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칼라엘을 파트너로 데리고 사냥터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 준비했다.
“폐하.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레일라 영애가 사라진 쪽에서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칼라엘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저기로 좀 더 들어가야겠군. 그렇지, 칼라엘?”
“…네, 폐하.”
레일라 영애가 말을 타고 사라진 곳에 시선을 둔 채 움직이지 않는 칼라엘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 집중시켰다.
이 제국의 주인인 황제와 함께하면서도 여동생만 생각하는 저놈을 어찌한다.
오늘 공들여 저 여동생을 위해 파티를 마련해 뒀다.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이니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벌어질 것이다.
‘오늘 칼라엘에게 최고의 선물을 줄 수 있겠군.’
1년에 한 번 열리는 화해의 연회에 옆 제국의 황제가 참석한다고 서신을 보낸 후부터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다.
평소 여자만 품다가 칼라엘을 보고 궁금했다.
그저 궁금할 뿐이었는데…….
다른 이들은 황제의 명에 벌벌 떠는 것에 기쁨을 느끼다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데 호기심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그의 시선 끝에 걸린 여동생이라는 존재를 보았고, 그래서 오랫동안 이 무대를 준비했다.
‘나페아 제국 황제에게 저 칼라엘의 애지중지한 여동생을 줘 버리는 것.’
가장 좋은 미끼였으며 단순한 재미였다.
제국 간의 화합 차원이기도 했고, 걸리적거리는 여동생을 치워 버리는 것이기도 했다.
입양아를 데려간 나페아 제국 황제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데 이용하기도 좋고.
공들여 준비한 사냥터에서 그들은 질척이는 시간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칼라엘에게 보여줄 수만 있다면 보여주고 싶은데.
황궁 기사단장에 말을 타고 가까이 다가왔다.
“폐하, 보낸 이들이 모두 계획대로 하고 물러났다 합니다.”
“그래, 잘했다.”
어렵게 만든 미약이었다.
사람을 통해 실험도 거쳤고.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먹이느냐가 문제라… 그로 인해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다.
첫째, 그들을 같이 묶어두기 위한 사냥제 파트너 지목.
미리 반박할 가능성을 일체 차단하기 위해 사냥제 시작을 선언하며 둘을 묶어 주었다.
둘째, 과연 칼라엘의 동생이 물을 마시느냐인데. 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면 다른 계획도 마련해 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켜야 했으니.
그런데… 이 제국의 신이 도운 것인지, 이렇게 쉽게 성공할 줄이야.
입가에 피어오르는 웃음을 애써 지웠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사냥한다.”
잠시 후, 보고를 받아보면 알겠다 싶어 숲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폐하. 성공했다 합니다. 지금 공작께서 레일라 영애를 찾기 위해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하하하하—
속 시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칼라엘, 이제 너는 어찌할 것이냐?’
마지막까지 재미를 위해 여기에 한 가지만 무대를 장식하면 된다.
나페아 제국의 황제가 레일라 영애를 데리고 돌아가는 것.
‘역시 이런 것이 재미지.’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재밌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평생 가슴에 박힐 고통을 주는 것이다.
스타멘 공작가를 상대로 황명으로도 레일라 영애를 옆 제국에 팔아치우라고 할 수는 없었다.
현 스타멘 공작인 케이드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고 집요한 구석이 있는 놈이었다.
매번 귀족 회의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안건이 처리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려니 했는데.
결벽적일 정도로 일 처리에 있어서 철저했고, 실수가 없이 원하는 것을 결국 손에 쥐고 마는 놈이었다.
감정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마는 칼라엘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놈이었다.
이제 어떻게 굴러갈지 궁금해졌다.
나페아 제국 황제와 레일라 영애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최대한 늦게 받아야 했다.
“사냥감을 위해 안쪽으로 더 들어가라.”
둘을 위한 미약 제조를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즐겁게 웃었다.
얼마 만에 웃는 진심의 웃음인지.
이래서 고통을 주는 사람은 즐거운 법이다.
* * *
공작저가 보였다.
“빨리 문을 열어라. 공작 각하께서 오신다.”
정문을 지키는 경비들이 소리 지르며 빠르게 열리는 문을 통해 저택 로비에 도착했다.
말에서 내리자 곧바로 집사를 시켜 주치의를 호출했다.
그전에…….
“목욕물을 받아 아가씨를 깨끗이 씻겨. 그리고… 내 침실로 데려가.”
대기하고 있던 하녀에게 레일라를 맡기고 집무실로 올라갔다.
솟구치는 분노를 가눌 수 없어 의자를 집어 던지고, 창가로 걸어가 주머니를 뒤졌다.
“빌어먹을.”
평소 즐겨 하지 않아서.
멈칫—
‘레일라가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왜 이 말이 지금 떠오르는 것인지.
주머니를 뒤지다가 책상으로 걸어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잘 정리된 시가를 하나 들고 입에 물었다.
빨갛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다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들어 깊이 뱉어냈다.
후우—
하얀 연기 속에 떠오르는 모습은 정사의 흔적으로 가득한 레일라의 엉망인 몸이었다.
얼마나 해댔으면.
황제의 재킷을 벗기기 전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괜찮았는데.
“이런 제기랄. 빌어먹을.”
정제되지 않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빨갛게 달아오른 시가를 그대로 주먹으로 말아 안에 가뒀다.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집무실에 퍼져나갔다.
몸의 모든 기능이 정지했다.
끓어오르는 분노가 뇌를 지배해서.
“폐하, 이렇게 하시겠다?”
정확한 건 주치의에게 들어봐야 하겠지만, 이 모든 상황을 만든 사람은 이 제국의 황제일 것이다.
첫날 레일라에게 첫 춤을 신청하게 한 행동은 내가 볼 수 있는 시야 안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냥제야… 영애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차만 마시리라 여겼는데.
파트너로 만들고 같이 숲 안으로 들이밀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 전날이었다면.
“그걸 노렸나?”
똑똑—
“들어와.”
“각하, 주치의가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가시겠습니까?”
집사의 말에 잠시 망설이는 걸음이 바로 따라붙지 못했다.
레일라의 엉망인 그 모습을 보면.
무슨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서.
하아—
길게 눈을 감았다가 뜨고 느린 걸음으로 집무실을 벗어났다.
답지 않게 내 방문임에도 쉽게 손잡이를 잡지 못하고 있자 눈치 빠른 집사가 열어주는 틈으로 안에 들어섰다.
망설임을 접고, 큰 걸음으로 응접실을 가로질러 침대로 다가가자 주치의가 보였다.
“각하, 오셨습니까?”
“레일라는?”
“조금만 더 살펴보고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왜 깨어나지 않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아끼는 주치의를 보고, 튀어나오려 하는 화를 꾹꾹 눌러 내렸다.
“조금 더 살펴보고 바로 나와.”
일단 레일라의 다 씻겨진 몸을 확인했으니, 밖으로 나가 응접실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생각을 멈추려 눈을 질끈 감았다.
냉정해지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차단하고 생각에 집중할 때였기에.
“지금까지 그렇게 함부로 하지 못하게 조여댔는데. 내 손안에서 벗어나는 꼴은 못 본다.”
피식—
하긴, 나 자신 자체도 레일라에게 이럴 줄은 몰랐으니, 어쩌면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것이 당연하려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다가왔다.
“여기 앉아. 그래 이제 다 끝났으면 상태를 말해.”
“네, 각하.”
무슨 이야기를 듣더라도 냉정할 수 있었다. 아니, 있어야 했다.
“미약의 한 종류를 드신 듯합니다. 현재로서는 추정일 뿐입니다. 이미 해독이 다 끝난 상태라 정확히 진단하기는 힘듭니다만, 보이는 바로는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해.”
“이런 미약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드릴 말씀이…….”
“그래서?”
나도 모르게 살기가 흘러나왔다.
“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종이라…….”
“그래서 모르겠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저 주치의의 목을 뽑아 버릴 것 같아서.
평소 냉정하고 차분한 이미지를 위해 자신을 얼마나 감추고 제어해 놨는데.
모든 것은 철저해야 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런데… 뭔가가 자꾸 신경을 갉아 먹었다.
레일라와 레일라! 또 레일라. 이런 것들이.
그래, 모든 일의 출발점은 레일라였고, 아마도… 그 끝도 레일라일 것이다.
하인이 내려놓은 찻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찻물이 넘어가는 길을 따라 끓어오르는 분노를 강제로 넘겼다.
“이 제국에 유통되는 모든 미약은 알고 있단 말이지? 그런데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네! 정… 정말입니다. 각하.”
주치의의 몸과 말이 떨리고 있었다.
“확실히 미약은 맞단 말이지? 해독약이 없는… 아, 존재도 모르니 해독약 자체도 모르겠군.”
“네… 네!”
하얗게 핏기가 가신 얼굴로 대답하기 바쁜 주치의의 얼굴을 평온한 눈길로 훑어 내렸다.
제국에 퍼진 적 없는 미약.
주치의조차 처음 보는 종류.
답은 하나인가. 만들었다?
“해독약이 없다면 무조건… 무조건 남녀 교합뿐이란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각하.”
이 제국의 황제가 만들어준 판에 나페아 제국의 황제와 레일라가 올라서 만족할만한 연극을 펼쳤다는 거였다.
그동안 생각하지 못한 점은 내가 너무 간과했다는 거였고.
황제의 집요함과 나페아 제국 황제의 여자에 대한 점.
정보에 의하면 목석일 정도로 여인을 멀리한다고 하더니.
‘이런 미친놈! 그걸 고스란히 믿었다니. 상대가 레일라인데도 말이지.’
레일라를 안은 놈이 다른 놈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목을 뽑아 버렸겠지만, 상대는 거대한 제국의 황제였다.
쉽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것이 묘하게 더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맘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은 전부 치워버려야 한다. 그 어떤 것이라도.
내 부모처럼.
“확실히 모든 미약은 해독되었다는 거겠지?”
“네, 확실합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남자가…….”
“그만! 그만 나가.”
레일라의 몸에 남아 있는 난잡한 자국에 짐작하고 있었지만, 직접 주치의의 말을 통해 들으니 누구든 죽여 버리고 싶었다.
“카트!”
“네, 각하.”
“알아 와.”
무슨 말인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것이 일이니.
부복하고 머리를 깊이 숙이고 물러나는 모습을 눈에 담고 있을 때였다.
* * *
꽈앙—
부서지듯 문이 열리고 케이드란 형님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레일라에 대한 말도 자세히 듣지 못한 데다가 저택에 오자마자 레일라가 케이드란의 방에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순식간에 뛰어올라 방으로 올라왔다.
“레일라는 자고 있어. 앉아, 칼라엘! 오늘 네가 조금이라도 내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레일라를 위해서 좋을 거야.”
부서지듯 열린 문을 뒤로하고 들어서다 그대로 발이 멈췄다.
“…….”
“앉아.”
다시 한번 뚝 떨어지는 명령에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
“하아.”
“진정하고 있어. 네가 화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없으니까. 황제는?”
저런 냉정하고 침착한 면이 항상 재수 없었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필요한 행동이었다.
“황궁으로 가셨습니다. 레일라를 보고 와도 됩니까? 형님.”
“아니, 네가 그럴 필요는 없어. 지금 자고 있으니 깨어난 후에 보는 것이 좋아.”
이제는 만나게조차 해주지 않나 싶어 몸이 저절로 긴장되었다.
레일라가 없으면 살기가 힘들다. 아니, 아마 살 수 없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