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60)

46화.

메리아는… 나에게 특별할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같이 커야만 했던 사정도 있었고, 유모의 딸이기도 했다.

목숨을 구해준 유모의 딸이었기에 황제가 된 후에도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편하게 지내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친구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진정한 하나뿐인 친구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 마차에 있는 레일라에게 가려는 시선을 다잡기 위해 고개에 힘을 줘야 했다.

시선에 힘을 주며 메리아의 얼굴에 고정했다.

친동생 같은 메리아에게 다른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는데.

조금 더 어릴 때는 안기는 것도 다 받아줬는데 지금은 뭔가 어색했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래서 오늘쯤 이곳에 도착한다는 소식에 쉬지 않고 달려왔어. 그런데 왜 그래? 조금 전에 레이오드가 마차 쪽에 다가가지도 못하게 하던데.”

레이오드와도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란 탓에 뭐든지 같이 했었다.

“네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일단 이곳에서는 위험하니까. 궁에 돌아가서 날을 잡아 소개해줄게.”

메리아의 검은빛에 가까운 분홍색 눈이 크게 뜨였다.

“누군데. 내가 모르는 사람도 있는 거야?”

“일단 가서 이야기하자. 여기는 위험해.”

“나도 마차에 같이 타면 안 되는 거야?”

나는 괜찮은데 그녀가 불편해할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괜찮다 할 것이 뻔하긴 한데… 그래도 레일라가 불편한 건 나 자신부터 싫었다.

“안 돼. 네게 소개해 줄 사람이 불편할 거야.”

조금 북쪽에 있는 나페아 제국의 특성상 그녀가 살던 곳보다 서늘한 것이다. 레일라가 추울까 걱정되어 시선이 자꾸 마차로 향했다.

서늘한 바람이 메리아와 나 사이를 훑고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머리에 힘을 주고 앞쪽을 살폈다.

보이는 것은 없었고, 가리는 것도 없으니 위험은 없을 것이긴 한데.

황궁에 도착하기까지는 3시간은 더 가야 할 것이다. 모든 신경에 마차에 혼자 있을 레일라에게 향하고 있었다.

“프레… 프레드릭!”

팔을 흔들며 말하는 메리아로 인해 그제야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야.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래? 왜 내 말을 못 듣는 건데?”

“아… 미안. 뭐라고 한 건데?”

“한 번 물어봐 주라고. 같이 마차에 탈 수 있는지. 네가 그러니까 이상하다.”

머리가 휙 소리를 내며 레일라가 있는 마차로 돌아갔다.

“…아니, 오늘은 그냥 말 타고 가. 빠른 시일 내에 자리를 마련할 테니. 그렇게 해줘. 메리아.”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메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살폈다.

“별일은 아니고, 그녀가 불편할까 봐, 그래.”

“뭐라고? 그녀?”

메리아의 분홍빛이 도는 눈이 크게 뜨였다가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만. 알았어. 가서 이야기하자.”

수긍한 메리아가 같이 온 호위와 함께 말을 달려 먼저 황궁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하얀 먼지가 여운을 길게 남겼다. 점점 작아지는 메리아의 뒷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몸을 돌렸다.

“레이오드. 나와.”

순식간에 다가온 레이오드가 옆에 딱 붙어섰다.

“메리아가 왜? 설마 네가 나오라고 한 건 아닐 테지?”

어느새 마차 쪽을 보던 시선을 돌려 그를 보자 그의 고개가 땅으로 처박혀 있었다.

‘정말, 그렇게 당부했건만.’

그가 아니면 메리아에게 연락할 사람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확인하고 나니 씁쓸했다.

“저는… 폐하.”

“레이오드. 네가 어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겠다. 난 메리아에게 마음이 전혀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레일라 영애니.”

어릴 적부터 같이 보아온 레이오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안다.

나 또한 레일라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그러니 너도 명심해라. 레이오드. 짐이 두 번 다시 말하진 않을 것이니. 이제 짐에겐 레일라 뿐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레이오드의 고개가 아래로 더 떨어져 내렸다. 그가 왜 그러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친우가 아닌 황제로서의 첫 명령이었다.

누구보다도 잘 아는 레이오드이니만큼 반드시 알아들었을 것이다.

마차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자 ‘쿵’ 하는 소리가 발걸음을 붙들었다.

“레이오드. 무슨 짓이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레이오드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릎을 꿇고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기사의 발소리가 들렸다. 이러다가는 레이오드의 모습을 보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폐하. 제발 메리아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일어나. 일어나라고 했다. 당장!”

기사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런 모습을 그들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노기 어린 음성에 그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숙인 고개 사이에 숨어 있는 그의 얼굴을 향해 서늘한 시선을 고정했다.

“네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메리아와 나는 그런 사아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본 너야말로 잘 알 텐데.”

깊이 숙어진 레이오드의 모습이 곁으로 도착한 기사의 눈에 들어갔다.

“폐…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서둘러 예를 갖추는 그들을 손으로 저어 보내버리고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레이오드,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 짐의 성격을 모르는 네가 아니니 말이다.”

다시 한번 황제로서 강조하고 마차의 문을 열었다.

훅 끼쳐오는 비릿한 향 속에 쌓여 있는 레일라의 보랏빛 눈이 기꺼웠다.

“후, 레일라. 다녀왔습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둘러 다가가 레일라를 안아 들었다.

계속 누워만 있는 그녀가 얼마나 갑갑할지 걱정되었다.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금방 다녀오려고 했는데… 조금 늦었습니다.”

체온이 낮은 손이 내 양 뺨을 감쌌다.

급하게 안아 올리느라 이제야 느낀 그녀의 작은 손.

“레일라…….”

“아직 완전치는 않지만, 조금씩 움직여져요. 대신에 다리에는 아직 힘이 들어가지 않네요.”

작은 손이 부드럽게 얼굴을 감싸자 그 손길을 타고 소름이 돋을 정도의 짜릿함이 전신에 퍼져나갔다.

불쾌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이 손짓 하나에 이런 반응이라니.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다 눈을 뜨고 그녀의 손끝에 입술을 눌렀다.

“…천천히,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내가 있으니.”

레이오드에게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지금 내겐 온통 레일라 뿐이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집착과 소유욕은 오로지 그녀 것이다.

오늘 그의 행동은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레일라를 두고 다른 여자는 생각할 틈이 어디 있다고.

슬쩍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려 허벅지 사이를 스쳐 지났다.

레일라가 아닌 여자와는 가능하지도 않을 텐데.

마차가 출발하자 그녀가 내게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몸을 들어 올렸다.

“이제 이곳에서 3시간 정도만 가면 됩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됩니다. 레일라,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 옆에만 있으면 됩니다.”

“…네.”

* * *

프레드릭의 절절한 눈빛을 더는 마주하기 힘들어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그의 입술이 내 손가락 하나하나에 촉촉한 기운을 남기는 느낌이 너무 선명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손끝 키스를 마친 그가 내 몸을 편하게 기대게 했다.

그의 손이 스친 곳마다 따뜻해졌다.

“레일라, 여긴 괜찮습니까?”

곳곳을 더듬으며 물어대는 그에게 고개만 슬쩍슬쩍 숙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이런 행동에 심장이 속도를 높였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자 그의 손길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자 마차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폐하,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황궁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속도를 늦춘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밖에서 시작한 웅성거림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가 탄 마차가 제국 내 수도로 들어오자 수도에 있던 사람들이 마차에 있는 태양의 눈을 보고 황제임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레일라, 이제 나페아 제국의 수도를 지나면 바로 황궁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이 그대에게 집이 되었으면 합니다.”

집…내 집.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움이 더욱더 커지고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이제 황궁입니다.”

이곳에서는 긴장할 일이 없을 거로 생각한 거와는 반대로 몸이 저절로 긴장되었다.

그가 허벅지에 앉아 있는 내 등 뒤로 손을 들더니 힘을 주고 눌렀다.

그의 근육 하나하나까지 느껴질 만한 접촉의 맞물림.

등을 쓸어 내리는 손길 뒤로 귀에 내려앉는 따스한 숨의 느낌.

“레일라, 이곳에서 그대를 아프게 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편히 계시면 됩니다.”

그는 다 아는 것처럼 나를 달래자 안정감이 들었다.

“프레드릭, 감사해요.”

그는 별다른 내색 없이 더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밖에서 들리는 사람의 말소리가 커지고 마차가 완전히 멈추어 설 때까지.

“폐하, 도착했습니다.”

레이오드의 말소리가 들리고 나를 고쳐 안은 프레드릭이 자신의 재킷으로 꽁꽁 감쌌다.

“레일라, 원하시면 얼굴을 다 가려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이곳을 보고 싶어요.”

그가 사는 나페아 제국 황궁의 모습이 궁금했다.

처음 오는 곳이라 궁금하기도 하고.

이렇게 그의 품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로 처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당당하게 마주하고 싶었다.

그의 눈이 깊어지며 눈꼬리가 살짝 휘어졌다.

“그대의 그런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네? 고맙습니다……?”

이런 모습이 아름답다니.

도대체 그의 스위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이런 별거 아닌 모습에도 아름답다니.

몸을 추스른 그가 나를 안은 채로 마차 밖으로 긴 다리를 뻗었다.

‘맙소사.’

몇 명이라고 생각한 것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마차 앞을 가득 채운 사람의 물결.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내… 내려주시면.”

“헉. 폐하께서.”

“흡.”

급하게 숨을 들이쉬는 사람이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