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60)

36화.

“그럼, 당연하지. 레일라 너를 기다리고 있어. 내가 미리 말을 해 두었으니. 가서 네 짐을 정리하고 에렌은 데리고 가야지.”

당연히 에렌을 데려가고 싶었다.

큰 오라버니를 보던 시선을 돌려 프레드릭 황제에게 향했다. 그의 황금빛 눈이 살짝 휘어지며 웃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폐하, 에렌을 데려가도 되나요? 저는 같이 가고 싶어요.”

“그대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기뻐서 웃는 모습에 그가 화답하듯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따뜻해서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그럼 저 공작저에 가서 짐도 챙기고 에렌과 같이 올게요.”

지금 간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무리 두 오라버니가 나를 어찌하려고 해도, 감히 황제를 능멸하진 않을 것이라는 믿음.

“아… 레일라. 저와 함께 가시면 됩니다.”

그가 같이 간다.

덤덤한 말이 더 안정감을 주었다.

덜컹—

큰 소리에 그를 보던 시선을 돌렸다.

둘째 오라버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럼 저희가 먼저 레일라와 함께 저택에 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해주셔야지요.”

손을 들어 둘째 오라버니를 진정시킨 케이드란이 낮은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에 프레드릭 황제가 느릿하게 턱을 쓸어내렸다.

“그럼 잠깐, 이 제국의 황제를 만나 레일라 영애와의 일을 마무리하고 바로 저택으로 가겠습니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향해 숙여졌다.

“레일라,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바로 뒤따라갈 거니 꼭 어디 가지 마시고 공작저에 계십시오. 절대 다른 곳으로 가면 안 됩니다. 참 수호 기사인 레이오드가 따라갈 겁니다. 그의 옆에 꼭 붙어 있어요.”

“네, 폐하. 약속할게요.”

말을 마친 그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 제국의 황제를 만나러.

“레일라, 집으로 가자.”

빠르게 곁으로 다가온 둘째 오라버니가 나를 품에 가두고 안아 올렸다.

“레일라. 하아. 레일라!”

“칼라엘! 그럴 시간 없어. 지금 바로 저택으로 가서 레일라의 짐을 챙겨야 해.”

거친 숨결을 케이드란이 끊어냈다.

* * *

칼라엘의 손에 꽉 잡혀 있는 레일라의 팔을 억지로 끊어내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프레드릭 황제가 오기 전에 일이 끝나야 하니까.

둘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마차에 타려 하자 프레드릭 황제의 수호 기사인 레이오드가 뛰어와 마부 옆에 올라탔다.

얼마나 급하게 왔으면, 자신의 말조차 챙기지 못한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뻔한 걸 눌러 내리고 마차에 올랐다.

공작저에 도착한 마차가 멈추자 미리 나와 있는 집사에게 지시하고 레일라의 방으로 올라갔다.

“기사님은 잠깐 문 앞에 있으시면 됩니다. 설마 영애의 방까지 들어가진 않겠지.”

레일라의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레이오드를 막아서자 그가 긴장하며 차고 있는 검에 손을 올렸다.

“여긴 레일라의 방뿐입니다. 이곳 안까지 들어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단히 주의를 받은 듯한 그가 불안한 듯 방안을 흘끗거렸다.

무시하듯 그를 지나쳐 레일라와 칼라엘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레일라, 이리 와.”

“오라버니, 에렌은요? 에렌은 어디 있나요?”

“에렌은 칼라엘의 방에 있을 거야. 이리와!”

뒷걸음을 치려는 레일라의 팔을 강하게 잡고, 쪽문을 지나 칼라엘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기에 에렌이 있나요? 어디에요?”

레일라의 뒤에 있는 칼라엘에게 눈짓을 보내자 순식간에 레일라의 곁으로 다가간 그가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윽. 오…….”

힘없이 쓰러져 내리는 레일라를 안아서 꽉 끌어안았다.

“넌, 내 거야! 레일라. 영원히.”

집착이 묻어 나오는 손길로 가슴을 꽉 쥐고 놓았다.

“칼라엘, 이틀은 깨지 않을 거니, 미리 준비한 곳으로 레일라를 데리고 가. 다른 곳은 절대 가면 안 되니 내 말을 명심하고. 무조건 준비한 곳으로만 가야 해.”

고개를 끄덕이는 칼라엘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곳은 내가 남아 프레드릭 황제와 이 제국의 황제를 막아야 하니, 레일라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건 너뿐이야. 그러니… 뒤돌아볼 거 없이 무조건 앞으로만 가.”

어제부터 칼라엘의 방에 준비한 이동 마법 위에 마력을 주입했다.

레일라를 안고 있는 칼라엘을 그 위에 세웠다.

“도착하거든 바로 준비한 마차를 타. 이동 수식이 긴 거리가 아니니, 최대한 빨리 움직여서 영지로 출발하고.”

“네, 형님.”

환한 빛에 휩싸인 둘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길게 뱉은 한숨이 적막한 방에 뿌려졌다.

이동거리는 수도의 외곽까지이지만, 그곳에서 마차를 타고 영지로 가면 될 것이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질 동안 이곳에서 프레드릭 황제를 막아야 했다.

“레일라, 너는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어. 영원히. 내가 널 놔주지 않을 거니까.”

여기 오기 전, 레일라가 프레드릭 황제와 함께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이제는 상관없으려나.”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될 거니까.

만족스러운 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동안 마음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속이 끓어 올랐던지.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되지 못한 일이 없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뤄지게 하고 말았으니, 설혹 그것이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모는 한이 있더라도.”

드디어 손에 넣었다.

어디도 가지 못하게 꽁꽁 가둬놓고 나만 보면 되는 것이다.

똑똑 똑똑—

꽝꽝.

레일라의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커지더니 부술 듯 문이 쳐댔다.

레이오드의 조급함이 느껴져는 움직임에 조소를 흘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시간을 최대한 길게 끌어야 한다.

프레드릭 황제가 이 제국의 황제와 만나고 오는 시간까지라도.

어차피 수호 기사야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테니까.

레일라의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부서질 듯 흔들리는 문소리를 연주처럼 들으며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

찻잔을 들어 올려 뜨거운 찻물을 넘겼다.

“레일라는 내 것이야.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내 것이야.”

타닥타닥—

진득한 소유욕이 묻어나는 손짓으로 소파의 팔걸이를 손으로 두드렸다.

꽝꽝—

이제는 흡사 문이 부서질 듯이 두드려 대고 있었다.

꽈앙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방안으로 뛰어 들어온 수호 기사가 쪽문을 부수고 칼라엘의 방으로 들어왔다.

“공작님! 레일라 영애는 어디 있습니까?”

뭔가 이상한 걸 느끼긴 한 모양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와 검을 뽑아 드는 예기가 남다른 걸 보면.

‘역시 황제의 수호 기사인가.’

“칼라엘이 데리고 잠깐 나갔는데… 금방 오지 않겠어. 뭘 이렇게 흥분하고 그래, 건방지게.”

황제라면 모르지만, 저따위 것에 말조차 높이고 싶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여기서 죽여 버리고 싶지만, 프레드릭 황제의 의심을 살 수 있으니 참아야 했다.

다시 눈길을 주기도 전에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뛰쳐나간 그가 저택을 벗어나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로 올라갔다.

“아… 아, 이제 프레드릭 황제가 오는 시간까지 집무실에 있으면 되겠지.”

느긋한 발걸음과 느긋한 손길로 레일라가 사라진 날부터 손에 잡았던 시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다디단 연기가 입안에 메웠다.

폐가 가득차도록 연기를 들이 마셨다.

* * *

레일라를 두 오라버니에게 맡기고 황제를 만나러 가야 한다니.

불안함이 몰려들었지만, 내일 이곳을 떠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두 형제를 제치고 레일라를 데려가기 위해서는 유레안 제국 황제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짧은 시간 안에 황제와 담판을 짓고, 따라오려는 기사들을 두고 먼저 말을 달렸다.

빠른 속도록 황궁을 빠져나와 달리고 또 달리다 앞에서 달려오는 말이 보였다.

“레이오드! 레이오드!”

불안함에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치솟는 긴장감에 거칠게 심장이 요동쳤다.

말에서 내린 레이오드가 그대로 땅에 머리를 박았다.

“폐하! 레일라 영애가 사라진 듯합니다.”

“뭐!”

그의 말에 거칠게 뛰던 심장이 지하로 곤두박질 쳤다.

설명을 듣기 전에 다시 말을 달렸다.

‘레일라, 레일라.’

이제 레일라가 없는 삶은 생각하기 싫었다.

그냥 혼자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후회가 밀려와 먼저 보낸 멍청한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빌어먹을, 젠장.

공작저의 철문이 다 열리기 전에 안으로 들어가 무작정 위로 올라갔다.

뒤따라온 레이오드가 안내한 곳으로.

“사라진 곳이 어디냐?”

레이오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들어가기 위해 쪽문을 지나 레일라의 마지막 자취가 있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력?

분명히 느껴지는 것은 마력이었다.

제국에서는 한 번도 개방해 본 적 없는 마력을 개방해 눈에 집중했다.

그동안 마력을 쓸 일이 없어 봉인해 두었을 뿐 마력이라면 그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감히. 감히. 감히.’

눈에 마력을 집중해 천천히 훑어 나갔다.

“이동 좌표.”

공작이 오기 전에 서둘러 이동 좌표로 하얀 마력 뭉치를 날렸다.

사라진 시간을 계산하면 그리 먼 곳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가만히 집중하고 있자니, 느긋한 발소리가 들리고 공작이 나타났다.

그의 잎이 만족스럽게 길게 늘어져 있었다.

“폐하,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저도 칼라엘과 레일라를 찾는 중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찾지를 못했습니다.”

레일라를 빼돌렸구나!

그가 엄지손을 올려 턱을 나른하게 쓸어내렸다.

걱정하는 모양새가 눈에 거슬렸다.

“…그러시겠죠.”

공작을 보고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살심을 눌러 내렸다.

케이드란 공작을 건드리면 제국 간의 전쟁이다.

물론 그따위가 레일라보다 중요하지는 않겠지만.

“레이오드, 서둘러 황궁으로 간다. 공작도 찾고 있다고 하니, 우리도 찾아야 할 것이야.”

뒤에 따라붙는 공작을 무시하고 빠른 속도로 공작저를 빠져나왔다.

공작저를 벗어나자 말을 멈추고 레이오드를 불렀다.

“먼저 황궁으로 가라. 네가 가서 테리안과 함께 모든 인원을 점검하고 챙겨서 내일 시간에 맞춰 나페아 제국으로 출발해.”

“폐하!”

말뜻을 한 번에 알아들은 레이오드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제 잘못이니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폐하. 제발.”

“레이오드! 소싯적 친우로서 말한다. 난… 난 말이지. 이제 그녀가 없으면 살지 못할 거 같아. 그러니 내가 추적해야 해. 다른 사람은 오래 걸려. 하지만, 나라면 쉽게 찾을 수 있어.”

너는 알지?

레이오드라면 나의 실력을 알고 있다.

그동안 쓸 일이 없어 쓰지 않았던 모든 방법을 동원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니까.

“…네, 폐하. 통신석은 꼭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그래, 꼭 짐이 있는 것처럼 황궁을 빠져나와야 한다. 난 지금부터 추적할 테니. 그러니 내 말대로 황궁으로 가서 준비해.”

예를 갖추고 물러나는 레이오드를 보다 시선을 비켜 가까운 가게로 들어가 로브를 사고 금화 한 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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