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오늘 입은 옷은 사냥제를 위한 옷으로 활동하기 편한 바지였다.
윗옷이 꼬리처럼 내려와 엉덩이를 살짝 덮은 옷으로, 가벼운 드레스를 입는 것보다는 움직임이 훨씬 편했다.
사냥제를 가기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치고 드레스룸을 나오자, 둘째 오라버니가 내 방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저 준비 다 했어요.”
“그래…….”
그의 살피는 시선이 위에서부터 타고 발끝으로 내려왔다.
“예쁘네.”
“네, 감사해요. 오늘 직접 사냥하시나요?”
“아마도…….”
참여하고 싶지 않아도 참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온갖 이유를 두고 어떻게든 옆에 두려는 황제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을 테니까.
어제 연회에서도 황제의 눈이 둘째 오라버니를 스치듯 볼 때마다 욕정이 섞여 있었다.
틈을 노리는 잡아먹지 못한 자의 열망이 느껴지는 눈빛.
만약… 만약에 내가 없었다면, 오라버니랑 잘 되었을까?
“가자.”
생각을 끊는 그의 말에 방을 빠져나와 마차에 올랐다.
사냥제는 크게 걱정할 것이 없었으니, 그저 참여하기만 하면 되는 거라 큰 부담은 없었다.
물론 사냥에 직접 참여하는 영애가 있긴 해도, 대부분 영애는 따로 마련한 티타임 텐트에 모여 차를 마시면 되었다.
“레일라, 조심해.”
“저야 차만 마실 건데요. 사냥에 직접 참여하는 오라버니가 조심해야죠.”
혹시 내가 도망가는 걸 걱정하는 걸까?
잘못 도망치면 짐승의 먹이나 될 것이다.
마차가 덜컹 소리와 함께 멈추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내려 사냥터로 향했다.
온도가 딱 알맞은 바람이 먼저 맞아주더니 부드럽게 머릿결을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 만인가? 밖으로 나온 것이.’
녹음이 가득한 숲과 바람에 저절로 미소가 입에 걸렸다.
그런 내 모습 하나하나에 진득하게 따라붙는 그의 시선을 못 본 척 숲으로 눈을 돌렸다.
“좋아? 내가…….”
“다음에 큰 오라버니 허락 맡고 외출할게요. 오늘은 이곳이 좋아요.”
“그래.”
그의 말을 끊고 바로 답했다.
혼자 느끼는 자유가 좋으니까.
등 뒤로 따라붙는 시선이 어느 순간 끊어졌다.
많은 귀족이 먼저 도착해 있자, 드디어 사냥터에 도착한 황제가 단상에 올랐다.
황제 옆으로 나페아 제국의 황제 또한 같이 단상에 올랐고 존재감이 없는 소국이나 다름없는 왕국의 왕과 왕자는 단상 아래에 자리했다.
멀리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차이.
두 황제가 올라간 자리에서 한 명은 빛으로 더 밝아지고, 다른 한 명은 점점 빛을 잃는 모습이었다.
마법 확성기를 통해 황제의 음성이 사냥터 가득 울려 퍼졌다.
“오늘 사냥제는 유레안 제국과 나페아 제국 간의 화합을 위한 두 번째 행사이니만큼, 뜻깊은 사냥제가 될 것이다. 오늘 사냥제에서 우승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금화와 다른 원하는 것도 들어 주도록 하지.”
황제의 말이 끝났다, 생각하고 마련한 텐트로 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다시 황제의 말이 울려 퍼져 돌아선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어제 첫 춤을 추었던 스타멘 공작가의 레일라 영애를 나페아 제국 황제의 파트너로 지정해 사냥제에 같이 참여시키기로 했다. 말을 준비해서 레일라 영애를 태워 준비시켜라.”
머리가 멍해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어제 겨우 첫 춤을 추었던 상대와 사냥제 파트너까지 하라니.
또다시 내게 쏟아지는 따끔한 시선 속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빌어먹을 황제 놈’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잇새로 욕을 뱉었다.
이럴 거면 어제 나페아 제국의 황제 침실로 밀어 넣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 정도였다.
“아, 저기 나오는군. 오늘은 더 아름답구나. 이 제국에 평화를 위해 온 나페아 제국의 황제를 위해 그대가 사냥제 숲을 잘 안내해 주기 바란다.”
“…네, 폐하.”
숲을 모르는 내게 숲 안내를 맡겼다.
황제의 진해진 웃음이 프레드릭 황제에게로 향했다.
“용감하시기로 유명한 분께서… 설마하니 무서우셔서 기사단 전체를 대동하고 사냥제에 참여하려고 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의 입이 비웃음에 늘어졌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영애와 함께 가도록 하죠.”
짝짝짝—
의도한 대로 이뤄지자 혼자 신나서 손뼉을 쳐대던 황제가 입술을 찢었다.
그의 웃음 띤 얼굴 끝이 둘째 오라버니를 향한 채.
의미심장한 얼굴로 황제가 손에 기를 들고 사냥제 시작을 알렸다.
“자, 이제 준비되었으면 모두 정렬해서 각 파트너 별로 숲으로 들어가라.”
오늘 사냥제는 두 명이 한 팀으로 이뤄 숲으로 들어가는 파트너제였다.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전부 기사로 이루어져 있는 숙련된 파트너가 있는 팀이었고… 나는 그야말로 말이나 겨우 타는 짐짝이었다.
정말 사람 미치게 하고 있었다.
준비된 말에 올라타는 것만으로도 벌써 힘이 빠지고 있었다.
아무 능력이 없는 평범한 영애인 내게 사냥은 다른 공간이었다.
황금빛을 머금은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대는 제 옆에만 있으면 됩니다. 이 제국의 황제는 재밌는 사람이군요.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을까 싶지만. 우리가 꼭 우승할 필요는 없으니 즐기면 될 겁니다.”
그의 큰 손이 커다란 말의 갈기를 쓰다듬고 있었다.
“…네, 죄송합니다. 폐하.”
말을 향했던 그의 황금빛 눈이 내게로 쏟아져 내리더니 무심한 어조의 말들이 뱉어졌다.
“이 모든 것이 그대가 의도했나요?”
“네?”
“그대가 결정권자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대가 죄송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야 뭐, 참여하는 것에 의의를 두면 됩니다.”
오랜만에 접한 정상적인 말들이 더 이상한 이유가 뭘까?
그가 말을 천천히 앞으로 걷게 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즐기러 갑시다.”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따랐다.
‘그래 맞아. 내가 무슨 사냥을.’
어차피 이 사냥제에서 내가 동물을 사냥할 일은 없으니 편하게 마음먹으면 된다.
천천히 앞으로 나가는 등 뒤로 느껴지는 붉은 눈동자 두 쌍이 온몸을 불태우듯 꽂혀 들었다.
프레드릭 황제의 말꼬리에 고정한 시선을 뒤로 돌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곳은 깊을 수도 있으니 그대와 나는 가볍게 이 근처로 가도록 하죠. 그래도 될까요?”
“네, 폐하.”
대부분 참여자가 빠르게 말을 달려 숲 안쪽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 둘이 탄 말은 산책하듯 천천히 걸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이 드디어 모두 떨어져 나갔다.
큰 오라버니는 가문의 기사와 함께.
둘째 오라버니는 이 제국의 황제와 황궁 기사단과 함께.
프레드릭 황제가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조금 빠르게 달렸다.
빠르지 않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달리는 말을 따라 나도 같이 달렸다.
조금 멀어진 그가 속도를 늦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쪽으로 오시죠. 다른 사람이 다 들어가면서 사냥감을 몰고 갔는지 한 마리도 안 보입니다. 잠깐 저쪽으로 가보도록 합시다.”
그의 옆으로 가자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저기 사슴 한 마리가 보입니다. 우리는 사슴 한 마리만 잡고 바로 돌아가도록 하면 되겠습니다. 혹시라도 위험할 수 있으니 제 뒤에만 계시면 됩니다.”
조심히 화살을 들고 다가가는 그를 보고 뒤에 멈춰 기다렸다.
어차피 나는 방해꾼만 될 터이니.
그제야 느껴지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손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장식으로라도 뭔가 들고 올걸.
피융—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와 함께 단, 한발의 화살로 깔끔하게 사슴의 머리를 꿰뚫어 버린 그를 보고 말 위에서 손뼉을 쳤다.
아무도 없으니 나라도 장단을 맞춰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생각 없이 손뼉을 치는 나를 돌아보는 나페아 제국 황제의 얼굴이 이상했다.
‘아… 황제에게 손뼉을 치면 안 되나?’
실수했다는 생각에 펼친 손바닥을 말아 쥐었다.
“영애!”
다급한 그의 음성에 변명의 말을 뱉어냈다.
“아… 이건 저기 별다른 뜻 없이…….”
내 말에도 멈추지 않은 그가 순식간에 다가와 말 위에 있는 나를 가볍게 안아 들고 뛰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빠른 속도에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릴 뿐.
‘말이 더 빠르지 않나?’
이 상황에서 말을 생각하는 나를 그는 속도로 가볍게 조소했다.
내 생각이 틀렸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사람의 속도라고 보기 힘들 만큼의 빠른 속도로 그가 달렸기에.
‘이래서 진남주인가.’
그가 막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을 때 바로 옆으로 화살이 퍽하고 와서 박혔다.
“이… 이게 도대체…….”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머리가 쓸데없는 생각을 멈췄다.
그 뒤로도 몇 개의 화살이 날아와 나무에 박혔다.
퍽퍽퍽퍽—
내려달라 나오려는 말을 다시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어 씹어 삼켰다.
움직이는 자리마다 와서 박히는 화살이 곧 내 심장을 뚫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그의 목을 바르작거리는 몸짓으로 더 매달렸다.
그는 힘든 기색 하나도 없이 나를 안고 가볍게 달렸다.
커다란 성인을 안고 깃털보다 가볍게 이곳저곳으로 움직여 이동했다.
“저들의 움직이는 모습으로 보아, 전문 살수인 듯한데… 이상하네.”
그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10명 정도가 한꺼번에 움직이고 있어 혹시라도 저와 떨어지면 위험할 수 있으니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계십시오.”
“네.”
당연하죠.
여기서 혼자 움직이는 건 그야말로 그들의 먹이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왔는데.’
그의 뒤로 하나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눈을 똥그랗게 떠봤지만, 내 평범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포기하고 그의 목을 더 끌어안는 내 몫의 일을 했다.
우리 뒤로 바람에 움직임으로만 보이는 나뭇가지의 움직임이 출렁거렸다.
“지금은 몸을 숨길 곳을 찾아 영애를 두고 저 혼자 처리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영애를 안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의 말에 속눈썹이 빠르게 움직였다.
‘혼자가 더 위험하지 않을까.’
“일단 저들을 피해서 더 깊이 들어간 뒤로 영애가 있을 곳을 찾아보도록 하겠으니 조금만 참고 있어요.”
“…네.”
삶의 생명줄처럼 유일하게 매달리는 존재인 그의 목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가 안정적인 손으로 나를 안고 다시 빠르게 달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뭔가가 휙휙 뒤로 지나가는 모습에 눈을 감았다.
“아, 이곳이 좋겠군요. 저들이 아직 도착하기 전이니, 잠시 그대가 이곳 근처에서 숨어 있으면 혼자 처리할 수 있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가 걷는 곳으로 서둘러 뒤를 따라가자 몇 걸음 만에 바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이 적당하군요. 저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라, 누가 오더라도 곧바로 볼 수 있으니 혹시라도 위험하면 소리를 지르면 됩니다.”
“네, 그럴게요. 조심하세요. 폐하.”
잠시 묘한 눈으로 나를 보던 나페아 제국의 황제가 최대한 빨리 그들을 처리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