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무효의 선택
초혼을 두 번 할 수도 있죠.
배우자가 두 명일 수도 있고요.
누구와 밤을, 어떻게, 어떤 순서로?
사적인 영역으로 남겨 둡시다.
“후작 부인이 임신을 했어.”
“진짜?”
“확실해, 왕진 다녀간 의사의 진단이니까.”
“세상에… 아버지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어림짐작할 뿐이다. 작고하신 콘라드 후작과 첫날밤을 보냈을 때 아이를 가진 거라면, 벌써 배가 꽤 불러 올 때였다.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다니. 유복자가 안되었어. 누군가 혀를 찼다.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가 경멸 조로 받아치는 것이다. 의사 말로는 임신한 지 10주가 채 안 되었다던데. 그러자마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쨍했다.
“소식 들었어?”
“무슨?”
“오르칸 공의회 수장님께서 내려오고 계신대. 벌써 건넛마을까지 도착하셨다더라.”
“대추기경님께서? 무슨 일로.”
“글쎄, 마녀재판이라도 하실 일이 있으신가 보지.”
속닥거리는 이들은 동시에 한 여인을 떠올렸다. 올가 체이스필드.
“마녀처럼은 안 보이던데…….”
오히려 눈빛은 맑고 안색은 다소 우울해 보였던가. 남자를 후리는 요망한 악녀라기보다는, 손에서 책을 거의 놓지 않는 책벌레였고. 목덜미에 두른 검은 초커가 아니라면 오메가인 줄도 모를 정도였다. 그동안 남몰래 그녀를 훔쳐보았던 후작가의 부엌데기 소년이 우물쭈물하자,
“그게 바로 교활한 점이지. 마녀가 뭐, 산발해서 빗자루 타고 날아다니는 줄 알아. 감쪽같이 정체를 숨기고 너처럼 순진한 놈을 홀려서 발라먹는 거다.”
그보다 서너 살 더 먹은 다른 소년이 인상을 쓰고는 퉤, 가래 섞인 침을 뱉었다. 방에 틀어박혀 하루는 울었다가, 하루는 웃었다가, 실성하여 곡을 하고 있다던 오메가 창부를 모욕하는 짓이었다.
무색무취의 평범한 여자.
그렇기에 더욱 악의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그 마녀는 후작가의 세 남자를 치마폭에 감쌀 만큼 엄청난 마력을 지닌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말이 되지 않으니까. 고작 열성 오메가 아닌가. 특별히 아름답지도, 향기롭지도 않은 여인에게 그리 미쳐 환장할 까닭이 없잖은가. 반 억지의 연역 논리였다. 평범하므로 악녀이고, 선하므로 마녀이다.
“쉿, 조용히 하고 들어 봐. 저 소리 들려?”
둥. 둥. 둥. 둥.
할 일 없이 잡담하던 도중이었다. 감이 예민하게 발달한 연상의 소년이 뱀 같은 소리로 좌중의 입을 다물게 했다.
둥. 둥. 둥. 둥.
과연 울려 퍼지는 북소리에 소년들이 서 있는 지면이 진동했다.
“군대가…….”
…그 환청을 언덕 위 저택의 올가도 똑똑히 들었다.
“군대가 오고 있어요. 나를 잡으러.”
“올가.”
“목을 달 거예요. 내 배를 갈라서, 내 아이를 꺼내 갈 거야.”
“그렇게 둘 건가요.”
“절대로! 안 돼요. 내 아이는 못 줘. 뺏기지 않을 거야!”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거의 매일 이러했다.
반쯤 실성하여 낮이 떠오르는 줄 몰랐고, 밤이 저무는 줄 몰랐다. 하염없이 울던 올가는 어느 날에는 볕 좋은 창가에 앉아 아랫배를 감싸고 어여쁘게 웃었다. 임신이 가능하리라 결코 생각한 적 없었고, 자식을 바란 적 역시 없었음이다. 하지만 막상 배태하고 나니 자식을 갖고 싶었던 거구나, 새삼 알게 되었다고 했다. 딸일까요. 아들일까요. 누구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속삭이고는 했다.
“낳고 싶어요.”
“부디 낳아 주세요.”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잖아!”
휴고의 품에 안겨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올가가 일순 발작했다. 손톱을 세워 단단한 팔뚝을 풀어 헤쳤다. 가까이에 앉아 있던 미겔까지 밀쳐 내고, 넘어지듯 침상을 내려와 물결무늬 다리 가구 아래로 기어들어 간다. 배를 감싸고 웅크린 그녀가 애처롭게 벌벌 떨었다.
“이리 나오세요. 그러다 다치면 어쩌시려고. 태아에게도 무리가 갈 수 있어요.”
“싫어… 놔줘요. 발견하지 못하게 여기 숨어 있을 거야.”
올가는 자신을 부드럽게 끌어내려는 미겔의 손목을 쥐어뜯으며 가구 밑에서 버티었다.
…드디어 드레이크 추기경이 동북 변경에 도착한 때였다.
화려하게 성장한 성기사들을 몰고 나타난 그는, 변경백 대리가 부재한 영지 소속 군부대에 가장 먼저 행차했다. 허둥지둥 달려 나와 맞이하는 부단장 파르보를 위시한 모든 병사에게 황금칙서를 선포하기 위해서였다.
‘나라의 녹을 먹는 귀족의 사병은 곧 짐의 병사이니라.’ 지엄한 황명에 불복할 군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일병 3천, 기마병 1천, 창병 1천, 석궁병 5백, 그리고 여섯 대의 공성 전차가 드레이크의 휘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만족한 추기경은 그중 1백 명을 엄선하여 골라 앞장세웠다.
“아니야, 차라리 도망가는 게 낫겠어. 미겔, 휴고! 나를, 나를 보내 줘요. 저들에게 잡히지 않게 길을 열어 줘요.”
“부인.”
“아, 그러면 당신들은 어떡해. 당신들도 죽게 될 거야. 안 돼. 같이 도망가요. 우리 멀리 달아나요. 세상이 우리를 잊을 때까지 숨어 살아요, 응?”
“하하, 저들이 마음먹고자 한다면 국경 폐쇄는 일도 아닐 겁니다. 어디로 달아날 수 있을까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까요. 도끼질 좀 하는 녀석이 이쪽에 있으니, 해적질이나 하면 먹고살 만은 하겠군요.”
“농담할 때인가요!”
“그저 긴장을 풀어 드리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어깨를 으쓱이는 미남자는 저 북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쳤어. 도리질 친 올가는 토하려야 토할 수 없는 초조함과 두려움을 하소연하기 위해 다시 엉금엉금 기었다. 자신을 안아 들기 위해 다가온 기사의 바짓가랑이를 절박하게 붙들었다.
“휴고.”
…드레이크의 진격이 재개되었다.
둥. 둥. 둥. 둥.
발맞추어 행진하는 군대를 구경하고자 온 영지민이 거리에 쏟아졌다. 가장 선두에 말 탄 엄숙한 자의 목적지는 확고했다. 덩굴장미가 벽을 타고 오른 체이스필드 대저택. 시건방진 금발 놈이 다 자란 이후에는 발끝 한번 디디지 못했던 고향이다. 곧 언덕의 능선이 완만해지고, 저택 외벽의 돌담이 보이기 시작했다.
꼽추가 들고 있는 선봉대의 깃발이 펄럭였다. 그 옆 진홍색 수단을 걸치고 위풍당당한 드레이크의 주름진 낯이 새삼 감회에 젖었다.
그들의 군홧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올가의 얼굴이 더욱 새파랗게 질렸다.
“휴고, 제발, 지금이라도 떠나요. 비밀 통로는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나요? 저택 뒤쪽 숲으로 나가는 길이 있겠죠. 가요. 당장!”
바짓가랑이를 당기는데도 꼼짝하지를 않는다.
올가는 자신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안아 올리는 남자를 향해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울지 마십시오.”
“그럼, 제 말을 좀 들어요…….”
“아이와 함께 저희 목숨까지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마음이 벅찹니다.”
“왜 이렇게 답답한 소리만 하는 거죠!”
답답함을 토로하는 올가의 목소리가 한껏 찢어졌다.
“우리는 죄인이야. 더러운 짓을 저질렀잖아. 빼도 박도 못할 그 증거까지 만들었어.”
아랫배를 한 손으로 감싸 쥐고는 절박하게 매달린다. 휴고의 두꺼운 목덜미를 한 아름 부둥켜안은 그녀가 울먹거렸다.
“내가 만든 죄인들.”
떨리는 탄식이 이어졌다.
“우리는 지옥에 떨어져도 만나지 못할 거야. 더 이상 죽음은 우리의 출구가 되지 못해. 그걸 왜 몰라요. 산지옥이어도 살아만 있다면 함께 할 수 있잖아요. 아니면 혹시 살기 싫은가요? 그래도 날 위해 살아 줘요. 내가, 내가 잘할게요.”
혼자 남기 싫어요.
기어이 가장 유치하고 가장 솔직한 본심까지 거덜 냈다.
“…올가.”
그에 목이 멘 건 건장한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휴고가 으스러지도록 제 짝을 힘주어 껴안았다.
“네……?”
“저를 선택해 주시겠습니까?”
“무슨.”
“반드시 양자택일해야 할 때가 온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
형제를 선택지로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휴고의 손이 아랫배를 덮은 자신의 손등 위를 강하게 압박하여, 그가 배 속의 아이를 선택의 저울 반대편으로 암시하였음을 깨달았다.
말도,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올가는 경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렷한 대답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순간, 그들이 서 있는 공간 자체가 지옥도로 변하였다.
…드디어 드레이크가 당도하였다.
둥. 둥. 둥. 둥.
불길한 북소리가 천둥처럼 요란했다. 이제는 형제와 올가 그 누구도 이를 그저 환청이라 치부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미겔이 꼿꼿하게 일어서 옷차림을 단장했다. 유려한 미소를 띠고 올가를 향하여 손바닥을 내민다. 마치 둘만의 혼인식을 치르기 위해 예배당을 찾았던 그날처럼.
“무도한 패륜자들은 들어라! 심판의 때가 왔노라!”
웅장한 저택의 대문이 박살 나는 것은 찰나였다. 말발굽으로 앞마당을 짓밟은 드레이크가 목청을 돋워 후작 부인과 조카 형제를 호명하였다.
“나오라는군요.”
그러나 밖에서 들리는 무시무시한 함성에도 불구하고, 올가의 손끝을 가만히 쥔 미겔은 감흥이 없어 보였다.
“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 없으니 당당하게 저들 앞에 서겠습니다. 올가, 저는 제가 죄인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고, 다만 뜨겁게 정을 나누었을 뿐.”
마음에 둔 여인을 교묘한 덫에 빠뜨려 집어삼킨 죄.
그녀와의 관계를 미끼로 철천지원수를 또 다른 덫으로 불러들인 죄.
정말로 악독한 죄목은 부러 함구하였다. 부드럽게 올가의 손을 이끈 미겔이 복도로 나섰다.
“자, 내려가 보실까요.”
“미겔……!”
“뜸 들인다 해서 피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요.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쳤어야 할 적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조문객이기도 하죠. 백부께서 찾아오셨군요.”
마지못해 끌려 나와 비틀거리는 그녀를 반대편에서 휴고가 부축했다.
그렇게 그들은 한 명의 신부와 두 명의 지아비의 모습으로 회랑을 걸어 천천히 원형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의 아래, 저택의 넓은 홀에는 이미 쳐들어온 기사들과 군사들이 가득 늘어서 있었다. 식은땀을 비처럼 쏟고 있는 파르보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모든 고용인이 앞다투어 내빼어 사위가 고요했다. 그 가운데 검은 드레스를 입고 겁에 질린 여인의 손을 양옆에서 붙잡고 내려오는 형제를 보자니 기묘한 기분이 그를 사로잡았다. 분명 그들을 응징하기 위해 찾아왔을진대, 숨죽여 바라보는 작금은 꼭 엄숙한 식장에 참석한 하객이 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모순적이기 짝이 없었다.
곧, 대치한 자들의 거리가 아주 좁아졌다.
그래, 저 눈. 저 푸른 눈을 볼 때마다 속이 뒤틀렸었다.
지팡이를 쥔 추기경의 손등에 퍼런 정맥이 돋았다.
드레이크는 과거 궁정의 예배를 도맡은 교구장이었다. 꼭 저 녀석들처럼 푸른 눈에 머리칼이 검고 풍성한 여인이 그의 예배당을 찾아오곤 했었다. 지금은 비셴의 왕비인 안젤리나. 개구리를 몰래 잡아다가 신단 아래 풀어놓고 사제들을 놀래 주기 좋아했던 천진한 소녀. 단 하나 검은 사막의 샛별 같았던 여인을 비밀스럽게 마음에 두었다.
차라리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기를 바랐다.
불타는 장작에 맨발로 오르는 질투에 사로잡혀, 드레이크는 날마다 사람 키만큼 긴 청원서를 작성하였었다. 공주 안젤리나를 공국에 보내시어 국방의 안녕을 도모하소서. 피눈물로 호소하였다. 여신상 앞에서 입 맞추던 동생 콘라드와 안젤리나 공주를 보았을 때부터.
변경의 법칙.
형제는 영역 싸움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작위 계승에 실패한 패배자는 죽거나, 또는 반드시 고향을 등져야 했다. 하여 베타인 드레이크는 알파인 콘라드에게 칼을 세우지 않고 새벽이슬을 맞으며 어느 날 달아났다. 작위가 없으니 그 대신 종교에 뜻을 두었다. 궁정에서 비상하여 최정상에 오르리라, 칼을 갈았다.
한데 왜 도망친 여기에서 또, 형제에게 원하는 것을 빼앗기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안젤리나 공주, 당신은 왜 하필 내 동생과.
예배당의 기둥 뒤에 숨은 드레이크의 뺨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신과 접견하는 중개인으로서 가져서는 안 될 더러운 감정들이 그의 오장육부를 물들였다.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혼인할 수 없는 신의 종이었다. 그 순간 가장 미천한 벌레보다 더 무력했다. 하여 가질 수 없는 여인의 정사를 묵묵히 훔쳐볼 밖에.
거리낌 없이 콘라드를 예배당에 불러들여 여신상 앞에서 약식 사랑 고백을 마친 안젤리나는, 개구지게 웃으며 몸소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숨죽여 비밀리에 사랑하는 게 일종의 장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어차피 혼인하게 될 사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테니까.
젊은 남녀의 구합이 깊어졌다. 음란한 살 소리와 물소리가 찬송가를 대신하여 예배당을 울렸다.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의 정사는 길고 격하였다. 두 마리 뱀처럼 딱 달라붙어 정신없이 흘레붙었다. 안젤리나는 무릎이 벌게지도록 엎드려 콘라드를 품다가 절정에 달하여 화급히 턱을 젖혀 탄성을 내질렀다. 그 순간, 기둥 뒤의 드레이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가질 수 없으면 깨뜨릴 수밖에.
처참하게 박살 내어 아무도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수밖에.
뒤돌아선 드레이크는 머잖아 계간질에 미친 비셴의 왕이 안젤리나 공주를 무참히 홀대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정절을 잃은 계집에게 마땅한 대접 아닌가. 드레이크는 오히려 축배를 들었다. 절망한 콘라드가 결혼에 흥미를 잃고 은둔한다는 반가운 소식 또한 있었다. 그래, 그러다 콱 뒈져 버려라. 쓸쓸히 죽어 버리렴, 동생아. 내가 돌아갈 수 있도록. 다 가졌던 삶을 돌려 다오. 그는 상사병을 앓다 죽은 콘라드의 부고 소식이 들려오기를 하루하루 애타게 기다렸다.
하나 대신 날아온 소식은 출생 신고서였다.
날 듯이 내려가 직접 확인한 아이는 새파란 눈을 가진 금발 남아였다. 콘라드는 한사코 어미의 정체에 대해 금구하였으나, 드레이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안젤리나의 아이라는 걸.
불행해야 할 여인이 연옥을 벗어나기를 도모하였다.
그래선 안 될 일이었다.
무릇 신의 대리자는 무류성(無謬性)의 면책권을 가졌다. 수장으로서 내리는 그 모든 신앙과 도덕에 관한 장엄한 결정은 결코 틀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하여 드레이크는 여신의 앞잡이로서 금발 아이를 불결한 태를 타고난 짐승의 씨앗으로 명명하였다.
3년 뒤, 또 다른 청안의 아이가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역겨운 검은 머리 짐승이었다. 괴롭히고 학대하여 물리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의 무류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소악마들. 내가 망가뜨리려고 무던히 애썼던 남녀의 결정체. 응당 미울 수밖에 없었다.
추기경 드레이크는 마침내 코앞까지 걸어온 미겔과 휴고를 향해 험한 송곳니를 빠득 갈았다.
그렇게나 몰아붙였는데도 다 자라고 만 악마들.
능청스러운 저 낯짝을 찢어 낼 수만 있다면야. 그토록 큰아버지의 기세가 음험하였으나, 가슴에 꽃만 달지 않았지 새신랑처럼 화려한 조카는 그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는 것이다. 곧 희소가 잦아든 미겔이 초대 없이 찾아온 자들에게 말문을 열었다.
“드레이크 백부님, 아버지의 장례를 조문하러 오시는 길이 상당히 험하셨나 봅니다. 부고를 알린 지가 언제인데 이제야 도착하시다니요. 딸린 식구가 이리 많으셨으면 언질이라도 한번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이 모든 군인들을 대접할 만큼 식기가 충분한지 모르겠군요.”
“여전히 세 치 혀 놀리는 품새 하나는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태생부터 더러운, 불결한 짐승아.”
“하하, 제 태생에 대해 아시면서 아직도 그러십니까.”
“닥쳐라, 그 누가 공인해 주었더냐. 정신 나간 매음굴의 비렁뱅이도 말뿐인 황손이다. 그 누가 너희 미친 망발을 믿어 줄 줄 아는가!”
격분한 추기경이 손에 쥐고 있던 보구 지팡이를 거세게 휘둘렀다. 그에 커다란 원석을 물고 있는 지팡이 장식이 미겔의 뺨을 찢었다. 그를 신호로 거대한 꼽추가 달려들어 멱살 쥔 알파를 바닥에 무릎 꿇렸다.
“저 죄인도 꿇려라!”
휴고를 손가락질하자, 드레이크의 등 뒤의 수하들이 올가에게서 떨어뜨린 낙향 기사를 두들겨 패 굴복하게 했다. 익히 두려워하던 장면이 고스란히 현실화하였다. 덩달아 강제당하여 엎드린 올가가 통곡하여 비명을 내질렀다.
“마녀야.”
“……!”
그런 그녀의 위로 진홍색 의복의 추기경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약식 재판장의 신성 판관이 된 그가 체이스필드 후작 부인을 막 추궁하려는 찰나.
“마녀라니요, 지체 높으신 후작 부인이시죠.”
기사의 군홧발에 뒤통수를 밟혀 바닥에 뺨이 짓눌린 미겔이 끝까지 딴지를 걸었다.
“언청이처럼 어눌한 발음으로 기세만은 등등하군.”
드레이크가 비웃음으로 손짓하자, 또 다른 성기사의 검집이 그의 머리통을 험하게 후려쳤다. 수박 깨지는 소리가 작렬하였다.
“안 돼!”
핏방울이 분수처럼 공중으로 튄다. 짝의 고통이 전이되어 올가는 소금 맞은 생선처럼 몸부림쳤다.
“그를 때리지, 때리지 마세요, 추기경님… 저러다 죽습니다……!”
“그렇다면 묻는 말에 숨김없이 대답할 것이냐.”
“하, 하문을.”
“좋다, 너에게 금수의 죄를 묻겠다. 수많은 죄목 중 패륜이 으뜸이라. 파륜자야, 인정하는가?”
“……!”
“대답을 한다더니만. 내 질문이 어려웠는가. 그렇다면 쉽게 풀어 설명해 주지.”
숨죽여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드레이크가 지팡이 끝으로 올가의 턱을 젖혔다.
“마녀야, 자식과 잤는가.”
추궁은 더욱더 원색적으로 변하였다.
“호적상 네 아들들과 짝짓기하여 뒹굴었는가. 금지된 성기를 음부에 박고 노팅하였는가. 배덕한 씨물을 자궁에 받아 배태하였는가. 아들을 지아비라 부르고 있는가.”
대답은 없었다.
낱낱이 나열된 죄에 혀가 얼어붙어 꼼짝할 수가 없다. 올가는 질식하여 죽을 것만 같은 취조 분위기 속에서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눈물만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기적 같은 방법이 존재하기는 할까.
기를 쓰고 생각을 해 봐도 온통 암흑이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본 드레이크가 매몰차게 소리쳤다.
“가위를 가져와라.”
“안……!”
반항하는 올가의 목덜미에 서느런 금속의 날이 닿았다. 열쇠 외에 오메가 초커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교구 전용 가위였다. 천이 잘려 나가는 오싹한 감촉과 함께 결국, 맨살이 드러났다. 가녀린 목줄기, 피부에 선명한 잇자국 두 개.
보나 마나 뻔하였다. 체이스필드 형제의 치아를 뽑아다가 대조해 보면 딱 들어맞는 자국일 테다. 코웃음 친 드레이크가 쿵! 지팡이로 회랑 바닥을 찧었다.
“자! 명백한 증거를 보라. 이들은 인륜지사를 외면하고 육욕 지옥에 빠진 파륜자들이다. 한 놈도 빠짐없이…….”
“안 됩니다, 그러지 마세요. 살려, 살려만 주십시오! 감히 용서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목숨만……!”
아아, 이제는 다 틀렸다. 그러나 부질없을 줄 알면서도 올가는 몸부림쳐 온몸으로 호소하였다.
그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뺨이나 이마에 낙인을 찍어도 좋습니다. 발목이 끊어질 족쇄를 달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죽이지만은.
“이, 일말의 자비를. 추기경님, 백부님, 큰아버님, 당신의 조카들 아닌가요.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불쌍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주인 잃은 영지를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형제입니다. 참작하여 부디… 혈연을 어여삐 여기셔서…….”
“문란한 년, 네 말 중에 남편이 몇이더냐. 헤아릴 수가 없구나.”
멸시를 담아 힐난하자, 칼에라도 찔린 듯 여인의 낯이 질렸다.
드레이크는 저열한 만족을 만끽하며 목을 울렸다. 문득 묘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안젤리나 이후 죽은 동생이 삼은 최초의 부인. 증오하였던 조카들의 여자. 일거양득하여 모두를 욕보일 수 있는 통쾌한 묘수가.
“목숨만이라.”
짐짓 온화한 척 꾸며 내자, 정처 없이 흔들리는 녹갈색 동공에 가느다란 희망이 샘솟았다.
“네 죄를 스스로 인정하라.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말미의 인정을 베풀 수도 있지.”
달콤하게 꾀어내니 지팡이 끝에 얹힌 여자의 턱이 얕게 끄덕였다.
“자식들과 잤나.”
“…잤습, 니다.”
마지못하여 최초의 자백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모여든 자들 사이에 짧은 소란이 일었다. 이로써 가축과 붙어먹어 화형에 처해진 사내 이후 오랜만에 화형대를 세울 명분이 선명해졌다. 아니, 불태울 게 아니라 목매달아야지. 의견이 분분해졌다. 드레이크는 그들의 소요를 즐기며 더욱 목청을 돋우었다.
“아들들과 몸을 섞었나.”
“서, 섞었습니다.”
“누가 먼저 유혹하였는가. 너였는가, 저들이었는가.”
여기에서 올가는 말문이 턱 막혔다. 어쩌지. 어떻게. 우왕좌왕하는 시선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겔과 휴고의 얼굴이 걸렸다.
배신하지 말라.
그리 부탁하였던가. 하지만 추기경은 이 공개된 재판에서 조카들을 철저히 욕보이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비로소 올가도 그의 비틀어진 심사를 눈치챘다.
누구의 줄을 잡아야 하지. 짝의 부탁을 고수하여야 하나. 아니면 이 순간 단두대의 손잡이를 잡은 자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나. 혼탁하여 망설였으나, 결국은 살고자 하는 본능을 좇기로 하였다.
올가는 형제를 외면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들이, 저를, 유혹하였습니다.”
배반하여 살릴 수만 있다면.
“페로몬을 발산하여 저를 구속하였습니다. 정신을 잃은 사이에 저를 강간, 하였습니다. 강제하여 짝을 맺고… 뿌리치는 저를 지속적으로 겁간하여 결국 임신하게 하였습니다… 흐윽.”
세상 모든 치욕을 기꺼이 안겨 주겠다.
차마 나뒹굴었던 남자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추기경의 주름진 얼굴만 매달려 바라보았다. 마녀가 조카들을 강간범으로 몰아가는 데 일조하자, 그의 표정이 만족하여 누긋해졌다. 안도한 올가는 흐느껴 웃었다. 그악한 거짓말로 새까맣게 물든 혀가 아려 와 울었다. 그 독에 자신이 먼저 썩어 죽을 것만 같았다.
“오, 세상에. 귀를 씻고 싶은 끔찍한 범죄로다. 그런데도 자신을 범한 악인들의 죄마저 보듬어 주려는가.”
쳐 죽여야 할 죄인에서 비열한 공범자로 격상하였다.
드레이크는 비겁한 올가의 턱에서 지팡이를 떼어 냈다. 목련처럼 떨구어진 그녀의 정수리를 향해 약속한 자비를 선사하기로 하였다.
“부인의 아량이 갸륵하다. 가히 성전에 적힌 대로 실천하는 신도 아닌가. 여신께서 가로되 ‘선한 자보다 악한 자를 더 사랑하라.’ 정말 그대로구나. 이런 여인을 어찌 목매달겠는가. 오히려 칭찬하여 마땅하다.”
그러면 살려 주시려는가.
기대에 찬 올가가 그의 자비를 고대할 때였다.
“살려 주마.”
드레이크가 그에 부응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조건부 자비였다.
“택하시오, 부인. 어느 죄인을 살리시겠나. 형제인가, 아이인가.”
“네……?”
쿵.
심장이 배 속으로 뚝 떨어졌다.
올가는 드레이크의 거짓 인자함을 믿지 못하여 멍하니 되물었다.
“한쪽만 살려 드리리다.”
쿵. 쿵.
“죄는 있는데 벌받을 자가 없다면 쓰겠는가. 필히 한쪽을 선택하시게.”
어느 쪽도 드레이크에게는 유리할 뿐이다.
자식 잃은 조카들의 절망도 좋았고, 강간범에 패륜아로 낙인찍혀 죽는 형제의 말로도 그럴싸했다. 콘라드야, 이 꼴을 보여 주지 못해서 애석하다. 흥분한 드레이크의 턱 주름이 옹골차게 팼다.
쿵. 쿵. …쿵.
그런 그의 앞에 넘어진 올가는 숫제 온몸이 널뛰는 맥박 자체가 되어 버렸다.
“저, 저는.”
“올가! 저자를 믿지 마십시오.”
“……!”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 인격자가 아닙니다. 저자는, 우리 형제를 미워하여 어떻게든 우리의 목을 베기 위해 안달 난 자입니다. 저자의 수작을 거절하세요, 올가!”
하면 어떻게 하자는 건데.
올가는 피로 흥건하여 외치는 미겔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그토록 강건한 휴고마저도 수적 열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깔렸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저는.”
쿵. 쿵. 쿵.
살아만 있으면 아이는 언제라도 다시.
“저는…….”
쿵. 쿵. 쿵.
아니다, 어찌 자궁에 착상한 귀하디귀한 생명을. 어떻게 맺어진 결실인데. 아귀가 맞지 않은 톱니바퀴를 억지로 맞물리다시피 해, 끔찍한 번민과 고통을 맨발로 밟고 얻은 열매다. 절대로 잃을 수는 없었다.
“저는, 선택을.”
모두의 눈총이 작살처럼 따갑다.
올가는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떼어 냈다. 철자 하나, 하나를 굴려 발음할 때마다 내장을 쥐어짜듯 고통스러웠다. 온몸의 수분이 눈물로 흘러나오는 듯했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가 오열하였다.
“하지 못하겠습니다…….”
“허어.”
“선택하지 못하겠습니다……!”
차라리 성벽에 매달리게 된다고 해도.
올가는 숨 막혀 울었다.
처절하게 비틀어진 마음을 또렷하게 자각하고, 증명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절망에 전율하는 자들이 있었다.
“하, 하하하.”
드디어 얻어 낸 마음.
이 순간을 인내하여 기다렸던 미겔이 참았던 광소를 터트렸다. 일부러 밟힌 시늉을 내고 있던 휴고에게 눈짓한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반격의 때가 도래하였다. 한껏 당겼던 시위를 놓아 화살을 쏘아야 했다. 저 빌어먹을 새끼에게.
“그렇다면 선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전히 여상한 어투였다.
미겔은 서럽게 울고 있는 올가를 향해 부드러운 위로를 건넸다.
“닥쳐라, 건방진 죄인아. 네가 무어라고……!”
자꾸만 끼어드는 간살맞은 혓바닥에 성질이 났다. 드레이크가 참다못해 녹아 물이 될 것처럼 우는 여인에게서 눈을 떼고 신경질적으로 돌아섰다.
좀 더 혹독한 고문을 주문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손톱 발톱부터 모조리 뽑고 시작하면 좋을 것이다. 이전에는 그래도 명색이 후작의 사생아인지라 직접 손찌검을 하지 못하여 아쉬웠으나, 이제는 얼마든지 그 신체를 훼손할 명분이 있잖은가.
잔인한 상상을 하며 형제를 노려보려던 드레이크의 눈이 튀어나올 듯 홉떠졌다.
“……!”
“이거. 아픈 척, 약한 척하는 것도 일이로군요. 좀이 쑤셔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 꼼짝 않고 있는 엎드려 있는 것도 힘들군.”
돌아선 드레이크가 목도한 장면은 그가 기대했던 바와 전연 딴판이었다.
“큭, 크흑, 켁……!”
추기경이 자랑하던 꼽추 거한은 미겔의 손에 멱살 잡혀 발끝이 공중에 떴다. 게거품을 물고 검은 눈동자가 회까닥 돌아간 채였다. 그 육중한 몸을 내던진 미겔이 뻐근한 목덜미를 기울여 당길 때였다. 그 옆에서는 살점이 튀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름 끼치는 소음이 났다. 성기사들이 창칼을 꺼내기도 전에, 맨손으로 그들을 때려눕힌 휴고가 휙,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큰아버지, 아시겠지만, 겁박하여 얻어 낸 자백은 무용하지요.”
피가 뚝, 뚝 떨어지는 아름다운 얼굴에 육감적인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러니 우리는 강간범이 아닙니다. 아, 그리고 패륜한 죄인 또한 아닙니다.”
휴고의 신호를 받은 파르보가 재빨리 인파를 헤치고 달려가 저택의 정문을 열어젖혔다.
서둘러 대기하고 있던 사절들을 들여보낸다. 증인이 되기 위해 변경을 찾아온 비셴의 귀족들이었다. 이국적인 차림을 한 외교관의 행차에, 미리 언질은 받은 변경의 군사들과 또는 영문을 모르는 기사들이 길을 터 주었다.
바야흐로 삼자대면이었다.
마침내 준비하였던 대단원이었다. 미겔과 휴고는 일이 돌아가는 영문을 몰라 뒷걸음질 치는 드레이크와 올가의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올가 체이스필드, 이 자리에서 그녀의 혼인 무효를 선언합니다.”
그래야 흠결 없는 우리의 신부가 되어 줄 수 있으니.
미겔이 눈매를 접어 웃었다.
***
지금.
뭐라고.
올가는 거한처럼 앞을 막아선 형제의 등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물 밖처럼 아득하게 멀었다. 너무 울어 눈두덩이 욱신거렸다. 어느새 그녀의 뒤로 돌아온 변경의 군사들이 그녀를 붙들어 매고 있던 사내들을 떼어 냈다.
순식간에 체이스필드 형제는 성기사단과 대치하여 수적 열세를 극복했다. 아니, 되레 월등히 우월한 세력을 확보한 셈이었다. 파르보와 1백의 군사뿐 아니라 국경을 따라 설치한 초소의 모든 군인들이 애초에 그들 편이었으므로.
결국 에드먼드의 황금칙서는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뭐라고……?”
“갑자기 귀라도 먹으셨습니까, 백부.”
수하가 건넨 수건으로 터진 이마를 닦아 낸 미겔이 턱짓으로 비셴의 사절을 가까이 불러 모았다.
“올가 체이스필드의 혼인을 무효로 하겠습니다. 그녀는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저택에 들어왔으니까요. 죽은 남자와 어찌 결혼하겠습니까.”
“말장난이다! 저 여자는 이미 가문 족보에 이름을 올렸어. 콘라드의 사망 일자와 날짜 대조도 이미 마쳤다. 분명 결혼을 먼저.”
“아아, 족보. 그렇죠. 서명했었죠, 제가.”
미겔 체이스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반대로 드레이크의 얼굴은 서서히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뜻밖의 함정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잘 확인해 보시지 그러셨어요. 올가 체이스필드. 그녀의 이름 옆에는 아버지가 아닌, 제 서명이 적혀 있을 텐데요. 그러니 굳이 말하자면 제 아내가 되었다고 하여야 옳지 않습니까.”
“……!”
“남편이 죽었으니 혼인 서약에 서명을 할 수 있나요. 다시 말해, 남편의 서명 없이 정식 혼약은 성립하지 않죠. 그러니 우리의 근친상간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죄라면 그저 순결한 미혼의 청년들이라는 것뿐.”
“그렇지 않다. 일단 귀족 가문의 족보에 이름이 적히면, 오직 국왕의 허락이 있어야지만 그 이름을 지울 수 있는 것이다. 하니 너희 짐승들은 빼도 박도 못할 모자지간이다! 구역질 나는 상간을 저지른 죄인들이다!”
“어느 국왕 말입니까.”
“뭐?”
“어느 국왕이 이 혼인을 무효로 선언할 수 있느냔 말입니다. 부친과 모친이 속한 나라가 각각 다르니 우리에게는 국왕도 두 분이 계시온데.”
미겔의 논조를 휴고가 마저 이어받았다. 잠시 말을 끊고 눈짓을 한다. 그러자 때맞추어 비셴의 전령이 들고 온 유언장을 길게 펼쳤다.
“공인받지 않았으므로 우리에게 친모가 없다고 하였습니까.”
“아, 없다고 하지는 않았어. 역겨운 창녀의 자식이라고 하셨지. 한데, 그 창부께서 친히 저희를 공증하셨다고 합니다. 어디 친히 찾아오신 여기 사절의 선포를 들어 보시죠.”
판이 깔렸다. 그러자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된 전령이 목을 가다듬고는 유창한 오르칸어로 유언장을 읽기 시작했다.
“…나, 안젤리나, 정복 군주 오르칸 알프레도 1세의 제1 황녀, 공국 비셴의 여왕, 독립 영토 랭체스터의 대공은 서명한다.”
모두가 똑똑히 들었다.
왕비가 아닌 여왕 안젤리나.
비셴의 왕이 마침내 작고한 것이다. 왕과 왕비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제1순위 왕위 계승자가 된 왕비가 여왕으로 등극한 정세가 그려졌다.
“나는 장자 미겔 체이스필드에게 공국의 왕위를 양위한다. 차자 휴고 체이스필드에게 대공 작위를 전승한다. 여왕의 서명. 안젤리나 1세 왕력 1년, 추수의 달, 아홉 날.”
전령이 여왕의 유지를 모두 읽었다. 그 옆에 선 사절이 짤막하게 덧붙였다.
“여왕께서는 며칠 전 서거하셨습니다.”
“흠.”
드레이크는 이제 거의 수액을 다 빨려 말라비틀어진 고목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천천히 그를 돌아본 미겔이 낮게 목을 울렸다.
“그렇다면 내가 그대들 공국의 차기 국왕이란 말이로군. 안 그런가.”
킬킬대는 것이다.
“하면 비셴의 왕으로서 내가 직접 이 문제 되는 결혼을 무효화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돌아본다.
“올가, 이제 당신은 자유롭습니다.”
“아.”
“마음고생시켜 미안하고, 또 미안합니다.”
“아, 아…….”
“마음을 다하여 깊은 감사와 은애(恩愛)를 전합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일평생을 다하여 사랑으로 갚겠습니다.”
무릎을 꿇어 말을 잃은 여인의 손등에 보드랍게 입 맞춘다.
“제가 후작이 되지 못했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더 지체 높은 자가 되었지 않나요.”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처음부터…….
“끝까지 내 앞길을 방해하는 악마들……!”
그 순간.
한순간에 반전된 상황에 드레이크 체이스필드가 치를 떨었다.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모든 야욕이 물거품처럼 산화하였다. 허망하여 남은 것은 독기뿐이다. 위치가 전복되어 감히 대거리할 수 없는 신분이 된 조카에게 욕설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에 ‘왕을 모독하는군.’ 너털웃음을 터트린 미겔이 어쩔 줄 몰라 군기가 와해된 성기사들을 노려보았다.
“병신 같은 것들. 누구를 붙잡아야 하는지 모르겠나. 엄한 자를 마녀사냥하여 몰아간 것도 모자라, 황손을 모독하고 동맹국의 왕까지 욕보인 자가 저기 있다. 그런데도 우두커니 서 있을 텐가. 모조리 잡아다가 모반 방조죄로 투옥해야 정신이 번쩍 들 건가.”
“아닙, 아닙니다, 전하!”
그러자 승전보를 울려 마녀 퇴치의 실적을 쌓기 위해 따라온 기사단장이 화들짝 놀라 비셴의 새로운 왕에게 경례를 붙였다. 기가 막힌 일이었으나 상황은 하늘과 바다가 뒤집힌 꼴이라, 이제는 공의회의 수장이자 대추기경인 드레이크가 주적이 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어렵게 모셔 온 상관을 체포하는 일이 대단히 마뜩잖았던지라, 누가 먼저 신의 종에게 창칼을 세울지 망설일 때였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은 백부가 지팡이의 원석을 뽑아 들었다. 차라리 단도였더라면 휴고가 막아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칼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 대신, 대롱을 불어 손가락 마디보다 짧은 독화살을 쏘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올가를 향해 등 돌린 미겔은 그를 보지 못했고, 휴고가 근처 기사의 칼을 빼앗아 화살을 자르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오직 올가만이 날아오는 화살을 정면으로 보았다.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것보다 무조건 반사적인 행동이 더욱 빨랐다.
올가는 미겔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함께 비틀거리며 넘어지려는 순간, 윗가슴이 따끔했다.
“올가……!”
긴 바늘처럼 화살이 빗장뼈 아래 꽂혔다.
아, 형제 중 누가 자신을 부르는 걸까. 올가는 고개를 들어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삽시에 눈앞이 어두워졌다. 보이지 않는다. 뜨거운 물기는 누군가의 눈물 같았으나, 그 역시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까마득한 나락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
기록적인 서리가 내린 날. 체이스필드에서 새 왕조가 탄생하였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에드먼드 3세의 앞에 민무늬 옻칠한 붉은 봉함이 도착하였다. 밀랍을 녹여 뚜껑을 열어 보자, 인접 국가의 국왕 시해 죄로 목이 날아간 드레이크 체이스필드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조카 형제의 머리를 자르겠노라 자신하고 궁정을 떠났던 자가 잘린 목이 되어서 돌아왔다. 짐수레에 실려 수도로 올라오는 사이 군데군데 썩은 머리통에 구더기가 끓고 있었다. 그 꼬락서니가 오심이 일 정도로 역겨워 황제는 봉함을 멀찍이 외면했다.
봉함에는 서신이 딸려 왔다.
유창한 필체의 요지는 이러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시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왕으로서 반기하겠습니다.
폐하가 돌아가신 후에.
지금의 태자께서 보위에 오르시고 나서.
“아바마마.”
에드먼드가 무슨 협박 서신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그의 발치에서 안젤로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런 백치 아들을 바라보는 황제는 짧은 사이 이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마침내 황제는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를 펼쳤다.
미겔 체이스필드를 동북의 변경백이자 후작으로 정식 임명하는 칙서였다. 또 한 장의 칙서가 발행되었다. 어여쁜 고명딸에게 선황이 하사하였던 섬, 랭체스터. 지금은 주인 잃은 땅의 군주로 휴고 체이스필드를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퍼스 경은 존귀한 랭체스터 대공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위험한 구설에 휘말리게 하였던 화제의 여인, 올가 체이스필드는 그 뒤 어떻게 되었는가.
그녀는 후작 부인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애초에 성립하지 않았던 혼인이었던 것이다. 아쉽게 되었네. 잘만 했으면 한 나라의 국모가 될 수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한 여인의 비극적인 결말을 속닥거렸다. 이미 죽은 사람을 두고 왈가불가해 봤자 뭐 해. 다 지난 이야기지. 쯧쯧,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한 명의 열성 오메가가 그렇게 기억 속에서 풍화되었다. 다만, 사람들은 모진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진짜 배 아파 낳은 자식도 아닌 형제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였던 그녀를 기려 이렇게 부르곤 했다.
마더 올가.
그녀의 봉분 위에 낙엽이 졌고, 눈송이가 나렸다. 그리고 다시 신열병을 부르는 뜨거운 여름이 도래했다. 또다시 가을이, 겨울이, 봄이, 여름이. 계절이 몇 바퀴를 순회하여 시간이 흘렀을까.
까르륵.
후작저의 화원에 나와 노는 아기가 웃는다.
붉은 머리칼을 지닌 남자애였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엉금엉금 기어 선명한 햇빛의 경계선에 앙큼한 손가락을 뻗는다.
“그러다 그을릴라.”
발끝까지 망사 베일을 쓴 여인이 그런 아이의 고사리손을 보드랍게 쥐었다.
희끗하게 비치는 녹갈색 눈동자가 여물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