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60)

54화.

어두운 골목 안에서 그녀가 자리를 잡았다.

“절대 내 뒤에서 나오면 안 돼요.”

메리아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았다. 하얀 날이 골목을 비추는 빛을 받아 더욱 시리게 빛이 났다. 그 순간 골목 안으로 검은 옷으로 몸 전체를 가린 사람들이 빠져나갈 틈 없이 촘촘하게 들어찼다.

‘저건.’

내 성년식 날 봤던 큰 오라버니의 비밀 기사들이었다.

맙소사, 저들이 왜 여기에.

두려움에 떨어대는 마음이 손끝의 떨림으로 옮겨가 몸 전체가 떨렸다.

그걸 느꼈을까?

“레일라,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어떻게든 막아설 거니까요.”

메리아의 실력은 알고 있다.

하지만 혼자 몸을 지키며 2, 3명 상대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축축한 바닥을 밟고 있는 구두의 숫자는 열을 훨씬 넘어 보였다.

나로 인해 그녀가 다치는 건 원치 않았다.

“메리아… 도망가요. 날 두고 도망가라고요. 당신이 위험해요.”

“그럴 수 없어요. 뒤에서 나오지 말아요.”

그녀는 단호히 거부하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 안 돼.’

우리가 말하는 와중에도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스타멘 저택에서 느꼈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한심함.

그걸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아 뜨고 나약한 마음을 버리려 노력했다.

“눈 감아요!”

메리아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좁은 골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가 칼을 막아서는 모습을 눈 한 번 깜빡임 없이 보고 있었다.

그녀를 상대하는 5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이 뒤에 있는 나를 잡기 위해 밖으로 퍼졌다 다시 조여왔다.

그 순간, 메리아를 공격하던 검은 복면의 검이 메리아가 막지 못하는 각도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등 뒤를 찌르는 칼을 보고 막아서듯 그녀를 몸으로 감쌌다.

어깨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칼의 느낌과 당황한 표정의 메리아가 고함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희미해질 때쯤 막 골목의 입구를 들어서는 머리와 옷이 엉망인 칼라엘의 모습도.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점멸하는 시야 사이로 차단됐다.

“레일라! 레일라!”

나를 부르는 커다란 외침을 들으며 오른쪽 어깨를 잡고 그대로 앞으로 몸이 떨어져 내렸다.

“레일라!”

정신을 차려보려 했지만, 생전 처음 어깨를 관통한 칼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눈이 감겼다.

* * *

“레일라!”

쓰러지는 레일라를 잡아보려 손을 뻗다가 뒤에서 찔러오는 칼을 먼저 막아야 했다.

이럴 줄은 몰랐다.

처음 레일라를 황궁에서 데리고 나올 때까지도 오늘 이런 일이 생기리라는 생각조차 못 했다. 항상 이런 식으로 뛰어놀던 곳이었기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방심하고 말았다.

앞에서 나타난 검은 머리의 붉은 눈의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복면인을 처리하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복면인을 처리한 사람 뒤로 황궁의 기사들이 들어왔다.

“빠르게 처리한다.”

그중 가장 앞에선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며 참았던 숨을 뱉어냈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뒤로 넘기며 레일라를 살폈다.

피에 범벅된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레일라가 보였다.

“레일라… 아아, 어떡해.”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가를 거칠게 소매로 닦아 내고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누르고 있자 거칠게 뻗어진 손이 툭 처냈다.

“비켜! 저리 비켜.”

다가온 남자의 거친 손길에 속절없이 떨어져 나온 손을 말아쥐었다.

“아, 아. 레일라. 내 동생.”

피처럼 붉은 눈의 남자가 상처 난 어깨를 짚고 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챙. 쨍강. 챙. 챙.

뒤에서 부딪히는 검의 소리가 드디어 멎었다. 많은 이들의 발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골목 안을 어지럽혔다.

가까이 다가온 황궁 기사가 레일라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를 안고 있던 남자가 사나운 기운을 품어냈다. 다가오면 모두 베어버릴 듯한 날카로움이었다.

모두 그 자리에 멈췄다.

“이봐요! 일단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 상처를 살펴야 해요. 지금 그럴 시간 없다고요.”

씩씩거리며 남자의 앞으로 걸어가 외쳤다.

레일라를 빨리 황궁으로 데려가야 했기에.

어깨를 움찔하며 떨던 남자가 레일라를 안고 일어나 큰 걸음으로 골목을 벗어났다.

남자의 뒤를 따라 나와 대기한 마차에 올랐다.

순식간에 도착한 황궁의 침대에 레일라를 눕히는 순간이었다. 꽝 하는 굉음 소리를 내며 육중한 문이 거칠게 열렸다.

“비켜! 죽여 버리기 전에.”

프레드릭이었다.

항상 온화하고 이성적인 모습만 보다가 처음으로 보는 그의 모습에 멈칫하는 걸음이 뒤로 물러났다.

레일라를 침대에 눕히며 미쳐 손끝조차 떼지 못하고 있던 남자가 순식간에 그녀한테서 떨어져 나갔다.

“당장 궁에 있는 모든 궁의를 불러들여라. 안 되면 이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의원을 전부 들여. 당장!”

프레드릭의 외침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종과 시녀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지금 그의 눈에는 그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피를 흘린 레일라만이 그의 눈에 가득 차 있었다.

“아… 아… 레일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처가 심하긴 하지만,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어깨만…….”

“닥쳐! 다 잡아 왔는지나 확인해라. 내가 그놈들의 면상을 확인할 때까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려놔.”

먼저 도착해 진료 중인 궁의가 프레드릭의 기세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던 그가 레이오드에게 지시했다.

그의 눈은 침대 위의 레일라에게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살피던 시선을 돌려 프레드릭의 손에 의해 한방에 문까지 나가떨어져 있는 붉은 눈의 남자를 살폈다.

크게 다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메리아! 메리아!”

곧 터져 버릴 폭발 직전의 음성에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야 했다. 시선을 틀어 프레드릭에게 돌렸다.

붉은 기가 올라온 눈을 한 그가 바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뭔가를 눌러 내리는 모습이 몹시 낯설었다.

“…왜?”

그가 자신의 화를 눌러 내리기 위해 주먹을 말아쥐었다.

“왜? 레일라를 데리고 간 거냐?”

“…꽃을 보여주고 싶어서입니다. 폐하.”

“그까짓 꽃이 뭐 볼 게 있다고!”

그의 거친 고함을 들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자 방안으로 한 무더기의 사람이 들어와 침대를 온통 둘러쌌다.

“다 나가. 궁의와 공녀를 돌보던 시녀만 남기고 다 나가. 전부 나가라.”

낮게 깔린 음성에 살기가 묻어 나왔다. 그와 함께 방에 있던 많은 사람이 우르르 밖으로 빠져나갔다.

맨 마지막에 내가 나가려고 하자 문 앞에 쓰러져 있던 남자가 일어났다.

들어왔던 것처럼 같이 밖으로 나왔다.

* * *

“치료해라. 당장!”

알고는 있었다. 어깨를 다쳤다고 해서 목숨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녀는 약했다. 그것도 몹시.

무거운 명령을 내리고 그들에게 맡긴 후, 방을 나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발걸음이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발을 잡아끌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만나야 했다.

문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뒤로 돌려 침대 위의 그녀를 응시했다.

핏기없는 얼굴.

피가 잔뜩 묻어 있는 드레스.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작은 입술이… 내 심장을 멈추게 하고 있었다.

그래, 오늘에서야 알겠다.

‘레일라… 그녀가 없으면 나 또한 살아가지 못하겠지.’

심장이 속도를 늦췄다. 뛰기를 거부하는 심장에 손을 올려 퍽퍽 쳐대고서야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따라와.”

문 앞에 서 있는 칼라엘과 메리아를 데리고 집무실로 걸어갔다.

걷는 걸음마다 길게 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림자가 무거웠다. 집무실로 들어가 그들에게 손짓했다.

허공에 손짓하는 손끝이 미약한 바람에 흔들려댔다.

하아—

숨을 고르지 않으면 정제되지 않은 칼날 같은 말이 그대로 튀어나올 것이다.

“차를 내와라.”

그녀를 닮은 하얀 안개를 닮은 찻잔을 손에 들고 오래도록 입에 머금고 있다가 따스한 기운이 사라진 뒤에야 목으로 넘겼다.

“…메리아, 왜 데리고 나갔어?”

잠긴 목소리가 질책의 음색을 만들어 냈다.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녀 또한 놀란 상태로 온몸이 피범벅이었기에 다시 한번 화를 눌러 참고 말했다.

“네가 나쁜 뜻은 없었다는 것은 안다, 알지만. 지금은 시기가 나빠. 나에게 한 번이라도 물어야 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녀가 알 리 없다는 것을.

‘내가 항상 같이 있어야 했는데.’

생각을 거부한 머리가 결국에는 스스로가 잘 돌보지 않았다는 자책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잘못했습니다. 폐하! 모든 것은 제 책임입니다.”

“내가 지금 책임을 묻자고!”

입술을 끌어당겨 씹어대고 겨우 진정시켰다.

“상황이나 말해.”

단순히 꽃을 보여주려 했다는 메리아의 말이 끝나자 시선 끝에 걸린 칼라엘에게 눈길을 주었다.

“너는 왜 그곳에 있었지? 내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

“…황궁에서 나가는 레일라를 봤습니다. 그래서 의식하지 못하고 그녀를 따라 나갔습니다.”

내가 좀 더 신경을… 다시 이어지려는 자책을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 주변에 호위가 있었다.

‘메리아가 있었으니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많은 것을 함께한 그녀를 쉽게 막아서지는 못했을 테니까.

이건 명백한 내 실수였다.

“다 나가. 레이오드!”

집무실 문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이오드가 다가왔다.

“잡아 온 놈들에게 가겠다.”

“폐하, 제가 먼저 그들을 심문하겠습니다.”

감정이 이글거리는 서늘한 눈빛으로 레이오드를 바라보자 그가 급하게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를 제치고 문으로 걷다가 벗어나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침실에는 당분간 출입을 금한다. 둘 다 돌아가.”

“…….”

말이 없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레이오드와 함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폐하, 격렬한 전투에 다 죽고 3명만 남았습니다.”

“그가 보냈나?”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레이오드이니만큼 그가 누군지 알 것이다.

“네, 그렇게 보입니다.”

확실한 답변을 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다시 눌러 내렸다. 레일라의 그런 모습 뒤로 감정이 제어되지 않고 있었다. 말을 줄여야 했다.

눌러지지 않은 감정을 처리하지 못한 발걸음이 땅에 끌렸다.

“고문 담당은?”

“파벨 경입니다. 먼저 불러오겠습니다.”

서둘러 움직이는 레이오드의 뒷모습을 보고 멈춰 섰다. 정제되지 않는 분노가 들끓어 올라 내 앞에 누구든 눈에 띄면 베어 버릴 거 같았다.

“폐하, 아직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반 살수들하고는 다릅니다. 대부분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입을 엽니다만,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직접 만든 이들인가?

“짐이 가겠다. 안내해.”

파벨의 뒤를 따라 스산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감옥들 사이를 걸었다.

발밑에서 출렁거리는 물들이 시커먼 얼룩을 만들어 대고 점점이 옆으로 퍼졌다.

끼익.

삐걱대는 철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사지가 묶인 채로 피칠갑을 한 3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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