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그의 마땅찮은 눈빛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물 마셔, 레일라. 쯧. 그렇게 약해서야.”
낮게 혀를 차는 소리에 물컵을 들었다.
그들에게 내 생각과 몸 따위는 중요치 않겠지.
늘 그랬으니까.
“형님, 갈수록 유치해지시기만 합니다.”
두 남자 간의 이상한 기운이 다시 식당에 짙게 깔리자 숨통이 막혀왔다.
짙게 깔린 기운에 막힌 숨이 버거워 얼굴이 붉어졌다.
손을 들어 숨통이 막히는 목을 쥐고 몇 번 더 컥컥거리며 천천히 진정시켰다.
“전, 컥. 초대장을 보겠어요. 이제 사교계에 나가봐야 하니까요. 그래도 될까요?”
내 말이 살기 어린 공기를 가르자 둘이 기운을 거둬들였다.
“그래, 그래야지. 넌 그럴 자격이 충분해.”
큰 오라버니의 허락에 막힌 숨과 함께 기대감으로 널뛰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이렇게 살다가는 먼저 죽을 거 같으니 뭔가 계획을 세워야 했다.
“대신 말이야. 레일라. 네가 어딜 가든 내 허락을 맡고 가야 해.”
“…네?”
스타멘 공작가에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
방금 이 공작가의 가주이자 공작인 그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나는 티파티조차 편히 갈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하하하, 웃기네.”
둘째 오라버니의 웃음이 무거운 공기를 들썩이게 했다.
“웃깁니다. 형님. 레일라가 아이입니까? 어제부로 성년이 되었습니다.”
명령만 담겼던 입에서 정상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옳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한 사람이 둘째 오라버니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들어 올려지려는 놀란 얼굴을 식기에 고정했다.
“칼라엘. 아직도 이해 못 하나 본데. 이 저택의 주인은 나야. 네가 아니라. 그러니 내가 하는 모든 명령에 무조건 그냥 따르면 되는 거야.”
큰 오라버니의 짙어진 검은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숙인 머리 위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레일라, 알아들었겠지? 너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의 말끝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인형처럼 생각 없이 원하는 답을 하면 된다.
“…허락받고 갈게요. 어딜 가든지요.”
그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려 시원하게 웃었다.
이제 새로운 규칙에 적응할 때였다.
* * *
레일라의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으며 다시 식기를 들어 올렸다.
식사 전에 칼라엘의 방에서 보았던 것들을 씹어 삼키면서.
질척하게 들러붙는 건 평소의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결벽증이라 일컬어질 만큼 깔끔한 스타일인 내가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이야.
남과 공유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물론 어제까지는.
식기를 들어 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굳이 모든 것을 지금 답을 내릴 필요는 없었다.
저놈에 대한 처분도 마찬가지였고.
금방이라도 저놈이 날뛸 듯이 들썩거렸지만… 그러지 못할 것이다.
레일라에게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어차피 내 손안에 든 건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게 누가 되었던지 상관없이 모두 내 뜻대로 하면 되니까.
“헤이드, 레일라에게 온 모든 초대장을 내게 먼저 올려.”
레일라를 향해서 입꼬리를 당겨 환하게 웃어주었다.
“레일라, 이 큰 오라버니가 당연히 네게 신경 써야잖아. 그렇지 않아? 칼라엘! 너도 나와 같아. 그렇지?”
“글쎄요.”
무심한 눈빛으로 식기를 드는 놈을 보던 시선을 비틀어 내렸다.
둘 사이에 낀 레일라가 탁 소리와 함께 식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방에 갈게요. 가서…….”
“앉아, 레일라. 내 허락 없이 일어나지 마.”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아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야 했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다시 자리에 앉는 레일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저 무관심하길 간절히 바라는 눈빛 속에 담긴 애절함 따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미 내가 그러기로 했으니까.
레일라가 서서히 받아들이면 되는 거였다.
아니,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녀의 의사 따위 내게는 상관없었지만.
“자… 그럼 식사 다했으면 일어날까? 칼라엘, 너도 일어날래?”
“…….”
너무 한 번에 숨통을 끊어 놓으면 더 반항하는 법이니 서서히 조여야 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레일라와 칼라엘을 다루면 되는 것이다.
* * *
케이드란의 말에 대답 없이 일어나 레일라의 손을 잡았다.
“가자.”
“네, 오라버니.”
평소와 똑같은 짧은 말투였지만, 의미는 달랐다.
불안함에 떠는 레일라와 같은 걸음으로 걸었다.
“잠깐.”
케이드란의 가벼운 말투가 둘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멈춘 걸음마다 속에서부터 들끓어 오르는 열기가 긴 다리를 타고 끈적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람을 멈춰 놓고도 여유롭게 입을 닫고 일어나는 면상을 갈겨 주고 싶은 것을 겨우 눌러 내렸다.
그는 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묶어 놓았다.
목에 있는 구속구가 무겁게 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 별건 아니고, 밤에 보자고.”
“…네. 그런데……?”
레일라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떨리는 진동을 만들어 냈다.
그 소리조차 감흥 없는 케이드란의 어깨가 가볍게 들썩이고 내려왔다.
느릿하게 일어난 그가 천천히 레일라 앞으로 다가왔다.
“레일라, 이 오라버니가 보자고 하면 넌 따르면 돼. 그동안 칼라엘이 널 잘 교육한 것 같더니.”
그가 혀를 차며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이 큰 오라버니가 널 다시 교육하길 바라? 그렇다면 내 친히 네게도 가르침을 주도록 하지. 칼라엘도 내 가르침을 좀 받더니 조용하잖아. 그러니 내가 동생 둘을 가르친다 해서 나쁜 건 없을 거 같은데.”
그가 낮게 혀를 차며 눈썹을 일그러트리자 레일라의 몸이 경직되었다.
케이드란이 손짓했다.
“이제 가봐! 내게 더 볼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아니면… 오라버니 따라서 집무실로 가고 싶은 거야?”
나도 모르게 겹친 손 사이로 손톱을 받아 넣었다.
“아…아니요. 바…방에 가서 쉬고 싶어요.”
말끝에 울음이 묻어난 레일라의 가는 목울대가 일렁거렸다.
케이드란이 손을 올려 레일라의 은빛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 멈춰 있는 나와 레일라를 지나쳤다.
그가 나가고 레일라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갈게요, 오라버니.”
혼란이 가득한 레일라의 얼굴 위로 시선을 두다가 서둘러 내렸다.
케이드란의 성격상 그를 거스르는 모든 것은 제거될 것이다.
그것이 나라고 하더라도.
“안아줄까?”
레일라를 위해 뻗은 손을 그녀의 힘없는 손이 단번에 쳐냈다.
짝 소리와 함께 손이 밀려났다.
“괜찮아요. 그냥 걸을게요.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레일라의 거친 말에 침묵을 지켰다.
성년식 전이였다면 저런 말조차 하지 못했을 그녀의 거친 언사에 밀린 손끝을 말없이 응시했다.
어제부터 시작한 인생의 다른 막에서 처음 배워가는 사람처럼 혼란스러웠다.
뭘 해야 하는지부터 다시 시작해 보아야 하나.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 이제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레일라가 방문 앞에 선 순간, 나 또한 동시에 내 방문 앞에 섰다.
레일라의 팔이 문손잡이를 잡는 모습을 보고 나 또한 방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레일라의 손이 방문을 열기 위해 내리는 손을 보고 똑같이 힘을 줘서 방문을 열었다.
조금씩 열리는 문을 보고 같은 크기의 힘으로 조심히 똑같은 넓이로 열리는 문이 새로웠다.
“쉬어.”
방으로 완전히 들어간 레일라가 작게 ‘네’라는 대답을 하자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완전히 닫았다.
* * *
칼라엘에게 답하고, 조용히 닫히는 문 뒤로 잠깐 몸을 기대고 있다가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 그대로 몸을 던졌다.
예상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 일들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두 명으로 인해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와 몸의 힘을 모두 빼앗아 갔다.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겠지.”
허공에 손을 올리고 뭔가라도 잡으려고 했지만, 빈손뿐이었다.
지금의 내 모습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힘주어 눈을 꾹 감았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눈에 어둠이 스며들었다.
“아가씨, 아가씨! 일어나셔야 해요. 준비하고 식사하시자고 하셨어요. 늦으시면 안 돼요.”
“으음. 귀찮아. 그냥 안 먹을래. 너무 피곤해. 그냥 잘 거야.”
“아가씨…….”
자꾸 깨우는 에렌을 귀찮다고 밀어내고 다시 몸을 말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고개를 더 깊이 베개에 묻었다.
지금은 몸을 까딱할 힘도 없었다.
“으악.”
순식간에 들리는 몸이 아니었다면.
“레일라.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새 잊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내 뜻을 거스르지 말라고. 아니면… 이 오라버니가 친히 네게 먹여주길 바라? 칼라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우리 둘뿐인데.”
어떻게 할래?
쉽게 이불을 제치고 들어 올리는 큰 오라버니로 인해 강제로 일어나야 했다.
“제가 갈게요. 오라버니.”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할 때였다.
말을 잘 듣는 내 모습에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바쁜 와중에 너와 식사하기 위해 시간을 냈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가자. 내가 널 챙겨야지, 누가 이렇게 널 돌보겠어.”
챙기지 않아 줘도 되는데.
속으로 삼킨 말을 잘근잘근 더 씹어 삼키며 그를 따라 식당으로 내려갔다.
“레일라, 내가 먹어주길 원하지 않으면, 네가 잘 먹는 것이 좋아.”
“…별로 배고프지 않아서요.”
“그래, 그래도 먹어둬야지. 나를 받으려면.”
식기를 들어 올리는 손끝이 그대로 접시 위로 뚝 떨어졌다.
한 번으로 끝내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긴 했지만, 이렇게 오늘 바로는 아니었는데.
“오라버니… 저, 오늘 너무 힘들어요.”
그의 붉은 눈이 내 얼굴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그가 탁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레일라, 그렇게 알아듣게 말해도 몰라? 여기서 네가 선택할 권한 같은 것은 없어. 그래, 좋아. 딱, 오늘까지만 네 마음대로 하고, 오늘이 지나면 네 선택할 권한 따위는 없어.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오라버니가 이렇게 친절하게 해줄 때 잘 따르는 것이 네게도 좋아. 나도 내가 앞으로 어찌할지 모르겠으니.”
그래, 나도 그것이 더 무서웠다.
“…네, 명심할게요.”
“그래, 착하네. 레일라. 이 오라버니가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거든.”
오라버니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서 그가 묻는 말에 성실한 답을 했다.
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딱 내가 얻어 낼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식사와 후식까지 전부 다 먹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올라가 곧바로 욕실로 가서 꾸역꾸역 밀어 넣은 저녁을 토해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시면 주치의를 부를까요?”
욕실 앞에서 걱정하며 묻는 에렌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마저 먹은 것을 전부 쏟아낸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바로 씻고 자고 싶어. 준비해줘.”
“네, 아가씨. 쉬고 계세요.”
유일하게 날 위하는 에렌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아 머리를 뒤로 기댔다.
스타멘 공작가에서 보낸 10년보다……어제와 오늘.
단, 이틀의 시간이 가장 힘들어 손가락 끝조차 움직일 힘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