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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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실패

어렸으니까요.

불행의 시작을 변명해 봅니다.

“메리, 메리!”

“…예!”

딱 한 번, 초커를 벗은 적이 있다.

초경을 한 오메가는 사춘기에 찾아올 첫 히트를 앞두고 초커를 착용하게 됐다. 짝 없이는 평생 벗을 수 없는 족쇄이자 방어구와의 조우였다. 이를 함부로 벗는 것은 중범죄였으나, 허드슨은 성의 없는 가명 ‘메리’를 지어 주며 딸에게 범법 행위를 강요했다.

‘히트도 시작하지 않은 너를 누가 오메가라고 생각하겠느냐.’

입주 여성 가정교사더러 몰락한 신분의 매춘부라고 조롱하듯, 노동하는 오메가의 사회적 통념 또한 최악이었다. 고용주를 페로몬으로 유혹하여 사고 친 오메가의 소식이 황색신문에 실리지 않는 날이 드물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오메가의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걸리지 않게 조심해!’

윽박지르던 아버지의 앞에서 뻣뻣한 메이드복을 떠안은 올가는 겁먹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길로 짐수레를 타고 강 건너 옆 도시 스완의 귀족가로 향했다. 허드슨이 물어다 준 일은 세탁방 전담 하녀직이었다. 노동 대가인 주급 1스랑은 매주 그의 주머니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포도가 여무는 여름. 올가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뭐 하는 거야? 온종일 거기 서 있을래? 뭐 볼만한 거라도 있어?”

“아니에요.”

동료의 재촉에 올가는 황급히 고개를 바로 했다.

이 집안의 막내아들에게 뺨을 얻어맞던 소년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았다.

“뭐야, 매 맞는 시동이잖아.”

‘깡말랐네.’ 올가가 바라보던 방향을 힐끗거린 하녀가 입술을 비죽였다.

“매 맞는 애답게 바닥이라도 구르면서 엄살을 부려야지. 저렇게 참는다고 누가 좋아하나. 높으신 분들 비위만 건드릴 텐데.”

세탁물을 한 아름 진 두 하녀는 나무 그늘 드리운 연무장 공터를 힐끔거렸다.

키만 훌쩍 커서 깡마른 소년이 목검을 잡았다. 번개처럼 휘둘러 허수아비를 친다. 잠시 뒤, 시간 차를 두고 허수아비의 목이 떨어졌다. 까막눈이 보아도 비범한 실력에, 소년에게 시범을 주문했던 무술 선생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와 동시에 관전하던 막내 공자가 벌떡 일어섰다. 곧바로 비만하여 살찐 주먹이 다시 날아들었다. 어디서 나대냐는 욕설이 올가가 서 있는 곳까지 쩌렁쩌렁 들려왔다.

“쯧.”

올가보다 나이 많은 하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잘난 체 못 하면 죽는 병에라도 걸렸나? 왜 사서 매를 버는 거람. 이래서 주제를 모르는 것들은……. 저러다 정말 맞아 죽지.”

“죽어요?”

“모르니, 메리? 저 뚱돼지가 갈아 치운 시동만 셋이야. 전부 시체가 되어서 실려 나갔다고. 멀쩡한 갈비뼈가 하나도 없었다더라.”

과연 그럴 만했다. 막내 공자는 눈 밖에 벗어난 시동을 그야말로 죽일 듯이 패고 있었다. 육중한 발길질에 배를 걷어차인 소년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무릎을 펴자마자, 또 얻어터졌다.

“알파 재목이네.”

베타인 하녀는 넘겨짚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덜컹, 올가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래서 더 미움받는 거야. 저 뚱돼지가 그렇게 알파가 될 거라고 호언장담하고 다니다가 단단히 창피당한 직후잖아. 의사 선생이 그랬다며. 페로몬의 ‘페’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남자애라고 했대.”

“평범한 게 어디가 어때서.”

“농담해? 세상은 알파 귀족이 주무르는 거야. 당연히 알파가 되고 싶겠지.”

“…….”

“하지만 베타에게 두들겨 맞는 알파보다는 내 신세가 낫군. 똑똑히 봐, 메리. 저게 바로 현실에 순응하지 못하는 풋내기의 말로니까.”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바로 저 굴복하지 않는 고집이 올가의 어딘가를 건드렸음이다. 피차 신분이 미천한 특수 성(性)을 타고난 점이 그러했고, 암울한 미래가 낙점되어 있어도 눈동자에 서린 이채를 잃지 않는 점이 그러했다.

올가는 이름도 모를 소년에게서 동질감과 연민을 느꼈다.

그에게 묻고 싶었다. 우리는 이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무얼 바라고 있는 거냐고.

“가자, 메리. 이러다가 해가 지겠어. 빨아야 할 드레스만 열 벌이 넘는데… 일을 다 못 마쳤다간 저녁에 두들겨 맞는 건 우리가 될 거야.”

“예, 가요.”

행여나 근무 태만을 이유로 잘리기라도 한다면 집에 돌아간 후에 아버지에게도 손찌검을 당할지 몰랐다. 고개를 끄덕인 올가는 빨래터를 향해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신음 한번 내는 일 없이 무표정하게 폭행을 견디고 있던 소년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착각이라 치부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자.”

며칠 뒤. 올가는 기회를 틈타 연무장의 외곽으로 달려갔다.

“먹어. 부드러운 흰 빵이야.”

한바탕 검술 수련이 끝난 뒤였다. 막내 공자의 패거리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소년을 내팽개치고 사라졌다. 원체 머리가 나쁜 공자라 문관 출세는 틀렸다. 그러니 무관이 되어 기사 입단식을 통과하든지 해야 수련을 졸업하고 소년도 매 맞는 일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그 길 역시 요원해 보였다.

“누가 보기 전에 얼른. 헌 입 안을 자극하지 않고 잘 넘어갈 거야.”

“됐어.”

“맞아 죽기 전에 굶어 죽으려고? 그저께 저녁부터 한 끼도 못 먹었으면서.”

“…….”

올가는 앞치마를 걷어 몰래 꺼낸 흰 빵을 소년의 입술에 반강제로 밀어 넣었다. 사치스럽게도 우유에 적신 빵이었다. 주인 부부의 남은 식사를 관리하는 주방에서 훔쳐 왔다.

“앞머리가 너무 길어. 그래서 앞이 보이긴 하니?”

터진 잇몸 때문에 천천히 빵을 씹는 얼굴이 호두를 뺨에 문 다람쥐 같다.

그을린 피부색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다. 소년의 앞에 쪼그려 앉은 올가는 독한 세제 때문에 트고 갈라진 손끝을 뻗었다. 검은 앞머리를 걷어 주려다가, 순식간에 손목을 낚아채여 저지당했다.

“왜 이래.”

변성기의 목소리가 칼칼하게 쉬었다. 이미 반시체 취급당하는 저였다. 소년은 이 낯선 소녀가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너 죽는 거 보기 싫어서.”

“왜?”

“손이 이렇게 크잖아.”

“무슨 소리야.”

“키도 크고 몸도 커지겠지. 그러면 보란 듯이 저 녀석한테 복수해 줘. 알파는 누구나 기사단 입단 시험을 치를 수 있잖아. 한 번에 합격해서 승승장구하는 거야. 너, 재능 있잖아.”

“내가 누군지 알기는 해?”

“알지. 퍼스.”

소년처럼 천대당하는 알파는 전부 똑같다. 집안이 필요로 하지 않는 서자. 또는 그 외에도 모든 아버지 모르는 소년들의 통칭이었다. 퍼스. 아비에게 무시당하는 모든 소녀의 이름이 메리인 것처럼.

“나는 메리야.”

통성명 후에야 소년은 올가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심쩍은 눈초리였다.

“정말로 바라는 게 없어?”

“없어. 너에게서 뭘 얻을 수 있겠어? 거꾸로 탈탈 털어 봤자 먼지밖에 안 나올 것 같은데.”

“저번 집에서는 잠자리를 보살펴 주던 시종장이 날 덮쳤어. 가랑이를 터트려 주고 쫓겨났지. 그래서 여기로 온 거야.”

“…….”

“그 전 집에서는 백발 부인이 나를 잠자리 시동 취급했고. 벗기려고 좋은 옷을 입혔다나 뭐라나. 말 한 마리를 훔쳐 타고 달아났었는데…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큰아버지가 도로 쫓아내더군. 지독한 순혈주의자 자식.”

역겨운 이야기였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순결과 정절에 대해 교육받은 올가는 정색했다.

“그런 이상한 변태들과 비교하지 마. 불쾌해.”

성교란 쾌락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자손을 잉태하기 위해서 허락된 거룩한 행위인 것이다.

“난 너에게 추호도 그런 걸 바라지 않아. 성행위는 평생 정해진 한 사람과 해야 하니까. 아무나 붙잡고 해 대면 원숭이랑 다를 게 뭐야.”

올가의 말에서 느껴지는 짙은 혐오에, 비로소 어깨의 힘을 뺀 소년이 뜸을 들이다 되물었다.

“한 사람?”

“그래.”

“연애결혼이라도 바라는 건가.”

“바라면 안 되니.”

“안 된다기보다는.”

세탁방 하녀 메리인 처지를 직시하라는 뉘앙스가 느껴졌다면 자격지심일지 모른다. 어쨌든 덕분에 조만간 팔려 갈 처지를 새삼 자각하고 말았다.

허드슨은 두 달 뒤, 올가의 생일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생일 지난 열여섯 계집부터 선 시장에 본격적으로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올가는 애꿎은 바닥을 쏘아보며 소년에게 톡 쏘아붙였다.

“그렇게 현실 파악을 잘하는 너는 왜 그러는 거야.”

왜 자꾸만 눈이 마주쳤겠나.

동류를 알아본 것이다.

연무장은 빨래터를 가로지르는 길에 있었고, 괜한 생각을 하기 싫어 의식적으로 그곳을 외면하는 올가의 등허리에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곤 했다. 신경 쓰여서 돌아보면, 때맞춰 다른 곳을 쳐다보는 소년이 있었다.

“…다음에 볼 때도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 또 먹을 걸 가져다줄게.”

거기까지 말하고 올가는 얼른 자리를 떴다.

일어나 검은 빵을 약간 씹고, 빨래를 한다. 점심은 굶고 한 시간 쉬었다가 다시 빨래. 저녁으로 묽은 수프 따위를 먹고 나면 취침 시간까지 놋쇠 다림질을 하는 쳇바퀴 생활에 한 가지 낙이 생겼다. 소년에게 흰 빵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소년이 막내 공자에게 얻어맞기 전 얼른 쓰러져 구르는 시늉을 하던 날. 마침 빨래를 지고 연무장을 지나가던 올가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손에 꼽힐 정도로 무더웠던 여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올가가 챙길 종류가 한 가지 더 늘었다. 어쩌다 특식으로 제공되는 얼음 조각이었다. 빙장고를 관리하는 시녀의 옷을 빨래해 주는 조건으로 하룻밤 보관한 얼음을 소년의 입 안에 물려 주면, 나직하게 앓는 소리를 내며 시원함을 음미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았다.

얼음은 금방 녹아났다.

머리칼이 수더분하게 자라 목덜미까지 덮는 소년이 옆자리에 웅크려 앉은 소녀를 곁눈질했다. 도발적인 눈동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얻어맞는 일이 숱해 기르기 시작한 앞머리였지만, 좋은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손부채를 부치는 소녀의 옆모습을 마음껏 훔쳐볼 수 있는 거.

둥근 턱 아래 길게 뻗은 뽀얀 목줄기에 어쩐지 목이 탔다. 입술을 연 건 충동적이었다.

“3년만 버티면 돼. 그러면…….”

“그러면?”

“기사 입단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생겨. 합격하면…….”

퍼스는 그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자신과 달리 메리는 땀 냄새마저 향기로웠다. 속이 훤히 비치는 슈미즈를 입고 덤벼들던 마나님에게서 풍기던 지독한 향수 냄새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아찔해지는 정신을 붙들기 위해 짧은 잔디를 주먹 쥐어 뜯었다.

“합격하면?”

“나랑.”

“너랑?”

“그 전에, 복수부터 하고 나서. 그리고.”

열여덟이면 이른 나이에 가정을 이루는 남자들도 제법 있잖은가. 황궁 기사단의 말석이라도 얻게 된다면, 소박하게 먹고사는 데는 문제없을 테다.

문득 눈에 들어온 메리의 손끝이 남김없이 부르텄다.

하루 열두 시간 이상 물에 담가 놓는 고된 노동의 당연한 결과였다. 그뿐만 아니라, 옷감을 비비느라 얇아진 손톱도 마른 논바닥처럼 쩍 갈라져 피가 비쳤다.

손에 물 묻는 일 없게 해 줄게. 상투적인 대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왜 사내들이 그렇게 청혼하는지 알겠다. 퍼스는 메리의 상한 손끝이 꼴 보기 싫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자신에 대해 마찬가지로 염려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목젖 부근이 몹시 간지러웠다. 기침을 하면 깃털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쯤 되면 나는 유부녀겠다.”

“…뭐?”

“아이도 한 명쯤 낳았을까?”

3년 뒤가 뭐람. 아버지는 벼르고 있었다. 좋은 값을 제시하는 알파 귀족이 나타난다면 당장 다음 달이라도 올가를 팔아 치울 작정인 게 훤했다.

그가 그녀를 짝으로 원하는지, 아니면 알파를 낳아 줄 단순한 씨받이로 원하는지는 알 바 아닐 것이다.

“너라도 잘됐으면 좋겠어.”

하니 선택지랄 게 없는 오메가의 처지에 비해 퍼스는 훨씬 나았다. 알파로서 출세할 길이 있으니까. 지금이야 뒷배 없는 사생아 취급이지만, 장성하여 한 명의 남자 몫을 하게 되면 그간의 고난을 모두 보답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집 못된 자식한테 복수하면 꼭 신문 투고란에 작게 실어 줘. 알겠지?”

올가는 쓴웃음을 지으며 턱에 맺힌 땀을 닦았다. 후끈한 열기에 공기 밀도가 높아졌다. 가까운 흙바닥에 사슴벌레 한 마리가 말라비틀어졌다. 개미들이 열을 지어 곤충의 몸이며 날개를 떼어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일어섰다.

“그럼 먼저 가 볼게.”

무섭게 굳은 소년의 얼굴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후 일과를 헤아리면서 멀어진 올가가 아주 간과한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알파의 개화(開花)였다.

열여섯을 전후하여 오메가가 첫 히트를 맞이하듯, 알파도 청소년기에 첫 러트를 맞는다. 그 구체적인 시기는 감정의 열화에 많은 영향을 받기에 이들의 첫 발정기는 흔히 ‘첫사랑의 병’이라 불리기도 했다.

사랑.

부드러운 발음만큼 따사로운 마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감정일 리 없다.

비밀스럽게 시작되는 애정은 화살표를 갖는다. 하지만 이 눈먼 화살이 꽂힌 상대의 마음을 강제로 당겨 올 수는 없다. 여기에서부터 사랑은 다채로운 색을 띠게 된다. 탁한 붉은색이 되기도 하며, 싸늘한 푸른색, 나락 같은 검은색, 또는 여러 색이 섞여 혼탁한 보라색을 발하기도 했다.

그러니 지극히 일방적이며 내재적인 분노 역시 사랑이라 일컬어 마땅한 것이다. 이 역시 알파의 발정기를 촉진하는 감정의 요소 중 하나였다.

알파는 그들만의 사회를 구축한 보기 드문 종족이었다. 꽤 규모 있는 이 저택만 해도 알파는 매 맞는 소년 단 한 명뿐이었다. 당연히 나고 자란 빈민가에서도 올가가 알파를 맞닥뜨릴 일은 없었다. 하여 그 위험성이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싸구려 억제제 한 알을 쥐여 주고 올가의 등을 떠민 베타 허드슨도 이에 대해 무지했던 게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날 밤에.

3년을 버티겠다던 퍼스가 돌연 미쳐 버렸다.

그날의 마지막 수업은 역사 시간이었다. 여느 때처럼 이죽거리던 막내 공자를 실신할 때까지 팬 소년은 저택의 경비병들에게 붙잡혀 독방에 감금되었다. 간신히 처형을 면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부친의 신분이 대단해서라는 소문이 물안개처럼 퍼졌다.

***

“퍼스, 정신 차려 봐, 퍼스!”

물도, 음식도, 빛도 없이 일주일을 구금당했다. 경비병들은 제 발로 걷지 못하는 소년을 마구간에 처박았다. 후환이 꺼림칙하여 직접 처리하지는 못해도 그를 살려 줄 의향이 없는 것은 명백했다.

“…크, 으.”

행여나 불똥이 튈까, 사용인들은 마구간에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덕분에 쉽게 밤의 어둠을 타고 숨어들 수 있었다. 램프를 내려놓은 올가는 구유에 처박힌 퍼스에게 달려갔다. 쭉정이처럼 마른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그녀는 참담함을 삼키고 부랴부랴 적신 천을 입 안에 짜 주어 부상자의 목을 축여 주었다.

“너, 너어.”

“퍼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소년이 맥없이 팔을 뻗었다. 한데 올가의 어깨를 틀어쥔 악력만큼은 어느 때보다 가장 셌다. 악, 소리가 나올 만큼 아파 비명을 지를 뻔한 올가는 처음으로 소년과 또렷이 시선을 마주했다. 쿵. 그 순간 심장이 배꼽까지 떨어졌다.

소년의 원망에 찬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왜, 또, 왔어. 죽게 놔두지, 왜.”

처음으로 입 밖에 낼 만큼 장렬하게 분노했다. 더 모질고 악독한 일들도 버텼던 그였으나, 열다섯 해에 그보다 더한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정함이 더 아프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다정함이라면 더더욱.

남의 것이 될 여자.

휴고 퍼스 체이스필드.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이름을 가진 소년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감각을 맛보았다. 살아남기 위해 무디어졌던 감정이 분개한 용의 비늘처럼 일어나고, 저 아래에 응축되었던 분노가 때 이르게 폭발했다.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것, 하나도 없었어.”

“아, 아아. 하아, 하아!”

끼익. 구유 통이 삐걱거린다. 범상찮은 분위기를 기민하게 눈치챈 말들이 깨어나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런 게 생기면 괴로울 뿐이니까. 그런데 네가…….”

대가 없는 다정함을 알게 했어. 박살 날 꿈을 꾸게 했어.

알아? 누군가에게는 그게 바로 악마의 짓이야.

인생 최초로 페로몬을 발산하는 알파의 송곳니가 섬뜩한 유백색을 띠었다. 소년의 바지춤이 눈에 띄게 부풀었다. 첫 러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발정은 또 다른 발정을 부르는 법이다.

전염성 있는 성욕은 근거리에 있는 오메가의 각성을 부추겼다. 난생처음의 페로몬 샤워. 그것이 페로몬인 줄도 모르고 올가는 뒤로 넘어져 숨 가쁘게 헐떡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퍼스가 깨어나자마자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고 머릿속이 어찔해졌다. 이명이 동반된 빈혈이 이는 가운데 움찔거리는 다리 사이 감각만 날이 섰다. 이미 여성으로서 충분히 성숙한 음부가 빠르게 씰룩거렸다. 불현듯이 소스라쳤다. 그러자마자 치마 밑 속옷이 왈칵 젖었다.

크게 숨을 들이켠 알파가 그 애액 냄새를 맡았다.

갓 피어나는 오메가의 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향기로웠다. 무척 달면서도 새콤했다.

“너…….”

낮게 쉰 목소리로,

“오메가구나.”

숨기고 있던 사실을 폭로했을 때. 쿵. 또 한 번 심장이 떨어졌다.

황급히 목덜미를 만져 본 올가는 매끈한 맨살의 감촉에 저도 모르게 흐느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이 바로 그토록 아버지가 주의하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서둘러 주머니에서 꺼낸 약을 삼켰지만 부질없었다. 싸구려 억제제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이기지 못했다. 그렇다고 깨물림을 방지할 초커도 없다. 이 순간, 올가는 발가벗겨져 내동댕이쳐진 사슴처럼 무방비했다.

“아. 안 돼, 퍼스. 이러면 안 돼. 우리는……!”

“우리는 운명의 상대야. 믿어지지 않아. 내 첫사랑이 동갑내기 오메가라니. 서로에게 첫 상대가 될 예정이라니… 내게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부활자처럼 구유에서 일어섰다가, 곧바로 넘어진 소년이 목을 울려 웃었다. 꼼짝하지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올가에게 비틀거리며 기어 와 그녀의 발목을 매만졌다.

“그래, 널 내 짝으로 만들 거야. 그러면 되겠어. 내 것이라고 먼저 낙인을 찍어 놓으면 되는 거잖아. 후… 그러면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아도 돼. 널 독점할 수 있어.”

폭발적인 페로몬을 뿜는 소년은 제 몸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해 보였다.

그는 열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피범벅인 셔츠를 걸치고 미소한다. 덜 무르익은 사내다움에 음울함과 광기가 어우러져 가히 요사했다.

“…읏!”

부지불식간에 다가온 소년에게 깨물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피하지 마.”

간발의 차이로 목덜미를 방어한 올가의 손바닥에서 이를 떼어 낸 휴고가 으르렁거렸다.

“아, 아…….”

바싹 얼굴을 들이민 소년과 아주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뜨겁게 작열하는 숨결이 입 안에까지 느껴졌다. 그 뜨거움에 전율한 순간이었다. 미끄덩한 혀가 가득 밀고 들어오면서 올가의 몸이 완전히 뒤로 넘어갔다.

“…으응!”

막힌 신음이 샜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

말 울음소리와 먹이용 건초 무너지는 소음이 어린 알파와 오메가의 첫 발정기를 숨겨 주었다. 서투르기 짝이 없는 격정적인 입맞춤은 피 맛이 났다. 어느 사이 입술을 떼어 낸 소년은 거의 이지를 잃었다. 짐승처럼 헐떡이고는 또다시 이를 세웠다.

“아읏!”

이번에는 겨드랑이를 물렸다.

예민한 살갗이 찢어지는 섬뜩한 아픔이 강타했다. 정신이 번쩍 드는 고통에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맑아졌다. 올가의 머릿속에 내일 아침 벌어질 일련의 미래가 빠르게 펼쳐졌다.

정사를 나누다가 발각될 것이다.

그러면 허락 없이 정절을 잃은 음탕한 오메가로 낙인찍혀 집으로 돌려보내질 테다. 아니, 오메가임을 숨기고 위장 취업한 죄로 관청에 잡혀갈지도 몰랐다. 더불어 강간 죄목으로 함께 잡혀 들어간 퍼스는, 확실하게 죽게 될 것이다. 이 몸뚱이로 태형 백 대를 버텨 낼 재간은 없을 테니까.

“그만둬!”

안 돼. 이렇게 제 발로 절망으로 굴러떨어질 순 없었다.

한순간 올가의 강렬한 의지가 알파의 페로몬을 일시적으로 흐트러트렸다. 퍼스가 이제 막 각성하기 시작한 미숙한 알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쥐어짠 힘으로 그를 밀쳐 냈다. 잇자국이 난 너덜너덜한 살점을 핥고 있던 머리통이 나가떨어졌다. 기회였다.

“메리, 가지, 마. 가지……!”

올가는 퍼스의 외침을 뒤로하고 마구간을 뛰쳐나갔다.

숨을 참고 마구 달렸다. 과부하 걸린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마구 달려 저택가를 벗어나 외진 갓길로 나왔을 때는 이미 파랗게 동이 트고 있었다. 머리띠가 벗겨져 붉은 머리칼은 산발이 되었고, 신발 역시 어딘가에서 잃어버렸다. 만신창이가 된 그녀는 사람의 눈을 피해 꼬박 하루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 망할 년이……!”

“아, 아버지.”

한데 도무지 몸의 열기가 식지 않았다. 손쓸 방도를 몰랐을뿐더러 대처 방법을 알려 줄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눈물로 뺨이 범벅 된 올가는 곧장 다락방 구석에 숨어들었다. 영문도 모르고 자신의 뜨거워진 몸뚱이를 살필 찰나였다. 가랑이를 들추고 있다가 발각되었다.

허드슨은 다리 사이를 오가던 올가의 손이 젖은 것을 보고 격분했다.

“정조와 순결을 그리 신신당부했건만, 오, 여신이시여. 제 아이가 육욕에 눈을 떠 타락했나이다. 저를 대리자로 삼으시어 이년을 벌하시옵소서!”

다락문이 완전히 젖혀졌다. 어둠에 숨은 올가의 위로 네모난 심판의 빛이 드리워졌다. 다락 밖의 불빛이었다. 그 위로 심판자 아버지의 그림자가 길게 뻗었다.

곧, 바지 혁대를 풀어 헤친 그가 매섭게 가죽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고가에 매매할 처녀성을 잃을 뻔한 죄는 무거웠다. 이성을 잃은 허드슨은 올가의 등짝에 수십 마리의 뱀 자국을 남겼다. 실신하여 뻗은 피투성이 살갗에 퉤, 경멸을 담아 침을 뱉기도 했다.

그렇게 어린 양들의 첫 발정은 참담히 실패하고야 말았다.

이는 짝짓기의 절단이었다.

메리와 퍼스는 결국 짝이 되었다. 물린 겨드랑이에 소년의 타액이 스몄고, 소녀의 피가 소년의 식도를 적셨다. 이로써 한 명의 알파와 한 명의 오메가의 일평생을 묶기에 충분했다. 다만 핵심 교합이 부재한 미완의 의식이었을 뿐.

목덜미 외의 부위를 깨물어 짝짓기하는 그릇된 방법은 함구의 대상이었다. 불필요한 지식은 불필요한 사고를 유발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실패한 의식의 영향? 어그러진 첫 발정기의 여파?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헤아릴 수 없는 부작용이 무지한 소년 소녀를 덮쳤다.

“이 계집은 틀렸네.”

성욕은 죄다. 아버지의 정조 관념을 뼈저리게 주입받은 올가는 아무도 그녀의 향을 맡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짝 된 알파만이 그녀의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목덜미에 물린 자국이 없었기에 그녀는 불능한 열성 오메가로 낙인찍혔다.

그와 더불어 체이스필드의 사생아 휴고는 성불구가 되었다.

미완의 짝이 달아났고 첫 러트는 장렬히 실패했다. 억제제로 열병을 다스릴 기회조차 없었다. 그는 그 이후로 사흘 밤낮을 고열에 들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사흘의 변태(變態)를 거쳐 휴고 퍼스는 완전한 우성 알파로 새롭게 각성했다.

살아서 마구간을 걸어 나온 그를 보고 저택의 무사들은 대경실색했다. 매 맞는 시종이 재앙 신으로 변모했다. 급히 각종 무기를 쥐고 덤벼들었으나, 모든 제약을 벗어던진 그를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일방적인 학살극.

현 황제, 당시에는 황태자였던 에드먼드 3세가 도시에 잠행 나와 그 무도한 현장을 목격했다. 소문이 무성하던 그 체이스필드 변경백의 사생아가 난자한 현장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마음에 드는군.”

에드먼드의 변덕이 그를 살렸다. 때마침 치열한 황자의 난을 치르던 중이었다. 황태자는 무도한 알파를 사형장으로 보내는 대신 기사복을 입혀 자신의 옥좌 뒤에 서게 했다.

‘재미없군그래.’ 황궁에 등장한 자신의 사생아를 보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는 콘라드 후작을 향해 에드먼드가 입술을 비죽였다.

***

쓸모없어진 오메가로 전락한 올가는 그날부로 신문 읽기를 극도로 꺼렸다. 혹시나 부고란에 퍼스의 죽음이 실렸을까, 확인 사살하기 두려웠던 까닭이다. 십중팔구 죽었을 것이다. 한동안 그녀는 죄책감에 짓눌려 울었고, 길거리에 숱한 퍼스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갈가리 찢어졌다.

그 소년을 좋아했었다.

의무에 짓눌려 자각하지 못했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사무침은 뒤늦었고 결말은 참혹했다.

올가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시간을 돌린다면 그를 살릴 수 있었을까. 뿌리치지 않았을까. 자문해 봐도 해답은 불투명했다. 그녀 자신이 너무나 무력했기 때문이다. 돌풍처럼 휘몰아친 저택에서의 사건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고정된 운명과 같았다.

이처럼 슬픔의 물살이 거셌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강물도 점차 메마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10여 년이 흘렀다. 소년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변색된 종이보다 더욱 흐려졌다.

세월에 마모되어 마음에도 굳은살이 생겼다. 첫사랑의 죽음을 딛고 무덤덤해진 올가는 아주 오랜만에 신문을 펼쳤다. 지금은 멸문한, 도시 스완의 저택에서 근무했던 세탁방 하녀 메리를 찾는 광고가 10년 만에 처음 중단된 바로 그날이었다.

그녀의 앞으로 체이스필드 후작의 초대장이 도착한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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