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60)

30화.

그가 나가고 곧바로 응접실 문이 열렸다.

둘째 오라버니 혼자였다.

큰 오라버니는 공작이니만큼 나페아 황제를 배웅하기 위해 나갔겠지.

“레일라.”

순식간에 다가온 그가 나를 안아 투박한 손길로 베일을 거칠게 벗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따라가던 내 눈을 그의 손이 잡아 올리고 붉은 눈이 샅샅이 살폈다.

“너는…….”

꽈앙—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응접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큰 오라버니가 들어와 거친 동작으로 주저앉았다.

“레일라, 말해.”

“…뭘요?”

“무슨 대화를 한 건지 다 말해! 당장.”

“…저녁에 연회에서 보자는 말이었어요.”

그의 핏빛의 눈이 검은색을 띠었다.

“그리고?”

“춤을 청한다고 했어요.”

검은색을 띤 눈에서 소름 끼치는 검은 안개가 퍼져 나왔다.

“그래서 허락했고?”

“제가… 제가 거절할 자격이 없잖아요. 폐하께서 시키면 해야 하는 거잖아요.”

어차피 이 제국의 황제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몸이었다.

내 말이 끝나자, 큰 오라버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론 그래야지. 이 제국에 온 귀빈을 모시고자 하는 폐하의 뜻이라면 말이야.”

어차피 내 말을 들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형님! 하지만.”

“너도 철없이 좀 굴지 말아, 칼라엘. 어차피 첫날부터 폐하께서 그리 정하셨다면 끝까지 하실 분이니 말이야.”

나를 꽉 끌어안고 있는 둘째 오라버니의 몸의 떨림이 내게 전해졌다.

“전, 그렇게 못합니다. 나의 레일라가…….”

“단, 오늘까지야! 레일라. 내일부터는 내 허락 없이는 넌 절대 이 저택 밖으로 한발도 나가지 못해. 그 누가 오더라도. 그러니 네가 참석할 수 있는 연회는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야. 아…이 오라버니가 화가 좀 풀리면 같이 가줄 수도 있고.”

감금.

오늘이 지나면 이 저택 안에 나를 가둬 두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그의 표정이 진지했다.

‘이제는 선택해야 하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뿐이었다.

평생, 이 저택에 감금된 채 두 오라버니와 지금처럼 계속 지내던지.

아니면 나페아 제국 황제를 따라 그의 나라로 갈 것인지.

난 무엇을 선택하고 싶은 걸까?

지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프레드릭 황제가 오늘, 이 저택에 들러 나에게 그런 말을 할 거라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왜 나에게… 그에게는 연인이 있을 텐데.

혹시 책임감이 강해서 나를 책임지기 위해서일까.

“레일라, 오늘 연회가 마지막이니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거야. 올라가서 준비하고 있어.”

“네, 오라버니.”

대답과 다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칼라엘, 놓아 줘. 준비해야지.”

그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날 옭아맨 손이 풀렸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달리 걸음을 천천히 늘렸다.

그들에게 도망가는 모습을 보이면 더 물어뜯길 거 같아서.

응접실을 벗어나고서야 잰걸음으로 방으로 올라갔다.

“에렌, 성수를 가져와.”

“이미 주인님께서 가져다 놓았습니다.”

여기까지의 그의 관대한 허락일 것이다.

에렌이 건네주는 성수를 받아 마셨다. 이 성수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 저녁 연회에 이 꼴로 간다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뒤에서 얼마든지 말해도 되지만, 얼굴까지 이 꼴로 나타나 그 말에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에렌, 연회에 가야 하니 준비해 줘.”

“네, 아가씨.”

에렌과 첫날 준비해 주었던 하녀들의 손에 의해서 하나하나 준비해 나갔다.

목욕하고 마사지를 받고, 손톱도 다듬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받고 준비한 드레스를 입었다.

“오늘 머리 장식은 간단한 거로 해줘. 첫날 했으니 말이야.”

머리가 무거운 건 싫었다.

이 상태에서 머리까지 짓누르면 숨조차 쉴 수 없으니.

모든 준비가 끝나고 화장을 다시 한번 다듬어 보았다.

거울 앞에 서자 나로 보이는 거울 속의 여인이 무표정하게 마주 보고 있었다.

마주한 시선이 서로 얽혔다.

“넌 어떻게 하고 싶어?”

같이 입을 열더니 같이 닫히는 모습에 실소가 나왔다.

‘난 모르겠는데.’

이제 다시는 없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것이 이토록 망설이게 하는 것이고.

어쩌면 다시라는 것은 내 삶의 마지막에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싫은데.

지금까지 어떻게 살기 위해 바르작거렸는데.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

몸의 준비는 모두 끝났지만… 마음의 준비는.

“레일라, 이리 와.”

준비가 다 끝난 둘째 오라버니가 나를 불렀다.

깔끔한 정복 차림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그가 명령했으니 그에게 가야 했다.

“레일라, 오늘 내게 떨어지지 마.”

“…네, 그럴게요.”

“그래, 내 예쁜 동생아.”

그의 진득한 손끝이 내 턱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옷차림만큼이나 깔끔하고 아름답고 시린 미소였다.

“이제 가자.”

“네.”

‘절대 떨어지지 마.’

다시 한번 나직이 떨어지는 그의 명령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대한 두 개의 그림자가 복도에 낮게 깔리는 모습을 뒤로하고 앞으로 걸었다.

조금의 떨어짐도 허용치 않을 듯이 몸을 바짝 붙이고 걷는 그와 거의 하나의 몸처럼 움직여야 했다.

“자, 잡고 올라.”

그가 내밀어준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먼저 올라 자리를 잡으면, 늘 맞은편에 앉던 그가 오늘은 내 쪽으로 오더니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았다.

“난, 네 옆에서 떨어지지 않아.”

그의 목소리에 담긴 진득한 집착이 좁은 마차 안에서 더 숨통을 조였다.

“절대, 절대로.”

마치 자신에게 맹세하듯이 몇 번을 더 떨어지지 않겠다고 하는 그의 집요함에 피가 차갑게 식었다.

긴장감을 감추기 위해 드레스를 잡은 손을 꽉 쥐자 순식간에 다가온 그의 손이 드레스에서 내 손을 쉽게 떼어냈다.

그 손 사이사이를 그의 긴 손가락이 얽혀 들었다.

막힘 숨이 숨통을 조였다.

“오라버니… 제발.”

숨이 막혀와 조금만 떨어져 있어 주기를 바라는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얽힌 손가락 하나하나에 더 주어지는 힘이었다.

“날 봐, 레일라. 넌 눈도 감지 마! 항상 날 보고 있어.”

침잠하듯 감은 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의 집요함에 평소 없었던 마차 멀미가 나려했다.

그의 집착이 나와 프레드릭 황제의 일이 있은 뒤로 더 심해지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무서웠다.

어제도…자는 나에게 한 짓을 보면,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붉은 눈이 자유로운 생각조차 잘라냈다.

끝없이 눈길을 돌리지 못하게 눈을 맞춰오는 오라버니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의 눈빛을 피할 때마다 따라오는 눈길에 결국 포기한 건 나였다.

“레일라, 무슨 생각해? 나?”

“…….”

오라버니의 눈빛이 위험스럽게 빛났다.

생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걸까?

“대답! 대답해!”

“…네. 오라버니 생각하고 있어요.”

그의 손이 올라와 내 입술을 쓸었다.

그가 더는 이성을 잃지 않게 잘 맞춰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라버니 생각했어요. 네.”

그러니… 그러니 제발 분노를 풀어주면 안 될까?

덜커덩 소리를 내며 마차가 멈췄다.

구원의 소리처럼 들리는 소리에 반응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무표정을 가장했다.

“내리자, 손잡아.”

이미 잡은 손을 그대로 끌고 마차 입구까지 간 그가 나를 안아 내렸다.

같은 시간에 도착한 귀족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시선도 그의 행동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숨조차 쉬어지지 않게 조여오는 모습.

“먼저 우리 공작가의 휴게실로 가자. 그쪽에 있으면 형님이 시종을 보낼 테니.”

어서 휴게실로 갔으면 좋겠다.

걷는 걸음 하나에도 그는 내 옆에 바짝 붙은 채 조금의 틈도 벌리지 않았다.

그런 집요함에 죽어 버릴 것 같았다.

가문의 휴게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차와 함께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막혔던 숨이 트이지 않았다.

“공작님께서 입장하시자 하십니다.”

시종이 전해준 전언에 일어나 연회 홀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오라버니는 나와 조금의 떨어지지 않았다.

연회 홀의 입구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는 큰 오라버니 옆에 나란히 섰다.

“스타멘 공작님과 칼라엘 공자님, 레일라 공녀님께서 드십니다.”

우렁차게 외치는 시종의 옆을 지나 홀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쏟아지는 시선들이 따갑게 계속 따라왔지만, 지금은 그런 시선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귀족들의 입장이 끝나자 이 제국의 황제와 프레드릭 황제의 입장 순서가 되었다.

“이 제국의 태양이신 블라이스 유레안 황제 폐하와 나페아 제국의 황제이신 프레드릭 나페아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시선을 내렸다.

두 오라버니의 붉은 눈이 입장을 알리는 홀 입구 쪽이 아니라 내 얼굴로 쏟아지고 있어서.

얼굴을 뚫어 버릴 듯한 그들의 모습에 저절로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모두 고개를 들라. 오늘로 제국 간의 평화를 기하는 연회의 마지막이 되었다. 마지막인 오늘 이 연회에서 두 제국 간의 평화가 지속하기를 바란다.”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이 제국의 황제가 영애의 손을 잡고 홀로 나가자 첫 춤의 선율이 홀 안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다행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 또다시 프레드릭 황제와 첫 춤을 추라고 하면…….

이 제국의 황제가 여는 첫 춤이 거의 끝나갈 때쯤 홀 안의 사람들이 움직였다.

여기저기서 두 번째 춤을 청하고 있었다.

내 모습 위로 커다란 인영이 마법석의 빛을 가리고 그림자를 만들었다.

“레일라 영애, 같이 춤을 추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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