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큰 오라버니 케이드란이 악단에 손짓하자 지휘자가 서둘러 홀에 춤곡을 흘려보냈다.
“이리 와, 레일라. 네 얼굴을 보니 잠깐 쉬어야겠어.”
“형님은 가고 내가 데려갈 테니 신경 쓰지 마시죠.”
큰 오라버니의 눈가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더는 험악해지기 전에 큰 오라버니의 손을 잡고 둘째 오라버니에게 등을 돌렸다.
“너, 지금 가면 후회할 건데. 레일라. 넌 머리가 나쁘네.”
내 뜻을 거스른 벌을 받았던 걸 기억해야지.
그의 낮은말이 등 뒤에 아프게 박혔다.
‘아니 후회 안 해. 난 오늘이 가기 전에 도망갈 거니까.’
입 밖을 튀어나오지 못한 말을 삼키고 그를 벗어났다.
‘그런데… 왜 큰 오라버니는 나에게 이렇게 잘해줄까?’
워낙 무심한 성격이라 10년 동안 나와 말한 것조차 손에 꼽을 사람이.
어릴 적 돌아보는 순간마다 마주친 그의 붉은 눈을 먼저 피한 건 나였다.
늘 돌아보면 마주치는 방관 하듯 보기만 하는 시선을.
“여기 앉아.”
상념에서 벗어나 그가 내미는 자리에 앉았다.
홀 기둥 옆의 한쪽에 마련한 의자에 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
“레일라, 괜찮은 거지? 칼라엘은 크게 신경 쓰지 마.”
10년 동안 무심하던 그답지 않은 말에 실소가 나왔다.
오라버니가 내게 친절을 베풀 거였으면 그전의 무수한 기회는 어떻게 하고, 지금에야 이러나 싶었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았다고?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그가 지나가는 하인에게 건네받은 샴페인 잔을 나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잔을 받으면서 홀 쪽에 시선을 던졌다.
혹시라도 둘째 오라버니가 이쪽을 보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칼라엘은 나갔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연회를 즐겨. 오늘은 네 날이니까.”
“왜 그래요? 왜 이렇게 챙겨 주는데요? 제가 혹시라도 다른 귀족에게 행복하게 보이지 않을까 봐요? 그러면 웃을게요.”
최대한 입꼬리를 끌어당겨 활짝 웃었다.
“…레일라.”
그의 말끝이 목 안쪽으로 잠겼다.
“좀 안정되었으면 일어나. 네 성년 연회에 오신 분들에게 인사는 해야 하니까.”
“네, 오라버니.”
목구멍을 넘어간 알싸한 샴페인이 의문을 토해내게 했지만 여기서 멈춰야 했다.
그가 내민 단단한 팔에 손을 올리고, 이끄는 곳마다 걸음을 옮겼다.
인사를 하고 스쳐 지나갈 때마다 느껴지는 경멸의 눈초리와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결코, 즐겁지 않은 내 성년식의 풍경이었다.
행복한 웃음을 입가에 너무 걸었을까……입술 끝이 잘게 경련했다.
‘쉬고 싶다.’
슬쩍 들린 눈으로 그의 표정을 살피자 눈과 눈이 바로 마주쳤다.
‘응?’
“쉬고 싶어? 거의 다 끝났으니 조금만 참아.”
“…네, 오라버니.”
정말로 끝이 보였다.
“어휴, 공녀님이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어쩜 이렇게 아름다우실 수가.”
“그러게요.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애라 소문이 자자하잖아요.”
겉모습만이겠지.
영식들이 혹시라도 내게 춤을 신청할까 싶어 부들거리는 손으로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이 모순적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인사.
“오라버니, 이제 정원에 좀 나가봐도 되나요. 밖에 좀 나가고 싶어요.”
큰 오라버니의 표정 없는 시선이 내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그래, 그렇게 해. 그런데, 혼자는 위험하지 않을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가 물었다.
“저택의 정원인데요, 뭐. 금방 다녀올게요. 오라버니.”
그의 부드러움 때문인지 용기 있게 내 의사를 밀어붙이고 정원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등 뒤로 쏟아지는 시선이 따가웠지만, 꿋꿋이 홀을 가로질러 걸었다.
나가는 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10년간 살았던 익숙한 곳이라 오늘 결심한 내게 큰 용기를 주었다.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정원을 가로질러 사람이 없는 곳으로 들어서자 막힌 숨통이 트였다.
후아후아—
이제부터가 진짜 나만의 성년식! 그 시작이었다.
도망이라는 성년식, 나만의 밤.
“어디 보자. 내가 지금 가진 것이.”
손에 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있는 거라곤 에렌이 머리에 꽂아 준 장식이 다였지만, 꽤 값이 나갈 거였다.
손을 들어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걷던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이곳까지 손님이 들어올 공간이 아니라 작은 소음조차 없는 적막함 뿐이었지만, 내게는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여긴가.”
아무도 몰래 로브와 약간의 금화를 챙겨 두었던 곳이.
많은 것은 아니라 몇 개의 금화가 다였다.
서둘러 로브를 뒤집어쓰고, 로브 안쪽 주머니에 금화를 넣은 채 걸음을 옮겼다.
성년식을 위해 신은 높은 구두 굽에 발이 아팠다.
끙—
“아파도 어쩔 수 없나.”
편한 구두까지 챙길 여유가 없기가 없었다.
멈춘 걸음을 옮겨 저택 내에 가장 낮은 담 앞에 섰다.
그나마 그동안 봐온 곳 중에서 이곳이 가장 낮았다.
담에 올라가기 위해 몰래 숨겨둔 상자를 꺼내와 밟고 올라서 담의 마지막 끝을 잡았다.
“어디 가는 거야? 내 예쁜 동생이 이렇게 나갈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응? 거긴 담인 거 알지?”
“…….”
굴곡진 담을 잡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제발 여기만… 넘으면.’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하얗게 된 머리가 생각을 거부한 채 거미처럼 벽에 몸만 붙였다.
“힘들면 이 오라버니가 널 올려 줄까? 아니면, 네가 가는 곳에 내가 데려다줄 수도 있고. 무조건 같이 다녀야지. 그렇지?”
“…….”
“그것도 아니면, 이리와. 내가 가기 전에 네가 오는 것이 좋아.”
빌어먹을 몸이 굳은 채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담벼락에 박제된 동물처럼 계속해서 붙어있는 것이 지금으로선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네가 안 오면 내가 가.”
휘파람을 불던 둘째 오라버니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발소리를 듣고서야 담 위를 잡은 한쪽 팔을 내리고, 기어서 내려왔다.
“떨지 마. 내가 널 어떻게 할까 싶어?”
그의 말에도 속절없는 몸뚱이가 줄기차게 떨어댔다.
오늘을 기다린 내 변화를 예민한 그가 모른다고 생각한 내가 병신인지.
‘발을 떼. 바보야!’
스스로 욕을 씹어대며 겨우 발을 떼어냈다.
저벅저벅—
겨우 두 걸음.
“레일라! 칼라엘!”
끼어드는 다른 목소리에 또다시 걸음이 멈췄다.
땅에 처박힌 시선을 들어 올리자 이곳에서 보일 리 없는 큰 오라버니가 보였다.
‘왜…왜? 여기에.’
“멈춰. 레일라.”
“형님! 도대체 왜 여기에? 가서 손님이나 상대하죠!”
그가 고함치듯 하는 말에도 큰 오라버니의 시선 안에는 오로지 나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레일라, 내 손을 잡아. 그러면 내가 널 보호해줄 수 있어.”
‘보호? 왜?’
* * *
레일라의 눈이 서서히 놀라움으로 물 들어가는 모습을 눈 한 번 깜빡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10년.
레일라가 이 저택에 온 시간 동안 내 눈은 항상 그 애를 향해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도 모른 채 계속 레일라에게 머무는 눈길이 깊어지고 있었다는 자각조차 없이 빠져들었다.
나도 안다.
내 하나뿐인 혈육인 칼라엘이 10년 동안 레일라는 보는 집요한 시선을.
내 피가 섞인 동생이 또 다른 입양된 내 여동생인 레일라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그래, 나는 모두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단지 때가 아니었기에.
가끔 레일라에 향하는 눈길에 의문이 들곤 했었다.
내 눈빛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식사 중 물컵에 비치는 눈빛이 동생의 눈빛과 똑같은 색임을 알고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난.
“레일라, 널 유일하게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저택에서 나뿐이다.”
널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널 내 곁에 두면 된다.
그게 내 하나뿐인 피를 나눈 동생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형님!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칼라엘이 살기를 담아 소리치는 모습을 보고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레일라만 바라보았다.
‘자, 선택해. 넌 오늘 우리 둘 다 선택하지 않고 담을 넘으려 했지만, 괜찮아 레일라!’
어차피 넌 죽을 때까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그러니 지금은 선택해야 할 거야.
바들바들 떨리는 레일라의 입술이 들썩거렸다.
“안 돼! 레일라. 내가 10년 동안 널 어떻게 기다렸는데. 너만 보면서.”
칼라엘의 집요한 눈길이 레일라의 입술을 따라 움직였다.
“저…저는…저는 아무도…….”
피식—
그렇단 말이지.
어차피 나는 오늘 레일라가 누구를 선택하든 상관없었다.
그래도 듣고는 싶었는데.
망설이듯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보고 입꼬리를 죽 말아 올렸다.
저 앙증맞은 입이 결코, 내가 듣고자 하는 말을 입에 올릴 리가 없겠지.
난 스타멘 공작가의 가주이자 공작이다.
일단 동생인 칼라엘부터 묶어 놔야겠다는 생각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묶어서 레일라에 아무 짓도 못 하게 만들기 위해.
“덮쳐라!”
5년 동안 착실히 준비한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널 위해서 인자한 가면을 쓰고자 했지만.
* * *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얀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나고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연기가 걷히자 둘째 오라버니의 몸이 그물에 감겨 정원 바닥에 뭉개지듯 누워있었다. 그 주변으로 가문의 비밀기사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형님! 제정신입니까?”
사납게 터져 나오는 목소리가 고막을 찢어 버리려 했다.
“칼라엘, 특별히 마탑에 부탁해서 네 힘을 봉인할 수 있게 만든 거니, 네가 움직여도 소용없어. 그러니 얌전하게 따르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뭐 하자는!”
악을 쓰며 반항하는 그를 큰 오라버니가 가뿐히 무시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상황을 살피는 동공이 잘게 떨렸다.
“공자를 방 침대에 묶어 놔라. 목에는 구속구를 채우고, 양팔과 양다리 모두 침대에 쇠사슬로 묶어두고 힘을 써서 달아나지 못하게 해 놔. 반드시 준비한 쇠사슬로 묶어 놔야 한다.”
그래야 힘을 쓰지 못할 테니까!
뿌드득—
칼라엘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형님! 이런다고 내가 포기할 거 같아? 죽여 버릴 거야. 내가 반드시…….”
그의 섬뜩한 모습에도 큰 오라버니가 여유롭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칼라엘, 네 상태나 보고 말해. 지금 네 모습으로는 내 옷자락 하나 스칠 수 없으니 말이야. 데려가.”
비밀기사에게 다시 한번 지시한 큰 오라버니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질질 끌려가는 둘째 오라버니를 멍청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내게.
“내가 모를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가 모르는 것이 이상한 일인데. 레일라.”
부드러운 목소리가 분명한데도 마법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입이 겨우 한마디를 뱉어낼 뿐이었다.
“…왜?”
목소리 끝이 바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