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머리 한쪽이 터진 놈.
팔과 다리가 이상하게 꺾인 놈.
몸에 칼자국이 수십 개 그어져 있는 놈.
놈들을 훑던 시선을 들어 올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 네놈의 주인인 스타멘 공작에게 돌아가고 싶은가?”
3쌍의 피가 터진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왜? 네놈들의 주인을 알아서? 그거야 간단한 거 아닌가?”
그놈뿐이니.
이 제국에서 내게 맞서던 놈들이야 진작 처리했으니.
그리고 그들이 입고 있는 검은 옷을 이미 봤기도 했고.
“돌아간다 해도 네놈들 목숨은 없을 것이다.”
이미 그들의 눈빛에서 생기는 없었다. 살 의지조차 없는 죽은 눈.
그들의 주인의 얼마나 잔혹한 놈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읽어 내려갈 때였다.
바닥부터 기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세 명을 감싸고 타고 오르자 그들이 몸이 떨어댔다. 파들거리며 떨리는 몸이 위험해 보일 지경이었다.
“폐하! 위험합니다.”
아니, 위험하지 않았다.
검은 연기는 정확히 저놈들만 목표로 타고 오르고 있으니.
“괜찮다. 조금 있으면 숨통이 다 끊어질 것이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 연기가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을 타고 슬금슬금 스며들어 안으로 사라졌다.
기이한 모습이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입, 코와 귓구멍… 거기에 눈에까지 스며들었다. 연기가 완전히 스며들어 사라지자 그들의 움직임도 동시에 멈췄다.
‘지독한 놈.’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의 집요함과 철저함을 보일 줄이야.
“여기 모두 정리해라. 레이오드! 황궁 주변 경계를 두 배로 강화하고, 짐의 침실 주변은 세 배로 강화해라.”
다 죽어버린 놈들에게 볼일은 끝났다.
등을 돌려 감옥을 나가는 걸음이 무겁게 끌렸지만, 그녀에게 가야 했다.
레일라 곁에 있어야 할 때였으니.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오자 주변이 온통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검은빛이 내려와 화려했던 정원을 모두 검게 물들어 놓은 사이를 빠져나와 큰 보폭으로 침실로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선 곳에서는 여전히 눈이 감긴 레일라의 모습뿐이었다.
“폐하, 지금은 잠이 드셨을 뿐입니다. 안정되셨습니다. 목숨까지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상처가… 조금.”
옆에서 쉴 새 없이 입을 여는 궁의의 말이 듣기 싫어 대꾸 없이 침대로 다가갔다.
조금 전과 달라진 거라고는 그녀의 몸에 묻어 있던 피가 모두 지워져 있었다. 모든 것이 마치 없었던 일같이 하얗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늘 밤만 지나면 내일은 더 괜찮으실 겁니다.”
“다 나가라. 당장.”
소리 없는 걸음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침대로 다가가 레일라의 손을 잡았다.
빌어먹게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은 서늘한 손이었다.
“미안합니다. 내가… 내가… 그대에게.”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침대 밑에 무릎을 꿇고 항상 느끼던 온기가 빠져나간 손에 얼굴을 묻었다.
다 묻히지 않는 얼굴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이곳에 데리고 올 때 그녀를 행복하게만 해주리라 다짐했는데…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다니.
자신의 무능함이 이렇게 아플 줄이야.
“으음.”
작게 미동하는 손가락과 파리한 입가를 빠져나오는 신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레일라, 정신이 좀 듭니까?”
그녀의 은빛의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잘게 떨리기를 반복하더니 조금씩 위로 올라서자 아름다운 눈이 드러났다.
“여긴.”
“침실입니다. 그대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자 작은 손이 내 뺨을 더듬어 내렸다. 온기는 없지만 부드러운 손길에 뺨이 화끈거렸다.
“울지 말아요. 저 괜찮아요.”
울어, 내가?
말을 하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울어 본 적 한번 없는 내가.
어처구니없는 말이라 대꾸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대가 잘못…….”
뒷말이 어그러지고 몸이 그대로 멈췄다.
그녀가 내 뺨을 쓸어내린 손끝에 묻어 있는 작은 물기 때문에.
한 방울의 눈물. 말문이 턱 막혔다.
* * *
프레드릭이 울었다.
많은 눈물이었다면 울지 말라는 한마디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 떨어지는 단, 한 방울의 눈물이 내 손끝을 타고 내 심장이 박혀 들었다.
그게 더 마음이 아파 심장이 지끈거렸다.
“조금 다쳤을 뿐이에요. 저 보기보다 튼튼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의 음성이 순간적으로 커졌다가 잦아들었다.
“어깨에 칼이 박혔습니다. 이 여린 몸에. 차라리 내가.”
“프레드릭.”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가 다쳐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말에 놀라 일으켜지는 몸을 그가 황급히 잡아 다시 눕혔다.
“일어나지 말아요. 아직 일어나면 안 됩니다. 궁의가 며칠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심스럽게 뒤로 눕힌 그가 부드러운 이불을 목까지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손끝이라도 닿으면 부서질 것처럼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프레드릭… 그가 보냈나요?”
알고는 있었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끝까지 확인하지 못하고 시선을 비틀어 침대에 있는 이불을 향했다.
그에게 하지 못한 많은 말들이 입안에 맴돌기에.
부스럭 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시선을 틀자 넓은 곳을 두고 침대 끝자락 어깨에 상처가 없는 쪽으로 그가 파고 들어왔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팔이 나를 끌어안았다.
“네, 정확히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스타멘 공작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그가 아니면 여기까지 집요하게 파고들 사람이 없을 테니까.
“레일라.”
큰 오라버니에 관한 생각을 날릴 정도로 그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대가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아니, 내게 다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다치거나 아프지만 말아요.”
속을 토해내는 무거운 말이 심장에 파고들어 왔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그는 내가 다치거나 아프지만 말라 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네. 미안해요.”
“레일라, 미안한 건 납니다. 내가 레일라를 다치게 했어요.”
지금까지 늘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네,라는 단어만 달고 살았다.
텅 빈 머리가 세 개의 단어 중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터져 나왔을 뿐인데.
그가 거리를 두고 나를 끌어안고 얼굴을 어깨에 묻었다.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숨결만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앞으로 뭘 해야 하는 걸까요?”
“그대만 허락하시면 내가 다 알아서 합니다. 그리고 그대와 국혼을 치를 겁니다.”
국혼.
그래 국혼이구나.
그를 비켜났던 시선이 순식간에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네?”
잘못 들었겠지.
그가 아무리 나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이미 이 제국에 발을 디딜 때부터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는 허락만 하면 됩니다.”
나보고 황후를 하라고?
“프레드릭, 저는…….”
“레일라, 허락만 해주세요. 나와 함께 하겠다고.”
그가 내 어깨에 묻은 얼굴을 들었다. 갈망하는 황금빛 눈이 간절함을 품고 있었다.
“하… 하지만.”
“레일라, 네?”
그의 황금빛 눈이 속눈썹 사이로 살짝 가려졌다.
나 또한 그와 함께하고 싶다.
그렇지만, 황후라니…. 황후.
“그대 외에는 그 누구하고도 함께 하지 않을 겁니다. 나에게는 그대뿐이니까요. 그러니 그대는 나와 함께 하겠다고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의 진심을 담은 말들이 간질거리며 심장에 박혀 들었다.
“그대는 네라고만 하면 됩니다. 네?”
그가 뜨거운 숨을 뱉으며 이마를 어깨에 비볐다.
“…네.”
저절로 벌어진 입이 대답하고야 말았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가 묻은 고개를 들어 올려 환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이 밤과 내 맘을 밝히는 빛처럼 보였다.
그는 내 마음의 빚이었다.
“다시는 다치지 말아요. 절대로. 물론 다시는 그대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지만.”
그가 이를 세워 어깨에 있는 여린 살을 아프지 않게 긁어내렸다. 다친 나보다 더 아픈 표정으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날카로운 턱선을 지나 그의 눈동자를 그리며 지나는 곳마다 그의 시선이 따라왔다.
“사랑해요. 프레드릭.”
그의 떨리는 속눈썹이 툭 튀어나온 내 말에 풍랑을 만난 것처럼 떨어댔다. 손끝을 간지럽히는 속눈썹에 대고 쭉 훑어 내렸다.
간지러운 느낌이 손끝을 타고 올라와 마음에 스며들었다.
이 사람을 사랑한다.
내 말에 화답하듯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귓가에 대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내가 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