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눈을 비추는 햇살에 찡그리다가 가늘게 뜨이려는 눈이 다시 어둠에 감겼다.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무슨.”
조용히 말과 함께 나온 따뜻한 입김이 다시 되돌아와 입술을 적시고서야 프레드릭의 커다란 손이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프레드릭?”
“네, 여기 있습니다.”
귓불을 간지럽히며 들리는 그의 나직한 음성에 몸이 움찔거렸다.
나를 배려하기 위한 몸짓으로 누워 있던 그가 얼굴을 간지럽히는 햇살을 손 하나로 가려 주고 있었다.
“레일라, 내일 우리 함께 국경에 가야 할 듯합니다. 그대의 큰 오라버니를 만나러 가야겠어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함께 만나요.”
두려움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함께라면 상관없었다.
“상처가 심하지 않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는 동안 마력으로 이동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그대가 불편한 건 안 됩니다.”
나를 최우선 하는 사람이 있으니.
“…네.”
그가 다 해줄 것이다.
“칼라엘과 함께 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몸을 충분히 쉬어 두십시오.”
말을 마친 그가 일어나 내 얼굴 곳곳에 입술을 내려 자국을 남겼다.
그의 입술을 따라 새겨진 자국들이 심장으로 스며들어 왔다.
감긴 눈 위에도 그의 입술이 오래 머물다 떨어졌다.
“내일 가기 위해 오늘 이곳에 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꼭 식사도 챙기고 필요한 건 뭐든 말해주십시오.”
내 손을 잡은 그가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술을 누르고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언젠가는 만나리라 여겼지만, 이렇게 빨리 일 줄은 몰랐는데.
종일 멍한 기분이었다.
* * *
드디어 출발하기 위해 아침.
상처는 이미 다 나아 있었다. 이곳에도 신전은 있었으니까.
준비를 마치자 그가 침실 안으로 들어와 나를 안아 들었다.
“프레드릭, 걸을 수 있어요. 이제 다 나았어요.”
“그대는 아픈 사람입니다. 그러니 안겨 가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는 아프지 않다는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지만, 그는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대로 침실을 나섰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복도에 즐비해 있는지 볼 수 없었다.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눈을 꾹 감았기에.
“아니, 세상에.”
“지금이게.”
경악하듯 터져 나오는 신음과 한탄의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황후가 아님에도 황제의 침실에 살고, 황제가 안고 다니는 사람이 되어 버린 나는 조용히 그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머리를 그의 가슴 쪽으로 좀 더 가까이 하며.
“레이오드, 많이 올 필요 없다. 그쪽도 조용히 올 것이니. 너는 칼라엘과 뒤의 마차를 타고, 마법사에게 마법을 걸라 시켜라.”
* * *
아픈 레일라를 오랜 시간 마차를 타게 할 수는 없었다.
국경까지 하루가 넘게 걸리는 거리였지만, 마법사가 걸어준 마법이면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일라를 안고 마차에 올라 자리를 앉았다.
자꾸 꼼지락거리며 내려오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았지만, 오늘은 이대로 있고 싶었다.
불안함만이 있음은 아니었기에.
“국경까지는 금방 도착할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이대로 있어요.”
내려 주기 싫은 억지를 부렸다.
다시 얌전해진 그녀가 몸 전체에서 힘을 빼고 깊이 맞대왔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다친 뒤로 풀지 못한 욕정이 솟구쳐 올랐다.
시선을 억지로 마차 창문에 붙들어 매며 눌러 내렸다.
덜컹—
마차가 멈추는 소리에 내릴 준비를 했다.
“레일라, 안으로 들어갈 때 이대로 안고 가야겠습니다.”
“네? 안 돼요!”
“그대의 큰 오라버니에게 그대가 많이 다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요. 네?”
그녀가 많이 다쳤다는 소식에 반응했으니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내 품에 안겨있는 모습을 스타멘 공작이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것도 궁금했다.
한숨을 깊게 내쉬는 그녀가 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는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를 더 깊이 끌어안고 마차에서 내렸다.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는 레이오드와 칼라엘이 가까이 다가왔다.
“폐하, 황궁 기사단 중 3개 기사단만 왔습니다. 모두 실력자이니 믿어도 좋으실 겁니다.”
“그래, 그들은 도착했나?”
“네, 조금 전 도착해서 천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먼저 도착했다니 다행이었다.
이대로 레일라를 안고 안으로 들어가면 되니.
슬쩍 시선을 돌리자 칼라엘의 붉은 시선이 내게 꽉 안겨있는 레일라에게 고정되어 떨어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실소가 나왔다.
공작도 같으리라는 것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들어간다. 레이오드 너와 칼라엘만 들어오고 나머지는 밖에 있어라.”
간단히 지시하고 레일라를 안고 큰 걸음으로 걸어 천막 앞에 섰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입구를 열어주자 천천히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곧바로 붉은 시선이 강렬하게 꽂혀 들었다.
내가 아닌 레일라에게.
“아, 오셨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블라이스 황제가 내 눈을 맞추고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의 웃음에 시선은 스타멘 공작에게 고정하고 입만 끌어 올려 미소를 지었다.
멈춘 걸음을 옮겨 자리에 앉을 때까지.
인사하는 동안에도 공작의 눈은 레일라에게 고정되어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레일라 영애가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지금 몸이 아주 좋지 않아 안고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오늘 꼭 오라버니를 보겠다고 하여.”
블라이스 황제가 사람 좋은 웃음을 억지로 지으며,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그의 불쾌한 듯 일그러지는 눈만이 지금 그의 기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공작! 그래 만나자고 한 이유가?”
유레안 제국의 황제에게서 눈을 거두고 공작을 향해 물음을 던질 때까지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레일라였다.
“…칼라엘과 마무리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칼라엘의 시선이 내 품에 있는 레일라에게 향하다가 공작에게 미끄러졌다.
두 쌍의 닮은 듯 다른 눈빛이 서로를 향하자 그 주변으로 불꽃이 일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여기서 둘이 편하게 대화하면 되겠군.”
둘만이 대화해도 된다는 허락을 하자 공작의 시선이 다시 한번 레일라를 거쳐 칼라엘에게로 향했다.
“레일라는 괜찮은 거야?”
표정을 정리하지 못한 레일라는 정신을 놓은 척 미동이 없었다.
미소를 지으며 기특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의 움직임을 따라 끈적하게 달라붙는 공작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척 더욱 다정하게 머리를 넘겼다.
애무하듯 귀끝을 지분거리다 입술을 내려 볼에 쪽 소리가 나게 붙였다 떼기도 했다.
“…레일라 영애와 국혼을 치를 생각입니까?”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감상하던 블라이스 황제가 무심코 던진 말에 환하게 웃었다.
물론 수긍의 뜻으로 보란 듯이 고개를 숙여 입술에 길게 입을 맞췄다.
허리에 둘려진 작은 손이 옷을 쭉쭉 잡아당겼다.
“레일라는 의식이 없는 겁니까?”
“아닙니다. 곧 있으면 깨어날 겁니다.”
공작의 모든 궁금증은 칼라엘이 아닌 레일라에게 있었다.
그의 눈빛이 스쳐 갈 때마다 불안해하는 레일라를 달래기 위해 머리를 좀 더 정리하고 안정감을 주기 위해 몸에 더 가까이 끌어당겨 토닥여 주었다.
“폐하! 잠시 동생과 둘만 대화를 해도 되겠습니까?”
“아…필요하면 그렇게 하십시오. 아니, 그럴 거 없이 짐이 나가서 주변을 둘러보고 오죠.”
일부러 셋을 남겨두고 레일라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레이오드에게 손짓을 하고 텐트에서 조금 더 떨어져 나왔다.
* * *
프레드릭 황제가 나가고 블라이스 황제를 봤지만, 그는 미동조차 없이 칼라엘에 시선을 둔 채 그대로 있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니.
“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말해.”
차갑게 식어있던 칼라엘의 눈에 서서히 열기가 피어올랐다.
“형님이 제게 물으시니.”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발로 차버리려다가 꾹 눌러 내렸다. 황제도 있는 자리였기에 여기서는 참아야 했다.
다시 입을 열기 전에 황제의 입이 먼저 열렸다.
“칼라엘, 짐이 너를 용서하겠다. 그러니 내 요구 조건을 한 가지만 들어주고 온다면 짐이 용서하고 너를 받아들여 직책도 내려 주고 치하도 하지.”
느닷없이 옆에서 끼어드는 말에 두 쌍의 붉은 눈이 의문을 담아 비집고 들어온 황제에게로 향했다.
자격지심 덩어리인 황제가 하는 말을 들을 필요는 없지만, 황제인 이상 그를 존중해 주자 싶어 경멸의 시선을 감추고 그를 주시했다.
어차피 들을 가치조차 없는 제안일 테지만.
“레일라 영애의 목을 베어 와라. 참! 프레드릭 황제의 목도 같이 베어오면 좋고.”
먼저 나왔던 레일라의 목이라는 말만 계속해서 머리에 울려 퍼졌다.
내가 그녀의 목을 쥐었을 때조차 꺾지 못했던 가느다란 목.
조금 전, 프레드릭 황제의 품에 안겨있던 레일라의 가녀린 몸.
긴 시간을 돌아 깨달음은 한순간이었다.
‘아…아…이제야 알겠다.’
이번 생은 레일라를 죽일 수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순간적으로 몸에서 모든 기운을 풀어헤쳐 블라이스 황제의 목을 겨냥했다.
“하하하하.”
어느새 뻗어 나온 칼라엘의 몸에서 나온 검은 기운이 이미 블라이스 황제의 목을 가르고 있었기에.
양쪽에서 뻗어 나온 검은 기운 두 개가 만나자 블라이스 황제의 목이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와 닮은 피보다 더 붉은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래, 너와 나는 닮은 부분이 눈뿐만은 아닌 거 같아. 그렇지, 칼라엘? 지독히도 닮은 너와 난데.”
처음으로 저놈이 내 동생임을 인정해야 했다.
둘 다 참지 못하고 감히 황제의 목을 날려 버리다니.
둘의 붉은 시선이 차갑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자, 천막의 막이 걷혔다.
안으로 들어오던 프레드릭 황제가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다시 밖으로 나갔다.
“형님은 저 황제를 이기지 못할 겁니다.”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저놈이 레일라를 데리고 홀로 도주하리라 생각했는데…프레드릭 황제의 밑에 기어간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안 해봤을 리가.
나 또한 이기지 못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강한 자를 알아보는 본능적인 감이 이미 경종을 보내고 있었기에.
“미련한 놈.”
누구에게 뱉어낸 말인지 알 수 없었다.
* * *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발길을 돌려 다시 밖으로 나와 레일라를 마차에 밀어 넣었다.
“레일라, 잠시 이곳에 있어야겠습니다. 음…저곳에는 혼자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맑은 시선이 눈을 맞춰오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한 후 레이오드에게 눈짓했다.
알아들은 그가 마차 문 앞에 서자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주위를 돌던 중 레일라를 안고 들어가려 했다.
안에서 세어 나오는 강한 살기를 마주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던 차였다.
‘설마.’
저들이 아무리 미쳐있어도 그럴 리가.
그러나…다시 들어간 천막 안은 짙은 피비린내가 역겨울 정도로 가득차 있었다.
“이게, 도대체!”
두 형제의 닮은 듯 다른 무감한 붉은 시선이 곧바로 직시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