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60)

56화.

레일라를 안고 눈을 꾹 감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귓가를 파고들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모든 것에 내가 맞춰있는 듯한 소리였다.

어둠에 물들 듯이 그녀에게 하나하나 맞춰갔다.

그녀가 숨을 들이쉬면…나도 들이쉬고…내쉬면…나도 내쉬고.

어둠으로 깔린 창문에 밝은 빛이 조금씩 스며들 때까지.

“프레드릭….”

눈을 질끈 감은 위로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저절로 떠지려는 눈에 힘을 줬다.

“사랑해요.”

그녀의 사랑 고백은 너무 달콤해서 나 자신이 녹아내린 듯했다. 눈을 뜨고 화답하고 싶지만, 그녀를 향한 욕망이 드러난 눈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 밤새 그녀 옆에 있는 자신을 칭찬했다.

그녀의 손끝이 입술 끝으로 내려왔다.

입술 선을 따라 조그맣고 부드러운 손이 움직여 입꼬리를 타고 춤을 췄다.

“당신을 믿어요. 그러니 당신이 원한대로 할게요. 아니, 처음으로 원하는 것이 생겼어요. 당신…프레드릭이요.”

당신을 가져야겠어요.

그녀는…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낮게 가라앉은 욕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나를 가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이 열릴 때마다…내 심장은 더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이미 그녀로 채워진 심장에 또다시 그녀가 비집고 들어갔다.

“가져요. 레일라! 그대는 이미 내 모든 걸 가졌지만, 더 가지고 싶으면 내쉬는 숨까지도 가져도 됩니다.”

눈을 꾹 감은 채 요동치던 진심이 뱉어졌다.

닿아 있는 손끝이 움찔거리더니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네, 그럴게요. 이미 당신도 저를 가졌으니까.”

그녀의 말과 함께 창문 밖의 세상이 완전히 밝아졌다.

아마도…레일라가 없었다면……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열이 오른 눈을 뜨고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내렸다.

“얼른 나아요. 그대가 이렇게 있으면 내가 더 죽을 거 같습니다.”

핏기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입꼬리 끝에 걸린 빛이 나를 끌어당겼다.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묻었다. 아픈 그녀를 생각해 그녀의 입술만 조심스럽게 지분거리듯 눌러 내리며.

새벽까지 물고 빨았던 입술이 살짝 부풀어 있었다. 먹어도 먹어도 또 먹고 싶은 그녀의 입술은 내게 있어 중독이었다. 아니, 모든 것이 그러려나.

“불편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해요. 꼭 말해야 합니다.”

강조하듯 몇 번을 그녀에게 말하고 그녀의 곁을 떠나 밖에 대기하고 있는 시녀에게 식사를 들이라 명했다.

오늘 아침은 그녀에게 내가 꼭 먹여주고 나가야 제대로 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레일라, 아침 식사는 나와 함께해요. 자 침대에 등을 기대요.”

식사가 들어오는 소리에 가뿐히 그녀를 안고 침대 끝에 내려놓고 하나하나 먹여주었다.

그녀가 먹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내 입에 넣는 일을 반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집무실로 가야 할 때였다.

복도를 걷다가 레이오드에 한번 더 경계를 강화하라 지시했다.

다시는 그녀가 다치는 일이 없어야 했으니.

“폐하, 칼라엘은 조금 있으면 이곳에 올 겁니다.”

“그래.”

칼라엘이 오기 전에 밀린 서류에 집중했다.

조용한 집무실 안에서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이 적막을 갈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폐하, 칼라엘이 왔습니다.”

펜을 들어 하얀 종이에 유려하게 서명하던 손이 멈칫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언제 들어도 유쾌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들여라.”

큰 걸음으로 들어온 칼라엘이 고개를 숙이자 손을 세워 응접실 의자를 가리켰다.

“저쪽에 앉아.”

저놈을 봤을 때 했던 예의 따윈 진작에 집어 던져 버렸다.

다른 사람에게 지키게 되는 예의가 저들 형제에게만은 힘들었다.

올라오는 거부감을 삼키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다리를 겹쳤다.

“차를 내와.”

시종장이 내오는 차를 앞에 두고 눈짓으로 차를 마시라고 하고 찻잔을 들어 길게 입에 머금었다.

“너희 형제에 대해 알고 싶다. 낱낱이.”

내 말이 너무 뜬금없는 말이었을까? 칼라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차피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거 아니었나? 그대의 형이 그냥 이렇게 두고 볼 거로 생각한 건가? 나보다 더 잘 알 텐데.”

자신의 형에 대해서 잘 아는 그이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레일라를 빼돌리려고 했고, 그날부터 추적을 시작했고…결국 이곳까지 보냈다.

“내 생각으로 끝났으면 하지만, 그대의 형이 결국 이곳에서 레일라를 빼내 가지 못하면 결국 목숨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스타멘 공작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제거한다.’

찻잔을 들던 칼라엘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손을 타고 찻물 몇 방울이 탁자 위에 방울져 떨어져 얼룩을 만들었다.

정곡을 찌른 말에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그럴 겁니다. 형님이라면 말이죠.”

* * *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프레드릭 황제가 말하기 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내가 아는 형님이라면 반드시 그럴 것이니.

그 집요한 성격과 원하는 건 반드시 손에 넣고야 마는 성격.

냉정함이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

그래서 어쩌면 부모님도.

“그래서 그대도 그런 생각인가?”

뭘? 지금 뭘 물어본 것인지 모르겠다.

“설마, 저보고 지금 레일라를 제거할 생각이냐고 묻는 겁니까?”

순간적으로 제어하지 못한 감정이 흘러나와 바닥에서부터 검은 안개를 만들어 냈다.

건너편에 앉아 있는 프레드릭 황제의 황금빛 눈이 아래쪽을 살피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래, 그렇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지?”

한숨이 나왔다.

황제는 정확히 우리 형제를 파악하고 있었다.

저 프레드릭 황제나 형이나 비슷한 종자로 보였다. 나와는 다르게 모든 것을 파악한 눈빛이나 알고 묻는 말도 온통 신경을 거슬렸다.

그리고…레일라에게 하는 것도.

젠장.

“…전이라면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 또한 이미 파악하고 있는 듯한 황제의 눈빛이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레일라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일 것이다.

“마력은 다 타고나는 건가?”

“네, 스타멘의 핏줄들은 그렇습니다. 살인에 특화된 마력입니다.”

“네가 생각하기에 네 형이 앞으로 어찌할 것 같은가?”

어려운 질문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형의 생각을 읽어 본 적도 없고…그를 앞질러서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

이것이 그와 나의 차이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진 않을 테지만 어찌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대의 황제는 어떤가?”

황제에 관한 생각은…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미친놈.

“황제는 나를 원할 겁니다. 그리고 형은 레일라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전쟁뿐이겠군.”

황제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것뿐이었다.

두 사람의 원하는 것이 모두 이 제국에 있었다.

나와 레일라.

어떻게든 데려가기 위해 전쟁이라도 불사할 것이다.

“그런 미친 짓도 충분히 할 사람이긴 합니다.”

프레드릭 황제의 황금빛 눈이 생각 속으로 침잠했다.

전쟁.

이렇게 계속 암살자를 보내는 것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음을 그도 알 것이다.

그렇다고 전쟁 속으로 제국민을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요즘 그대의 형이 황궁에 자주 입궁한다고 하더군. 전쟁을 위해서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녀와 함께하려 할 것이니.

“전쟁이 나면 그대는 어찌할 건가? 그대의 형? 아니면 레일라?”

“…이미 이곳에 따라온 이상 제 대답은 정해진 것입니다. 폐하!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평생 레일라 옆에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라도 처절하게 살아가야 했다.

멀리 있어도 상관없었다. 볼 수만 있다면.

* * *

칼라엘의 붉은 눈이 검은빛으로 물들어갔다. 평생 옆에만 있게 해달라는 말은 빈말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한다.?

“그대의 형에게 서신을 보내라. 만나자고 해!”

“나올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무조건 나오게 하는 것은 그대의 몫이다. 레일라와 함께 간다고 해.”

“…네?”

한번은 만나야 할 것이다.

레일라와 나…그리고 스타멘 공작과 그의 동생 칼라엘과 유레안 제국의 황제까지.

“레일라가 나간다고 하면 나올 테지. 그러니 무조건 나오게 해라.”

전쟁하기 전에 먼저 담판을 지어야겠으니.

“칼라엘에게 종이와 펜을 가져다줘라.”

대기하고 있는 시종장에 지시하고 서신을 적기 위해 준비하는 칼라엘의 모습을 묵묵히 응시했다.

펜을 잡은 그의 손끝에 망설임이 묻어났다. 이내 마음을 다잡고 하얀 종이 위를 검은 잉크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서신의 내용을 보내기 전에 확인하면 되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꼭 나올 수 있게 해라. 그대의 형이 능력이 있다면 황제까지 데리고 오는 것도 좋겠군. 그대의 형 정도면 능력이 출중해서 충분하니.”

스타멘 공작 정도라면 황제를 가지고 노는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서신을 다 작성한 칼라엘이 약간의 망설임 끝에 서신을 내밀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고, 눈에 띄는 거라면 레일라가 죽을 만큼 다쳤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한쪽 눈썹을 쓱 올렸다.

“아무리 냉정하고 침착한 형이라도 레일라의 신상에 관해서는 결코 자유롭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니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나올 겁니다.”

* * *

프레드릭 황제에서 심정을 토해낼 날이 오다니.

하아—

내가 그랬으니 그도 그럴 것이다.

“처음에는 레일라를 뺏기느니 죽여 버리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지금은 그녀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겁니다. 듣기 싫은 말일 테지만, 우리 두 형제의 심장은 레일라입니다.”

그녀가 멈추기 전에 먼저 멈추는.

레일라의 안위는 그들 형제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심장이라는 말에 불쾌한 표정으로 일그러진 황제가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더는 말하기 싫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나가라고 했다.

“서신은 제가 직접 형에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우리 형제들만의 마력에 의해 그 앞에 바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맡겨 주시면 지금 바로 보내겠습니다.”

칼라엘의 말에 그에게 서신을 내밀었다.

그가 서신을 받더니 검은 연기를 피워 편지를 먹어치우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라도 이런 식으로 지난번 레일라의 외출을 알린 건가?”

“…아닙니다. 그랬다면 그렇게 일찍 도착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다.

“그녀를 공격한 놈들이 지하 감옥에서 네 연기에 싸여 바로 죽어버리더군. 그대 형의 짓이겠지.”

스타멘 공작가만의 특징이라면 맞을 것이다.

“확답이 오는 대로 바로 내게 보고하고, 이만 나가봐.”

깊게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의 문을 향해 나서는 칼라엘의 뒤로 그의 긴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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