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2권) (31/60)

먹이가 된 공작가의 행복한 영애 2권

31화.

그가 왔다.

소리 없는 비명을 흘렸다.

옆에 오는 줄도 몰랐던 프레드릭 황제가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절망스러운 마음과는 다르게 그의 황금빛 눈이 휘어진 채 웃고 있는 모습에 심장이 지끈거렸다.

손가락에 통증이 느껴졌다. 손가락 사이사이 얽혀있는 둘째 오라버니의 손으로 인해.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듯 가해지는 손의 압력에.

탁—

그의 손보다 더 커다란 프레드릭 황제의 손이 얽힌 손을 쉽게 떼어내더니 내 손을 잡아 부드럽게 이끌었다.

“아… 여기들 있었군. 칼라엘! 너는 잠깐 이리 오거라. 짐이 네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언제 첫 춤이 끝났는지 우리 곁으로 다가온 황제가 둘째 오라버니를 불렀다.

“칼라엘, 어리석게 굴지 말고 폐하를 따라가야지. 그렇지?”

낮게 떨어져 내리는 케이드란의 말에 둘째 오라버니가 움찔 몸을 떨고 일어섰다.

“아, 참! 공작. 내일 회의로 인해 그대와도 할 말이 있으니, 같이 가야겠어.”

무슨 생각인지 황제가 두 오라버니를 모두 데려갔다.

그들이 없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프레드릭 황제가 이끄는 데로 홀의 중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애… 손이.”

손, 손이라는 말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둘째 오라버니에게 잡혔던 손에 굵은 손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선명하게 붉어진 손의 모양을 따라 남은 자국.

“괜찮아요. 이 정도는.”

“…….”

그의 알 수 없는 눈이 내 얼굴을 지긋이 살폈다.

“정말 괜찮습니다. 아프지 않아요.”

“대체 그대는.”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일렁이며 소용돌이치더니 긴 속눈썹 사이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그의 감정이 잠겼다.

“내 앞에서만은 그러지 마십시오. 그대가… 그대가 아픈 것이 싫으니.”

이상하다. 그의 말이 너무 진심처럼 느껴져서 움직이던 발이 멈췄다.

나를 걱정하는 말.

멈춘 나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능숙하게 안아 들고 도는 그로 인해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닫힌 입을 굳은 채.

내 표정도 생각도 말도… 전부 나의 것이 아닌데, 프레드릭 황제는 자신 앞에서는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 있었다.

마치 내 것처럼.

“이 춤이 끝나면 잠시 저와 시간을 가져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 춤을 신청한 거니 말입니다.”

“…네.”

또다시 그의 알 수 없는 시선이 나를 스쳤다.

나는 그 어떤 표정도 그에게 지어주지 못한 채 시선만 내리깔았다.

“뭔가 걱정이 있습니까? 그대가 나에게 다 말해주길 바라는 건 무리겠죠?”

그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나지막하게 내뱉은 말이 귀를 타고 심장에 전달되었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그러다 정말 버려지면? 버려지는 거에 대한 두려움에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춤추는 우리 둘의 공간에 홀 안에 있는 귀족들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선과 소리가 홀 안을 가득 채울 때쯤 곡이 끝났다.

음악이 중지된 홀에 다시 세 번째 춤곡이 준비를 마쳤고.

그는 곡이 끝나고도 손을 놓지 않은 채 테라스로 이끌었다.

나 또한 그 손을 놓지 않고 프레드릭 황제가 이끄는 데로 따라 나갔다.

“세상에, 저 공녀님은 도대체가.”

“어제 있었던 사냥제에서 사고가 있었다고 하던데, 정확히 듣지 못했지만요.”

“정말 천박한 출신은 어쩔 수 없군요.”

등 뒤로 쏟아지는 시선과 말속에서도 당당하게 그의 손을 잡고 테라스로 나갔다.

아니, 지금 내겐 그 무엇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차가운 음료 두 잔을 부탁하지.”

테라스로 들어가기 전에 프레드릭 황제가 시종에게 음료를 부탁하는 모습에 참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 정도면 뭐든 명령으로 해결할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곳에 앉아요. 영애.”

의자를 빼주는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공기를 타고 폐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 그제야 막혔던 숨이 터지고 있었다.

이곳에 보이지 않는 두 오라버니 때문일 수도 있고.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종이 가져다준 음료를 내 앞에 내려주며, 그가 다른 의자를 당겨 내 옆에 바짝 앉았다.

이런 모습 하나하나에서 묻어나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이상하면서도 눈길이 갔다.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재촉하고 싶지는 않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그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지만.”

그의 황금빛 눈 가득 내 모습이 담겼다.

진하게 울렁이는 눈동자를 보면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보는 눈빛이라 착각할 만큼 눈빛이 진했다.

“얼굴은… 다행입니다. 따로 성수를 준비할까 했는데.”

계속 말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틀어 테라스 너머의 정원을 향했다.

탁 트인 정원의 모습에 막혔던 숨을 다시 한번 트이며 무거운 입을 달싹거렸다.

“폐하, 저는… 저는.”

이제는 결정해야 했다.

지금까지처럼 감금된 채 살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여기서 더 그들이 미친 짓을 한다면 그걸 어떻게 다 감당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니었다. 아마 여기서 더 한 짓을 당하면 내 정신이 버티지 못할 거 같았다.

불안함에 점칠 된 눈빛을 그에게 돌리지 못했다.

그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떨리는 손끝을 드레스 뒤쪽으로 숨겼다.

“저는… 저는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 특별하게 잘하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가… 제가 폐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말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입에서 쓸데없는 말만이 흘러나왔다.

좀 더 간절하게… 간절해야 하는데.

불안한 손톱 끝이 드레스에 가려진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시야에 비치는 마법 등마저 암전되었다.

‘응?’

온통 어둠으로 물든 곳에 그의 빛나는 눈만이…….

그의 일그러진 눈만이.

“그대는… 그대는 도대체…….”

그의 뚝뚝 끊어져 나오는 말과 함께 촉 하고 가볍게 입술에 내려앉은 부드러운 감촉이 선명했다.

숨이 바로 느껴질 만한 거리.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들어온 숨이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

그의 벌려진 입에 진득하게 입술을 누르고 내 숨을 그의 입술에 말과 함께 밀어 넣었다.

“아무것도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 이런… 이런 거라도.”

“레일라! 제발.”

그의 말에 하얗게 휘발된 머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세상에, 맙소사.

“폐… 폐하! 잠시 제가… 정말 이러려던 게 아니라.”

당황하며 열린 입이 다가온 그의 입술에 삼켜지는 바람에 더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의 혀가 입안 가득 밀고 들어와 순식간에 안쪽까지 침범했기에.

* * *

살짝 고개를 틀었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천천히 혀를 집어넣어 여린 천장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진정하라는 뜻으로 서두르지 않고 가지런한 치아를 하나하나 달래듯 쓸어주고 여린 옆과 천정을 가볍게 쓸며 타액을 마셨다.

쭈웁거리며 빨아당긴 다디단 타액을 삼켰다.

질척거리는 키스에 진정된 그녀를 가볍게 안아 허벅지에 앉히고 고개를 더 깊이 틀어 다시 입술을 맞댔다.

입 안 깊숙이 들어간 혀로 쓸어주고 점막을 훑으며, 다급하게 달아오르는 아래를 진정시켰다.

“하아.”

급하게 숨을 내쉬는 그녀의 입술에서 천천히 떨어지자 두 입술이 서로의 타액으로 젖어 번들거렸다.

미친 듯이 야한 색으로 물든 입술이 보기 좋았다.

레일라의 입술과 키스에 흥분한 페니스는 덤덤함을 가장한 얼굴과는 달리 흥분감에 절어 있었다.

타액에 번들거리는 그녀의 입술이 색정적이라 신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애써 눌러 내리며, 다시 입술을 내렸다.

공작의 저택에서 보았을 때 있었던 상처 자국이 있던 자리와 지금의 키스로 인해 번들거리는 타액이 묻은 자리를 입술로 가볍게 정리해 주었다.

쪽쪽쪽쪽—

흩어지듯 떨어지는 입술에도 몸을 움찔거리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팔을 넓혀 가슴 가득 끌어안고 어색한 손길로 등을 토닥여 줬다.

“그대는 그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니…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오로지 저만 좋은지… 끄응.”

이런 말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가느다란 팔이 뻗어 나와 목을 감싸는 손길에 고민으로 잠긴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손짓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었다.

불안하게 떨리는 손의 떨림이 그대로 목에 전해지고 있었다.

무엇이 이토록 불안한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그녀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목에 둘러싸인 손이 힘이 들어가나 싶더니, 그녀가 내 가슴에 깊게 고개를 묻었다.

“폐하, 이런 저라도 좋으면… 따라가고 싶어요.”

그 작은 입에서 드디어 허락이 답이 나왔다.

* * *

프레드릭 황제와 함께 가서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지금 공작저의 생활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가슴에 꼭 맞닿은 귀에 심장의 울림이 들렸다. 일정한 속도로 뛰어대던 심장 소리가 내 심장 소리와 맞물려 같이 뛰어대는 소리가 좋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폐하, 어려운 부탁인지 모르지만, 오늘 저녁에 같이 있어도 되나요?”

저를 보내지 마세요.

일정한 속도록 뛰어대던 심장의 소리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동안, 무서움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꿀꺽—

그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이는 소리가 큭 들렸다.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때는 어찌해야 할까?

“지금… 큼큼.”

잠긴 목을 몇 번 풀기 위해 목을 가다듬던 그가 커다란 손을 들어 부드럽게 내 얼굴을 쓸더니 턱 끝을 잡았다.

“지금 제가 묶고 있는 이 황궁에 있는 궁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대가 원한다면 저와 함께 제국으로 가는 동안 함께 있어도 됩니다.”

“네.”

망설임 없는 대답.

그의 손길이 입술 주변을 지분거리더니 번진 립스틱 자국을 정리해 주었다. 다정한 사람.

지금은 이 사람이 내민 손이 필요했다.

“그 오라버니들이 저를 찾아오면…….”

“그들은 내가 상대합니다. 영애는 그냥 편하게 있으면 됩니다.”

물론 맡기고 싶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영애가 가주의 허락 없이 황궁에 머문다, 그것도 다른 제국의 황제와 함께.

그게 과연 가능할까? 불안한 시선을 느꼈는지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휘어지며 웃었다.

“불안할 필요 없습니다. 연회를 더 즐기실 게 아니면 지금 바로 갈까요?”

“네.”

망설임 없이 답했다.

두 오라버니가 오기 전에 이곳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좋으니 어서 빨리 화려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불안함이 밀려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인생에서 내가 직접 선택한 길이니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민 팔에 손을 올리고 테라스를 나와 긴 복도를 걸었다.

“어머, 세상에…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정말 저 나페아 제국 황제와 밤을.”

뒤로 흘러드는 소리를 다시 한 귀로 흘렸다.

아니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그의 힘줄이 솟은 굵은 팔뚝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으니까.

“실례인지 알지만, 안고 가도 될까요?”

그의 낮은 저음이 어둠을 갈랐다.

“네?”

“그대가 걸어서 가기에는 좀 거리가 멀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안고 가고 싶은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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