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래서 이쪽에 사람들이 없었나.’
이상하긴 했다.
유레안 제국과는 다른가, 라고만 생각했는데.
낯선 곳, 낯선 사람 틈 속에서 낯설어하는 내 모습을 위해 곳곳에 그의 배려가 녹아 있었다.
“공녀님…….”
의아한 듯 보는 시녀를 따라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왔다.
멍한 상태에서 나른해진 몸을 의자에 기대고 있자니 조금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학습에 충실한 몸이 칼라엘을 보자 스타멘 공작저에서 했던 것처럼 반응하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가 밉거나 싫은 감정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두려움.
그래, 학습된 두려움이었다.
* * *
레일라를 다시 방에 두고 나오며 뒤에 따라오는 레이오드에게 손짓했다.
“레이오드, 가서 칼라엘을 집무실로 불러와라.”
“네, 폐하.”
물러가는 레이오드를 향한 시선을 거두고 집무실로 향했다.
보이진 않지만, 이미 침실 주변으로 호위가 쫙 깔려 있어 그들에게 손짓했다.
더욱 철저히 주변을 경계하라고.
침실 주변에 눈에 보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폐하, 칼라엘을 불러왔습니다.”
드디어 이곳까지 따라온 그와 이야기를 할 때였다.
멈춘 손에 들고 있는 펜 끝에서 점점이 떨어져 내린 검은 잉크가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의 중앙으로 내려앉아 검은 물을 들였다.
“들여라.”
조금 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 들어오는 칼라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고갯짓으로 한쪽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인상을 쓰며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시종장을 손을 들어 막고 손짓으로 전부 물렸다.
“레이오드 너도 나가라. 전부. 차만 내와.”
“하지만, 폐하!”
“나가라고 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주춤거리며 망설이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는 레이오드의 모습에서 시선을 틀어 칼라엘을 향했다.
그는 표정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시선을 아래에 처박고 있었다.
시종장이 직접 마련해준 차가 탁자에 놓이자 손을 뻗어 찻잔을 들었다.
뜨거운 김이 찻잔에서 흘러나와 손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입 안에 머금었다.
“들지.”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찻잔으로 옮겨지더니 망설이는 손길로 찻잔을 쥐었다.
“이곳에서 그대가 뭘 하고 싶은 건가? 먼저 말해.”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잇새를 빠져나와 칼라엘에게 나갔다.
“…폐하, 전.”
어지러운 표정으로 칼라엘이 입을 열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 * *
프레드릭 황제를 만나기 전부터 멍해 있는 머리가 생각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제는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멈춘 머리가 말조차 만들지 못했다.
‘레일라.’
내 예쁜 동생인 레일라가 나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조금 전 테라스에서 보여준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폐하… 우리 레일라가… 우리 레일라가.”
“이젠 그대의 레일라가 아니다. 짐의 레일라다.”
당당하게 자신의 레일라라고 말하는 황제에게 반박할 수 없는 내 모습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마시던 차를 내리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비참했다.
항상 명령하면 인형처럼 표정 없이 따르던 레일라가… 그 레일라가 조금 전에 봤던 레일라와 동일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모르겠습니다, 폐하.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길을 좀 알려 주십시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어릴 적 레일라를 처음 본 뒤로 그 아이만 보면서 여기까지 살아왔는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고개를 들었다.
나에게 보여준 적 없는 표정으로 황제를 대하는 레일라가 생각나 다시 고개를 숙였다.
“길을 잃었습니다.”
내 말에 뜻 모를 미소를 입에 걸고 있는 황제의 표정이 깊어졌다.
“레일라가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녀가 원한 것이라면.”
지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서늘했던 몸에 조금 전 마셨던 따뜻한 찻물이 넘어간 곳만 따스할 뿐 온몸이 얼음덩어리에 둘러싸여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깰 수 없는.
“그럼, 레일라에게 묻도록 하지. 그대에 대해.”
묻는다는 말에 숙여 있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른 곳은 싫습니다. 그녀 곁에…….”
“불가한다.”
그녀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었다.
머리에 큰 충격이 얹어진 순간 나도 모르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무슨 정신으로 바닥에 내려갔는지 모르지만, 쿵 소리와 함께 무릎에 느껴지는 통증이 들고서야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무슨 짓이냐?”
멍해진 머리로 바닥에 닿게 머리를 숙였다.
“제발… 폐하! 저는 레일라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달라진 황제의 기를 느꼈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일어나, 앉아라.”
“제발.”
“앉으라 했다.”
무겁게 힘이 실린 음성이 서늘하게 머리에 떨어지고서야 일어나 소파에 몸을 묻었다.
레일라 옆에만 있게.
“물어본다 했다. 짐이 레일라에게 물어 답을 얻을 때까지 그녀 근처로 가는 것을 금한다. 명심해라.”
오늘 일 때문일 것이다.
테라스에 있는 그녀가… 적극적으로 움직여 황제의 허벅지에 앉아 있는 모습이 떠올라 눈을 길게 감았다.
형에게 레일라를 뺏겼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레일라의 곁에 있기만 하게…….”
“그만! 분명 묻는다고 했다. 다시 한번 말해두지. 그녀와 확실하게 말하기 전에는 그녀 근처에 오는 모습이 다신 눈에 띄지 않게 해라.”
차마 답할 수가 없었다.
* * *
칼라엘의 떨리는 손끝이 찻잔에 닿는 모습을 무감한 눈으로 훑어 내리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회오리가 스쳐 지나가도록 둘 다 입을 다문 채 그대로 있었다.
“전처럼 돌아가는 것은 포기해야 할 거다.”
“…….”
대답을 못 하는 그에게 다시 강요하지 않고 시선을 비틀어 내려 찻잔을 쥐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있는지도 몰랐던 소유욕이 솟구쳐 올라 마음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나가서 레이오드를 따라가라. 미리 말해두었으니.”
레일라가 있는 이곳과는 거리가 있는 곳으로 거처를 마련해 두었다.
“…….”
대답 없이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있는 칼라엘의 뒤로 오후의 햇살이 그늘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레일라가 어찌 나올까 하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 나는 시선으로 보다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나가. 당장.”
꼴 보기 싫으니.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런데도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불안한 열기가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빌어먹을.
그녀와 엮인 일만 마주하게 되면 감정이 먼저 툭툭 튀어나와 버리고 만다. 황제의 관을 쓰고 늘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던 내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예를 갖추고 물러나는 칼라엘의 그림자가 그가 나간 후에도 집무실 가득 진득하게 묻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폐하, 차를 더 드릴까요?”
가만히 손가락을 뻗자 시종장이 따뜻하고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길게 따랐다.
손가락을 뻗어 찻잔 위로 올라오는 하얀 뭉치를 손으로 잡아 당겨봤지만, 부질없이 부서지기만 하는 모습에 자조적으로 웃었다.
부서지는 사이로 레일라의 부드러운 은빛 머리가 잔상을 따라 부서져 내렸다.
결국, 찻잔을 들지 않고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처리를 기다리는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얼마나 오래 계속해서 같은 장의 서류를 손에 들고 있었을까.
“폐하, 이만 들어가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시종장의 조용한 말에 그제야 들고만 있던 구겨져 있는 서류 한 장을 한쪽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돌아가겠다. 이후에 아무도 다가오게 하지 마.”
“네,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시종장을 물리고 밖으로 나와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끌고 걸었다.
나의 레일라가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손을 들어서 막았다.
조용히 멈춰있는 그들 위로 긴 그림자를 남기고 성큼성큼 걸었다.
굳게 잠겨 있는 황금색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돌리는 순간 부드럽게 열리는 문 뒤로 저녁의 빛이 묻어났다.
“레일라…….”
빛을 등진 긴 은빛의 머리를 늘어트린 레일라에게 또 한 번 반했다.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아름다운 내 여인이 입을 열 때까지.
“프레드릭, 어서 오세요.”
저녁의 햇살이 그녀의 등 뒤로 환하게 부서져 내렸다.
내 연인은… 나만의 연인은 넓게만 보였던 방 한가운데에 서서 방의 주인인 나보다 더 주인 같은 모습으로 환하게 웃었다.
“…일이 끝나서 왔습니다.”
“오늘 힘들진 않았어요?”
문손잡이를 잡은 채 발을 내딛지 못하는 내 앞으로 그녀가 빛을 등지고 걸어와 손을 잡아끌었다.
미약한 힘.
끄는지도 몰랐던 작은 힘에 끌려가는 커다란 덩치가 낯선 모습을 등 뒤로 남기고 끌려갔다.
“식사는 이곳으로 들이라 했습니다.”
당분간은 그녀와 단둘이 있고 싶었다. 그러니 이곳에 그 누구의 발도 들이지 않게 하리라.
소파에 내려앉는 내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허벅지가 맞닿을 만큼의 거리로 옆에 앉았다.
“무료하진 않았습니까? 혼자 있기 그러면 항상 저와 함께 다니면 됩니다.”
약간의 진심을 담은 말을 뱉고 그녀의 표정을 살피자 환했던 얼굴이 굳었다.
“…좀 더 있다가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싫다가 아니었다.
놀란 눈으로 그녀의 입을 살피자 벌어졌던 입이 민망한 듯 꾹 닫혔다.
맙소사.
오늘 그녀가 내게 테라스에 해주었던 그 상황이 왜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이 나는 걸까?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자 노크 소리가 들리고 트레이가 들어왔다.
그녀만 보다가 어떻게 식사를 끝냈는지도 몰랐다.
보석 같은 눈이 앙하면 같이 앙하고 따라 했다는 기억만 남았다.
“오늘 힘드셨어요? 얼굴이 멍해 보여요.”
멍해 보이는 건 그대 때문인데.
“힘든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래도 해결은 잘되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녀의 걱정하던 얼굴이 풀렸다.
“다행이네요.”
해결되지 않은 건 그녀 옆에만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