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앞으로 길게 뻗어진 손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메리아를 보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뒤로 물러가던 손이 그녀 손에 잡혔다.
따뜻한 느낌이 묻어오는 작은 손이 마주 잡아 힘을 주었다.
‘이런, 악수를 신청하다니.’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나도 모르게 메리아와 잡은 손을 크게 흔들자, 그녀가 큰 소리로 웃었다.
‘멋있다.’
“이건 서로의 친근함을 표현하기 위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곳에선.”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 다시 그녀가 활짝 웃었다.
“저도 그럴까 싶어 잡은 거예요. 우리 이제 편하게 서로를 대하기로 해요.”
메리아와 잡은 손을 좀 더 크게 흔들었다. 메리아가 오랫동안 알아 온 친구 같았다.
그 순간, 꽝 하는 거친 소리로 문이 거칠게 열렸다.
“프레드릭!”
동시에 두 여자가 부른 이름의 주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갖춘 그로서는 의외의 모습이었다.
서두른 기색이 역력한 그가 내 바로 옆에 큰 소리로 앉았다.
커다란 소파가 출렁거렸다.
“메리아, 도대체 네가 무슨 일이야? 왜 여길 온 거야? 내 허락도 없이.”
그의 질책 어린 시선과 함께 책망하는 말이 메리아에게 쏟아져 나왔다.
겨우 만든 내 첫 번째 친구인데.
그래, 친구… 이제껏 한 명도 얻어 본 적 없는 나만의 친구.
급하게 손을 뻗어 그의 큰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잡아끌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도 보고 싶었어요. 프레드릭, 저 좀 보세요.”
들어올 때부터 분노로 짙어진 그의 황금빛 눈이 나와 맞춰지자 분노가 빠르게 사라졌다. 대신 자리 잡은 건 걱정이었다.
약간 축축한 그의 손이 내 손을 꽉 쥐었고, 불안한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살폈다.
“우리… 우리 친구 했어요. 저도 꼭 만나고 싶었어요.”
내 눈의 간절함을 읽었기 때문일까, 그의 살피는 시선이 오랫동안 내 얼굴에 머물렀다. 한참을 그렇게 보던 그가 내게서 눈을 돌려 그녀에게 향했다.
“…그래서. 친구?”
메리아에게 묻는 것인지 내게 묻는 것인지 모를 물음에 그녀의 입술이 씰룩거리며 위로 올라갔다. 삐죽한 웃음을 흘린 그녀가 양손을 겹쳤다.
“내가 묻고 싶은데. 참 우리 셋이 있을 땐 이제 편하게 말해도 되는 거지!”
물음이 아닌 통보처럼 말한 메리아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 * *
“정말… 내가 너 이런 모습 처음 보네. 어릴 적부터 봐온 냉정하고 감정 변화조차 없던 네가, 지금 땀 흘리도록 이곳에 뛰어온 거야? 내가 레일라에게 해를 끼칠까 봐?”
메리아의 그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메리아는 어릴 적부터 나와 함께 검을 들어 무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에 반해 레일라는 너무 가녀리고 연약했다.
밤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지 못할 정도로 연약한 그녀였기에 늘 걱정이었다.
얼마나 아끼고, 아껴서 겨우 몇 번 할 정도로 약한 그녀였으니.
어제도 다 끝내지 못하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지 않은가!
“뭐야? 진짜 그런 거야?”
메리아의 말이 다시 물어 왔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내 침묵을 긍정으로 읽은 메리아가 어이없는 한숨을 뱉어내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 참! 어이가 없어서. 물론 내가 너를… 그만하자.”
“메리아, 미안해요.”
그녀가 레일라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에요. 레일라. 세상에… 내 친구가 이렇게 못난 사람인 줄 처음 알았네요. 부족한 친구지만 잘 부탁드려요.”
말을 마친 메리아가 바로 등을 돌려 문으로 향하다가 다시 뒤돌았다. 그녀의 장난스럽게 휘어진 눈이 레일라를 향해 찡긋거렸다.
“참, 우리 자주 봐요. 저도 레일라가 맘에 들었으니까요.”
“…네. 그렇게 해요. 저도 꼭 그러고 싶어요.”
그녀는 메리아가 나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고, 나는 그런 레일라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는… 이제는 나의 소꿉친구까지 그녀를 맘에 들어 하다니. 이 상황에서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할지 몰라 표정이 이상해졌다.
내 표정이 묘해 보였을까.
시선을 돌린 그녀가 눈을 맞춰오더니 꽉 잡은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댔다.
“저 걱정해서 오신 거예요? 프레드릭의 좋은 친구를 저도 친구로 삼게 해줘서 고마워요.”
“그대가…….”
큼큼.
왠지 모르게 잠겨버린 목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손에 닿은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그냥 그대가 걱정되었습니다. 메리아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메리아가 레일라를 만나기 위해 방에 찾아갔다는 말을 듣자마자 붙잡는 귀족들을 뿌리치고 급하게 달려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내 눈에 보이는 레일라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부드러운 살이 손끝을 스치는 느낌에 시선을 내리다 그대로 멈췄다.
레일라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손끝에 눌러앉아서.
“프레드릭, 저 걱정하지 말아요. 여기까지 오기가 힘들었지만, 당신을 위해서 힘을 내볼게요. 그러니 저 믿어 주세요.”
이러니… 내가 그대에게 벗어날 수 없겠지.
손끝에 맹세하듯 진득하게 눌러앉은 입술의 감촉에 날아가려는 이성을 온 힘을 다해 붙잡아 내렸다.
“…믿습니다. 그대를. 누구보다도 더.”
활짝 웃은 그녀가 손끝에 댄 입술을 떼고 내 입술을 물었다. 사랑스러운 그녀를 허벅지 위에 올리고 점막을 가르고 혀를 집어넣었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그녀 안의 타액을 꿀꺽거리며 집어삼키고 있자니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으음, 프레드릭! 잠시만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조금 떼자 그녀가 뭔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다시 혀를 밀어 넣으려 하자 그녀의 손이 입술을 가렸다.
“설마, 지금 일하다가.”
“…네. 그대가 걱정돼서.”
못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는데.
민망함에 시선을 내리자 청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처음으로 들리는 레일라의 큰 웃음소리,
멍하게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그녀가 웃던 모습 그대로 내 팔을 끌고 방문 앞까지 데려갔다.
그제야 문 옆에서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는 시녀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다녀오세요. 저 여기에 잘 있을 테니까요.”
“…네. 식사는 꼭 많이 드십시오.”
매끼 식사를 그녀와 함께하고 싶어도 같이 하기 힘들 것이다.
가고 싶지 않은 걸음을 옮겨 방문을 나서자 레이오드가 급하게 다가왔다.
“폐하, 얼른 가셔야 합니다. 뉴먼 공작과 박스터 후작이 다른 귀족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들이 죽고 싶어 환장했군.”
* * *
그가 나간 문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방금 옆에 있었던 그의 향기가 느껴져 숨을 깊게 들이켜 입 안에 머금었다.
“공녀님, 폐하께서 식사는 이곳으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지금 가져올까요?”
“아니, 조금만 있다가. 잠깐만 테라스에 나가볼 수 있을까?”
“네, 그럼요. 공녀님. 폐하께서 공녀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다 잘 들어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래.”
시녀가 안내하는 곳을 따라 걸었다.
황제의 넓은 방이라 그런지 한참을 걸어야 했다.
시녀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테라스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부드러운 천에 둘러싸인 푹신한 의자가 주는 포근함을 느끼며 엉덩이를 깊숙이 묻고 정원으로 눈길을 돌렸다.
“와…….”
황궁은 황궁이었다.
공작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꽃들이 각각의 빛을 뽐낸 광경이 경이로웠다.
저곳을 걸어보고 싶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가 시간이 날 때 아니면 오늘 만난 메리아와 같이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이곳이.
이제 내가 살아가야 할 곳일까?
조금 전에 급하게 달려온 그의 모습이 생각나 행복감이 몰려왔다. 처음 느끼는 행복감이었다.
‘걷고 싶다. 그와 함께.’
메리아 앞에서 보여준 모습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두려움마저도 녹여 버렸다.
‘그에겐 나뿐이다.’
이제는 그가 없으면 나도 살 수 없을 거 같았다. 행복에 젖은 눈길이 다시 정원을 훑다가 이질적인 곳에 멈췄다.
“으악.”
순간적으로 놀란 마음에 입 밖으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오… 오라버니?”
이곳에서 지금 보리라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 정원에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가 있는 테라스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칼라엘 오라버니.”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기 전부터 보고 있던 시선과 정면에서 마주했다.
왜 이곳에.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레일라.”
모든 것이 정지하고 그의 모습만이 커졌다.
시야를 돌리게 만든 바람도 멎고, 그 바람에 날리던 꽃잎조차 멎어 모든 것이 정지했다.
지금까지 잊어버렸던 사람.
프레드릭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한다는 생각만 가득 찬 머리가 생각을 멈췄다.
다시 한번 그의 입이 열리고 정확히 내 이름이 만들어졌다.
“보고 싶었어. 레일라.”
불안한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에 그의 집착과 광기만이 떠올랐다.
칼라엘의 커다란 걸음이 정원을 가로질러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을 눈조차 돌리지 못하고 마주해야 했다.
손을 움직일 수도 누군가를 부를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딸각.
찻잔이 놓이는 소리가 나를 멈춤의 마법 속에서 끌어내어 현실로 이끌어 주었다.
“공녀님, 차를 내왔습니다. 무슨 차를 좋아하신 지 몰라서 폐하께서 즐겨 드시는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래. 고마워.”
목소리 끝이 떨렸다.
정지에서 깨어난 손을 들어 올려 찻잔 속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찻물이 목을 따끔거리게 했다.
“레일라.”
애절한 부름이 이어졌다.
이곳은 2층이라 그가 쉽게 올라오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없는 용기를 끌어 올려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 쪽으로 걸었다.
“오…라버니.”
그의 살피는 시선이 머리에서 시작해 천천히 내려와 얼굴 전체를 살피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속까지 전부 살펴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져 결국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는 건 몸에 습관처럼 굳어진 버릇이었다.
“레일라…….”
“…네, 오라버니.”
그의 잠긴 목소리가 바로 앞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애절한 목소리에도 시선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넌, 넌… 이 오라버니 생각나지 않았어? 보고 싶지도?”
조금도.
그의 목을 긁어낸 목소리가 테라스를 넘어왔다.
“레일라.”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본 그가 다리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