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아가씨, 아가씨! 일어나셔야 해요. 디자이너가 와서 기다립니다.”
“으응, 조금만 더 자면 안 될까?”
“안 돼요. 아가씨. 오늘 꼭 드레스를 맞추셔야 연회 날에 완성할 수가 있다고 했어요. 힘드셔도 일어나세요. 네.”
몇 번 더 깨우는 에렌의 손에 일어나 간단히 준비했다.
디자이너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내려가자 그녀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아유, 공녀님, 오셨어요. 제가 공녀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드레스는 몇 벌을 맞추면 될까요?”
그녀의 얼굴이 인위적으로 밝아졌다.
“한 벌이면 돼요. 마담.”
온갖 호들갑을 떨던 마담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만약 오라버니가 있었다면 다를지도 모르지만, 난 그다지 드레스에 욕심이 없다.
아니다. 이 집의 모든 것에.
“5벌.”
응? 이건 또 소리야.
“…오라버니? 언제 왔어요?”
표정이 굳은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꽃이 피듯이 화사해졌다.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둘째 오라버니가 드레스의 숫자를 말한 순간부터.
아니, 오라버니의 휘황찬란한 미모가 마담 눈에 비추고부터였을까.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그녀가 입꼬리를 한껏 당겨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네! 공자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쩜 공녀님은 좋으시겠다. 이런 분이 오라버니라니.”
당신이 가지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오라버니, 그렇게 많이 필요 없어요. 연회만 참석할 거잖아요.”
“3일이야. 같은 드레스를 계속 입은 영애는 없어.”
그래, 어차피 내 의사 따위 두 오라버니에겐 필요 없을 테니.
“네, 그럴게요.”
“사냥제에 맞는 옷도.”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마담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네, 네! 공자님 저에게 맡겨만 주세요.”
마담에게 드레스를 맡기고 방으로 가려고 하자 오라버니가 뒤에 따라붙었다.
“어디 다녀왔어요? 큰 오라버니는 들으셨죠?”
* * *
레일라가 급하게 말을 돌렸다.
“그래.”
서둘러 말을 돌리는 레일라에 동조했다.
언제나 그랬다.
레일라를 보면 이 저택에 정 둘 곳을 두지 않는다.
시녀도 한 명뿐이고, 물건도 정이 가는 물건을 두지 않는다.
언젠가는 이 저택을 떠날 사람처럼.
나만 그리 느끼는 것은 아닌지, 영지에 가는 형이 레일라에게 몰래 붙여 놓은 그림자를 보면 그 또한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분노, 지금은 불안함.
레일라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형은 절대 레일라를 놓지 않을 거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이고.
우리 형제 사이에 흐르는 피는 그녀가 죽어도 벗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제 드레스룸에도 많으니까요. 그런데 오라버니. 연회 3일 동안 전부 참석해야 하나요?”
“폐하의 명이야.”
황제의 명이라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별히 연회를 좋아하는 성격은 못되었지만.
방에 도착해 방으로 들어가는 뒤로 칼라엘이 따라 들어왔다.
아무렇지 않게 들어선 그가 큰 덩치를 소파에 깊게 묻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발이 무거워졌다.
“에렌, 차 좀 부탁할게.”
그의 앞에 앉아 차를 들었다.
긴장으로 굳어진 손에 들린 찻잔에서 찻물이 흘러 아래로 점점이 떨어져 내렸다.
“긴장하지 마.”
그의 명령조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자 붉은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의 핏빛 눈에 온통 내가 들어차 있었다.
“어쩌면 넌.”
그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의 눈에 스치는 쓸쓸함이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되었지만, 모른 척했다.
이제는 감흥 없는 그의 붉은 눈을 마주하자 그가 나직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첫날 연회는 같이 가. 형님이 오더라도.”
“네.”
평소에 말이 없던 그가 말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앞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살이 좀 빠진 거 같아. 식사는?”
“…네. 했어요.”
“혹시 다른 필요한 건?”
“…네. 없어요.”
친절한 그의 물음에 짧게 답했다.
그가 이곳에 있겠다고 하면 어쩌나… 그 걱정에 머리가 하얗게 되어 자꾸 말이 짧아졌다.
그가 깊이 묻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내 방에서 나가는 그의 커다란 등이 쓸쓸해 보였다.
그를 보던 시선을 내려 손끝에 걸린 찻잔을 향했다.
찻잔 안에 고인 찻물에 내 모습이 짧게 비췄다가 사라지는 모습에 같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질 수 있을까?”
느리게 가는 하루가 저물고 밤이 되었다.
걱정하며 뒤척인 그 밤에 그는 내 방을 찾지 않았다.
‘혹시 큰 오라버니와 무슨 약속을 했을까?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자기들 마음대로 할 거니까.
큰 오라버니와 둘째 오라버니가 없는 날을 보내다 연회가 시작하는 첫날이 되었다.
연회 첫날 아침에는 연회에 가는 준비를 도울 하녀 3명이 더 보내져서 차질없이 준비할 수 있었다.
준비된 연한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두 오라버니가 보내준 머리 장식을 최대한 머리에 꽂아 넣었다.
‘음…좀 많이 무거운데.’
목걸이와 귀걸이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이 준비해 준 것이었고, 여기에 내 의사는 없었다.
무거운 머리에 자꾸 목이 뒤로 꺾이려 하고 있었다.
“아름다워, 레일라.”
다가온 큰 오라버니가 손짓하자, 준비를 도운 하녀와 에렌이 순식간에 물러났다.
“보고 싶었어. 레일라. 넌?”
큰 오라버니의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아 왔다.
이미 화장이 끝난 입술이라 가벼운 입맞춤을 기대했다.
하지만… 입술을 물어 뜯겼다.
짐승의 이빨이 드러났다.
그가 이를 세워 입술을 물다가 끝내 립스틱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진득하게 입술을 빨아댔다.
타액이 번들거리는 입술을 그의 엄지가 진득하게 쓸었다.
“다시 칠해 달라고 해야겠어. 그렇지?”
그가 에렌을 불렀다.
“넌 보고 싶은 얼굴이 아니네. 그러나 그런 건 나한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관없어.”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형님, 이제 가시죠.”
언제 왔는지 둘째 오라버니가 큰 보폭으로 가까워졌다.
“아름답네.”
문 앞에 서 있던 에렌이 들어와 내 입술을 다시 만져주었다.
준비를 마치고 두 오라버니와 함께 방을 나섰다.
“언제 이렇게 맞춘 거예요?”
“미리 말해 놓고 갔어. 그래도 우리 세 명뿐인데… 남들에게 행복해 보여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비슷하게 해달라 했어.”
셋의 옷에 섞인 색과 소매의 모양이 비슷했다.
마치 연인처럼 보일 수도 있을 정도로 곳곳이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목에 맨 크라바트는 완전히 나와 똑같은 색이고.
마치 연인처럼 보였다.
‘그들의 뜻이 그렇다면.’
두 오라버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오늘 불안할 건 없어. 나페아 제국의 황제가 왔다 하더라도 그와 친해질 필요는 없으니까. 황제의 뜻에 맞출 필요도 없고. 그러니 네가 굳이 맞추려고 하지 마. 우린 그 정도의 가문이니까.”
“네, 오라버니.”
무조건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으면 되는 것이다.
마차가 달리는 동안 창문을 통해 밖을 보자 긴 줄이 늘어져 있었다.
오늘 연회 첫날이니만큼 수도의 귀족들이 전원 참석했다고 해도 좋은 정도의 긴 줄.
스타멘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는 긴 줄을 제치고, 가볍게 황궁의 성문을 가뿐히 넘었다.
“우리 가문의 휴게실은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언제든 쉬고 싶으면 시종에게 말해. 레일라, 너는 황궁엔 처음이니 되도록 나나 칼라엘과 같이 있으면 되고.”
“네.”
마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리자 둘째 오라버니가 먼저 내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내리자 살짝 어둠이 내려앉은 황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쓸데없이 화려하게 꾸몄지.”
둘째 오라버니 말처럼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아낌없이 달아놓은 고가의 마법 등이 밝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고, 정원에 꽃들 또한 이번에 새로 심었는지 전부 화려했다.
거기에 거의 모든 나무에조차 화려한 색의 마법 등으로 빛나지 않은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정말 화려하네요. 황궁이 처음이라 언제나 이런 모습인 줄 알았어요.”
“폐하는 보여주기를 좋아하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는 내게 큰 오라버니의 당부 소리가 들렸다.
“칼라엘, 레일라를 데리고 가문 휴게실에서 기다려. 우리 입장은 조금 늦어질 거니까. 시종을 보내면 그때 나오면 된다. 나는 만날 사람이 있으니 입장할 때 보자.”
큰 오라버니가 긴 다리로 우리와 다른 오른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둘째 오라버니가 나를 데리고 왼쪽 길로 들어서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담당하고 있던 시종이 차와 간식을 내왔다.
“레일라, 먼저 간단히 먹어. 연회장 안에서는 먹기가 힘들 거야.”
“네.”
시종이 내온 간식으로 허기진 속을 달랬다.
그와 말을 섞지 않기 위해 탁자 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똑똑—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시종이 들어와 한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째 오라버니의 팔에 손을 올리고 휴게실을 나서 적막한 긴 복도를 걸었다.
웅장한 연회 홀 문 앞에 서 있는 큰 오라버니가 보였다.
“스타멘 공작가의 공작님과 칼라엘 공자, 레일라 공녀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소리에 그들과 발을 맞춰 천천히 발을 디뎠다. 이미 입장해 있던 모든 귀족의 눈이 우리 세 명에게 집중되었다.
수군거리는 소리는 덤으로 딸려왔다.
물론 내게 닿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다.
지금 내 문제에 저런 수군거리는 소리까지 얹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스타멘 공작가가 입장하고 오늘의 주인공인 왕국의 왕과 왕자의 입장을 알렸다.
홀의 입구로 두던 시선을 돌려 안쪽을 향했다.
‘내가 보면 뭐 하겠어.’
그들의 입장이 끝나자 이 제국 황제의 입장 순서가 되었다.
“유레안 제국의 태양이신 블라이스 유레안 황제 폐하와 나페아 제국의 황제이신 프레드릭 나페아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홀에 있는 모든 귀족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뚜벅뚜벅—
홀을 가득 가르는 두 개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조용한 홀에 울려 퍼졌다.
“모두 고개를 들라! 올해에 개최하는 연회는 뜻깊다. 우리 제국과 나페아 제국의 평화를 상징하는 연회이니만큼 즐거운 연회가 될 것이니.”
황제가 말을 끊더니 나페아 제국의 황제를 향해 그린 듯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직접 참석하셨으니 제국 간의 평화의 뜻으로 첫 춤을 먼저 열어주셨으면 합니다.”
황제의 탁한 눈이 홀 곳곳에 스며들었다.
“스타멘 공작가의 레일라 영애는 앞으로 나오도록.”
맙소사.
설마 첫 춤을 추라고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오라고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저 어떻게든 엮이게 하지 않을까 했는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한발 떼었을 때였다.
상처 많은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잡고 멈추게 했다.
홀에 있는 많은 귀족의 눈이 나를 잡은 손으로 꽂히듯 내려앉았다.
“칼라엘,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마. 어차피 레일라는 우리를 떠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