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다른 일들은 모두 미루고 밖으로 나와 레일라가 누워 있는 침실로 향했다.
“레이오드, 나머지는 모두 테리안에게 맡겨라. 긴급한 사항만 가지고 네가 직접 오고, 다른 이들은 침실 근처에 얼씬하지 못 하게 해.”
침실로 들어가기 전에 레이오드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고, 레일라가 누워 있는 침실문을 조용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식사는 이쪽으로 가지고 와.”
레일라가 다친 후로 매 식사를 같이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야 마음이 놓였고, 그녀가 먹는 모습을 본 뒤에야 나 또한, 식사할 수 있기도 했으니.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위로 오후의 긴 햇살이 비춰 짧은 그림자를 남긴 모습을 뒤로하고 가만히 서서 내려다봤다.
여신이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저럴까.
아름다운 나의 레일라.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열리는 모습을 정신없이 보고 있자, 뜨인 눈이 내 눈을 맞춰왔다.
“일어났습니까? 같이 식사하려고 왔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어요?”
“네,”
평범한 일상처럼 보였다.
사랑하는 그녀와 내가 맞이하는 별거 아닌 하루의 시작처럼.
그녀의 어깨에 감겨 있는 큰 붕대만 아니었다면.
일어나려는 몸짓에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침대 끝으로 옮겨주었다. 그녀 옆에 앉아 작은 손가락 하나하나를 얽혔다.
“레일라, 칼라엘을 불러 서신을 보냈습니다. 스타멘 공작에게. 그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 만나서 결판을 지어야겠습니다.”
레일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잠시 방황하던 눈이 내 눈을 스쳐 지나더니…다시 돌아와 내 눈을 마주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레일라가 먼저 나를 걱정하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실력을 믿어 주십시오, 레일라. 나는 단지, 그대와 함께 가야 하는 것이.”
“전 괜찮아요. 저도 마무리는 하고 싶어요.”
그녀는 모든 것을 괜찮다고 하지만…내가 괜찮지 않았다.
길게 한숨을 뱉어내는 내 입술에 와닿는 서늘한 손가락의 기운이 느껴졌다. 입술을 스치는 손가락을 따라가다 그 손가락을 물어 버렸다.
“아, 프레드릭.”
“그대의 손가락이 너무 맛있어 보여서요.”
그녀의 핏기없는 얼굴이 서서히 홍조로 물들어가는 모습에 입에 들어와 있는 손가락을 빨았다.
그녀의 맛이 손가락에서도 느껴졌다. 빠져나가는 손가락을 이 사이로 가볍게 물고, 눈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펴 모든 곳을 눈에 담았다.
“다시는 그대가 다치는 꼴은 못 봅니다.”
이건 나에게 하는 맹세이기도 했다. 맹세의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을 물었다.
그녀의 온기를 때때로 확인하기 전에는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았기에.
펜을 들고 있는 손에서 떨어진 잉크가 점점이 하얀 종이 위에서 퍼져 나갔다.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 책상 위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검은 연기를 주시했다.
칼라엘의 연락.
서서히 만들어지기 시작한 하얀 종이 위에 손을 뻗어 서신을 낚아채듯이 들어 올렸다.
“이제야 연락할 마음이 생겼나? 죽여버렸어야 할 새끼.”
직접 갈 수 없는 상황이라 칼라엘을 보낸 것이 실수였다. 내 손에서 떠난 레일라라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분이 더러웠다.
살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호위하던 놈 중 몇 놈 목을 비틀어 버리고서야 흘러넘치는 살기를 갈무리했다.
“만나자고? 레일라가 다쳤다?”
기분이 묘했다. 레일라가 다친 것 따위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데.
분명 아닌데도 불구하고…서신에서 그 말을 본 순간 주변의 모든 것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가…나의 레일라가! 묘한 상실감에 눈앞이 흐려졌다.
그녀를 데려오려고만 했지, 그녀를 다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니었다. 레일라가 나를 떠나면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그랬는데…칼라엘이 쓴 내용 중 레일라가 다쳤다…다쳤다…다쳤다.
심장이 멈췄다. 멈춘 심장이 뛰기를 거부했다.
“카트.”
아무도 없는 집무실 책상 앞에 검은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무슨 일인지 상세히 알아내라. 당장!”
“네, 각하.”
명령을 내리면서도 서신에 박혀 있는 눈이 움직임이지 않았다.
레일라가 다쳤다는 건…내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없는데, 왜?
그런데 왜 그녀가 다쳤을까, 실수일 것이다.
그 가능성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내가 직접 죽여 버리는 것과 누군가의 손에 레일라가 죽는 것은 다른 문제임을 깨달았다. 그녀가 다른 곳에라도 살아 있는 것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각하, 폐하께서 찾으신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생각을 가르고 들어오는 집사의 말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이 제국의 황제 블라이스.
빌어먹을 놈!
칼라엘이 사라진 순간, 그를 찾기 위해 황궁의 기사들과 그의 그림자까지 모조리 풀어서 찾으러 다니는 통에 이 제국이 한바탕 뒤집혔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집요함.
“지금 바로 황궁으로 간다.”
손에 있는 서신을 태워 없애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질척하게 바닥에 붙어 있는 걸음을 떼어내고 저택을 나섰다.
“말을 타고 가겠다.”
마차를 준비한 집사가 종종걸음으로 말을 내오자 황궁으로 달렸다.
벌써 어두워져 가는 거리 사이로 길게 늘어지는 내 그림자가 진득하게 앞으로 나가지 못 하게 하고 있었다. 머리에서 한번 자리 잡은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폐하, 스타멘 공작 드셨습니다.”
시종이 알리고 안으로 들어가 예를 갖추고 있자 앉으라는 말이 들렸다.
요즘 자주 보는 황제의 모습에 보이지 않게 인상을 쓰고 자리에 앉았다. 시종이 내온 차를 마시며 들끓는 열을 눌러 내렸다.
“공작! 요즘 자주 보니 좋네. 그래 무슨 소식은 없고?”
황제가 묻는 궁금한 사항의 범주에 속하는 건 오로지 칼라엘 혼자일 것이다. 조금 전부터 시작한 손끝에 거스름에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뭐든지 명확하고 칼 같은 성격에 맞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뭔가 있어나 보군. 공작의 표정을 보니.”
눈치 하나는 빠른 황제가 기민하게 내 표정을 읽어내렸다. 관찰하는 시선으로 살피는 모습을 보고 손톱에 거스르는 가시를 그대로 안으로 쑤셔 박아 넣었다.
심장이 따끔했다.
“폐하, 칼라엘을 만난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황제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서류에서 떨어져 내려 나를 직시했다.
“칼라엘이 올 리는 없을 테고, 연락이 왔나 보군. 그래, 만나자고?”
“…네. 그렇습니다.”
흐음.
황제의 비음 소리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나와 함께 가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니.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던 블라이스 황제가 일어나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의 걸음마다 즐거움이 묻어나는 모습에 다리를 길게 꼬았다.
‘어쩐지.’
들어오는 순간부터 얼굴에 열이 올라 있어 무슨 일인가 했더니.
급하게 마무리한 바지 버클이 엇갈려 있었고, 바지 앞쪽에 점점이 얼룩이 져 있었고.
그가 방금까지 책상에 앉아 뭘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비릿한 냄새가 났군.’
저 미친 황제 새끼가 어쩐지 일을 한다고 책상에 앉아 있더라니.
슬쩍 눈길을 돌리자 책상 밑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하얀 다리가 길게 뻗어져 있었다.
“공작과 짐이 함께 가자는 말인가?”
“칼라엘이 폐하와 제가 함께 나왔으면 하니 말입니다. 폐하를…보고 싶나 봅니다.”
“하긴, 전쟁하기 전에 한번 그들을 만나보면 좋긴 하겠군. 그 조각 같은 감정 없는 놈의 얼굴이 궁금하기도 하고.”
전쟁.
이 제국의 황제는 매번 옆 나페아 제국의 황제에게 가진 자격지심으로 그곳을 치고 싶어 했다.
이번에 그 자격지심을 자극해서 가장 강한 두 제국을 하나로 묶고, 나아가 나머지 공국 하나와 작은 왕국 2개를 깨끗이 쓸어버리자고 했다.
물론 당연히 자신의 치세에 있는 이 제국이 가장 발전해서 역사에 기록된다는 말에 혹해서 미리 승낙한 일이기도 했다.
“공작이 날을 잡아. 미리 그놈과 옆 제국의 황제를 만나 무서움을 보여주는 것도 내 너그러움이니 말이야. 가까운 시일 내 만나 제국을 통일해 버리자고.”
황제의 자신만만한 음성이 들리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일 리 없다. 옆 제국의 황제인 프레드릭이 그리 만만한 상대였다면 이렇게 1년에 한 번 평화를 기원하는 연회를 열지 않았을 것인데…황제의 허세에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현명하신 폐하께서 하시는 일이니 모든 것이 당연히 이뤄질 겁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황제를 뒤로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진한 비릿한 향이 가득한 황제의 집무실을 벗어나자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가 보였다. 복도에 드리운 어둠이 성큼 걸어가는 걸음 사이로 반으로 갈라져 갔다.
그 어둠을 제치고 걷는 화려한 황궁의 복도가 아무도 없는 차가운 공작저보다 더 나아 보이다니.
손을 허공에 뻗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항상 이 손에 잡힐 장소에 네가 있었다. 10년 동안 한 번도 내 눈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네가 이제 눈을 아무리 감았다 떠도 보이지 않는다.’
칼라엘과 함께 사라진 레일라.
그녀가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는지 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말을 타고 돌아오는 어둠에 싸인 수도의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달리고 달려도 이 어둠이 걷히지 않았다.
달그락거리는 말의 소리가 멈추고, 저택 입구로 들어서 하인에게 말을 넘겼다. 로비를 지나 집무실로 올라가 빈 종이를 꺼내 칼라엘에게 쓸 서신을 적어 내렸다.
[그래, 만나자. 날을 미룰 거 없이 이틀 후 정오에 국경에서 만나. 같이 나와라.]
길게 적을 것도 없었다.
그리고 누구와 나오라고 굳이 적을 필요도 없었다.
이쯤이면 알아들을 것이니.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 종이를 손에 들고 마력을 집중했다. 칼라엘과 피로 이어진 것이 기분 좋았던 적이 없었는데.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하얀 종이의 마지막 부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다.
“레일라!”
그와 함께 입술 끝을 타고 나온 부름에 모든 동작이 멈추고 정지해 버렸다.
머리까지 정지한 눈을 겨우 들어 어둠에 완전히 물들어 버린 정원에 시선을 두었다.
어둠 속에 은빛의 레일라가 보였다. 어린 시절 저곳에 화려한 꽃이 아닌 잡초를 애지중지 키우던 레일라 그녀였다.
분명 보일 리 없는 그녀가.
“레일라, 그때 뽑아버린 네 꽃이…어쩌면 내 꽃이었나 보다.”
너를 담지 않았던…아니, 못했던 심장이 정지했으니.
레일라가 사라진 뒤로 느꼈던 수많은 감정이 피어올라 물들고 있었다.
그녀를 가진 첫날,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나신의 몸으로 보았던 창밖이 이런 모습이었던가!
창밖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했다.
레일라를 닮은 은색의 빛이 조금씩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눈을 꾹 감았다.
그녀가 사라진 내 삶 동안 나는 몇 시간이나 잠이 들었을까?
지금도 깨어 있는 것인지, 눈을 감고 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빛이 들어오는데…나는 왜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