다.
"빨리! 급해요!!!"
***
멀리서부터 스타드 은행이 보였다. 대형 은행답게 커다란 건물 주위로 군인들과 경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완전히 접근이 통제되어 있어 은행으로 들어가기는 힘들어 보인다.
은행의 입구에는 인질로 보이는 사람이 묶여 있어 접근조차 못 하게 막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 안에 있는 건가?’
시스템이 스타드 은행이라고 알려주고 있으니, 강민지는 현재 출입이 통제된 은행 안에 있는 게 분명했다.
'아직은 안 늦었...'
어떻게 들어갈지 고민하는 사이 은행 안에서 폭발 소리가 들렸다.
아주 익숙한 소리로, 어제도 들었던 폭발음. 연달아서 터지는 소리는 대련하며 매번 듣던 소리였다.
'아니지?'
그리고 거짓말처럼 끊긴 소리.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서 히로인 시스템을 활성화했고, 히로인 창에 있는 강민지의 이름이 회색으로 변했다.
“하아… 시발 개복치도 아니고”
당장이라도 저 안에 있는 놈들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최대한 감정을 가라앉혔다.
어젯밤에 세이브했으니 로드만 하면 강민지를 살릴 수 있다.
오히려 동굴에서보다 더 좋은 상황이었다.
‘PTSD 올 것 같네…’
일단은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마니카나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이유'
강민지가 위험한 상황에서 내게 했던 말을 곱씹어 봤다.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그리고 '운명 등급이 높을수록 더..'
등급이 높고 바꾸기 힘든 운명을 가진 사람.
'나는 아직 민지의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동굴에서 나오면서 수명을 늘어났지만, 아직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라는 의미 같았다.
전지전능해 보이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시스템도, 무언가 강력한 힘에 의해 묶여 있는 것처럼.
강민지도 어떤 힘에 의해 묶여 있는 상태라는 의미였다.
'아까 한계라고 했으니 더 물어볼 수는 없겠지.'
마키나는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도움을 주고 있었다.
방금은 선을 넘은 거고, 그에 따른 반동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F등급이라 자유로운 건가?'
[ ... ]
반대로 이야기하면 등급이 낮은 나는 운명을 바꾸기 쉽다는 의미였다.
'운명 등급은 뭐지?'
단순히 강함을 이야기하는 건 아닐 거다.
내가 아는 인간들 중 가장 강한 사람은 강민아지만, 강민아의 등급은 A였다.
알고 있는 인물 중 S 등급은, 윤서아, 정수아, 강주원
'3명의 공통점은 뭐지?'
아카데미 내부에서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는 윤서아, 강주원은 조금 밀린다 쳐도 정수아는 강민지보다도 부족하다.
'어떤 방식으로 등급이 측정되는 거야?'
등급이 중요도를 이야기한다면, A등급인 강민지가 죽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TV에서 보던 히어로가 보였다.
'히어로..?'
헌터와 같은 각성자지만 하는 일이 조금 다르다.
헌터들이 게이트로부터 사람들을 지킨다면, 히어로들은 빌런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킨다.
'돈 때문에 헌팅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히어로도 어느 정도 보수를 받고 움직이니,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히어로 쪽이 좀 더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하는 편이다.
아무튼 쉽게 말하면 헌터는 괴물들을 상대하는 전문가고 히어로는 빌런을 상대하는 전문가다.
'A랭크 실버 래빗, 규모가 규모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건가?'
실버 래빗은 토끼 가면과 긴 머리, 그리고 몸매가 부각되는 슈트 덕분에 인기가 많은 히어로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느낌으로는 미인일 것 같았다.
실버 래빗이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가족이나, 지인에게 보복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고, 히어로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았다.
높은 랭크에, 인기가 많은 만큼 인지도가 높은 히어로 중 한 명이다.
단순히 인지도로 따지면 윤서아나 강민아도 실버래빗에게는 이길 수 없다.
'마키나 실버 래빗은 등급이 어떻게 돼?'
[ 운명등급 C입니다. ]
'C 등급이라고?, 인지도나 업적을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데'
실버래빗이 C 랭크를 받을 수 있는 건가?
무력도 아니고, 영향력, 인지도도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 운명 등급이 정해지는 걸까?
전혀 감이 안 잡혔다. 나는 고민을 멈추기로 했다.
'일단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건.'
강민지를 구하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강민지를 구한다.
빌어먹을 운명을 바꾼다.
"이미 해본 일이네"
나는 이미 내 운명을 바꿨다.
[ ... 응원하겠습니다. ]
운명 따위 별거 없지
***
로드 하기 전, 강민지를 죽인 놈들의 면상을 확인하고 싶었다.
'복수한다. 쓰레기들아'
세이브 포인트를 로드하기 전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은행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특수 부대원들이 통제하고 있어서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대한 아카데미 생도?”
막무가내로 돌진하자 날 발견한 부대원이 중얼거렸다.
대한 아카데미는 대한민국 최고의 아카데미인 만큼, 힘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이다 보니 태도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실버 래빗까지 출동했다는 건 안에 있는 테러리스트 들은 각성 자라는 걸 의미했다.
평범한 강도면 A랭크의 실버 래빗이 출동할 이유가 없었다.
특수부대라 해도 각성자를 상대할 수 없다.
'총도 폭탄에도 안 죽는데 당연한 거지'
그래서 보통 이런 상황에서 특수부대는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거나 히어로들의 보조를 맡는다.
특수부대원들이 보조를 맡을 정도의 사건이면 각성자 한 명이 아쉬울 거다.
"... 아무리 그래도 안 된다 돌아가"
"지휘관을 만나게 해주세요!"
어차피 로드할 생각에 막나가기로 했다. 죽어도 상관없으니까, 민지의 복수는 하고 죽어야겠다.
"저 안에 내 친구가 있다고!!"
"안된다니까!!"
특수대원들이 날 밀어내려 했지만, 이미 인간의 신체를 벗어났기에 두 명에서도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점점 소란스러워지자, 신분이 높아 보이는 사람에게 보고하더니 다시 돌아왔다.
"지휘관님을 만나게 해드릴 테니 난동 피우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날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긴 했지만, 난동 피울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놈들에게 복수만 할 수 있으면 상관없었다.
삭막한 분위기의 특수부대원들을 지나치자 지휘실처럼 보이는 천막이 보였다. 안에는 멀리서 확인했던 히어로가 있었다.
'A랭크 실버 래빗'
C 랭크의 운명등급을 가진 히어로.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확실히 남달랐다.
'그래도 우리 민지보다는 아니지..'
상황을 보고 받은 지휘관과 이야기를 하던 실버 래빗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미안하지만, 학생에게 도움을 받을 수는 없어요."
"저 안에 제 친구가 있다고요!!"
민지를 죽인 범인들이 저기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갈 수 없었다.
"지금 어떤 심정인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 저를 믿고 기다려 줄 수 있나요?"
"네.."
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실버 래빗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지휘실을 나갔다.
부대원들을 따라 밖으로 향하는 길, 고개를 돌리자 은행 입구가 보였다.
마력을 사용해서 도약하면 한순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거기에 주변에는 각성자들도 없었다.
'미안 누나!'
뒤에서 경악하는 소리를 들으며 은행 입구로 도약했다.
"뭣!"
입구를 지키고 있던 테러리스트가 놀라서 공격을 날렸다. 나는 곧장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항마 활성화'
깔끔하게 잘려 나가는 테러리스트의 공격, 나는 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놈을 찔렀다.
"크헉..."
죄책감은 없었다. 인질을 무시하고 은행 안으로 들어간다.
"기…. 김시우 학생!!!"
실버 래빗의 목소리는 무시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상한 복면을 쓰고 있는 놈들이 날 반겨줬다.
"뭐야? 시발"
"이게 뭔 상황이야?"
복수의 시간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