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깜빡 깜빡 깜빡.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그제야 들어오는 시야에 눈알을 굴렸다.
몸이 꽁꽁 묶여 있는 상태라 움직이지 않았다.
“맙소사. 프레드릭.”
그의 얼굴이 가슴의 중앙 가슴골 사이에 붙어 있었다.
자는 건가, 싶어 시선을 내려 살폈다.
부드러운 머리가 가슴을 간질거리고 있었다. 용기를 얻은 손을 들어 그의 턱을 따라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 이곳저곳을 덧그렸다.
지금이라면.
“프레드릭… 저도 사랑하는 거 같아요. 아니… 아니에요. 사랑해요. 내 것이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당신이 욕심나요. 그래서… 말하지 못했어요.”
그가 내 유일한 세상이 될까 봐.
그만이 내 유일한 숨이 될까 봐, 아직도 겁먹은 마음이 그의 눈을 마주 보고 말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
그 마음이 반영되어서일까, 그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끝이 가느다랗게 떨리자 심호흡을 길게 했다. 멈춘 손을 움직여 그의 눈 끝을 따라 손으로 동그랗게 그렸다.
“너무 기댈까 봐 두려워요.”
처음으로 고백한 마음이 벅차올라 숨이 저절로 멈췄다.
“…당신에게 너무 짐을 줄까 그게 무서워요. 사랑해요. 프레드릭. 내 생에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사람.”
처음으로 내 것이 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전부 내 선택으로.
“프레드릭, 사랑해요.”
긴 여운을 뱉어내듯 고백이 길게 이어졌다.
* * *
“내가…….”
파악.
너무 놀라 얼굴에 대고 있는 손을 치우는 그녀의 손을 빠르게 잡아챘다.
그녀가 깨기 전부터 깨어 있던 몸이 그녀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강제로 멈췄을 뿐이었다.
그랬는데.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일어나 다시 쳐올리려는 허리를 다잡고 있자 그녀의 말이 들렸다.
“내가… 내가 그걸 원합니다. 레일라. 그대가 내게 기대 주길, 그대의 세상에 나만이 있기를. 그걸 내가 원해요.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다 줘요. 당신의 두려움까지도.”
고개를 숙이며 멀어지려는 그녀를 감싸 안아 몸을 틈 없이 다시 맞댔다.
“제발… 레일라. 그대가 없으면 이제 살아갈 수 없는 몸입니다. 응? 내게 다 줘! 제발. 그대는 그냥 주기만 하면 돼.”
멀어지려는 그녀의 몸짓이 멈추고 보석 같은 눈이 내 눈을 정면으로 맞춰왔다.
눈빛이 이어졌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그녀와 나의 눈빛이 이물질 없이 서로의 눈빛만이 존재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눈빛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자 그녀의 아름다운 눈이 곱게 휘어졌다.
“제발. 나 그거 하나면 돼. 응? 내게 모두 다 줘!”
의식하지 않은 말들이 튀어 나갔음에도 그런 모든 것이 인식조차 되지 않았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모습이 애처로웠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이었다.
황제로서의 감이 지금, 마지막 그녀의 벽을 허물어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으니.
“내게 다 줘.”
“…네. 네. 네! 그래요. 프레드릭. 그럴게요. 당신이라면.”
완전한 만족감.
황제의 관을 썼을 때조차 느끼지 못했던 행복감.
살아 있는 뿌듯함이 가슴 가득 채워져 그녀의 아래로 향했다. 도저히 이 몰아치는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막 갈라진 틈에 입술을 대고 혀를 밀어 넣어 그녀의 안을 핥았을 때였다.
“폐하! 폐하!”
이런 젠장.
갈라진 틈에 박혀있는 혀를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 욕을 짓씹고 있으니 부르는 소리가 높아졌다.
“프레드릭, 으으. 저기…….”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솟아오르는 화를 겨우 눌러 내렸다.
“네.”
안에 들어가 있는 혀로 인해 발음이 뭉개져 나오자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겨우 올라오는 화를 누르고 거칠게 침의를 펼쳐 걸친 채 문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 폐하! 나와보셔야 할 사항입니다.”
“무! 슨! 일이냐고.”
“회의입니다. 오랜만에 폐하께서 돌아오셔서 수도의 귀족들이 황궁으로 들어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젠장.
단,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눈을 뒤로 돌려 침대에 기다리고 있는 레일라가 보였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지금 귀족들을 잘 구워삶아야 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입지가 단단하지 않은 그녀를 위해서.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한번 꽉 쥐었다 폈다.
“…기다리라고 전해라.”
뒤를 돌아 침대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녀와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무 강했기에.
“레일라, 급한 일이 있어서 가야겠습니다. 혼자 있기가.”
“전 괜찮아요. 혼자 있을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정말로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할 그녀였지만, 지금은 온전히 마음을 연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당당함을 아니까.
아직도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페니스를 그대로 둔 채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씻고 밖으로 나갔다.
“레이오드, 가자.”
“폐하!”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내가 분명 선을 넘지 말라 했다. 너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너는 짐을 따라야 한다.”
입을 꾹 다문 채 뒤로 붙어오는 레이오드에게 시선을 떼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위해서 이 제국에 발판을 만들어줘야 할 때였다.
* * *
그가 나가는 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어제 봤던 시녀와 다른 시녀가 같이 들어왔다.
“공녀님, 욕실에 물을 받아 놓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저희가 부축해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움직이는 데 조금 불편할 뿐 누군가의 부축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들을 보고 그제야 방 곳곳에 시선을 뒀다.
그의 침실.
황제의 침실이 주는 화려함 말고는 크게 다른 바가 없을 정도로 그를 닮아 있었다.
간소함과 편안함이 주는 모습이 꼭 그를 닮아 있었다.
이제는 그를 믿기로 했으니.
아니다. 그 전부터 믿고 있던 그에게 마음을 확실히 열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하니… 이곳이 새로웠다.
천천히 일어나 걷고 있자니 고개를 깊이 숙인 하녀가 다가왔다.
“공녀님, 욕조에 물을 받아놨습니다.”
내가 불편할까 봐 사람을 붙이는 데 있어도 신중히 처리했을 그의 배려가 이곳에 있는 두 사람에게도 느껴졌다.
“그래, 알았어.”
욕실로 걸어가 욕조에 몸을 담그자 조심스러운 손길이 다가왔다.
내 몸에 손을 뻗은 그녀들의 손이 주춤거렸다.
왜 그러나 싶어 목 아래로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맙소사. 프레드릭.’
무슨 짐승도 아니고… 가슴 주변이 온통 잇자국에 물어 뜯겨 있었다.
얼마나 물어 뜯어 놨던지 잇자국과 울혈 자국으로 인해 하얀 곳이 없었다.
눈뜰 때 그의 얼굴이 가슴에 묻혀 있다는 건 알았지만.
민망한 마음에 눈을 감아 버렸다.
눈치가 빠른 그녀들이 표정을 갈무리하고 조심스럽게 씻겼다.
목욕이 다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걸음이 뚝 멈췄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도저히 만날 수 있는 길이 없어 무작정 찾아오고 말았어요.”
메리아, 프레드릭의 사랑인 여주.
밝고 맑아 모두에게 사랑받는 소꿉친구기도 한 여주.
“…네, 반가워요. 저, 일단 앉을까요?”
내 방은 아니었지만, 먼저 자리를 권하고 화려한 소파로 가서 마주 앉았다.
그녀가 소파에 깊게 몸을 묻히고 내게 눈을 마주해왔다.
검은색에 살짝 핑크빛이 내려앉은 맑은 눈망울을 보고 눈을 휘어 웃었다.
“전 레일라 스타멘입니다. 아시겠지만, 이 제국이 아닌 유레안에서 왔어요.
“전 메리아 레이언이에요. 폐하와는 소꿉친구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메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역시 상냥하고 밝은 여주다웠다.
“네,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메리아. 레일라라고 불러주세요.”
그녀의 살피는 시선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떨어져 내렸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와 내 눈에 고정되었다.
다행히도 적의가 느껴지는 시선은 아니었다.
“저에게 하실 말이 있나요?”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그녀에게 별다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 살피는 시선을 받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처음이라서요. 음… 그에게 사람이 생긴 건요.”
그냥 사람이라는 건가?
“확인하고 싶었어요. 어릴 적부터 봐왔던 사이라… 이건 뭐랄까, 그가 항상 잘되기를 바라거든요.”
나도 그렇다는 말을 차마 뱉어내지 못하고 그녀를 보던 시선을 비켜 내렸다.
그녀는 어떤 마음일까?
연인으로 사랑하는 마음일까, 싶은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어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저만의 마음이긴 하겠지만, 그를 마음에 두었거든요.”
나만 아니었으면 그도 당연히 메리아를 마음에 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시선을 들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일까.
“그는 아니지만요.”
그래, 그의 모든 눈빛과 몸짓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가 아니면 이제 나도 살 수 없다.
“…네.”
“직접 얼굴을 보고 싶어 무례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아니요. 저도 만나고 싶었어요.”
그녀의 눈이 더 커졌다.
“그가 저에 대해 말했나요?”
실수했다.
조용히 눈을 내리고 티 나지 않게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한 모금 입에 밀어 넣고 삼켰다.
“…아니요. 오는 중에.”
말을 적당히 잘랐다.
“걱정되었거든요. 옆 제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요. 무사한 모습을 빨리 보고 싶어 갔는데…….”
여자의 직감이었겠지.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가 그토록 지키려 노력한다는 것을.
“그때 느꼈어요. 그가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구나, 하구요. 오랫동안 봐왔거든요.”
심장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펄떡거렸다.
“레일라도 같군요. 사실은 그걸 보고 싶었거든요. 그가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으니까요.”
찻잔을 내린 눈을 들어 올렸다.
‘내가 그렇게 보인다고?’
그런 내 모습에 메리아의 눈이 크게 휘었다.
“…….”
“이제 확인했으니 됐어요.”
안심하는 그녀에게 머리를 걸치지 않은 말이 튀어 나왔다.
“메리아, 저와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나요?”
내 뜬금없는 말에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놀라움으로 물들어갔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웃었다.
“역시… 그가 사랑할만한 사람이네요. 마음에 두었다는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니.”
하아—
크게 숨을 한번 뱉어낸 그녀가 찻잔을 내리고 두 손을 들었다.
“졌네요. 네! 좋아요. 우리 친구해요. 레일라 같은 사람과 친구 하면 저도 영광이죠.”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