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로에서의 조우
달콤한 향.
내게 다가오는 것을 알고
일찌감치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죠.
끝이었다.
스물여섯. 적갈색 곱슬머리를 가진 올가는 순식간에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체이스필드 변경백의 다섯 번째 첩 간택 자리에 머리를 들이밀었으나, 변경백은 인사를 건네는 올가를 단 1초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니 그 순간 그녀의 구질구질한 인생이 뎅겅 끝장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올가는 떨리는 손으로 샴페인 잔을 야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앞으로 어떡하지.
깜깜하게 물든 미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와 신실한 교인인 척 종교에 귀의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기부할 재산이 없는 노처녀를 받아 주는 수도원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폐급 오메가가 주제도 모르고…….”
“쉬잇, 듣겠어요.”
“들으라지 그래요. 한몫 잡을 생각에 눈 벌게진 얼뜨기들이 어디 한둘인가요. 저런 치들 때문에 우리까지 싸잡혀 욕먹는다고요. 몸을 팔고 싶으면 매음굴에나 가 볼 것이지, 어디 감히 후작 저에 더러운 발을 들인답니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태된 경쟁자에게 쏘아붙이는 영애들의 시선이 표독스러웠다. 고개 숙인 올가는 떨리는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뻔뻔하다고 해서 수치를 모르겠는가. 그러나 적나라한 모욕에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그녀들의 말이 옳았으니까.
올가는, 주제를 몰랐다.
이 세상의 인류는 모두 세 종류로 나뉘었다.
알파.
오메가.
베타.
알파는 초월자라 불리는 우월한 인종이다. 남성만 존재하는 이들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약육강식 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였다. 그리고 이러한 알파를 낳을 수 있는 각별한 여성을 오메가라 했다. 바로 알파를 품을 수 있는 특별한 자궁을 지닌 극소수의 여성들이었다.
평범한 베타와 달리 호르몬과 페로몬에 종속된 짐승들.
발정기와 짝짓기라는 독특한 생리 때문에 혹자는 이들 종족을 야만스럽다고 조롱했다.
하나 그렇다 할지라도 알파는 야만한 고등 종족임이 틀림없다. 월등하게 아름답고, 지능적으로 우월하며, 감히 대적할 엄두를 못 낼 만큼 신체 능력 또한 탁월한 신의 대리자. 그렇기에 알파 명문가의 번성은 곧 국력의 부강함을 뜻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모친 되는 오메가의 형편은 어떠한가.
알파는 반드시 알파와 오메가의 짝짓기로만 잉태한다. 오르칸 제국 내 알파는 모두 귀족이므로, 태어나는 알파 남아들은 예외 없이 귀한 핏줄을 타고났다.
그러나 오메가는 사정이 달랐다. 그녀들은 종종 베타 평민, 때로는 그보다 못한 천민 집안에서도 태어났다. 같은 오메가라 해도 태어나서부터 각자의 출발선이 다른 것이다.
신분의 고저 차이뿐일까. 오메가로서 타고나는 특질에도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었다. 알파를 유혹하는 페로몬 향이 그것이다. 페로몬에 둔감한 베타까지 홀릴 정도로 빼어난 외모와 고혹적인 향을 지닌 우성 오메가가 있는가 하면, 과연 오메가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무색무취한 열등한 오메가도 있는 법이다.
말해 무엇 할까.
올가가 바로 열성 중의 열성인 최악의 오메가였다.
짝짓기하지 못하는 오메가.
그녀는 알파의 발정기, ‘러트(Rut)’를 촉발하는 페로몬 향을 뿜지 못했다.
이는 후계자 알파를 임신할 가능성이 전무한 치명적 결함이었다. 그러니 내로라하는 우성 오메가를 제치고 하자품인 올가를 처로 맞아들일 귀족 알파가 있을 리가. 하물며 동북부의 변경백이자 영방 군주로 불리는 귀족 중의 대귀족, 체이스필드 후작가의 가주라면 더더욱.
알면서도 이 자리에 왔다.
아무리 부친의 불호령이 있었다 한들, ‘노쇠한 후작은 이미 장성한 자식들이 있으니 다른 후계자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미련한 희망을 품고 제 발로 야회에 참석한 건 올가 자신이었다. 그러니 주제를 모르는 얼뜨기라 욕먹어도 응당했다.
한몫 잡을 생각에 눈이 먼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의 아버지가 그러했지마는…….
베타 허드슨.
그는 부와 권력, 명성을 누리는 명문 알파 귀족에게 올가를 시집보내어 제2막 인생을 열고자 한평생을 탕진한 자였다.
‘나는 야망이 큰 사내다, 올가.’
아버지의 입버릇이었다. 그는 우성 알파와 오메가로만 이루어진 상류 사회에 열렬히 편입하고 싶어 했다. 그러니 마침내 그 편도행 티켓이 되어 줄 오메가 딸을 얻었을 때의 기대가 어땠으랴. 사창가 어미에게서 강제로 젖먹이를 빼앗아 달아난 그는 귀족 사위를 얻어 장인 노릇을 톡톡히 할 꿈에 부풀었다.
“정말로 오메가?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걸. 아무리 열성이라 해도…….”
“척하는 사기꾼일 수도 있죠. 이미 근처에 소문이 파다해요.”
제 딸이 제구실을 못하는 반병신 오메가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때까지 말이다.
허드슨은 개개인의 지문처럼 독특한 오메가의 향기를 맡지 못하는 베타였다. 때문에 딸에게 심각한 결함이 있는 줄 몰랐다. 무지한 채로 2차 성징이 시작된 올가를 선 시장에 내놓아 비싼 값에 팔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그녀를 품평한 모두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이런 형편없는 오메가는 알파를 배태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노라고.
올가는 무용지물이 된 자신을 노려보던 아버지의 눈빛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러잖아도 손속이 험하던 그가 악귀로 돌변한 순간을.
“…….”
흠칫. 쏜살처럼 날아오는 매질의 환영에 올가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는 눈물이 치민 눈두덩에 힘을 꽉 주고 울음을 참았다.
흐느낀다고 해서 동정을 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욱신거리는 등허리 살갗을 감내하며 치맛자락을 올려 잡았다. 퇴장해야 할 순간이었다.
남들처럼 어엿한 양산이나 모자 하나 갖출 여력이 없어, 올가의 붉은 머리가 정오의 땡볕에 오렌지빛으로 바랬다. 그녀는 차마 인파를 가르고 정문으로 향할 자신이 없어 뒤돌아섰다. 동그만 어깨 너머로, 노년의 체이스필드 후작과 그를 둘러싼 신부 후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실려 왔다.
신록의 계절을 축하하는 모임이라는 건 명목일 뿐이다. 단지 그것 때문에 영지 내 호적 등록된 모든 오메가 집안에 초대장을 보냈을 리가 있겠는가. 이는 얼마 전 네 번째 소실과 헤어진 후작이 그들 중 애인을 고르겠다는 퍽 귀족적인 암시였다.
지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올가 역시 아버지만큼이나 이 정실을 두지 않는 별난 귀족의 첩 자리가 간절했다. 기실 이미 글러 먹은 일이 되었지마는.
그녀는 바늘처럼 따가운 웃음소리를 등에 달고 조용히 인적 드문 미로 정원으로 향했다.
높다란 상록교목 벽을 세운 미로는 은밀한 잠행을 위한 귀족들의 개구멍이었다. 필시 뒷문이 있을 터였다. 이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 빠져나가야겠다. 그렇게 지옥으로 돌아가는 귀양길에 접어들었다.
“이제 완전히 오갈 데 없는 몸이 됐네.”
자조한 올가는,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온 저에게 사정없이 손을 추어올릴 아버지를 예상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옆 마을 망나니에게 팔아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나병에 걸려 코가 녹아내린 망나니는 감옥 사형수들을 처형하며 보수를 꽤 짭짤하게 모은 모양이었다. 며칠 전, 물을 긷던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흥정을 걸어왔을 적이었다. 제시한 신붓값에 놀란 아버지의 눈빛이 전에 없이 반짝였던 걸 보면.
“도망이나 갈까.”
어디로?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수차례 거절당한 처녀라 소문이 파다해, 이제는 뭇 베타 남성들도 올가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야유하거나 침을 뱉고는 했다. 그러니 결혼은 더 이상 올가의 도피처가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거리 생활을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메가 또한 알파처럼 짐승의 족속인지라, 그녀들 또한 주기적으로 광적인 발정기를 거쳤다. 이지를 잃고 오로지 성교만을 바라는 짐승으로 변모하는 시기 말이다. 이때의 오메가는 한밤중의 야광 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강간당하고 상해 입은 슬픈 꽃들의 종착역은 결국 사창가였다.
올가는 얼굴도, 이름도 모를 어머니를 상기하며 목덜미를 단단히 조여 맨 초커를 매만졌다.
이 목덜미의 초커를 영원히 벗지 못하게 될 테다. 그녀의 아비처럼 야욕에 젖은 남성들에게 환상을 팔고, 몸을 팔고, 종래엔 아이까지 팔게 될 게 뻔했다.
이러한 끔찍한 수렁에 굴러떨어지지 않으려면 단 두 가지 방법뿐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알파를 만나 뒷덜미를 물리거나.
또는 값비싼 발정기 억제제를 복용하거나.
은밀하고 육욕적인 러트에 돌입한 알파가 마찬가지로 절정의 페로몬을 뿜는 발정기, 히트(Heat)에 빠진 오메가와 정사를 나누는 도중 그녀의 목덜미를 무는 행위는 매우 각별했다.
흥분한 알파의 치아가 오메가의 목덜미 살갗을 찢고, 그의 타액이 그녀의 몸속에 스미는 순간.
그때부터 그들은 오직 서로에게만 종속된 한 쌍의 짝으로 재탄생했다.
이때 깨문 자국은 일평생 지워지지 않는 각별한 징표였다. 마치 언약의 맹세 때 나누는 반지처럼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짝짓기한 알파와 오메가는 오직 상대의 체향만 감지할 수 있게끔 성질이 완전히 변하고 만다. 따라서 페로몬 향에 의해 촉발되는 발정기도 오로지 서로에게만 예속되는 것이다. 비로소 인간다운 분별력을 갖추고 본능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셈이라 할 수 있었다.
로맨틱하지 않나.
그러나 한 명의 알파가 한 명의 오메가와 짝짓기하는 일은 그렇게 흔치 않았다.
통속 소설의 전개와 달리, 알파 귀족은 한 명의 여성에게 묶이는 것을 꺼리는 편이었다. 그들은 발정기를 겪되 결코 피해자로 전락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정실을 두되 여럿의 여성과 즐길 수 있는 삶을 원천 차단할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니 사랑으로 짝짓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정치적인 정략결혼에 의해 짝을 맺는 경우는 간혹 있었으며, 혹여나 발생할지 모르는 어린 알파의 치기와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미혼의 오메가는 예외 없이 특수한 초커를 착용해야 했다. 발정기를 악용한 오메가를 엄벌하는 건 물론이었다.
현실이 이렇게 냉혹하니 짝을 찾아 발정기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오메가는 드물었다. 때문에 대다수의 오메가는 분별없는 발정의 수렁을 피하고자 그들 전용의 특수한 환약을 복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값비싼 발정기 억제제였다. 그러니 올가더러 집안 말아먹은 배은망덕한 년이라 퍼붓는 아버지의 욕도 일견 일리가 있었다. 어찌 되었건 그가 구해다 주는 억제제 덕분에 이제껏 거리의 여자로 전락하지 않았으니까.
‘이날 이때껏, 도대체 뭘 위해서 널 키웠는지 아느냐! 최소한 약값이라도 갚을 도리도 모르는 년! 망할 년, 어디 참한 귀족 한 명 꼬드겨 정실 자리 꿰찰 주변머리도 없지. 그 펄펄한 몸뚱이 써먹을 생각을 왜 못 하느냐, 이 말이다!’
날아오는 매질 끝엔 쓴 약 뒤의 사탕처럼 포옹이 이어졌다.
‘이게 다 널 올바른 양갓집 부인으로 만들기 위한 훈육이란다. 내 마음을 이해해 다오, 올가. 이 세상은 온통 고통뿐이지. 보드라운 발로는 절대 헤쳐 나갈 수 없는 가시밭길이야. 그러니 내가 너에게 미리 굳은살을 만들어 주는 거란다! 두고 봐라. 이 아비에게 감사할 날이 올 테니. 아무렴 오고말고. 오, 내 사랑하는 딸, 올가……. 이 아비를 불쌍히 여겨 주려무나, 응?’
올가는 아버지가 제게 규수의 교양과 창부의 교태 중 어느 쪽을 바라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행여나 별 볼 일 없는 하급 귀족 알파에게 물릴까, 억센 벨벳 초커를 족쇄처럼 목에 달아 주고는 어째서 다리 벌려 그들을 유혹하기를 바라는 건지.
오메가의 삶은 이처럼 지나치게 모순적이었다.
세상의 희로애락을 가장 극렬하게 맛보는 자들이 아마 이들일 테다.
그들의 삶은 지옥부터 천국을 아울렀다. 성노예 천민부터 왕좌를 굽어보는 여왕의 자리까지. 태어나서부터 귀하게 자라 권력가의 귀부인이 되는 오메가가 있는가 하면, 발정하는 특성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많은 남성을 후리는 창부도 있었고, 못된 포주에게 붙잡혀 임신용 암탉으로 전락한 신세도 있었다.
양지에선 추앙받고 음지에선 멸시받는다.
그리고 올가는 비로소 오늘에서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양지로 나아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절절하게 깨달았다. 예순 먹은 늙으신네의 뒷방 자리마저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하나 그렇다고 음지로 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니, 죽자.
이제껏 모진 모멸과 매질을 감내하며 애썼던 지난날이 우습게도 자살 결심이 참 쉬웠다. 아니, 오히려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를 떨쳐 낸 양 가뿐하기까지 했다.
“이렇게나 쉬운 것을 오래도 망설였구나.”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신이 애처로워서 스스로를 사랑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고단한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던 올가의 기개도 한계에 달했음이다.
자박자박. 풋내 아릿한 잔디를 밟으며 붉은 머리의 처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눈물이 가신 녹갈색 눈동자가 개운하게 선명해졌다.
제법 걸었으니 이제 곧 미로의 출구가 나올 때도 되었다.
그러면 곧장 서쪽의 올센 항구로 달려가야겠다.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옷자락 구석구석 한가득 돌을 넣고 바다에 뛰어들 것이다. 아, 아예 다리에 바윗돌을 매다는 것도 좋을 듯했다.
“바위를 매달 밧줄은 근처 잡화점에서 외상으로……?”
심지어 미소까지 띠고서 자살 계획을 구상하던 때였다.
수벽(樹壁)의 모서리를 돌아가던 올가가 저도 모르게 놀라 새된 비명을 올렸다. 핏! 뜨거운 액체가 오른뺨에 튀었다. 갓 절명한 시체의 핏방울이었다.
“이런.”
곧바로 난감한 듯 혀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화려한 금발을 지닌 장신의 사내가 무릎 꿇은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의 발치엔 복면한 자가 대자로 뻗어 있었다. 사내는 쓰러진 자의 가슴팍에 꽂힌 장검을 단숨에 뽑아냈다.
“숙녀께 못 보일 꼴을 보여 드렸군요, 하하.”
핏방울이 실금처럼 흐르는 칼날을 옆으로 휘둘러 털어 낸다.
“놀라게 할 저의는 없었습니다.”
능청스럽게 웃는 남자의 금발이 꿀타래처럼 흘렀다. 올가를 맞닥뜨리고 크게 뜨였던 그의 사파이어색 청안이 가물어졌다.
마치 벽화를 찢고 현신한 천사 같다.
그러나 맹인과 젊은이를 돌보는 인자한 천사는 분명 아니었다. 그보다는, 화려한 이목구비와 간살스러운 미소 뒤에 음험한 계략을 감춘 타천사에 비견할 만했다.
“마치 눈물을 흘리시는 것 같군요.”
올가의 뺨에 가느다랗게 흐르는 핏방울을 주시하던 금발 사내의 입꼬리가 깊게 팼다. 긴장된 분위기를 더욱 조이는 미소였다.
저도 모르게 숨죽인 올가는 고혹적으로 웃고 있는 남자의 이면을 엿보았다. 노출된 살갗이 바싹 일어난 것은 갑작스러운 살인 현장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저자에게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자살을 결심한 타락자를 난도질하기 위해 사신이 강림한 걸까.
올가는 찰나간 그의 새빨간 입 안에서 와득와득 씹히는 제 영혼을 상상했다. 오싹한 전율이 등줄기를 내달린다. 섬뜩하면서도 고양되는 아주 묘한 기분이었다.
***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이래 봬도 제가 아무나 찔러 죽이는 살인자는 아닙니다.”
순간 ‘아무나 찔러 죽이는 살인자입니다.’라고 하는 줄 알았다. 당황한 올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 네.”
그렇다 해도 가차 없이 살생하는 미남자의 얼굴을 오래 마주하기는 힘들었다. 올가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이번엔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시체가 보였다. 그야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신중하게 살피기를 그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이자는 복면을 하고 허리에는 단도를 찼군요. 파티를 틈타 저택을 털러 온 강도 같네요. 몸싸움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범죄 행각을 적발한 후 자력구제 끝에 우발적으로 칼을 휘둘렀다고 해도 되겠어요.”
뒤이어 기민한 상황 판단이 이어졌다.
“정당방위로 인정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증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경비대에 신고하시겠어요?”
누가 봐도 기습당해 단명한 시체를 두고 태연하게 자력구제니, 정당방위니 지껄여 댄다. 금발 장신의 사내, 미겔 체이스필드는 수수한 차림의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천을 덧대 기운 드레스 자락을 뒤늦게 감추는 여자는 아첨이나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리고 태연한 게 아니라 태연한 척을 하고 있다. 희게 질리도록 맞잡은 두 손이 떨리는 걸 보면.
“그런 절차가 귀찮아서 남몰래 처리하려고 했던 겁니다.”
“아.”
“게다가 저희 저택에 코끼리만 한 금괴가 숨겨져 있다느니, 하는 허황한 소문을 듣고 털러 오는 놈들은 보통 밀항한 해적 끄나풀들입니다. 지하 감옥에 한두 놈 가둔다고 해서 눈 하나 깜짝 안 할 겁니다. 그보다는 잔인하게 도륙한 수급을 보란 듯이 던져 주는 편이 더 효과가 좋죠.”
미겔은 체구가 왜소한 여자의 목에 둘린 검은색 벨벳 초크에 시선을 고정하고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했다. 사실 태연한 척을 하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렬한 향기가 아찔하다.
여자의 목덜미에서 풍기는 꽃향기는 흡사 향로를 태우는 것처럼 무척이나 강했다. 코가 아리다 못해 마비될 지경이다. 비강을 통해 뇌까지 직결되는 냄새. 자극받은 뇌의 중추가 조여들어 미묘한 두통이 일었다.
발정기가 아닌데도 이 정도이니, 히트라도 닥친다면 말도 못 하게 짙은 향을 뿜을 게 뻔했다. 온 영지의 알파들이 전부 벌 떼처럼 달려들겠군. 금발의 미청년은 여인의 치마 속을 상상하며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실은, 올가가 미로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미겔은 그녀의 존재를 코를 찌르는 냄새로 알아차렸다. 우연히 맞닥뜨린 척 연기를 좀 했을 뿐. 돌발 상황에서 발가벗겨질 그녀의 본성을 기대했다.
“그렇다면 얼른 앞장서시죠, 귀공. 여기서 더 지체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번에도 올가는 그의 예상 밖의 행동을 선보였다.
서슴없이 다가와 도둑의 신발 쪽을 붙잡고 번쩍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그뿐 아니라 고갯짓으로 미겔에게 망자의 머리 쪽을 들어라, 지시하기까지 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나름대로 뒤처리하시려고 생각해 두신 장소가 있으시겠죠. 가요. 옛말에도 시체하고 금덩이는 빨리 숨길수록 좋다고 하잖아요.”
“무모하십니다. 그러다가 시체 유기 및 살인 공범으로 지명수배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
“나라 전역에 제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는 건가요? 나쁘지 않네요.”
‘팔리지 않는 폐급 오메가 여성, 처지를 비관해 자살하다’라는 머리기사보다는 훨씬 그럴싸하지 않은가.
악명을 떨치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거지. 낯선 남자를 돕겠노라 팔을 걷어붙인 건 지극한 충동을 따랐을 뿐이지만, 올가는 나름의 일탈 행위에 흡족했다. 어차피 죽으려는 마당 아니었나.
“황당하군요. 혹시 미쳤다는 소리 안 듣습니까?”
“예?”
“일단 그 다리부터 내려놓으시죠. 이봐요, 정신 나간 숙녀분. 존함이?”
“…….”
“저는 미겔이라고 합니다. 미겔 체이스필드. 콘라드 체이스필드 후작의 장남입니다. 첫인사를 드리기엔 상황이 약간 멋쩍습니다만. 여하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진저. 하여 당신의 존함이?”
아뿔싸.
이름을 물어 올 줄은 몰랐다. 불시의 통성명 요청에 그만 당황하여 가명을 댈 융통성을 발휘할 타이밍을 놓쳤다. 낭패를 느낀 올가의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사실 ‘우리 저택’이라 했을 때부터 이자의 정체를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체이스필드 변경백의 난봉꾼 아들, 미겔 체이스필드.
화려한 외모와 종잡을 수 없는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유흥가를 난잡하게 휘두르고 다닌다는 대륙 중부의 탕아.
어렸을 적에는 기숙 신학교에서 쫓겨나고, 장성하고 나서는 문란한 생활로 사관학교에서 쫓겨났다고 하던가. 간간이 황색신문 가십난에 실리고는 하는 사내였다. 머리는 놀랍도록 비상해 카드 패만 잡으면 백전백승이라고도 했다. 도박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풍문 또한 자자했다. 여하튼, 악명 높은 자였다.
“…한가하게 제 이름이나 물으시는 걸 보니, 귀공께서 혼자서도 거뜬히 하실 수 있는 일에 제가 괜히 끼어들었나 보군요.”
올가는 황급히 도둑의 다리를 떨궜다.
어차피 자신은 몇 시간 뒤면 바다의 거품으로 스러질 몸이었다. 굳이 통성명해서 그와 얽히고 싶지는 않았다. 짧은 촌극을 기념하여 악수나 한 번 하면 족하련만.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아!”
게다가 혹시나 모를 음란한 구설수가 염려되기도 했다. 지명수배가 낫지, 헤픈 계집이란 오욕은 질색이다. 난봉꾼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올가는 재빠르게 돌아섰다. 눈총 따갑고 민망해도 정문을 통해 나가야겠다,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어깨가 빠질 듯 뒤로 억세게 당겨졌다. 단숨에 붙들린 손목 통증에 비명이 터졌다.
“왜 이러십니까.”
나긋하게 회유하는 목소리. 갈퀴처럼 뻗어 나온 손아귀가 올가의 턱을 감쌌다.
“선뜻 범죄 행각에 공모해 주신다던 분이 섭섭하게요.”
“……!”
“저도 나름대로 구겼던 첫인상 복구하려고 꽤 정중하게 굴고 있는 겁니다, 레이디. 괜히 부추기지 말아 주시죠. 못되게 굴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착각일까. 뜨겁게 달아오른 귓불을 잘근 씹힌 듯 따끔했다.
껴안다시피 올가의 등 뒤에 바짝 붙은 남자가 낮게 속삭였다. 열기가 느껴지는 숨결이 귓가에 들러붙었다. 반사적으로 솜털이 바짝 섰다. 숨까지 막혀 와 올가는 가볍게 헐떡이고 말았다.
“세 번째 묻습니다. 초대장을 받았다는 시점에서 어차피 들통날 일 아닙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이름을 알려 줘요. 당신을 부르고 싶으니까.”
“오, 올가입니다. 귀공……!”
“올가.”
“예… 흐윽!”
“올가, 이렇게 어여쁜 이름을 꼭꼭 숨기시는 저의가 무엇일까. 누구에게만 남몰래 부르게 하려고요.”
등 뒤의 남자가 이를 세우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에 올가의 숨이 더욱더 가팔라졌다. 심장이 귓속으로 옮겨 가 뜨겁게 맥박 쳤다. 쿵, 쿵, 쿵……! 정신없이 뛰노는 고동이 포식자의 위험을 시끄럽게 경고했다.
꼼짝할 수가 없다.
네 쌍 눈 달린 거미의 쪼개진 이빨에 덥석 물린 것처럼 무력해졌다. 그 순간, 올가는 벼락처럼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들었던 우성 알파의 페로몬 샤워였다. 무조건적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초월자의 힘.
억제제를 복용한 열성 오메가까지도 대번에 굴종하게 만드는 강력함은 이 남자가 얼마나 뛰어난 알파인지 대변하는 증거였다.
중력에 짜부라져 온몸이 소실점으로 압축될 것만 같다. 올가는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식은땀을 비처럼 쏟기 시작했다. 뒤돌아선 그대로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 채였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요. 곧 돌아올 테니까.”
촉.
올가의 적갈색 올림머리에 가볍게 입 맞춘 미겔이 떨어졌다.
그 순간, 진공의 공간이 깨어지고 편한 호흡이 돌아왔다. 금발의 알파가 위압적인 페로몬을 거둔 것이다. 그제야 올가는 오랜 잠수 끝에 간신히 수면 위로 빠져나온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렸다. 가까스로 미로의 수벽에 기대설 수 있었다.
빈혈이 일어 시야가 뒤흔들리는 데다가 오금이 저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해서, 남자가 자리를 비운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착하게 기다렸군요.”
정신을 못 차리고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을 때였다. 어느새 돌아온 남자가 애완동물을 어르듯이 달짝지근한 칭찬을 건넸다.
기다린 게 아니라, 대기를 강요당한 거다.
올가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뱉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미겔은 예의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탐미주의자들이 찬양할 법한, 어딘가 퇴폐적인 미소다. 그러나 예의 바르게 웃는 얼굴은 밀랍 가면에 불과했으며, 정중함으로 위장한 푸른 눈동자는 싸늘하게 올가를 탐색하고 있었다.
눈빛에 의해 한 겹, 한 겹 벗겨지는 기분이 오싹하다. 본능적으로 불쾌해졌다. 올가의 어깨가 무의식적으로 바르르 떨렸다.
어쨌든 그녀의 도움이 필요 없던 건 맞았다. 혼자서도 거뜬하게 도둑을 짊어지고 성큼성큼 사라졌다가 단출한 빈손으로 돌아온 사내는 재킷을 벗은 홑겹 차림새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늘씬하고 호리호리한 인상은 그의 섬세한 이목구비에서 비롯된 착시 현상에 불과했다는 걸.
넓은 어깨에 꽉 끼는 셔츠하며, 단추를 서너 개 풀어 헤친 칼라 사이로 퍼런 핏줄이 돋은 단단한 목덜미와 승모근이 엿보였다. 눈이 부신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야만함을 지닌 사내다. 올가는 은연중에 생각했다.
“그러니까.”
신이 사랑한 짐승. 전형적인 우성 알파 미겔이 올가에게 서슴없이 다가왔다. 도대체 거리감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자였다.
“당신도 우리 아버지께 다리 벌리러 온 새어머니 후보군 중 한 명입니까? 이해가 안 되는군요. 얼굴이야 멀쩡하지만 족히 서른은 더 먹은 노친네 아닙니까. 시들어 빠진 좆대가리 보고 밑이 젖기는 할까요?”
함부로 지껄이는 입술은 단정했다.
“하기는. 발정 난 오메가가 그런 걸 따질 리는 없겠군요. 좆만 달렸다면 사람이든 개, 돼지든 가리지 않는다는데. 냄새나는 늙은 좆이 문제겠습니까.”
그러고는 떠보는 것이다.
이게 이자의 수법인 게 분명했다. 깍듯한 얼굴로 교란하여 독설과 음담패설을 서슴지 않는다. 과연 듣던 대로 성격이 몹시 더러운 자였다.
페로몬 샤워 짓거리만 해도 그렇잖은가. 초면의 상대에게 폭력적으로 위계 서열을 정립하여 강제로 무릎 꿇린 것과 다름없었다.
어째서 이다지도 무례한가. 무엇을 캐내고 싶어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의도적인 모욕인 줄 알면서도 올가는 남자의 무례한 발언에 발끈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귀밑머리를 건드리려는 손을 단호하게 쳐 냈다.
“오지랖 걱정은 그만두셔도 됩니다, 귀공.”
창부 취급에 아락바락 대들기를 기대하고 있나. 그렇다면 차라리 뻔뻔해지겠다.
“당신 아버지께서는 제 가랑이 사이에 한 치의 관심도 없으시니까요. 제가 발가벗고 한복판에 누워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하.”
“그러니 이만 길을 터 주시겠습니까. 여기는 이미 글렀으니, 한시바삐 돌아가서 다음 다리 벌릴 상대를 물색해야 해서요.”
수도의 제일가는 고급 창부, 코르티잔도 이렇게 노골적이진 않을 것이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수치스러운 오욕마저 저승길 선물로 안고 가겠다. 마음먹고 대놓고 몸 장사를 하겠노라, 선언한 올가는 이번에도 상대의 예상을 비껴 나갔다.
“아주 막 나가는군요.”
미겔은 그러한 올가를 간단하게 정의했다. 다소 의외로운 듯도 했다.
위압적인 알파의 페로몬 샤워를 직통으로 맞은 오메가는 보통 저항할 의지를 꺾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주제에 받아치는 기개를 잃지 않았다. 얄팍한 반항. 도도한 척, 싸구려인 척하고 있으나 그 등허리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을 게 틀림없다.
이렇게까지 저항하는 부류는 한정적인데.
잠시 침묵한 미겔이 올가 쪽으로 턱을 가까이 숙였다.
“보통은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나, 모든 걸 다 놓아 버린 사람이 이런 식으로 굴죠. 올가, 당신은 후자입니까?”
“……!”
감미로운 저음에 정곡을 찔린 올가의 뺨이 씰룩거렸다. 상처 입은 자존심이 엿보였다. 동시에 자포자기와 무력함의 냄새가 났다. 그에 가늘어진 미겔의 눈매에서 가식적인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이내 상체를 바로 세운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런, 제가 혹시 당신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눈치챈 걸까요. 하지만 이렇게 보내 드릴 수는 없군요. 인연도 인연이거니와, 몹시 어렵게 만난 사이 아닙니까.”
“예? 그게 무슨.”
“휴고!”
올가의 말을 자른 미겔이 짤막한 이름을 연호했다.
“휴고, 근처에 있는 거 안다. 낯가림 집어치우고 나와 봐.”
여전히 그녀의 앞을 빈틈없이 막아서고는 흐트러진 금발을 쓸어 넘긴다. 기척을 숨기고 있는 누군가를 불러내면서도 끈질긴 시선은 올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우리의 어머니가 되실 분이야. 인사드려야지.”
마치 신부를 소개하듯이 속삭이면서.
***
…쿵!
그때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높다란 수벽에서 거대한 까마귀 한 마리가 추락했다.
아니, 까마귀처럼 온통 검은색을 띤 남자였다. 등장할 때를 기다렸다는 듯 절도 있게 착지하였다가 일어선 사내는 정갈한 군복 차림이었다. 짙은 피부색에 흑단 같은 머리칼은 뒤를 바짝 쳤다.
“영애.”
이 모든 실랑이를 어디선가 보고 있었나. 민망하여 표정이 굳어진 올가를 향해 목례한다. 휴고 퍼스 체이스필드. 마찬가지로 이름은 알았다. 요약하자면, 모든 것이 손위 형제와 정반대인 자였다.
“뺨에…….”
일단 형과 달리 말수부터 적었다.
저음역대를 도맡는 현악기처럼 목소리가 중후해서, 상대적으로 미겔의 음성이 미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올가의 뺨에 굳어 가는 혈흔을 보고 강직한 미간을 찌푸린다. 황궁 기사단 출신답게 건네는 손수건에는 오르칸 제국의 상징인 가시덩굴 장미가 수놓여 있었다.
“이 미친 새끼가.”
가까이 다가오던 남자가 문득 멈추어 섰다. 손수건을 빌려 뒤늦게 뺨을 닦아 내는 올가에게서 미겔의 페로몬 향을 맡은 것이다. 형제의 무례를 알아차린 그가 무섭게 돌아섰다.
퍽! 가차 없는 주먹질은 한순간이었다. 동생의 주먹에 나가떨어져 수벽에까지 떠밀린 미겔 체이스필드가 킬킬거렸다.
“못 배운 자식, 상스럽게 주먹부터 휘두르기는.”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영애. 정신 나간 놈으로 유명한 건달입니다.”
“어머니가 놀라셨잖아. 눈 동그랗게 뜬 거 안 보여?”
“이쪽 피가 아직 덜…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대신 닦아 드려도.”
그야 당연히 다짜고짜 주먹질부터 선보인 형제 관계에 놀랐다. 각자 꿋꿋하게 제 할 말만 하는지라 정신 사납기도 했다.
“아, 가,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퍼스 경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퍼스 경.”
권하는 대로 불렀을 뿐인데도 목이 껄끄럽다. 미들 네임 ‘퍼스’는 인정받지 못한 서자의 총칭이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자. 출생의 업을 지고 있는 남자의 그림자가 올가에게 드리워졌다. 손수건을 돌려받은 휴고는 지극히 투박하나, 최대한 경건한 손길로 그녀의 뺨을 마저 닦아 냈다. 한데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깐다.
그렇게 감추어진 눈동자만이 낮과 밤처럼 다른 형제의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그러나 미겔보다 휴고의 청안이 좀 더 시리게 새파랬다. 동틀 녘 하늘에서 홀로 빛나는 천랑성(天狼星)이 연상되었다.
“아무 느낌도 들지 않으십니까?”
무슨 소리인지.
무심결에 휴고의 피하는 눈길을 좇던 올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령 운명이라든가.”
더더욱 미궁에 빠진다. 저렇게 묻는 맥락을 모르겠다. 물음표를 띄우는 올가의 표정에 미겔의 냉소가 더욱 비틀어졌다.
“어이, 휴고. 제대로 고른 게 맞아? 네 인생만 아깝게 망친 게 아니라?”
“닥쳐.”
“일방통행도 이 정도면 보기가 괴로울 지경인데.”
“닥치라고 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 이봐요, 어머니. 정말로 이 녀석에게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까?”
반복된 추궁에 올가는 자격지심을 느꼈다. 이런 치욕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였다. 소위 중매인이라는 이름의 품평가들이 비슷한 유의 질문으로 그녀가 얼마나 형편없는 오메가인지 낙인찍고는 했으니까.
“아무것도요.”
익숙한 대답은 짤막했다. 이번에는 올가가 휴고의 시선을 피했다.
외형적 특징만으로도 그가 알파임은 알겠으나, 단지 추측일 뿐이다. 그녀는 무취의 오메가일 뿐 아니라 알파의 기척을 감지하는 감각마저 둔했다. 미겔처럼 독보적인 우성 종족이 아니라면 그녀의 미발달된 본능은 코앞까지 다가온 알파마저 눈치챌 줄 몰랐다.
휴고의 경우가 그러했다. 알파이되 미겔처럼 뛰어난 우성은 아닌 듯했다. 그 어떤 위압감도, 머릿속이 혼탁해지는 향기도 감지할 수 없었으니까.
“부럽군요, 이 지독한 이리 누린내를 못 맡다니.”
이어진 미겔의 비아냥에, 어쩐지 실망한 기색을 비치던 흑색의 남자가 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미겔도 이번엔 호락호락하게 맞아 주지 않았다. 가볍게 고개를 꺾어 휴고의 주먹질을 회피한 그가 동생의 종아리 뒤쪽을 거세게 걷어찼다.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머니. 저희는 보기보다 꽤 친근한 사이니까요. 운명의 여자도 기꺼이 공유할 만큼.”
“귀공, 제발 그 망측한 소리 좀 그만하세요!”
그 와중에 참다못한 올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렇게 대화가 단절되었을까, 어느샌가 휴고와 나란히 선 미겔이 은근하게 조소했다.
“무슨 내용이 그렇게 거슬리셨습니까. 한 여자를 침대에 들여 나누어 즐긴다는 게?”
그쯤이야 귀족의 각양각색 유흥 중에서도 대수로운 것 없는 오락이다. 올가는 온실 화초처럼 자란 진짜 영애가 아니었으므로 그런 싱거운 패담에 발작한 게 아니었다.
“아니면, 어머니라 부르는 게 싫으셨습니까.”
“영애도, 어머니도 아닙니다. 그만 놀리세요! 비참한 신세라고 해서 장난감 역할까지 도맡은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예순 넘은 노인에게 몸 팔러 왔다가 그마저도 좌절된 처지를 자꾸만 찔러 대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화를 내는 올가 자신도 놀라웠다. 짓밟힐 자존심이 아직 남아 있었다니.
“제가 주제넘었던 건 만족하실 만큼 충분히 조롱하신 것 같네요.”
토막 난 지렁이도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 꿈틀거린다지 않나. 단전에서부터 투지가 샘솟는다. 시큰거리는 눈두덩에 힘을 준 올가가 제법 위협적으로 알파 형제에게 대거리했다.
“비키세요.”
미겔과 휴고 모두 그녀의 녹갈색 눈동자에서 단호한 의지를 읽었다.
“계속해서 괴롭히신다면 이 자리에서 시체 한 구를 더 치우시게 될 겁니다.”
어디 바다에 뛰어드는 것만 자살 방법이던가.
강단만 있다면 당장 혀를 끊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러지 아니한 건, 단지 타인에게 귀찮은 뒷갈망을 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글프게도 이것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협박거리였다.
“…결코 그대를 놀리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영애.”
그러자 입이 비뚤어진 형을 대신해 휴고가 사과를 건네 왔다.
정직을 명예로 삼는 기사답게 진정성이 느껴진다. 그에 올가의 들끓는 화가 다소 누그러지려는데, 이번에도 미겔이 초를 쳤다.
“그래서 보내 드리면요. 어차피 죽을 작정 아니셨습니까?”
“……!”
“하, 버릴 목숨으로 유세가 대단하십니다. 그럴 바엔 남아서 어머니가 되어 달라 구걸했을 뿐인데요. 마음 상하셨다면 용서를 빌겠습니다. 어미 없이 함부로 자란 놈의 행패였다고 한번 깔보고 노여움 푸세요.”
휴고의 옆에서, 정원사의 가위를 면하고 웃자란 바닥의 잡초를 쏘아보던 금발의 미남자가 올가를 곁눈질했다. 길게 뻗친 속눈썹 아래 차갑게 가라앉은 청안이 번들거렸다.
“설마 체이스필드 후작 부인이 될 기회를 이렇게 걷어차실 건 아니겠죠.”
어쩐지 기이한 열망이 느껴진다.
체이스필드가의 장남뿐 아니라 서자 또한 비슷한 낌새였다. 보이지 않는 연기가 스멀스멀 발목을 휘감는 듯 등솔기가 쭈뼛해졌다. 올가는 마른침을 삼키고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파삭. 마름병에 좀 먹은 나뭇가지가 구두 굽에 분질러졌다.
“안 돼요.”
“싫으신 게 아니라?”
“저는, 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입니다.”
“정확히는 알파를 낳지 못하는 거겠죠. 열성 오메가라서.”
“그래요. 잘 아시면서…….”
마치 그들 사이에 가느다랗지만 깎아지른 균열이 나 있는 것만 같다. 한 끗이라도 발을 헛디뎠다간 구역질 나는 음모의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질 게 분명했다. 긴장한 올가의 뒤로 파삭, 또 다른 나뭇가지가 으깨졌다.
“그렇다고 해서 쾌락을 모를 몸뚱이던가요.”
겹겹이 싸맨 비밀을 들춰 보는 푸른 눈동자에 동류를 흘기는 야유가 뱄다.
“만에 하나의 우연, 아니 기적이라는 것도 있을 테고.”
“예?”
“지레짐작하지 말고 덤벼 보시란 말씀입니다. 도와 드릴 테니까. 실은 올가 당신이야말로 우리가 찾던 이상적인 어머니시라서요.”
“그게 무슨.”
“앞선 네 명의 측실을 쫓아낸 건 저희 짓입니다.”
보다 중후한 저음이 미겔의 말을 이어받았다. 강직과 고결을 사람의 형태로 빚은 듯, 교본에 실려 마땅한 기사 휴고였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서약을 하고서는 하나같이 후계를 보기 위해 용을 쓰더군요.”
그러나 털어놓는 실상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세속적이다. 아. 그제야 올가는 이들 형제가 이렇게나 간절히 자신을 원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석녀(石女)를 찾으시는군요.”
“영애처럼 영리하고 곧으신 분이라면 더욱이.”
형제의 아버지, 그러니까 이곳 연방 체이스필드를 다스리는 변경백 콘라드 체이스필드 후작은 별난 남자였다. 그는 일생 결혼하지 않고 밖에서 모친 미상의 아들만 둘을 얻었는데, 일족의 반대로 장남만이 인지(認知)를 얻은 정식 서자가 되었고 차남은 끝내 인정받지 못한 퍼스 경이 되었다.
다른 게 아니다. 뛰어난 오메가 처자들이 콘라드의 첩실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데는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둔 모종의 치밀한 계산속이 있는 것이다.
무릇 서자는 모친의 신분으로 위계 서열을 따진다. 다시 말해서, 신원이 확실한 그녀들이 새로운 알파를 낳는다면 이미 장성한 모친 미상의 형제를 제치고 후작가를 날로 먹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빌미 삼아 정혼을 요구할 수도 있을 터였다.
이러니 서약서가 대수일까. 눈에 불을 켜고 임신을 바랄 만한 먹음직스러운 과실이 코앞에서 대롱거리는데.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아버지의 바람기를 절제할 방법이 없으니 본인의 안위 보존을 위하여 차선책을 구하시겠다. 즉, 정식 후계를 생산할 능력이 없는 자신을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첩 자리에 앉힐 심산인 거다.
올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등을 가져가 입 맞추는 기사를 보고 맥이 탁 풀렸다.
헤아릴 수 없어 겁먹었던 그들의 속내가 이처럼 얕은 개울이었다니. 뻔한 속사정이 친근하기까지 하다. 긴장이 완화되자마자 당기는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고 말았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경계의 선을 넘어서고 말았다.
“…죄송하지만 아무리 이러셔도 안 될 일입니다. 무엇보다 후작 본인께서 제게 일말의 관심도 없으시니까요. 귀공들께서 힘써 주신다고 해도.”
“누더기 드레스 입고 외출하는 거, 지겹지 않으십니까?”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버텨 볼 때였다. 절도 있게 한쪽 무릎을 꿇은 휴고보다 가까이 다가온 미겔이 올가의 허름한 드레스 자락을 대놓고 지적해 그녀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장날 암소처럼 결혼 시장에 팔려 나오는 처지는요. 지긋지긋할 텐데요.”
“…….”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질 일입니다. 맹세합니다. 반드시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귀부인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레이디.”
마침내 오만한 미겔 체이스필드까지 천천히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야말로 숨 막히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감히 어울릴 수 없는 신분의 알파들이 동시에 청혼하는 것만 같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올가는 주책없이 떨리는 가슴을 꼬집고만 싶어졌다.
이들은 쓸모 있는 자신을 아버지의 여자로 추대할 뿐이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그러나 수없이 되뇌어 봐도 퇴폐적인 미남자와 정숙한 기사의 내민 손에서 미련을 떨칠 수가 없다. 그들이 제안하는 미래가 너무나 달콤했기에.
아버지. 베타보다 못한 열성 체질. 나병 걸린 망나니. 얼굴도 모르는 사창가의 어머니.
달아나고 싶은 온갖 굴레 끝에 자그마한 빛이 비치는 듯하다. 올가는 흡사 불가사의한 마술에 걸린 듯 몽롱해졌다.
그리하여 저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며 그들을 향해 끝내 잘게 떨리는 손을 뻗고야 말았다.
“저희 손을 잡아 주신다면.”
그 작은 손을, 집요하게 노리던 먹잇감처럼 낚아챈 미겔이 교활하게 웃는다.
“물론 평탄하기만 하겠습니까. 하지만 끝까지 믿어 주신다면.”
‘차갑네요.’ 얼음장 같은 올가의 손가락을 마찰하여 데운 미겔이 가만히 자신의 뺨을 가져다 댔다. 온순한 척 가증 떠는 짐승이 따로 없었음이다.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모든 다복과 부, 지고의 권력을 안겨 드릴 당신만의 남자가 되겠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저희처럼 열렬한 효자를 찾아볼 수 없을 테니 아마 여신 셰라마저 시기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께 다리 벌리되 알파만 배지 말라.
불경한 입발림으로 섬뜩한 경고를 한 미겔이, 올가의 중지 손톱에 가볍게 입 맞추고 침묵으로 동조하고 있던 동생에게 고갯짓했다.
“꺄악!”
그와 거의 동시에 치마째로 올가의 오금이 접혔다.
그렇게 그녀를 깃털처럼 번쩍 안아 든 기사가 절도 있는 걸음으로 수벽 미로를 역주행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접촉과 이동에 놀라 외마디 비명을 토한 올가의 붉은 머리칼이 퍼스 경의 널따란 등허리로 쏟아졌다.
황급히 붙잡은 어깨는 검은 암석처럼 단단했다. 왜일까. 예전에도 이렇게 어깨에 둘러메어진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기시감을 되짚어 볼 시간은 극히 짧았다. 다시금 야회의 웃음소리가 바싹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쩌실 작정인가요. 설마 후작님 앞에 저를 패대기치실 건 아니겠죠! 그런 창피를 당할 바에는 차라리……!”
“저런,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우리의 언약에는 당신의 주저함만이 유일한 장애였을 뿐인데.”
마침내 야회까지 뒤따라온 미겔의 얼굴이 뒤집혀 보인다. 빙긋이 입꼬리를 휘어 올린 그가 근처의 숙녀 한 명을 가볍게 밀쳐 내고 그녀가 앉아 있던 고급 의자를 빼앗았다. 갈라지는 물살처럼 인파가 흩어지고, 산만한 웅성거림과 따가운 눈총이 휴고의 어깨에 매달린 올가에게 일시에 화살처럼 꽂혔다.
맙소사, 수치심에 목 졸려 질식할 것만 같다.
빌어먹을. 괜한 꼬드김에 넘어갔어! 이 악문 올가가 작은 주먹으로 휴고의 단단한 등을 마구 때렸을 때였다. 이를 수신호로 받아들였을까. 또 한 번 세상이 뒤집혔다. 현기증에 넘어지는 몸을 미겔이 날쌔게 내려놓은 의자에 자연스럽게 받아 앉혔다.
“아버지.”
어느새 콘라드 체이스필드 후작과 그를 둘러싼 꽃들 앞이었다.
뺨이 붉어져 숨을 몰아쉬는 올가의 뒤에서, 등받이에 팔을 걸친 미겔이 미끄러운 미소를 걸쳤다. 그처럼 미혹적인 알파 때문에 만발했던 오메가 꽃들이 모조리 숨죽이고 만다.
“드디어 우리 형제의 어머니가 되실 분을 찾았습니다.”
강건한 체격의 휴고가 마저 다가와 수호 석상처럼 올가의 곁에 섰다. 그러자 발끈하여 모욕적인 언사를 뱉고자 했던 영애 한 명이 그만 입을 다물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아하, 그런가. 그래서 이 여자를?”
“예.”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로군.”
그들 앞에 긴 다리를 꼬고 앉은 변경백 콘라드 후작은 장자에게 물려준 금발과 차자에게 물려준 체격을 갖춘 고압적인 사내였다. 미겔과 휴고, 그리고 처음으로 올가를 제대로 마주한 그가 귀족 특유의 비릿한 냉소를 띠었다. 이 역시 장남 미겔과 닮은 표정이다.
“그럼요. 누구의 자식인데요.”
“하, 역시 핏줄은 속이지 못하는 법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피는 시선에 올가의 얼굴이 더욱 낭패로 붉어졌다.
강제로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는 미겔의 손이 아니었더라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갔을 것이다. 특권층의 후작과 정면으로 대면하고 나서야 올가는 비로소 일개 평민인 자신이 얼마나 격 떨어지는 처녀인지 절절히 실감했다. 서른 넘는 나이 차라든가, 밥 먹듯 갈아 치우는 첩 자리라든가 하는 결점들은 티끌만큼도 그녀에게 유리한 조건이 아니었음이다.
후작. 왕가의 곁붙이. 자신은 도대체 어떤 자리를 감히 넘보았던 건가.
제아무리 아들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해 준다 해도 턱없이 부족할 게 틀림없었다. 완전한 패배를 절감한 올가는 갑작스럽게 난입하여 야회의 분위기를 망치고 폐를 끼친 데 대해 후작께 사과하려고 했다. 그러나 졸아붙은 혀가 도무지 움직이질 않는다.
맞은편 콘라드는 붕어처럼 뻐끔거리려 애쓰는 처녀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았다.
고유한 향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여인은 이십 대 중후반쯤 되었다.
단정한 이목구비는 독보적인 미인으로 꼽기엔 부족했으나, 약간의 색조를 더하면 금방이라도 요염한 미색으로 탈바꿈할 듯했다. 평민다운 찌든 생활감과 염증, 그러나 사교와 궁정 생활로 부패하지 않은 순수가 엿보이기도 했다.
그래, 저 여자란 말이지.
샴페인 한 모금으로 입가심한 콘라드 체이스필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형제를 제외한 모두를 놀라게 한 수락이었다.
그의 주변에 모인 오메가들의 턱이 쩍 벌어졌다. 은근한 교태와 언어유희, 가문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 발탁하는 신부라니! 경우에 맞지 않는 지나친 파격 아닌가.
“조만간 그대의 집으로 화환과 마차를 보내도록 하지.”
이름도 묻지 않은 신부는 미겔의 페로몬과 그에 질세라 범벅 된 휴고의 페로몬 향이 뒤섞여 오히려 누구의 흔적인지 혼란스러운 알파의 냄새로 흠뻑 적셔진 상태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저리 순진한 낯을 하고 있으니, 조만간 전무후무한 불여우 오메가가 그 문란함으로 체이스필드 후작을 사로잡았다는 구설이 나돌 게 뻔했다.
그렇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미겔과 휴고. 자신들이 직접 고른 여인이 어떤 추문에 휩싸일지 뻔히 알면서도 방관하는 모략가들. 참으로, 피는 못 속이는 법이지. 올가의 곁에 선 낮밤처럼 다른 형제의 사파이어 청안을 바라본 콘라드는 매우 흡족하여 일어나 샴페인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나의 새로운 신부를 위하여.”
아니,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의 축배는 황망하여 얼이 빠진 신부를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은밀한 기쁨에 이를 드러내 웃는 후작의 얼굴에 더없는 환희와 해방감이 번진다. 몹시 즐거워하는 변경백의 기색에 마지못해 야회의 참석객들이 모두 따라 잔을 높이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체이스필드 영지 외곽, 빈민가에 걸쳐 다 무너져 가는 허드슨의 주택 앞에 기름진 여덟 필의 흑마가 이끄는 거대한 떡갈나무 마차가 당도했다.
새 신부를 맞이하기엔 지나치게 불길한, 칠흑처럼 새카만 장의 마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