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60)

4화.

꽃이 피어나듯이 활짝 웃었다.

빙의되기 전부터 눈치 하나만으로 살아온 나다.

스타멘 공작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었고.

‘차라리 눈치가 없었다면, 둘째 오라버니의 목욕시중을 들지 않았을까?’

아니, 그럴 리가.

흘러가는 생각을 빠르게 털어냈다.

그것보다 더 궁금한 건.

“큰 오라버니,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나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어둠이 깔린 긴 복도에 상큼함을 가장한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가 형식적인 남매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큰 오라버니와 나 사이는 늘 데면데면했다.

“웃기네. 처음부터 사이가 좋아질 일도, 나쁠 일도 없었겠지. 오늘 성년식을 통해 겉으로 드러난 것뿐.”

큰 오라버니가 답하기 전에 둘째 오라버니가 먼저 답했다.

“그걸 물어본 건가? 그렇다면 칼라엘 말이 맞아. 넌 그동안 내게 단, 한 번도 손을 내민 적이 없었으니까.”

왜 손을 내밀어야 하냐는 의문을 꾹 눌러 삼켰다.

같은 피를 가진 두 형제 중 큰 쪽은 무관심, 둘째는 집착 같은 광기.

둘 사이에 흐르는 냉기가 오늘은 이상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도대체 왜?’

“고개 들어, 레일라. 오늘은 너의 날이야.”

언제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걸까.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준비하는 동안 계속 들린 마차의 소음이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내 성년식에 온 것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물론 나를 보러 온 건 아니었다.

큰 오라버니와 둘째 오라버니를 보기 위한 자리일 것이니.

내 성년식은 핑계일 뿐이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난 오늘 스타멘 공작가의 행복한 영애니까.’

“존경하는 형님이신데…… 오늘 별관이 너무 작은 거 아닙니까?”

“넌 별관 홀 자세히 봤어? 생각보다 큰 곳이다. 정원에도 준비하라 했으니, 장소는 충분해.”

둘의 시선이 또다시 허공에서 엮여 들었다.

마치 하나의 먹이를 두고 싸우는 두 마리 짐승처럼.

다행히 별관이 보이자 시선이 흩어졌다.

“어머! 공작님, 안녕하세요.”

별관에 들어가지 않고 입구를 서성이고 있던 인영 하나가 찢어지는 높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온갖 화려한 장식을 머리에 꽂은 영애의 목이 꺾어질 듯 가냘파 보였다.

웃는 입이 찢어질 듯 턱선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어느 쪽.’

역시 큰 오라버니 쪽인가.

제국의 둘 있는 공작에 미혼인 오라버니야말로 승냥이 같은 여자들의 먹잇감으로 아주 제맛인 위치이긴 했다.

둘째 오라버니는… 아마도 다가갔다간 목이 부러지지 않을까 싶고.

눈길조차 주지 않은 큰 오라버니가 나를 이끌고 몸을 밀어붙이는 영애를 무시하듯 계속 걸었다.

잰걸음으로 다가온 영애가 정원을 밝히는 거대한 마법 등만 한 큰 가슴을 큰 오라버니의 팔에 질척하게 비벼댔다.

영애의 가슴을 따라가던 시선을 떼어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빨리했다.

털썩거리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응?”

저절로 틀어진 시선.

“오…오라버니!”

온몸으로 큰 오라버니의 팔에 붙어 가슴을 비벼대던 영애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쪽으로는 시선 한 자락 주지 않고 걷는 큰 오라버니를 불렀다.

그가 지나가는 하인을 손가락 끝으로 불렀다.

“저거 치워.”

“레일라, 그냥 가. 형님이 그런 거니까.”

‘뭘? 큰 오라버니가 넘어트린 거라고? 둘째와 다르게 신사적이고 매너 있는 오라버니가?’

그때까지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별관 홀 입구에서부터 들리는 온갖 시끄러운 소리에 묻혀 더는 생각을 이어갈 수 없기도 했기에.

홀을 채우는 수많은 귀족 사이로 들어서자 시끄럽던 소음이 일제히 멎었다.

오늘 성년식이 있는 별관은 입구를 지난 사람이 바로 보이는 구조였다.

성년식에 참석하는 사람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또각또각—

세 명이 동시에 울려대는 구두 굽 소리가 적막한 홀을 가르고 중앙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사라진 공간.

“저희 스타멘 공작가의 레일라 스타멘의 성년식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따로 일일이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오늘은 즐거운 날이니 다 같이 끝까지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참석한 귀족들을 향했던 큰 오라버니의 시선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첫 춤의 영광을 내게 줘. 레일라.”

이건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큰 오라버니가 나에게 첫 춤을 신청하다니.

‘내 입지 때문에?’

그러지 않고서는 무관심의 오라버니가 이렇게까지 할 리가 없는데.

마음의 동요를 들키지 않기 위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미처 도착하기 전에 끼어든 다른 손이 작은 손을 감쌌다.

앞에서 내민 손과 내 옆에서 뻗어 나와 먼저 내 손을 잡은 손… 그들 사이에 낀 작은 손이 소리 없이 떨렸다.

큰 오라버니의 시선이 내게서 비켜 내려 옆을 향했다.

“칼라엘, 오늘은 레일라의 성년식이니 자중해. 내가 큰 오라버니이니 첫 춤을 추고, 너는 두 번째 춤을 추는 것이 좋을 테니. 내 말 들어.”

말을 듣는 것보다 명령에 익숙한 둘째 오라버니가 어떻게 나올까 걱정되었다.

“떨지 마, 레일라. 내 손을 단단히 잡아.”

사정없이 구겨진 얼굴로 칼라엘이 손을 내렸다.

멈춘 손이 좀 더 앞으로 뻗어 나가 큰 오라버니의 마디가 굵은 손을 잡았다.

공작이자 가주인 케이드란 오라버니의 손짓으로 악단이 곡을 연주했다.

첫 춤의 아름다운 선율이 서서히 홀을 가득 채워나갔다.

음악에 맞춘 그의 리드에 따라 서서히 몸을 함께 움직였다.

이제 나는 스타멘 공작가의 행복한 영애, 레일라로 성년식을 맞이하면 되니.

“레일라, 긴장 풀어. 오라버니가 하는 데로 몸을 맡기면 되는 거야. 오라버니를 믿어.”

‘뭘 믿어?’

습관처럼 궁금증을 속으로 삼켜 씹어 먹었다.

10년 동안 무관심한 큰 오라버니의 표정을 믿었는데… 오늘은 나도 모르겠다.

“오늘 아름답다는 말을 못 했네. 칼라엘만 아니었다면, 네게 먼저 말했을 건데. 이 오라버니가 마련해 준 것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네가 아름다워, 레일라.”

턴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되는 오라버니의 말을 흘려들었다.

짐승의 몸놀림보다 유연한 그의 리드에 그저 몸이 따라갈 뿐.

끊임없는 다정한 말들이 그의 입에서 계속 쏟아져 나왔다.

‘왜 이렇게까지?’

묻지 못해 삼킨 의문이 뜨겁게 목구멍 안으로 내려갔다.

여기서 뭔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기에.

몸을 낮게 숙인 짐승이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무슨 생각해, 레일라? 이 오라버니를 봐. 지금 너를 안고 있는 나를 말이야.”

집착이 느껴지는 말은 착각일 것이다.

흘러가는 생각을 버리고 그의 리드에 집중했다.

끌어당긴 손으로 밀착의 강도가 짙어졌다.

음악에 따라 움직이는 큰 오라버니의 근육이 얇은 드레스 자락을 뚫고 선명하게 느껴질 만큼의 질척한 밀착이었다.

첫 춤의 음악이 멈췄다.

큰 오라버니의 팔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틀려고 하자 그가 나를 잡은 팔에 힘을 가했다.

“레일라, 이 오라버니를 기다려.”

“……”

익숙한 듯 속으로 답했다.

‘언제요? 왜요? 왜 기다려요.’

다시 드는 의문을 풀지 못한 채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손에 의해 큰 오라버니의 품에서 벗어났다.

“내 차례야! 형님. 그럼 바쁘신 공작께서는 손님들을 상대해 주셔야죠.”

그가 손에 힘을 주고 나를 이끌자 두 번째 음악이 흘러나왔다.

뭔가 이상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라는 놈에게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가늘게 떨리는 몸을 끌어안은 칼라엘이 음악에 맞춰 턴을 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몸놀림으로.

“레일라, 내 예쁜 동생의 첫 춤을.”

그가 이를 으득 갈았다.

“넌 내 건데. 기분 나쁘게. 그치?”

“…….”

그의 말이 대답하지 못했다.

“집중해! 당장 모든 생각을 멈추고 나를 집어넣는 것이 좋아. 레일라.”

협박처럼 떨어지는 말에 반응도 답도 하지 못했다.

피식—

그의 걸린 조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순식간에 몸이 위로 들렸다가 내려와 완전히 그의 몸과 꽉 맞물렸다.

꿈틀거리며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의 근육 하나까지 전부 내 몸에 새겨질 만한 밀착이었다.

“오…오라버니, 남들이 봐요.”

그의 사나운 입이 비틀렸다.

“왜? 형님을 지워야지. 내 신경 건드리지 말고.”

이가 갈리는 소리에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오라버니의 가슴에 있던 얼굴이 완전히 그의 가슴에 파묻혔다.

그의 젖은 목울대가 만족감에 꿀렁거렸다.

“하… 그래, 그렇게. 그게 네게 어울리는 일이야.”

두 번째 음악이 끝날 때까지 그의 가슴에 완전히 밀착된 인형으로 있었다.

놔주지 않은 손.

오라버니의 눈치를 살피려 시선을 들어 올리자 그가 내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악! 던져진다.’

조금 들린 얼굴을 다시 그의 가슴에 깊게 묻었다.

던져진 뒤의 일도 내겐 공포였기에.

그의 단단한 가슴 밑에 밀착한 뺨과 봉긋한 가슴이 모양을 잃고 비틀렸다.

홀에 참석한 귀족의 따가운 시선에 등이 불타오르듯 뜨거웠다.

어깨가 움찔거렸다.

“왜? 시선이 뜨거워? 홀에 눕히고 더 뜨겁게 해줄까?”

그가 악마처럼 비죽 웃음 지며 말했다.

“좋아? 응? 너는 사람의 시선이 뜨겁고… 나는 너와 닿아 있는 온몸이 뜨겁고.”

“……”

차라리 눈이라도 감았으면.

“눈 뜨고 똑바로 봐! 여기 바닥에 눕힌다, 너.”

귀를 파고드는 말과 함께 그의 두툼한 혀가 허공을 뻗어져 나와 여린 살을 핥았다.

“떨지 마. 더 떨면 지금 잔뜩 흥분한 자지를 꺼내 먹여주겠어.”

밀착한 배로 느껴지는 그의 흥분감이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 느껴진다.’

춤을 추기 시작할 때부터… 허리에 감은 오라버니의 손에 힘이 가해 밀착될 때부터.

온몸으로 느껴지는 그의 근육 하나하나까지 느껴질 때부터.

그의 것이 무섭게 치솟아 있었다.

“오라버니, 제발.”

“제발? 제발 뭐? 뚫어주라고?”

홀에 흐르던 음악이 다시 멈췄다.

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행이라고 생각해?”

음악이 끝났음에도 그의 손이 들의 맨살을 질척하게 쓸어내렸다.

마치 이곳 홀에서 눕혀버리겠다는 듯이.

조용해진 홀에 수군거림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저것 보세요. 소문이 사실이라니까요. 저런 천박한.”

“정말 소문이…….”

“저런 더러운 것.”

등 뒤의 수군거림을 가뿐히 무시한 그가 내 허리를 안고 한 바퀴를 빙 돌고 내려놓았다.

“칼라엘! 손 놔.”

“존경하는 형님. 그러고 싶지 않은데.”

“다시 말하겠다. 손에 힘 풀고 레일라를 내려놔.”

또다시 시작한 숨 막히는 압박감에 저절로 숨을 멈췄다.

“레일라, 숨.”

절대 놓지 않을 듯했던 둘째 오라버니의 손이 느슨해지더니 몸이 풀어졌다.

이러다 숨이 먼저 막혀 죽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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