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낙향 기사 (4/12)

3. 낙향 기사

잔혹해진 남자.

위장한 기사도를 벗어던지고

이를 가는 것이다, 첫사랑아.

“천부장님, 도둑놈을 잡아 왔습니다.”

“살려, 살려 주십시오, 단장 대리… 아니, 아니, 단장님! 장군님!”

노략질하는 해적 신고를 받고 영지의 군대는 해안가 마을에 초소를 차렸다. 그중 가장 큰 막사의 지휘실에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휴고 퍼스 체이스필드가 고개를 들었다.

“무릎 꿇려.”

“예!”

“단장님! 손을, 제가 직접 오른손을 자르겠습니다. 불명예 제대도 달게 감수하겠습니다! 반드시 도벽을 고치고 농사나 지으면서 쥐 죽은 듯이 살 테니… 한 번만 용서를……!”

“너는.”

“예, 예?”

“사람이 바뀌는 동물이라고 생각하나?”

사실 해적 무리 두목의 머리를 베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보다 큰 문제는 군사의 해이해진 기강이었다. 중앙정부에서 멀어질수록 지방 조직의 통솔이 어려운 건 통상의 사정이었고, 기가 센 알파들로 주로 이루어진 군대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했다.

묻는 음성이 고저 없다. 휴고는 일어나 집무 책상 옆에 비스듬히 세워 둔 도끼 손잡이를 잡았다.

“대답해, 개과천선할 수 있는 생물이라고 믿나?”

의전용으로 하사받은 장식 검은 부대를 답사한 첫날 분질러 버렸다.

콘라드 후작의 죽음이 공표되자마자 창고의 군수물자가 야금야금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날부로 그의 도끼날은 매일같이 피를 머금어 나날이 요사해졌다. 그와 더불어 수도의 파벌 싸움에 밀려난 낙향 기사라 깔보는 깐족거림도 쥐 죽은 듯 수그러들었다.

“그, 그건… 우욱!”

아마도 이자가 최후의 군수품 도둑이 될 테다. 어느 날 갑자기 변경백 대행이라며 나타난 젊은 놈을 젖비린내 나는 사생아 새끼라며 안줏거리로 씹던 밤도 이제는 끝이었다, 그는.

“걸레 가져와. 직접 닦게 해.”

과연 콘라드 체이스필드의 아들이었다. 육지전과 해상전 모두에서 연전연승하며 위상을 떨쳤던 아버지 우성 알파 못지않게 기세가 대단한 알파였다. 섬뜩할 만치 무정하고 싸늘한 눈빛은 그 이상으로 압도적이었으며, 또한.

그의 위압감에 짓눌린 사병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되레 구토를 했다. 전날 먹은 술안주까지 모두 토하고 누런 위액까지 뿜는다. 휴고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남자의 치태에 턱짓만 까닥했다. 이내 대기하고 있던 병사 하나가 걸레를 가져왔고, 무릎 꿇은 사병은 손을 떨면서 자신의 토사물을 치우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게 믿지 않아.”

“아, 아닙니다. 단장님! 저는 바뀔 수 있… 커헉!”

잠깐 사이에 낯빛이 거멓게 죽은 사병이 지레 놀라 번쩍 고개를 쳐들었을 때였다. 휴고의 도끼날이 기습적으로 날아왔다. 목젖에 정확히 박힌 날은 그간 찍어 냈던 살점의 기름이 끼어 예리하지 못했다. 하여 어린 종자가 날을 갈겠다는 것을 그는 부러 거절했다. 무딘 날이 죄인의 고통을 가중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쥐새끼의 천성이 바뀌길 기다리느니 그 멱을 따서 공간을 청소하는 편이 이롭다고 생각하지.”

“커흐, 켁, 크, 케엑……!”

도끼날을 떼어 내자마자 피 보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동시에 기사의 정복이 피로 흠뻑 적셔졌다. 그러나 휴고는 개의치 않고 다시금 사병의 목줄을 찍었다. 콰악. 떼어 냈다가 다시 찧는다. 콱. 콱. 일부러 힘 조절을 해서 쉽게 놈의 명줄을 끊지 않았다. 그렇게 도합 다섯 번 만에 기어이 도둑의 목이 뒤로 찢어져 굴러떨어졌다. 쿵. 머리 잃은 몸이 뒤늦게 자신의 토사물 위로 자빠졌다.

“그편이 경제적이고.”

망자는 듣지 못할 나머지 이유를 마저 언급한 휴고가 스윽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를 모시는 부하들이 하나같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돼지처럼 도축당한 사람의 목 단면에서 목뼈가 어떻게 부서질 수 있는지, 잘려 나간 정맥이 얼마나 피를 뿜을 수 있는지, 질질 새는 척수액이 어떤 색인지 똑똑히 알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을 도살하여 열 사람의 기강을 바로잡고 백 사람을 두렵게 한다. 실로 실용적이었다. 그렇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휴고 퍼스 경은 또한, 과연 인간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자비했으며 잔학했다. 도끼를 휘두르는 낙향 기사. 여러 종류 중에서 가장 무거운 한 손 도끼를 휘두르는 까닭은 적의 두개골을 으깨는 것이 취향이어서라는 괴이한 소문까지 붙었다.

“보고할 일은 이게 단가?”

“네, 그렇습니다!”

“그래, 그럼.”

찢긴 살점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도끼를 내던진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퇴근할 테니 급한 일 있으면 저택으로 전서 부치도록 해.”

“네! 살펴 가십시오!”

막사에 가득 찬 피 냄새에 남몰래 헛구역질하던 부단장이 칼같이 경례를 붙였다. 휴고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 연방 부대에서 가장 잘난 알파라고 으스대던 콧수염쟁이였으나, 최근에는 몰라보게 기가 팍 죽었다.

그 자신은 단지 촌구석 알파이자 우물 속 개구리에 불과했을 뿐이다.

소수 종족 알파. 그중에서도 우성 알파는 극소수인데, 거기에서 또 프리미엄이 붙는 극우성 알파는 바로 저런 사내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걸 비로소 최근에야 깨달은 콧수염 파르보였다.

휴고 퍼스.

그 뒤에 붙는 체이스필드라는 성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사내.

단장 대리는 체이스필드 가문의 사생아 형제 중 동생이라 했다. 가공한 보석처럼 눈부신 외모를 자랑하는 형 역시 최상급의 알파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존재 그 자체의 위력으로 주변을 압도하기로는 동생 쪽이 한 수 위였다. 오죽하면 휴고 퍼스를 대면한 모두가 이구동성이겠는가.

포효하는 사자 앞에서 오금이 쪼그라든 설치류가 된 기분이었노라.

혹자는 이리 누린내가 진동하여 참을 수 없다고도 푸념했다. 마치 수십 마리의 이리 떼에 휩싸여 위협당하듯 하여 식은땀이 비처럼 솟는다고 했다. 기실, 휴고의 앞에서 그의 기운을 이겨 내지 못하고 토악질한 건 비단 오늘 명을 달리한 도둑뿐이 아니었다.

“저, 부단장님. 수도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뭐라고? 어디 당장 줘 봐! 얼른!”

단장 대리가 먼저 퇴실한 후, 뒤이어 난장판 막사를 빠져나와 피신한 파르보는 사환이 내민 편지를 서둘러 낚아챘다. 발신인은 황실에 기거하는 궁정인 사촌이었다.

“으음.”

글씨로 빼곡한 편지에는 휴고 경의 무용담이 한가득하였다.

암살자의 위협에서 황제 폐하를 구한 적도 있더란다. 역적의 오장육부를 도륙하는 기사에게 홀딱 반한 에드먼드 3세가 그를 무척 총애하여, 평기사에서 전속 친위대로 고속 승진시켜 가까이 두었다고도 적혀 있었다.

휴고 경이 친부의 영지로 돌아가기 위해 퇴역함을 매우 아쉬워하셨으며, 명목상 장자인 미겔 체이스필드를 밀어내고 내심 후계 싸움에서 이기길 바라신다는 은밀한 내용까지……. 덧붙이는 말에는 황제께서 조만간 그를 정식 천부장으로 임명할 예정이란 소문이 돌고 있다 했다.

여기까지 빠르게 읽어 내린 파르보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니까 수도에서 도살자가 내려왔군.

이자를 변경백으로 앉힌다라.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작위를 노리고 귀향한 것인가. 형 미겔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거머쥐기 위해서?

변경 체이스필드는 군사적 요충지다. 여기서는 대대로 영지를 다스리는 후작이 군사 업무를 병행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는 지역의 특수한 성격 때문이었다.

체이스필드의 동해에서는 해적이, 서부 사막에서는 사특한 마술을 부리는 유랑 이민족이 기승을 부렸으며, 항아리 입구처럼 좁아지는 북부 대로의 병목 지대에는 다른 제국과 오르칸 제국을 저울질하는 공국 비셴이 있었다.

삼자의 침략을 저지하는 평야의 방패. 체이스필드의 이명이었다.

이처럼 국제 정세에 예민한 특수 지역인지라, 이곳에서는 적에게 이로운 약점이 될 파벌 싸움이나 땅따먹기 알력 다툼이 금지되었다. 하여 작위 계승전에서 패배한 자는 죽거나 영지를 떠나야 했다. 이는 수백 년간 이어진 불문율이었다.

바야흐로 형제 학살극이 터지려는가?

과연 미겔 체이스필드가 잠자코 당하고만 있을 위인이던가.

“그럴 리가 없지.”

탄식한 파르보는 사촌의 편지를 꾸깃꾸깃하게 구겼다.

휴고 퍼스가 도살자라면 미겔 체이스필드는 음험한 전략가라 일컬어야 마땅했다.

한량 짓을 일삼는 장남의 직업은 수학자이자 발명가였다. 특히 도시 측량과 공성 건축 설계에 탁월하였고 그 또한 학살에 재주가 퍽 능했다.

툭하면 군사경계선을 넘어와 곡식과 가축을 약탈해 가는 이민족을 막기 위해 그가 직접 진두지휘하여 건설한 참호가 대표적 예였다.

그것은 결코 평범한 참호가 아니었다. 가지각색의 원형 구조로 산개한 수백 개의 구덩이는 꼭 무작위로 퍼진 토끼 굴 같았고, 교묘하게 흙더미로 위장하여 그 위치를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이민족이 말을 달려 그 위를 밟게 되면, 창살이 거꾸로 꽂힌 구덩이에 비명 지를 틈도 없이 추락하여 말과 함께 몸통이 꿰뚫려 죽게 되는 것이다.

구조는 단순했으나 발상이 가히 악마적이었다. 잔인한 천재는 이에 그치지 않고 빈번하게 참호의 설계를 변경하곤 했다. 기존의 구덩이를 덮고 새로운 도랑을 예상치 못한 장소에 새로 만드니, 이민족은 함정을 방비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하루는 50구의 시체와 35필의 과하마 사체를 한꺼번에 수거한 적도 있었다.

‘저들의 단말마가 내려치는 낙뢰와 비슷하니, 이 지형 전술을 약식 지뢰라고 부르면 어떨까.’

봉분처럼 쌓인 시체를 보고 웃던 얼굴을 상기한 부단장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한 치의 물러남 없이 팽팽한 미친 형제 아닌가.

극우성 알파들은 지나치게 짐승에 가까워 인간으로서 결여된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들 하던데…….

더듬이처럼 눈치가 발달한 파르보는 체이스필드 형제가 각각 가지고 있는 병리적 특성을 부분적으로 알아차렸다. 얼마나 더 병든 작자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금수보다 더한 잔인함은 공통점이 확실했다.

“아이고야.”

그의 침음이 깊어졌다. 유행에 뒤처지고 투박한 시골살이였지만 나름의 평화에 만족하던 차였다. 이들 형제로 인하여 동북의 평온함이 박살 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쿠르릉.

한순간 십 년은 늙어 뵈는 중년 콧수염의 우울에 하늘이 맞장구를 쳤다. 한두 방울씩 얼룩지던 땅이 금세 폭우에 젖었다.

***

파르보를 우울하게 한 날씨가 휴고에게는 반대로 도움이 되었다. 정복이 비에 젖어 색이 짙어졌기에 사방에 튄 피가 묻혔기 때문이다. 덕분에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후작가로 환가할 수 있었다.

저택이 새로 맞이한 후작 부인의 방은 대저의 2층이었다.

어른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새 아들이 된 휴고와 미겔은 3층으로 방을 옮겼다. 천만다행이지. 계단을 오르던 휴고는 2층에 미미하게 고인 달콤한 향을 맡고 잠시 멈추어 섰다. 숨을 참고 마저 층계를 올라 방으로 들어섰다. 목욕보다 먼저 서랍장에서 억제제 주사를 꺼내 팔뚝에 꽂아 넣었다. 환약보다 즉효성이 뛰어난 알파 전용 억제제였다.

잠시 기다리자 사납게 들끓던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녀와 같은 층을 공유하지 않아서. 그랬더라면 치밀하게 수립한 절차를 걷어치우고 단숨에 방문을 부수고 새어머니를 탐했을 테니까. 비명을 지르는 입술을 틀어막고, 젖지 않은 음부를 막돼먹게 들쑤셔 반드시 피를 봤을 것이다. 휴고의 성기는 독보적으로 거대했다.

차륵. 물을 벗고 욕조에서 빠져나온 남자의 육체는 험준했다. 뼈가 굵고 어디고 할 것 없이 근육이 두툼했다.

날렵한 근육질로 미형의 몸매를 갖춘 형과는 다른 의미로 완벽한 몸이었다. 진흙을 덧대어 빚은 게 아닌, 바위를 깎아 표현한 몸. 투명한 물방울이 두꺼운 근육을 타고 흐르다가, 장골(腸骨)의 도드라진 굴곡을 만나 사타구니에 고였다. 수더분한 거웃 덤불을 지나 두툼한 성기 표피를 핥으며 미끄러진다. 요철이 확실한 요도구 끄트머리에 맺힌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맑은 핏빛을 띠는 귀두는 돌로 깎은 붉은 버섯을 닮았다.

성기 기둥의 둘레보다 큼직한 귀두는 갓이 넓적하고 뾰족했다. 여성의 질구를 한껏 벌려 뒤따라오는 기둥이 제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질을 뻥 뚫어 굴착할 모양새였다. 평범한 여성은 이 험악한 끝부분조차 담지 못하고 찢어질 게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알파의 정사 상대는 오메가가 적격이었다.

이족 보행하는 짐승의 좆에는 그를 족히 담을 만한 전용의 음부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짝짓기한 반려의 질 속. 마음껏 찧어 댈 튼튼한 자궁구가.

올가의 자궁.

자연스레 상상하자마자 진한 흑색을 띠는 성기가 꿈틀거렸다.

페니스의 표피를 이리저리 옭아맨 핏줄까지 툭, 툭 불거졌다. 속된 말로 말자지였다. 국부에 넓게 번져 우거진 음모는 또 어찌나 빽빽한지 몰랐다. 날벌레라도 잘못 앉았다가는 검은 수풀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겠다.

그야말로 정욕을 농축한 만듦새였다.

근육이 두꺼워 다물리지 않는 허벅지 사이로 어린아이 팔뚝 같은 페니스가 묵직하게 늘어졌다. 오랜 욕구불만에 흉포해진 기둥이 꺼덕거리며 솟구치려 한다. 그러자 무표정한 휴고는 성의 없이 자신의 성기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남는 주먹으로 무자비하게 벗겨진 귀두를 치기 시작했다.

“큭…….”

익숙한 과정이었다.

예민한 점막을 폭행하여 고통으로 발기를 죽인다. 어차피 그는 사정하지 못하는 불구였으므로 좆을 세워 봤자 더욱 고통스러울 뿐이다. 몸속을 뒤집어 놓는 성욕은 결코 배출되지 못할 원념이었다. 죽지 못해 살던 나날들. 배출할 수 없는 고통에 그간 거세의 충동을 몇 번이나 넘겼던가. 이제는 헤아리는 게 부질없을 정도였다.

마침내 좆도 불알도 시름시름 수그러들었다.

과격파 수도승도 흉내 못 낼 고행을 멈춘 휴고의 귀밑에 땀이 조금 솟았다. 성기에서 손을 떼어 낸 그는 곧 깔끔한 셔츠와 바지를 갖추어 입었다. 거대한 페니스는 늘 그렇듯 한쪽 허벅지에 비스듬히 붙여 수납했다.

그렇게 정숙하고 고결한 기사의 외면을 복구했다. 감쪽같았다.

그는 누가 보아도 자세가 곧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남이었다. 미겔에 비해 피부색이 짙고 모발까지 흑발이라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띌 뿐이다.

어디서든 손꼽히는 알파.

그를 넘어뜨리려는 궁정의 레이디들과 부인들의 수작이 어떠했던가. 실수인 척, 말 붙일 핑곗거리로 삼고자 그의 앞에 떨군 손수건과 작은 액세서리들, 심지어는 스타킹과 구두, 속옷 따위가 발에 챘었다.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나 새파란 청안을 가진 밤의 기사 휴고는 단 한 번도 그들 침대에 기어들어 간 적이 없었다. 무릇 알파라면, 성장기에 접어든 십 대 중반부터 성욕이 왕성하여 러트 발정기와 그렇지 않은 때를 가리지 않고 무분별한 섹스에 몰두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도 말이다.

오죽하면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알파는 어째서 오메가와의 섹스로만 번영하는가. 그건 바로 알파의 문란함을 못 견딘 여신께서 그들 족속이 번식하지 못하도록 자손 생산력에 족쇄를 채웠기 때문이라고.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음란한 섹스.

떼려야 떼 놓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휴고는 섹스를 경험한 적이 없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겠다. 이는 미겔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한 여성 편력가처럼 소문난 형제도 실은 여성을 뿌리 깊게 혐오하는 자였다. 섹스에 지긋지긋하게 물렸으면서도 정작 성교를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지독히 이율배반적이었다.

‘대단한 동정 형제 나셨어. 안 그래?’

언제였던가. 자조하던 미겔이 화를 참지 못하고 와인 잔을 내던져 박살을 냈었다. 그래도 동생보다는 형편이 나았다. 몽정이 아니라면 사정 자체를 하지 못하는 휴고와 달리, 미겔은 지루이긴 해도 자위는 가능했으니까.

‘아, 아흑, 으… 읏.’

미겔의 첫 자위는 그가 스물여섯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리본에 코를 들이박고 껍질이 까질 때까지 밤새도록 좆을 쥐어짰다. 휴고는 독주를 마시면서 그런 형제의 첫 수음을 지켜보았다. 리본의 주인을 범하는 상상을 공유하였던 밤이었다.

***

“그럼 이만… 그러니까, 음, 부인. 강녕하시오.”

“그러시면 안 됩니다, 블레이크 자작.”

“……?”

“입이 달렸으면 똑바로 혀를 놀려야지. 따라 해 보시죠. ‘체이스필드 후작 부인.’ 그리고 어디서 반존대 짓거리입니까, 건방지게.”

“미, 미겔 공.”

“자작께 옥스레이크의 포도밭을 대여해 드렸지 않습니까?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풀칠하시는 거로 아는데……. 아예 몰수해 드릴까요.”

정작 초로의 노인에게 무례하게 구는 건 미겔이었다. 어쨌든 뼈 있는 협박을 하자, 상석에 앉아 있던 올가에게 거만 떨던 자작이 펄쩍 뛰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얼른 모자를 벗고 부랴부랴 정식 인사하는 것이다. 손님을 맞이하는 접견실에 들어선 휴고가 본 첫 장면이었다.

“부군을 잃은 슬픔이 크시겠지만 지나친 애도로 건강 잃지 마시옵고 강녕하시기를. 후, 후작… 부인.”

“참 나, 눈치도 없군요. 지적당하고 고치는 거면 좀 더 정성을 보이셔야지 않나.”

“어떻게…….”

“마님이라고 부르시죠.”

완전히 하인 취급이다. 미겔의 모욕적인 위계 지시에 블레이크 자작의 낯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렇다고 후작가 후계자에게 맞설 순 없으니 괜한 올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이다. 천한 년이 상석에서 깔아 보는 게 못마땅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만하세요, 미겔.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신 분입니다. 이만 보내 드리는 게 어떨까요.”

그러자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이 앉아 있던 올가가, 비딱하게 구는 미겔을 마지못해 저지하고 나섰다. 꼭 이런 식이었다. 그녀의 새 아들은 어머니의 나무람이 있어야지만 괜한 시비를 간신히 그치곤 했다.

“아아, 들으셨습니까, 자작. 우리 어머니께서는 이토록 배려 넘치시고 자애로우십니다. 이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이만 물러가셔도 좋습니다.”

그마저도 재수가 아주 없었지마는.

퇴실령에 땀을 뻘뻘 흘리며 연거푸 허리를 숙이던 자작이 뒷걸음질 쳐 돌아섰다. 그러다가 거대한 석상처럼 서 있는 휴고를 발견하고 지레 놀라더니, 비굴하게 눈인사하고 도망친다. ‘가랑이 장사 한번 제대로 성공한 년!’ 노인은 그림자 대신 욕지거리를 남겼다.

“어이, 휴고.”

곧 올가와 미겔도 휴고의 인기척을 알아차렸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조문 접견? 두 시간쯤 받았나. 지겨워 죽겠군. 그래도 열흘 정도 지났으니 올 만한 사람은 대부분 만난 것 같은데.”

물론 그만큼 올가의 악명도 높아졌다.

대외적으로 그녀는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3일 만에 남편을 잃은 오메가가 되었다. 아직 목덜미의 초커를 벗기도 전이었다. 생전 정실을 두지 않았던 후작의 변덕도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결혼 직후의 비명횡사도 미심쩍긴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미겔은 미천한 출신의 어머니를 위하는 듯하면서 교묘하게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는 중이었다. 근래 밖에서 도는 미망인의 소문이 이를 뒷받침했다.

악녀. 창녀. 사특한 미망인. 심지어 사람들은 후작의 진짜 사망 원인조차 그녀라고 떠들어 댔다. 요컨대, 노년의 후작은 수많은 생좆을 먹어 치운 더러운 허벌 보지에 감염되어 병사했다는 것이다. 폭죽 사고에 휘말려 사고사했다는 건 대외용 변명일 뿐이라고.

웃기는 일이었다. 만인의 미움을 사는 부인이었지만, 그녀를 가장 미워하는 건 바로 같은 계층의 평민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들은 별도로 선동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도 내가 쟤보다는 낫지. 멸시하던 열성 오메가가 결혼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도망갔다. 비교 우위를 빼앗긴 자들의 분노란.

“그럼 오늘 접견은 이쯤에서 그만둬. 부인께서도 지치셨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퍼스 경… 휴고.”

“괜찮지 않습니다. 저놈의 무리한 요구에 억지로 맞춰 주실 필요도 없고요. 얼굴이 상당히 피로해 보이십니다. 바깥공기를 좀 쐬시는 게 어떻습니까. 비가 오니 멀리 나갈 수는 없지만, 가족 전용 정원이라면 우산을 쓰고 거닐 만하실 겁니다.”

휴고는 1인용 소파에 방만하게 뻗어 앉은 미겔을 걷어차고 한 단 높은 상좌에 앉아 있는 올가에게 다가갔다. 검푸른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악의적인 소문과 딴판으로 정숙하기만 했다.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부인.”

정중한 새 아들의 권유에 올가는 망설였다.

“그러면 화장실에 먼저 들렀다가 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화장도 고치고 잠시 쉬었다가 오십시오. 그동안 우산과 방수 신발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럴게요. 고마워요, 휴고.”

그녀는 처음으로 퍼스 경의 이름을 편안히 불러 보았다. 그에 휴고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억제제를 미리 맞아 두어 다행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녀오십시오.”

휴고는 조심스럽게 드레스 자락을 올려 잡고 스쳐 지나가는 올가에게 목례했다. 뒷골목에서 은밀하게 유통되는 선전지를 떠올리고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할 깍듯한 태도였다. 다리 사이에 독사 머리가 득시글한 ‘올가 체이스필드 후작 부인’의 알몸 삽화 말이다.

“너, 선수 치는 거냐. 나만 나쁜 새끼로 만들고 점수 따시겠다?”

“알면 잘하든가.”

“잘하고 있어, 계획대로.”

“그렇다면 언제쯤.”

“섹스할 수 있냐고?”

“입 더러운 자식. 짝짓기 말이다.”

“짝짓기는 섹스 아닌가.”

본성은 저 못지않게 저열한 놈이 점잖은 척하기는.

올가가 떠나고 접객실엔 형제만이 남았다. 실소한 미겔이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비딱하게 턱을 지지했다.

“먼저 그녀의 히트를 촉발해야겠지, 이론상으로는.”

“어떻게?”

“그건 너에게 달렸고. 애초에 그녀의 히트가 비정상적으로 중단된 게 네 탓이니까.”

미겔이 정장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휴고에게 던졌다. 올가의 초커를 해제할 수 있는 혼인 예물이었다.

“장인을 수소문해서 복사한 거야.”

“짝짓기는 함께 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당연하지. 혼자서 그녀를 물었다간 사지를 찢어발겨서 죽여 버릴 거다, 휴고. 친애하는 동생아.”

휴고뿐 아니라 미겔에게도 올가는 유일한 구원이다.

빼앗길 수도, 둘로 쪼갤 수도 없는 오직 하나의 안식처. 다만 미겔은 자신이 후발 주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주지하고 있었다. 운명이라든가, 첫사랑이든가 하는 낭만은 휴고의 몫이었다. 그 자신은 그저 익사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구명줄을 붙잡는 조난자에 불과했다. 또는, 후천적인 중독자라 하여도 되겠다.

“일이 잘 풀리길 바라는 부적으로 삼아. 보기만 해도 기분 좋잖아. 그녀를 깨물 수 있는 권리를 쥐고 있다는 거. 짜릿하지 않아?”

“…….”

“미리 경고하는데 첫 섹스도 혼자 치렀다간 마찬가지로 죽여 버리겠어. 기분상의 문제야.”

“너야말로 나 없을 때 좆 꺼낼 꿈도 꾸지 마라.”

“하하하, 우습지만 이럴 땐 우리 특이성이 편리하네. 동정을 뗐는지 육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

키득거리던 미겔의 귀가 쫑긋 섰다.

전반적인 신체 능력이 범인보다 뛰어난 알파다. 동물의 청력보단 못해도, 저 멀리 복도를 우회하여 걸어오는 미망인의 구두 소리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찬가지인 휴고도 접객실 입구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기대가 어린 눈빛에 문득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기지개를 켠 미겔이 중단되었던 음담을 이어 갔다.

“젖꼭지가 크더라.”

직격타였다. 휴고의 고개가 다시 미겔을 향했다.

“예배당으로 가는 길목에서 잠깐 벗기고 빨아 봤지. 젖 알이 어찌나 도톰하고 커다란지 빨고 씹는 맛이 일품…….”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암살자의 단도처럼 살기를 품은 도자기가 날아왔다.

“평상시 목소리도 좋은데 신음은 더…….”

그보다 더 무거운 문진(文鎭)도 휭,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쨍그랑! 잽싸게 머리를 피한 미겔 대신 창문이 깨져 나갔다.

“농담이야, 농담. 재미없는 자식. 하여튼 손버릇만 더러워서. 수도의 기사들은 다 너처럼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던지면서 싸우나? 서커스단이야?”

미간을 찌푸린 미겔이 투덜댔다.

“우연히 드레스 가슴 앞판이 살짝 벌어져서 유륜 색만 봤어, 유륜만. 벚꽃처럼 예쁜 분홍…….”

젠장. 역시 저 새끼를 붙여 놓는 게 아니었다. 휴고의 단정한 입술이 열리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희번덕였다. 물에 빠져도 입만 둥둥 뜰 자식의 세 치 혀를 믿고 집안일을 맡겨 놓은 건데, 피아 식별하지 않고 그 뱀 같은 혀를 놀린다는 게 문제였다. 미겔 체이스필드는 상대가 누가 됐든 속을 뒤집어 놓는 데는 단연코 일등이었다.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나던데요.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타이밍이 아주 좋았다. 휴고가 막 장식장 위에 박제된 사슴 머리를 떼어 내 집어 던지려던 참이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올가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머니.”

“아니긴요. 창문이.”

“눈먼 새가 들이박았을 뿐입니다.”

“…참새는 아니었겠죠. 대단히 큰 새였나 봅니다.”

올가는 그리 말하며 미겔과 휴고를 번갈아 흘겼다. 사이가 좋은가 싶다가도 싸울 때는 살벌한 형제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럼요, 아주 거대한 새였습니다. 사람만 한 새였죠.”

미겔은 박장대소했고 휴고는 아무렇지 않게 사슴 머리를 다른 벽에 가져다가 걸었다. 그들의 새어머니는 시치미 떼는 형제를 향해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

“지낼 만은 하십니까.”

정원으로 나오자 억센 빗줄기는 다소 소강되었고 남은 건 씻겨 나가 청량해진 공기였다. 폐를 부풀려 숨을 들이켜자 기분 좋은 쌀쌀함이 밀려들어 온다. 자연스레 올가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얼마 만에 웃어 보는 걸까. 까마득했다.

“네.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요. 덕분에요.”

“힘드신 건 없으신지.”

백화만발할 가을의 초엽이었다. 솜씨 좋은 정원사가 한가득 꽃무릇을 심어 놓았다.

비에 젖어 색이 담뿍 진해진 빨간 꽃무릇이 하늘하늘했다. 키 낮은 배롱나무꽃이 꽃다발처럼 피었고, 노란색 백일홍이 잔디처럼 깔렸다. 치마 밑단이 젖는 걸 감수하고 무릎을 굽혀 꽃잎을 살피던 올가의 손이 문득 멈추었다.

“굶어 죽을 걱정 없는 게 어디인가요. 집안의 천덕꾸러기 신세도 면했는걸요. 이 이상 바라는 건 사치죠.”

“힘들지 않다고는 하지 않으시는군요.”

“…….”

“편히 말씀하십시오. 미천하지만 듣는 귀는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해결책이 없는 것보다 말 못 할 답답함이 훨씬 괴로운 법이니까요.”

“경께서도 그런 적이 있으셨나 봐요.”

“인지받지 못한 서자였으니까요. 가문 사람들의 등쌀에 못 이겨서 일찌감치 집에서 쫓겨났죠. 어렸을 때부터 남의집살이하며 떠돌아다녔으니, 혼자 속으로 삭인 억울함이 꽤 많았습니다.”

검은 장우산을 쓴 휴고가 다가왔다. 올가가 차마 꺾지 못했던 꽃을 뚝 꺾어 한 송이 쥐여 준다. 무뚝뚝했으나 정감 가는 배려였다. 아픈 과거를 먼저 밝힌 행동도 그러했다. 어렵게 살아온 올가의 공감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선한 의도를 파악한 올가의 표정이 온화해졌다.

“그래도 이렇게 훌륭하게 장성하셨으니까요. 고생이 헛되지 않으셨습니다. 경의 다정함과 배려심도 그러한 고난을 이겨 내시는 과정에서 함양하신 성품이실 테고요.”

“어머니께 비할 바겠습니까. 그리고.”

“네.”

“저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아까처럼 편하게 불러 주시면 안 될까요. 휴고라고. 듣기 좋아서요.”

이들 족보가 아주 우스웠다.

뜻밖에 생긴 새 아들들은 올가와 나이 차가 거의 나지 않았다. 아니, 장남 미겔은 오히려 그녀보다 두 살 많은 스물여덟이었고, 차남 휴고는 겨우 한 살 어린 스물다섯일 뿐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고 해도 황당한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올가는 이들에게 ‘어머니’라고 불릴 때마다 갈비뼈가 덜그럭거리는 기분이었다.

“…휴고.”

공기 중 수분으로 인해 흙냄새가 진해진 가운데 기묘한 향이 느껴진다. 이상하게 목이 칼칼해졌다. 마른침을 삼킨 올가가 자신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럼 저도 하나 부탁드리겠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둘만 있을 때라도, 올가라고 불러 주세요. 부인이라든가, 어머니라든가 하지 마시고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가.

“그리하겠습니다.”

가볍게 날아갔다. 안도의 숨을 내쉰 올가에게 휴고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둘의 우산이 서로 부딪쳐 바깥으로 기울어졌다. 방수 천을 구르는 빗방울 소리가 유독 컸다.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과 낯선 호칭 듣기 불편하신 점, 충분히 이해합니다… 올가.”

나지막하게 속삭인 사내가 우산 손잡이를 틀어쥔 올가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둘만의 비밀이 생긴 거군요. 어머니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니.”

“…….”

“당신과 가까워진 기분입니다. 좋아요.”

굳은살이 박인 엄지로 작은 손등 뼈를 하나씩 훑는다. 낯간지러움에 올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괜히 가슴이 뛰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휴고의 체향이 짙게 느껴지는 듯도 했다. 일순 현기증이 일어 아찔해졌다. 왜 이러는 걸까.

“손이 몹시 찹니다.”

“아.”

그제야 자신이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이 남자는 그저 체온을 나눠 주려는 것뿐이다. 올가는 그의 가슴팍에 어깨가 닿는 미묘한 거리감과 야릇한 분위기를 애써 무시했다.

“알 만합니다. 미친놈과 일과를 함께하느라 힘드실 테죠.”

“미친… 미겔 말씀인가요.”

“안하무인 아닙니까.”

올가의 손을 힘주어 쥔 휴고가 인상을 썼다.

“웃으면서 사람 유린하기로는 천부적인 자식입니다.”

“너무 그렇게 매도하지 마세요. 친절하신 분입니다. 신경도 많이 써 주시고요. 다만…….”

“다만?”

잡힌 손이 부담스러워서 빼내려고 했으나, 꿈쩍하질 않았다. 올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남자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처럼 온전하게 마음 써 주는 모습에 그만, 감추려던 마음을 한 조각 흘리고 말았다.

“…저를 싫어하셔서.”

괜한 추측이 아니다.

보좌 명목으로 미겔과 가까이 있는 시간이 제법 되었다. 그래서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 만났던 날의 페로몬 샤워처럼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입에 발린 소리처럼 그녀에게 마음을 터놓은 것도 아니었다.

관찰하고, 시험하고, 등을 떠민다.

그의 앞발에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올가도 알았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밴 희미한 경멸 역시 진작에 눈치챘다.

“막상 앉혀 놓으니 제 몸가짐이나 언행이 성에 안 차시는가 봐요.”

조문 접견만 해도 그렇다. 미겔은 자꾸만 그녀를 시험하여 고기밥으로 던지곤 했는데, 올가는 그가 바랄 만한 재치나 지능적인 즉흥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천부적 천재인 우성 알파의 눈에는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까. 자격지심이 그녀를 좀먹고 있었다. 피로했다.

“아, 죄송합니다. 실례되는 이야기를…….”

빗방울이 맞붙은 우산의 틈 사이로 떨어져 올가의 손등 위에서 바스러졌다.

그 차가움에 놀란 올가의 뺨이 붉어졌다. 본인 앞에서 형제를 흉보다니. 교양 없는 짓을 저질렀다.

“오해하지 마세요, 휴고. 미겔이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후작 부인이라뇨. 애초에 제게 어울리지도 않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자리도 아녔어요.”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올가는 횡설수설하는 자신을 몸 밖에서 지켜보는 듯했다. 입술이, 생각이 통제되지 않았다.

“어서 작위를 승계하시면 좋겠어요. 그러면 저도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을 텐데요. 이 이상 폐 끼치지 않아도 될 테고요. 별 탈 없이 조문이 얼추 마무리되면, 황제께서도 체이스필드를 오래 비워 놓을 수 없을 테니 승계 절차를 더는 미룰 수 없을 거라고.”

왜 이럴까. 올가는 숫제 떨기까지 했다. 미열이 나고, 왼쪽 젖가슴에서부터 목덜미를 타고 이동한 심장 박동이 귓속에서 큰북처럼 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냄새가.

달짝지근한, 입맛을 다시게 하는 냄새가.

“…하던데요, 미겔이.”

휴고에게서 난다.

“비가 와서 그런가요. 쌀쌀하네요.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 이만 들어갈까요.”

“가지 마십시오.”

“훌륭한 산책이었어요. 기분 전환을 시켜 줘서 고마워요.”

“가지 마세요.”

“아뇨, 가야만 해요… 그리고 제발 어떻게 좀 해 보세요, 휴고! 당신의 페로몬이……!”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가닥이 팅, 끊겼다. 맥락 없이 신경질을 내고 나서야 올가는 이 냄새가 휴고의 페로몬 향이라는 걸 소스라치게 깨달았다.

“……!”

세상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토록 단내와 같은 페로몬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페로몬의 힘에 위압될지언정 미겔의 향조차 제대로 맡지 못하는 자신이, 어떻게 그에 못 미치는 알파인 휴고의 페로몬 향을 맡을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심장 박동이 너무 거세져서 상대적으로 빗소리가 멀어졌다. 손을 떨던 올가는 그만 우산을 놓치고 말았다. 거의 동시에 오금이 꺾여 무너지려는 것을, 휴고가 커다란 손을 제때 뻗어 껴안음으로써 방지했다.

“제 향이 느껴지십니까, 올가. 그건 어떤 냄새인가요.”

사위가 어둑하여 더욱 돋보이는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마치 푸른 불꽃 같았다. 어딘가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색이었다. 올가의 입술이 홀린 듯 벌어졌다.

“달콤해요. 아주…….”

제철 포도는 귀족의 몫으로 돌아가고, 수확 때를 놓쳐 문드러진 포도알은 노동자들의 맨발에 짓뭉개져 싸구려 포도주가 된다. 하루 품삯을 받고 일했던 때가 떠올랐다. 혀까지 아리도록 달았던 하루. 초파리까지 따라오던 달짝지근함이 옷에 배어 이후로도 한참을 갔다. 한데 휴고의 냄새는 그보다 훨씬 달아서 정신이 아찔해졌다.

“오메가가 알파의 향을 느끼는 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 반대도요. 올가의 정수리에 코를 붙여 크게 숨을 들이켠 휴고가 속삭였다.

“머리가 어지, 러워요. 제대로 서 있을 수가… 흐윽!”

“그렇게나 좋은 냄새입니까. 잘된 일입니다.”

“아……!”

“당신의 향은 좀 더 상큼합니다. 군침이 돌 만큼. 너무 진해서 육즙처럼 풍미가 느껴져요.”

상체를 숙인 남자가 껴안은 어머니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변명할 여지 없이 색정적인 접촉이었다. 그들을 가려 준 우산의 존재가 요행했다. 모자(母子)간에 있을 수 없는 페로몬 교감 행위를 감쪽같이 가려 줬으니까.

“안 돼. 이러면 안 돼요, 휴고.”

“오메가와 알파가 서로에게 발정하는 건 신이 정한 섭리입니다. 특별한 향을 감지한 이들끼리라면 더더욱.”

올가는 눈두덩에 키스하는 휴고를 밀어내려 했다. 밀어내려다가, 그의 셔츠 깃을 움켜쥐고 말았다. 무의식적이었으나 언뜻 조르는 듯한 태도였다.

“이상해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

도중에 말이 잘리고 입술을 먹혔다. 짐승의 첫입 같은 입맞춤이었다.

“…두 번째 키스를 가져가 주셔서 영광입니다.”

“흐읏……!”

“당신도 처음이 아닐 겁니다. 키스도, 이런 발정도.”

추궁하는 속삭임과 더불어 혀가 따라왔다. 올가의 떨리는 입술을 핥은 휴고가 서슴없이 혀를 집어넣어 깊이 키스했다. 외로 꼰 뺨이 홀쭉해질 만큼 혀를 빨고 빨리는 외설적인 교감이 한참 이어졌다.

“으읏, 읍, 누가 보면……!”

“하, 아…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말씀, 음, 드렸잖습니까. 가족 전용 화원이라고요.”

올가의 윗입술을 길게 물어 당긴 휴고가, 기어코 그녀를 정원 중앙의 길목에 쓰러뜨렸다. 결국 그의 우산마저 나동그라졌다. 그 대신 우산을 자처하여 올가의 위를 드리운 그가 다시 입맞춤으로 덤벼 왔다. 갈급하기 짝이 없었고 낯 뜨겁도록 육욕적이다. 금욕으로 빚은 듯한 사내의 어디에서 이런 색정이 솟아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하아, 하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다만, 휴고의 머리가 흠뻑 젖을 만큼은 키스했다.

어느샌가 그에게 못 박히듯 깍지 손을 낀 자세였다. 양껏 깨물린 입술이 얼얼했고 혀에서는 휴고의 타액 맛이 났다. 올가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술에 취한 듯 어지러우면서도 동시에 오감이 예민하게 달아올랐다.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발정. 천부적인 성욕과 다른, 오메가의 본능이 개화하고 있었다. 이제야.

아들이 된 남자와의 입맞춤으로.

미친 짓이다.

그러나 이 아찔한 감각은 결코 의지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억제제에 의존하는 것 아닌가. 아, 억제제. 약을, 오늘도 약을 먹었는데 어째서… 약이 왜 듣질 않는 거지.

도리 없이 아랫배가 떨리고 음부가 조여 드는 감각이 끔찍하다. 싫어. 못 견디고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였다.

“크윽.”

그녀보다 휴고의 거친 신음이 빨랐다.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남자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바지춤을 풀어 헤쳤다. 본래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젖은 속옷을 젖히자, 길게 수납되어 있던 성기가 튀어나왔다.

“놀라지, 흣, 마세요. 너무 아파서… 후… 윽!”

이렇게 커다란 남성기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올가를 놀라게 한 점은 또 있었다. 달콤한 페로몬 향기가 그의 국부에서 강렬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 올가.”

탄식과 같은 헐떡임 한 번이면 족했다.

억누른 신음과 함께, 차가운 공기 중에 노출된 휴고의 검붉은 성기가 점성 있는 액체를 뿜기 시작했다. 막힌 진흙이 밀려 나오듯 걸쭉한 정액이 올가의 배꼽 언저리에 뚝, 뚝 떨어졌다. 촛농처럼 뜨거운 밀액이 옷감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져 올가의 숨이 급해졌다.

“아, 하, 아아.”

정확히 십 년 만의 사출이었다.

뇌가 모조리 터져 나가는 기분이다. 짜릿하다 못해 죽음을 간접경험한 알파가 턱을 길게 젖혔다. 도드라진 목울대가 선명했다.

“불장난 같았던 그때와는 다르지 않나요.”

다시 고개를 내린 그가 이를 드러내고 미간을 찡그렸다.

불장난?

영문 모를 소리를 해석하던 올가의 녹갈색 눈동자가 어느 순간 크게 뜨였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동공에 언제였던가 고열에 들떠 휘청이던 소년의 모습이 겹쳤다.

“휴, 휴고.”

“예, 당신의 휴고입니다.”

미겔보다 그림자가 짙은 미소.

“당신이 버렸던, 그 어린 알파.”

허리를 낮춘 휴고가 경직되어 굳은 올가의 귓불을 아프게 깨물었다.

“한 번도 생각나지 않덥니까.”

책망하는 말투와 달리 다시금 입술을 핥는 혀는 부드러웠다.

“저는 당신뿐이었습니다. 내도록. 보세요, 제 정액 색이 증명하잖습니까.”

색사를 모르는 알파의 정액은 엷은 핏빛이 섞여 전반적으로 분홍색을 띠었다. 한 번이라도 질내 사정을 하게 되면 사라질 특징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거부하지 마십시오.”

아직까지도 질금질금 새는 귀두를 훔쳐 올가의 입술에 정액을 묻혔다. 이 역시 영역 표시가 습성인 까닭이다. 그 위로 입술을 묻은 그가 짤막하게 신음했다.

“……!”

먹먹하게 들리던 빗소리가 갑자기 고막으로 달려들었다. 쏴아아아아! 차가운 힐난처럼 느껴진다. 하여 휴고에게 깔린 올가는 그의 어깨를 마구 치대며 밀어내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어깨를 붙잡고는, 어느 순간부터 힘주어 그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본능에의 굴복이었다.

같은 순간. 그들을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아들과 어머니가 혀를 섞고 있다. 저택의 어느 방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이가 커튼을 치고 모습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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