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짙은 피비린내가 속에서도 무심한 둘을 내려다보았다.
묘하게 황제의 목이 칼라엘 쪽도 아니고, 공작의 쪽도 아닌 어정쩡한 뒤로 떨어져 있는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털썩—
의자에 앉아 고요하게 멈춰 미동조차 없는 그들을 돌아봤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할 생각이 없나?”
칼라엘을 그렇다 치더라도 공작까지 무감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거대한 제국 황제의 죽음이라기엔 너무 허망한 모습이었다.
철두철미한 공작의 성격상 이미 이런 일을 생각하고 온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황제와 공작, 그 뒤를 따르는 수행원들 10명뿐.
잠시의 만남이라지만 지나치게 적은 인원이다.
“공작, 이러자고 만나자고 했나?”
“…….”
끝까지 대답 없는 그를 내려다봤다.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는 모습.
황제의 목을 베어 버리고도 그는 감흥이 전혀 없었다.
헛웃음을 나왔다.
미친놈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추궁하려 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처음 올 때와 다르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차피 썩을 대로 썩은 유레안 제국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나만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뭡니까?”
그의 제안을 듣기 위해 그를 공작으로 대해 주었다.
“유레안 제국을 폐하 제국에 속국으로 해주시고, 제가 레일라를 보고 싶을 때 한 번씩만 보게 해주시면 됩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냥 보게만 해달라……?
몸뚱이 하나 들고 다 버리고 맨몸으로 따라온 놈.
자신이 모신 황제의 떨어진 목에도 감흥 없이 팔짱을 끼고 앉아 나라를 바친 놈.
“이 뒷수습은 공작이 다 알아서 한다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냥 보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멀리서라도 상관없습니다.”
할 말이 없었다.
거대한 제국을 알아서 가져다주고, 레일라만 보게 해주라니.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저 두 형제는 미친놈들이 맞았다. 이렇게 어이없게 끝날 줄 알았다면 레일라를 쉬게 해주는 건데.
아니, 그녀의 모습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인가…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런 전개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레일라와 상의해 보도록 하지.”
과연 그거면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쩌면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어차피 공작이 알아서 할 수밖에 없겠군요.”
레일라에게 설명하기 위해 나가려 하자 두 형제가 나란히 뒤를 따라 나왔다.
“…레일라를 잠깐 보게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황제를 망설임 없이 목을 베어버린 냉혈한이 왜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 걸까?
“폐하, 저 그 정도는 압니다.”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하는 공작을 보다가 시선을 비켜 레일라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마차 문을 노크했다.
“레일라, 스타멘 공작이 잠깐 보기를 원합니다.”
마차 안에서 헉하고 거칠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그도 들었을 것이다.
명백한 두려움이 느껴지는 반응이었으니.
슬쩍 시선을 옮겨 공작을 살피고 있으니 마차 문이 열렸다. 마차에서 내려오는 레일라를 안아 들었다.
깜짝 놀란 표정이 귀여워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술을 내렸다.
끈질긴 시선 둘을 무시하면서.
“조금 전 그곳으로 갈 수 없으니 그냥 이곳에서 대화하도록 하지.”
* * *
무슨 일일까.
프레드릭의 말에 숙였던 고개를 들고 두 오라버니를 얼핏 살피다 바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지금도 남아 있는 공작저에서의 습관 때문에.
따뜻하게 손을 감싸는 큰 손에 다시 고개를 들고 오라버니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붉은 시선이 프레드릭과 나의 손에 고정되어 있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눈을 직시해 왔다.
“…잘 있어서 다행이네.”
이상했다.
막상 마주한 큰 오라버니의 시선이 무섭지가 않았다. 손을 감싸고 있는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슨 일 있었어요?”
지금 분명한 건 4명 중 한 명인 유레안 제국 황제의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는 건데.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다.
“레일라, 돌아가는 길에 자세히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뒤에요.”
프레드릭의 말에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리자 큰 오라버니의 눈과 다시 마주쳤다. 나를 따라다니는 듯한 눈빛은 그대로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시선을 두던 그가 시선을 들어 올려 하늘을 향했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그가 십 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웃는 웃음이 아닌 진심으로 미소 짓는 그의 미소로.
한 가닥의 서늘한 바람이 그와 나 사이에 끼어 있는 먼지들을 들어 올려 하늘로 날려버렸다. 그 바람을 타고 뭔가 후련한 기분이 들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조만간 다시 만났으면 하는데.”
“…….”
약간의 떨림이 들어 있는 부탁 조의 말.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내렸던 얼굴을 들었지만…묘하게 비켜내려 있는 그의 붉은 눈빛을 끝내 마주하지 못했다.
‘큰 오라버니가 저런 사람이었나.’
언제나 당당하기만 했던 사람.
그 모습이 차갑게만 보였던 사람.
끝내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던 그가 먼저 몸을 틀더니 둘째 오라버니를 향해 말을 던졌다.
“칼라엘, 너도 같이 제국에 가야겠어. 가서 우리가 저지른 일에 대해 정리해야지. 그다음에 네 마음대로 해.”
또다시 이상한 말.
큰 오라버니의 모든 말이 그가 결코 던질 수 없는 말들이었다.
멍해 있는 내 손을 프레드릭의 손이 따뜻하게 감쌌다.
“레일라, 뒷일은 저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제국으로 돌아가면 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나보다 먼저 돌아선 비슷한 두 개의 등이 멈칫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의 손을 잡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잠시만 마차에 계십시오. 이곳 처리를 지시하고 오겠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손의 여운을 느끼며 마차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들로부터의 도망만을 생각했던 10년간의 삶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망막에 새겨졌다.
그 길 외에는 아무것도 선택할 것이 없던 내 삶이.
무엇 때문인지 모를 것이 울컥 치솟아 올라 손을 들어 올려 심장을 눌렀다. 잠긴 눈에 힘을 주자니 마차의 문이 열리며 그가 다가왔다.
상처 많은 부드러운 손끝이 내 눈을 스칠 때야 내 눈에서 흘러내린 것이 눈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레일라….”
그의 묵직한 저음이 울리고 따뜻하고 두꺼운 혀가 눈꼬리를 따라 쭉 핥아 올렸다.
그의 단단한 팔이 쉽게 들어 올린 나를 그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올렸다. 나를 꽉 끌어안은 그가 그와 나 사이의 틈을 단숨에 없애 버렸다.
마치 아무런 이물질도 그와 나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려는 듯.
손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입술을 찾아 입술을 눌렀다. 그의 입술 안으로 뾰족하게 세운 혀를 밀어넣었다.
말없이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다 받아준 그가 들어온 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질척하게 혀가 엮여 들었다.
“흐음. 하.”
그와 나 사이에 서로의 타액만이 오고 갔다. 끈적한 기운이 좁은 마차 안을 달궜다.
덜컹거리며 출발하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떼어냈다. 뒤로 물러나는 내 입술을 그의 입술이 쫓아와 물었다.
“레일라, 사랑합니다.”
입술 선을 쓸어내리던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하십시오.”
그가 혀를 밀어 넣어 입안의 모든 타액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야했다.
미처 담지 못한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 때까지 입술을 움직이던 그가 겨우 입술을 떼어냈다.
“그대의 두 오라버니가 황제를 죽였습니다.”
“네?”
설마, 블라이스 황제를?
“그들이 왜요?”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 멍한 시선을 들어 그를 향하자 그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자세한 사항을 모릅니다만, 아마 그대와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황제를 맘대로 죽여도 되는 건가?
“그대가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뒷일은 그 두 형제와 내가 할 테니까요. 그대는 그저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언제나 말했듯 또다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그의 곁에 있는 것이고…그리고 그다음은 모르겠다.
“지금은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처음으로 가지고 싶은 사람이니까.
그의 밝은 금발이 마차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보다 더 밝게 빛났다. 그의 황금빛 눈이 모든 것을 다 밝히듯이 밝아졌다.
마치 그가 나를 위해 준비된 사람으로 보였다.
물론 내 눈에는.
“사랑해요. 프레드릭.”
지금은 이것만 생각하고 싶다.
다른 무엇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에.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서운 속도로 달리자 마차를 덮쳐 오는 바람 소리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뱉어냈다.
어느새 다가온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다시 먹어 치웠다.
다른 때와 다르게 급하게 입안을 탐하던 그가 그것으로도 양이 차지 않은 듯 작은 틈조차 없애기 위해 얼굴을 틀고 더 깊게 입술을 밀착시켰다.
틈 없이 맞물린 혀의 움직임이 농밀해져 갔다.
“하아, 하아.”
그와 나의 타액과 얽히고.
그와 나의 숨이 얽히고.
거기에 꽉 닿아 있는 그와 나의 심장까지도 같은 속도로 일정하게 뛰었다.
빠른 듯 안정되는 심장.
끈적하게 얽혀 있는 입술을 떼어내자 그와 나 사이에 은색 실이 늘어졌다.
“평생…그대와 함께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잠긴 목소리 속에 집착이 묻어나왔다.
두 오라버니의 집착엔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면, 프레드릭의 집착은 내 심장을 미친 듯한 속도로 뛰게 만들었다.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붉어진 뺨에 대고 가만히 그의 온기를 느꼈다.
그의 뺨을 쓸어내리고, 일렁거리는 목을 쓸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와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기분 좋은 감촉을 느꼈다.
“당신도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요.”
손톱을 세워 그의 가슴을 아프게 긁었다.
미친놈들 틈 속에서 드디어 미쳐가는 지도 모르겠다.
딱딱한 가슴의 감촉이 기분 좋게 다가오자 몇 번 더 그의 가슴을 긁었다. 아프지도 않는지 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레일라…그대는 도대체. 지금 그대가 다쳐서 얼마나 내가 참고 있는지 안다면 이런 행동 못 할 겁니다.”
그의 음성 속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기분 좋아 다시 한번 세게 긁었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올라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제발. 하아…곧 도착하지만 않았어도.”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한 그가 입술을 깨물어 충동을 억누르는 모습을 기분 좋게 지켜봤다.
내 웃음과는 반대로 그의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지는 모습에 묘한 쾌감이 느껴졌기에.
입술을 깨무는 그의 입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의 혀를 손가락 끝으로 긁자 그의 혀가 도망가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나는 그의 혀를 따라가 다시 긁어내자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오는 모습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으, 레이라! 재미스니까?”
처음 듣는 그의 뭉개진 발음에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손가락을 빼려고 하자, 그가 입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이로 잡아 눌렀다.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깨물어 대는 통에 몸이 움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