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60)

32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실수였을까, 너무 세게 고개를 젓다 보니 발이 삐끗해 휘청거리는 몸을 그가 순식간에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었다.

“폐… 폐하. 괜찮습니다.”

“빨리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빨리 벗어나고 싶은데.”

그가 장난기가 묻어난 눈을 쓱 올리고는 말없이 그곳을 빠르게 벗어났다.

프레드릭 황제가 머무는 궁으로.

* * *

레일라의 얼굴이 온통 붉어졌다.

워낙 하얀 피부라 붉은 꽃이 피어난 얼굴은 금방 눈에 띄었다.

그녀의 얼굴을 감상하며 좀 더 천천히 걷고 싶었지만, 애처롭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걸음을 빨리했다.

“이곳입니다. 이틀 후면 벗어나 떠날 곳이지만, 아름답고 편안한 궁이더군요. 자 이제 들어갈까요?”

궁 앞에 도착하자, 잔뜩 성난 얼굴의 레이오드가 눈에 띄었다.

“레이오드, 여기다.”

“폐하! 대체 어딜 그렇게…….”

다가오는 레이오드에게 눈을 부릅떴다.

그녀에게 불안함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영애와 함께 왔다. 레이오드. 이야기는 조금 후에 하고 일단 영애가 쉴 수 있는 공간을…….”

말하는 중 가볍게 옷을 당기는 소심한 손이 느껴져 고개를 숙여 그녀를 살폈다.

입을 달싹거리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듯한 그녀를 위해 허리를 숙여 조그마한 입 근처에 가져다 댔다.

“폐하, 폐하의 방에 같이 있으면 안 되나요?”

불안함이 잔뜩 실린 망설이는 말이 그녀가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아—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이 영애와 함께 있으면 계속 욕정이 끓어오르기 때문에 참기가 힘들었다.

조금 전에 테라스에서도 그렇고… 이렇게 안고 있는 지금도 벌써 존재감을 과시하듯이 부풀어 있는 아래로 인해 앞섶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진짜 곤란한데.’

거절의 말을 내뱉어야 하는데, 주저하는 작은 손이 다시 한번 가볍게 옷을 당기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수줍은 미소를 짓는 작은 입술에 고개를 내려 입술을 물어 버리려 하는 것을 겨우 멈췄다.

“먼저 방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쉬고 계시는 동안 제 호위 기사인 레이오드와 대화를 좀 나누고 올 터이니 쉬고 계십시오.”

“네.”

순신 간에 방으로 이동해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이쪽에 소파와… 다른 것들이 있으니 쉬고 계십시오.”

레일라를 뒤로 하고 방을 나왔다.

“레이오드! 잠깐 이야기 좀 하지. 따라와.”

입만 떡 벌리고 있는 레이오드를 데리고 다른 방에 있는 응접실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대기하고 있는 시종에게 손짓으로 차를 달라 하고 레이오드의 반응을 살폈다.

평소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두고 혼자 다니기 좋아하는 내 습관을 알고 있는 그여도… 오늘 영애를 데리고 온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나 보다.

무슨 일인지 묻지 못하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레이오드, 묻고 싶은 게 있지 않아? 뭐, 일단 짐의 말을 듣지.”

무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도 알지 못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어릴 적부터 봐온 레이오드이니,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니.

“조금 전에 같이 왔던 영애와 함께 제국으로 가겠다. 그렇게 알고 준비해.”

“네? 폐하! 잠시만요. 제가 귀가 잘못되었나 봅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들은 그대로다. 같이 왔던 영애와 나페아 제국으로 돌아간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레이오드에게 다시 말해줄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닫았다.

저놈이 어릴 적부터 알아들었으면서도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꼭 다시 반문하는 습관이 있었으니까.

“다시 말하지 않는다. 준비해. 오늘부터 이곳에서 같이 지낸다.”

하지만, 명분이 필요하다.

이 제국의 공작가의 영애를 이런 식으로 그냥 데려올 수는 없으니.

“내일, 이 유레안 제국의 황제에게 면담을 요청해라. 이 제국의 황제와 담판을 짓겠다.”

“그러니까, 폐하. 도대체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설마… 혼인을 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그렇지요? 폐하.”

혼인?

이 제국의 결혼 문화에 대해 모르니 한 번 자세히 물어보긴 해야 할 것이다.

“왜 내가 혼인하면 안 되는 건가? 여기 오는 날까지도 혼인하라고 난리를 친 것은 그대들인데 말이지. 그러니 잘 되었지 않나. 혼인하겠다는데.”

“폐하! 하지만… 이건.”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얼굴로 울부짖는 레이오드의 모습에서 시선을 돌렸다.

“혼인이요? 설마 황후로 앉히시겠다는?”

“왜? 안 될 것이 뭐 있지? 제국 간의 화합도 되고 말이야. 여러모로 좋은 일 아닌가.”

어버버 거리며 차마 말을 잊지 못하는 레이오드를 두고 일어섰다.

“가는 날까지 이곳에 같이 있겠다. 그러니 알아서 준비해 줘. 레이오드! 명심해라. 내가 선택한 여인이다. 앞으로도 함께할. 다른 말은 듣고 싶지 않아. 낯선 곳이라 혼자 둘 수 없으니 가보겠다. 준비되는 대로 테리안을 보내.”

테리안 또한 어릴 적부터 같이 한 보좌관이니 나를 이해해줄…….

끙—

잔소리를 쏟아낼 테리안을 떠올리자 골치가 아파졌다.

사실, 나 자신조차도 이런 모습이 낯설기만 한 건 사실이니.

‘왜 이럴까?’

대답 없는 레이오드를 두고 나와 영애가 기다리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법 등이 활짝 핀 복도가 스산해 보였다.

“이유라…? 이유 따윈 필요 없지.”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급한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제국의 황제가 되고 단 한 번도 감정대로 행동해본 적이 없이 이 자리까지 왔다.

그랬는데, 레일라 영애만 보면 이성이 마비되고 감정적으로 되는 자신이 이상했다.

하지만 절대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건 알겠다.

“그래, 그 하나만 중요하다.”

다시 걸음을 옮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던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빌어먹을.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어제의 위태롭고 불안해 보인 모습 그대로 소파에 웅크리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소리 없이 움직여 머리를 들어 허벅지에 내렸다.

“레일라, 도대체 왜?”

왜? 그대는 이렇게 불안해 보이는 걸까?

알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올라 질끈 눈을 감았다.

이 영애와만 있으면 정말 감정 제어가 되지 않는다.

우당탕— 꽝—

밖에서 들리는 꽤 큰 소음이 들리자 조용히 감고 있는 눈을 떴다.

“두 오라버니인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어 느긋하게 한 손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나는 한 제국의 황제다.

이 자리에 오를 때까지 그냥 온 것은 아니기에, 미리 짐작하고는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에 레일라 영애의 의사가 있나 하는 것이었는데.

오늘 따라가겠다, 말하는 그녀를 보고 확신했다.

밖의 소란스러움이 더욱더 커지더니,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려다.

똑똑—

“누구냐!”

“폐하, 잠깐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리자 레이오드가 급박한 얼굴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 스타멘 공작과 공자가 궁 앞에 와서 레일라 영애를 데려가겠다고 합니…….”

헉—

“기다리라고 해. 무례하게 청하지 않은 손님이 함부로 들어오게 하지 말고. 조금 더 기다리라 하고 손님 접대용 응접실로 모셔라. 조용히 있으라고 하고.”

이런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는 레일라에게 눈이 떼어지지 않았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에 시선을 비틀었다.

입을 떡 벌린 채 그대로 굳어 있는 레이오드의 모습으로.

“왜? 빨리 나가서 그들에게 기다리라 전해라. 영애가 깨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니.”

“폐하, 영애는 두고 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영애가 있어서 좋은 게 뭐가 있다고. 어서 가서 전해.”

머뭇거리는 레이오드를 보내고, 조심히 영애의 머리를 들고 소파에 내려놓았다.

얼굴에 흘러내린 은빛 머리를 옆으로 옮겨주고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잠든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여인이 아름답다 느낀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나는 여인의 모습이 한 명도 없는 것을 보니… 이번이 처음인가.

아, 참! 메리아.

그녀는 아름답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름답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긴 했다. 강인하고 똑똑한 여인인 거지.

레일라는 달랐다.

잠든 모습이 여신 같긴 했지만, 정말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여인에 대해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이 영애는 특별함이 있었다.

“그래, 특별함. 누구도 가지지 못한 특별함이 있었어. 이건 그대만이 가진 겁니다. 아마도… 그 특별함을 나만 아는 것이 아니란 거지만.”

가볍게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이제 그들을 만나야 할 때였다.

시종이 열어주는 문을 지나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 있던 그들이 일어나 예를 갖췄다.

준비된 자리에 앉아 차를 권했다.

“그래, 스타멘 공작… 그리고 칼라엘 공자, 무슨 일로?”

분노가 그대로 드러난 얼굴인 칼라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는 것을 그의 형인 공작이 손을 뻗어 저지했다.

‘역시, 공작은 공작인가.’

“폐하, 제 동생이 여기에 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더는 연회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 동생을 데리고 공작저로 가겠습니다.”

통보인가? 감히.

“공작, 레일라 영애는 이곳에 있을 겁니다. 본인이 그렇게 정하기로 했으니 말이죠.”

천천히 찻잔을 들어 입술에 대자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폐하, 레일라를 만나야겠습니다.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전 스타멘 공작가의 가주로서 허락하지 못하겠습니다.”

웃음이 나왔다.

이미 성인이 된 영애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 제국의 법은 저 구석에 있는지도 모르는 소왕국보다 못한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기는군요, 공작. 레일라 영애는 성년이 지났습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죠. 성년이 지난 여인을 감금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그를 보던 시선을 틀어 레이오드에게 지시했다.

“레이오드! 이 제국의 법에 대해서 알아 와라. 당장.”

급하게 예를 갖추고 나가는 레이오드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공작과 영식을 살폈다.

“내일, 이 유레안 제국의 황제와 만나 논의할까 했는데. 레일라 영애와 함께 제국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결국, 칼라엘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을 분노로 부들부들 떤 채로.

“죄송합니다. 폐하! 앉아, 칼라엘. 당장.”

역시 스타멘 공작을 쉽게 상대할 사람이 아니었다.

“청혼하시는 겁니까? 만약 청혼이라면 가주인 저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폐하께선 나페아 제국으로 언제 가십니까?”

분노로 검게 물들어가는 붉은 눈을 하고서는 침착하게 말해 나가는 공작을 보다 시선을 비켜 내려 찻잔에 두었다.

“이틀 후로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일이면 모든 일을 매듭지어야겠지요. 그러니 공작! 내일까지 허락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폐하, 제국으로 가신 후에 정식으로 청혼서를 보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가 타협하듯 말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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