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이제 떠오르려는 햇살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여기가 스타멘 공작저군.”
신분을 밝히고 정문에 서서 기다리자 굳건한 철문이 열렸다.
종종걸음으로 나온 집사가 깊이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
집사의 안내에 따라 스타멘 공작저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이 주인을 닮은 건가?
차가움과 묘하게 딱딱 떨어지는 저택의 외관이 눈에 띄었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레이오드, 그냥 저 뒤쪽에 서 있어. 걱정할 거 없고.”
여기 오는 내내 잔소리를 퍼붓는 수호 기사인 레이오드를 뒤로 물렸다.
왜 가려고 하는지, 무슨 이유인지, 공녀를 만나서 뭘 하건지… 쉴새 없이 떠들어 대는 레이오드 입을 더는 그냥둘 수 없었다.
결국, 황명까지 끌어와 입을 다물게 하고서야 스타멘 공작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도 이유를 모르는데.
영애의 얼굴을 보고 완전히 나은 건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급했다.
초조한 마음을 감추려 응접실 안 곳곳으로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조용하고 차가운 느낌은 이곳도 인가?!’
벌컥—
조용하던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스타멘 공작 뒤로 칼라엘이 따라 들어왔다.
“폐하를 뵙습니다.”
눈으로는 죽일 듯이 노려보는 주제에 예를 갖춰 인사하는 모습이라니.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눌러 내리고 표정을 지웠다.
“그런데… 저희 저택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공작.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죠. 원래 이 제국은 이렇게 대화를 합니까?”
“…아닙니다. 그럼 차를 내오라 하겠습니다. 폐하.”
눈치 빠른 집사가 준비한 차를 올릴 때까지 세 사람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거대한 응접실에 찻잔 드는 소리만이 소음을 깰 뿐이었다.
‘잡아 죽이겠군.’
두 쌍의 붉은 시선이 뜨겁다 못해 태워버릴 듯이 타올랐다.
만약, 나란 사람이 황제가 아니었다면… 저 두 형제는 눈빛이 아닌 실제로 그럴지도.
그만큼 두 형제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다.
마치… 마치, 자신의 연인을 빼앗은 경쟁자를 처단하듯.
연인?
“영애가 걱정되어서 말입니다. 해독은…….”
파사삭—
칼라엘이 들고 있는 찻잔이 가루가 되어 손에서 날렸다.
급히 다가온 집사가 손에 흘러넘치는 찻물을 닦아주는 동안 빨갛던 눈이 검게 변해 있었다.
‘역시인가?’
“되었겠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고 괜찮은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영애를 보고 싶은데.”
“…준비하고 내려올 겁니다. 폐하.”
공작의 얼굴도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빛도 검게 물들어 있었고.
미묘하게 둘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면서도 그녀에 대한 반응은 똑같았다.
이것 참.
똑똑—
힘없는 노크 소리가 들리고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뒤를 따랐다.
“폐하를 뵙습니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영애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제 사냥터에서조차 본 적 없는 베일을 쓰고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묘하게 걷고 있는 걸음이 힘들어 보였다.
집중해서 봐야 보이는 정도로.
“영애, 괜찮은지 보러 왔습니다. 이쪽으로 와서 내 옆에 앉으십시오.”
영애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에게 꽂혀 들어간 두 쌍의 붉은 눈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분명 옆에 앉으라고 했는데, 소파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칠 뿐이었다.
묘하게 거리를 두는 모습.
저 둘만 아니었다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일어나 한걸음에 다가가 안아버렸을 것이다.
“공작! 영애와 단둘이 대화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 자리를 좀 피해 주시겠습니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둘째와 달리 공작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뭔가를 억누르던 그가 칼라엘을 데리고 응접실을 나갔다.
그래도 공작은 공작이란 건가?!
“레이오드! 너도 나가.”
불만스럽게 입을 열어 말하려는 레이오드에게 단호하게 손짓했다.
둘만 남게 되자 그녀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 살피려 했다.
작은 손이 막지만 않았다면.
“폐… 폐하, 그곳에서 대화해도 충분히 들립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말끝에 묻어나는 불안함.
이런 여인이 아닌데.
이지를 상실한 상태에서 보여준 모습은 분명 밝고 적극적이었던 그녀가 지금은 자신을 가리기 위한 베일까지 쓰고 있었다.
‘왜 이렇게 거리를 두는 걸까?’
“그대와… 내가 그날…….”
“그…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거리감.
“그대의 얼굴을 좀 보고 싶습니다. 안될까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어 베일을 들추려 하자 그녀가 몸을 움츠렸다.
나를 거부하는 모습에 마음이 일렁였다.
“그대의 얼굴이 보고 싶어요. 제발.”
황제가 되고 명령에만 익숙한 내가 ‘제발’이라는 단어를 처음 써 보았다.
그만큼 영애에 대해 애타는 마음이 끓어오르고 있었으니까.
단, 하루긴 했지만, 서로의 모든 것을 같이 나눈 사이였다.
일부러 거리를 두기 위해 멀리 떨어져 앉은 것도 그렇고,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기 위해 베일을 쓰다니.
고개를 숙이고 더 떨어지기 위해 엉덩이를 뒤로 미는 영애의 베일을 잡고 들어 올렸다.
“…….”
작은 손이 올라와 베일을 쥐고 있는 내 손을 스치듯 지나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빌어먹을.’
전날 나와 입술을 맞댈 때만 하더라도 멀쩡하던 입술이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분홍빛의 작은 입술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다른 곳은 이미 터진 것들도 보이고.
베일을 들친 손은 그대로 두고 다른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잔뜩 터진 입가를 쓸어내렸다.
“그대가…….”
눈까지 피하는 그녀를 아프게 눈에 담다가 천천히 베일을 내려 얼굴을 가려 주었다.
“그대가 괜찮은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몸은 괜찮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지독하게 떨리는 그녀의 작은 손이 눈에 계속 걸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작은 손을 손안으로 말아 쥐었다.
움찔—
둘이 있던 동굴에서의 적극적인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따.
그저 겁에 질린 모습만 보이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늘 저녁 연회를 마지막으로 이틀 후에 이 제국을 떠납니다. 영애!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긴 했지만, 진심이었다.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제발, 같이 간다고 해줘.’
“폐하. 저는…….”
“그대가 간다고만 하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간다고 승낙만 해주면 됩니다.
눈빛을 보니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끝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베일 뒤로 가려진 그녀의 눈빛을 읽기 위해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었다.
* * *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프레드릭 황제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나페아 제국의 황제 옆에는 분명 연인이 있을 텐데. 이게 무슨 뜻일까?
그리고… 지금 내 꼴을 봤으면, 그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나를 데리고 제국으로 가겠다고 하는 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는… 폐하, 저는 가지 못합니다.”
‘아… 아… 가고 싶다. 가고 싶은데.’
“영애, 지금 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저녁 연회에서 만난 후에… 아니, 아닙니다. 내가 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답하시면 됩니다.”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하루 같이 보냈다는 이유일까?
“…왜? 제게 왜 이렇게……?”
내 손을 감싼 그의 커다란 손에 힘이 조금 가해졌다.
“폐하, 왜?”
순식간에 뻗어온 손이 베일을 제치고, 눈꼬리 끝으로 진득한 입술이 닿아 왔다.
“울지 말아요. 날 믿고 가면 됩니다.”
내가… 내가 울고 있다고?
다시 한번 눈꼬리 끝으로 쫓아온 입술이 떨어지려는 눈물을 받아 꿀꺽 삼켰다.
혀를 세워 눈물을 핥던 그가 입술을 내려 온통 부풀어 오른 입술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뒤로 몸을 물리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어 버릴뻔한 마음을 겨우 다잡았다.
믿어도 되나?
“떨지 말아요. 날 믿어요. 믿기만 해주면 됩니다. 그러니….”
그러니 제발 같이 간다고만 해주면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떨리는 마음이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온기를 품은 그의 황금색 눈이 내 모습 하나하나에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그의 긴 팔이 뻗어졌다 느낀 순간, 내가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었다.
자신의 단단한 몸에 내 몸을 지그시 누른 그가 어색한 손길로 등 뒤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름을 불러도 됩니까?”
“…네.”
“레일라!”
허락하자마자 그가 냉큼 입에 올렸다.
낮게 귓가를 울리는 그의 저음의 목소리가 심장에 파고들어 와 심장의 속도를 높였다.
“레일라. 예쁜 이름입니다.”
“꼭 오늘이 아니라도 좋으니, 내 이름도 기억해 주십시오. 프레드릭.”
프레드릭 나페아.
꽉 끌어안은 그의 큰 손이 등을 지그시 누르자 그의 심장과 내 심장이 맞물려 똑같은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이 온기에 기대도 될까?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한 머리가 무겁게 그의 가슴에 기대있을 뿐이었다.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고, 마음조차 주지 못하고 살아온 시간.
“오늘은 영애가 괜찮은지 보러 온 겁니다. 오늘 저녁 황궁 연회에서 내가 춤을 신청하면 꼭 손을 잡아 주십시오. 조금 진정이 된 듯하니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녁에 연회에 가기 위해서는 그대도 준비할 것이 많을 테니 말입니다.”
“…네.”
짧은 대답에도 그는 햇살보다 환하게 웃었다.
응접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그의 등 뒤로 쏟아져 내렸다.
“동굴에서의 일은 다 기억납니까?”
“…다는 기억하지 못해요.”
그의 굵은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턱을 쓸어내렸다.
“그렇군요. 이지를 상실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만, 아쉽군요.”
‘뭐가요?’
질문을 안으로 삼켰다.
“그대는… 동굴 안에 있을 때의 모습이 진짜 그대의 모습이고, 지금의 이 모습은… 그대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만하고 바로 황궁으로 가봐야 합니다. 아쉽지만, 말이죠.”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소파에 내려준 그가 눈을 마주치고 다시 눈꼬리를 내렸다.
‘웃음이 참 많은 사람이구나. 그리고 웃음이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
“그냥 이대로 계십시오. 저는 바로 나가면 되니 말입니다. 몸도… 아직 다 낫지 않았을 거니 일어서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니, 그래도 폐하…….”
“그냥 계십시오.”
순식간에 일어난 그가 응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일어날 틈조차 없을 정도의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가 나간 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커다란 등 뒤로 희망이 보여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