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60)

47화.

부끄러움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하지만 이 제국의 황제에게 안겨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목에 감긴 손에 힘을 주었다.

“내려줘요. 폐하.”

작게 속삭인 내게 그의 황금빛 시선이 떨어져 내렸다.

“상관없습니다. 저들은 나의 신하일 뿐이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그대를 걷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레일라… 나 이외에 누구도 그대를 안지 못합니다.”

응?

덤덤한 모습으로 그가 큰 보폭으로 걸었다.

처음 와보는 나페아 제국 황궁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눈을 꾹 감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웅장하게 태양을 닮은 황금 칠로 점철된 커다란 문이 보였다.

그가 고갯짓을 하자 커다란 문이 양쪽으로 소리도 없이 열렸다.

“이곳은 내 침실입니다. 이제는 그대의 침실이기도 하겠군요.”

“…하지만 폐하. 손님방으로…….”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나 자신이 레일라와 한시라도 떨어져 있기 싫으니까요. 그러니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건 아닌데.

그는 이 제국의 황제다.

황제인 그가 결혼도 하기 전에 여자를 침실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대는 편하게 있으면 됩니다. 모든 것은 나한테 맡기고. 일단 오늘 돌아와 살필 곳이 많으니 나가야 합니다. 시녀를 부를 테니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침실 안에 있는 커다란 침대에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부드러운 손길로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준 그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대가 불편할까 봐 시녀 한 명만 있게 하겠습니다. 몸을 움직이기 힘드니 누구라도 있어야 하니까요. 씻는 것은 다녀와서 같이 씻기로 하고.”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그의 등 뒤로 내 시선이 저절로 따라붙었다.

문을 나서기 전에 그가 돌아보고 환하게 웃어 주고 나간 후에야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의 얼굴 위로 내려앉은 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그를 닮은 향기가 날아와 내가 누워있는 침대를 가득 적시고 그것도 부족해 흘러넘쳐 그의 방 가득 퍼져나갔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넓은 방이 그의 향기로 온통 점칠되었다.

맙소사.

떨리는 손으로 부드럽게 덮여 있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 위를 덮었다.

“프레드릭… 당신은 도대체.”

그동안 묻지 못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왜 여기까지 왔냐고.

왜 날 구하기 위해 황제인 그가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나에게 왔냐고.

“왜? 왜 그랬어요?”

무서워서 묻지 못했던 말들이 떠올라 눈이 화끈해졌다. 두 오라버니에게 달아나기 위해서 살아온 세월이 자그마치 10년이었다.

그랬는데 10년 동안 하지 못한 일을 그는 단, 며칠 만에 바로 해내 버렸다.

그리고 여기… 나페아 제국에 그의 침실 위에 누워있는 나 자신이 믿기지 않아 손을 들어 뺨을 세게 쳤다.

철썩 소리가 방의 고요를 갈랐다.

“고… 공녀님.”

엉?

생각이 빠져있는 통에 누가 들어온 지 모르고 있었다.

“빨리, 빨리 가서 폐하께 이 사실을 알려야겠습니다.”

다급한 걸음이 침대에서 멀어지자 그녀를 부르기 위해 목청을 높였다.

“아, 안 돼요. 잠시만요. 아… 아니, 이쪽으로 와줘.”

멀어지던 걸음이 멈추고 침대로 가까워지는 사람을 눈에 담았다. 낯선 복장을 한 갈색 머리의 시녀였다.

이 제국의 말이 모두 통함에 감사하며 입을 열었다.

“화… 화장실이 좀 급해서. 그래서 그런 거니 갈 거 없어.”

“네?”

그녀의 시선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폐… 폐하께서 공녀님의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바로 알리라고 하셔서…….”

“아, 그래서 화장실에 좀 데려다 달라고.”

서둘러 멍청한 표정을 정리한 그녀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도움을 받아 침대 끝을 짚고 일어섰다.

“아.”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인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공녀님!”

그녀가 서둘러 몸을 낮추고 내 팔을 부축해 다시 침대에 앉혔다.

부산하게 움직인 그녀의 인상이 구겨졌다.

스타멘 공작저에서 보았던 하녀의 눈과는 다른 눈빛을 오랜만이었다. 그게 신기해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눈치를 보면서 지낸 세월답게 다른 사람의 눈빛을 쉽게 읽게 되었다.

이건… 아마 전생부터였겠지만.

손수건을 꺼내.

손수건?

그녀를 살피다가 손수건을 꺼내 무릎에 대는 그녀를 보고 내가 더 놀랐다.

“공녀님, 피가… 어떡해요. 제가 가서 바로 폐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아니야. 그러지 마. 이런 것은 별것도 아닌데. 그냥 화장실에 갈게.”

계속해서 밖으로 가려는 그녀를 잡고 화장실에 데려다 달라고 몇 번을 말한 끝에 갈 수 있었다.

무릎이 조금 까져 피가 나긴 했지만, 별것도 아닌 상처였다.

그녀의 부축을 받고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얼마나 독한 약을 썼는지, 몸의 움직임이 아직도 편치 않았다.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리고 시종이 문을 열고 다가왔다.

“폐하께서 궁의를 보냈습니다. 공녀님의 몸을 자세히 살피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들여보내.”

그가 보낸 궁의를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공녀님, 폐하께서 공녀님을 세밀히 살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허락해 주시면 몸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네.”

조심스럽게 다가온 궁의가 진료를 시작하자 옆에서 시녀가 도와주었다.

한참 몸을 살피던 궁의가 진료가 끝나고 돌아가자 눈을 감았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오늘따라 유달리 짜증 났다.

마음이 지쳐서인지 쉽게 잠에 빠져들었다.

“으음. 간지러워.”

들어 올린 손이 누군가에게 잡혔다.

“레일라, 식사는 하고 자야 합니다. 그대로 계속 잠들면 힘듭니다. 자 침대에 기대…….”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쓸어내리던 그의 손이 뚝 멈추더니 긴 손가락을 뻗어 뺨을 쓸어내렸다.

“레일라… 이건, 도대체.”

그의 음성에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아, 제가 그랬어요. 그러니까 몸의 감각이 돌아왔나 살피기 위해서요.”

그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그대의 몸 어디에도 안 됩니다. 차라리 나를 때려요.”

목을 긁어내는 걱정하는 말.

고개를 숙여 알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웃으며 물러나 손수 트레이를 끌고 와 음식을 먹여주었다.

“이런 건 시녀를 시켜 주세요. 폐하가 직접 하지 마세요.”

“내가 싫은 겁니까?”

“아니, 지금…….”

“그럼 됐습니다.”

뭐가?

어리둥절해 있는 내 입이 꽉 찼다. 그가 넣어 주는 음식으로 인해.

그렇게 그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내 시중을 들었다.

“…프레드릭.”

“내일이면 몸이 전부 풀릴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오늘만 허락해 주세요.”

그의 모든 말이 내게 향해 있음을.

그의 손길이 내게만 향해 있음을.

오늘따라 선명히 각인되듯 보였다.

프레드릭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가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뻗은 손을 주춤하고 있자 내가 입을 열었다.

“안아서 데려가 줘요.”

어느새 잠긴 목이 허스키한 말을 뱉어냈다.

그가 나를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황제의 침실에 어울리는 화려한 욕조가 있는 곳으로.

어느새 따뜻한 물이 받아 있는 욕조로 걷던 그가 따라오는 모든 사람을 손짓으로 물렸다.

그의 커다란 손에 맞지 않는 섬세한 손길이 드레스를 조심히 벗겨 내렸다. 오래 검을 잡은 굵은 마디에 어울리지 않은 손길은 놀랍도록 섬세했다.

나를 챙긴 그가 자신의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좀 뜨거울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까?”

“…네.”

그의 세심한 배려에 일렁이는 심장이 빠르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앞으로 달려 나가는 심장이 튀어 나오기 전에 멈춰야 했다.

‘제발, 멈춰.’

심장 소리를 감추기 위해 그의 목을 더 끌어안고 단단한 가슴에 뺨을 묻었다.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 모를 소리가 일정하게 같은 속도로 뛰었다.

귀에 울리는 심장의 소리와 함께 엉덩이 아래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그의 페니스가 느껴졌다.

끄응.

그의 애끓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몸이 멋대로…….”

그가 말하고 있는 입을 찾아가 그대로 빨아 삼켰다. 말을 다 잇지 못한 그가 딱딱해진 턱을 내리지 못하고 시선만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늘 나를 먼저 살피는 선명한 그의 시선.

* * *

목에 감고 있는 레일라의 가느다란 손에 미약한 힘이 들어간다고 느낀 순간,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녀의 이런 모습이 나를 벗어나지 못하고 했다.

내게만 보이는 다가오는 레일라의 모습.

할짝거리며 입을 핥던 그녀의 작은 입술이 떨어져 가는 궤적을 따라 그대로 입술을 물었다.

항상 미치게 하는 그녀의 입술에 다시 미쳐갔다.

“레일라, 입에서 물맛이 납니다.”

내 말에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어느새 튄 물방울이 그녀의 얼굴 곳곳에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물맛이라고 했지만, 그녀의 맛이 더 강한 입술이었다.

조금 벌어진 입술을 다시 빠르게 엮었다.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가 혀를 옭아매고 끌어당겨 끈적하게 엮었다.

움찔거리는 몸짓 사이로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혀가 빨리는 소리가 하얀 연기에 가득한 욕실 안을 가득 채웠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그녀의 입술 안으로 들어가 여린입천장을 쓸고 목 안쪽같이 깊숙이 혀를 집어넣었다.

단내가 넘어오는 샘을 찾아 더 깊이 쑤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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