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20)

내 쪽을 향해 걸어오는 위태로운 걸음걸이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가 그렇게 하이힐 신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저건 한 번을 안 듣네.

고작 10m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힘겹게 걸어온 녀석이 갑자기 턱 끝을 추켜올린다.

“축하한다. 그대는 선택받았다!”

“…….”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얘는 대체 왜 여기에 있고, 또 무슨 놀이에 심취해 있는 건지.

“내 친히 네게 우리 길드에 가입할 자격을 허가하노니, 너는 곧장 머리를 조아려 공손히 받도록 하여라!”

되도 않는 헛소리를 하며 당당하게 내밀어진 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얇은 종이 한 장이 껴있다.

무엇인가 살펴보니 명함이다.

다른 건 모르겠고, 정시아라는 이름 석 자 앞에 붙어 있는 직함이 내 눈을 의심케 했다.

“스카우터 정시아…?”

대체 어떤 새끼가 얘한테 스카우터 자리 내줬냐….

길드 꼴 정말 잘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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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세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는 핑계로 시아를 집으로 데려왔다.

언제까지 길목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카페에 가자니 녀석이 워낙 유명 인사라.

“제법 정겨운 방이로구나.”

누추한 방 안을 둘러보는 시아의 눈빛에는 일말의 아련함이 깃들어 있었다.

예쁘장하고 고귀한 생김새나 옷차림만 보면 태생이 공주 같아 보이는 시아는 사실 진흙 속에서 피어난 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보다 훨씬 열악한 방에서 힘겹게 살다가 사람답게 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내 방이 무척 정겨운 모양이다.

종이컵에 커피 믹스 하나와 뜨거운 물을 넣어 녀석에게 건네주었다.

“커피 드세요.”

“음, 이 냄새는 화이트 모카 골드로군.”

“잘 아시네요.”

“후후, 본 공주에게 이런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니라.”

저거 거짓말이다.

그냥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가 화이트 모카 골드라 그런 거면서 무슨.

후릅.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 한 모금 마신 시아가 엄지를 치켜세운다.

“너는 커피 물 조절의 장인이로구나! 지금껏 내 마음에 쏙 드는 커피를 타오는 녀석은 단 한 사람뿐이었는데, 너는 그에 필적하는구나.”

그게 바로 나다.

하도 뺀질나게 길드장실 문을 두드려서 커피 좀 타주다 보니 그렇게 됐다.

어느새 보니까 나도 녀석이 좋아하는 양으로 커피를 즐기고 있더라.

“음, 좋구나. 좋아!”

고작 커피 한 잔에 해맑게 웃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가난을 딛고 부유한 삶을 살게 되었어도, 얘는 참 변하지 않는다.

믹스 커피 한 잔에 더없이 행복해하고, 스테이크보다 돈까스 한 장에 더 열광한다.

그 모습이 정겨워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뒤늦게 해선 안 되는 행동임을 깨닫고 아차 하는 순간, 녀석의 기세가 돌변했다.

“배짱도 좋구나. 감히 허락도 없이 내 머리를 만지다니.”

“아, 그게.”

평소보다 낮아진 음성이 녀석의 감정을 대변한다.

생각해 보니까 얘 머리를 만지는 게 허락된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러니까 이 몸뚱어리 말고, 손시우 말이다.

손시우가 아닌 지금의 나는 녀석에게 있어 한없이 먼 타인.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원래 같았으면 벌을 내렸어야 마땅하겠으나…, 커피 물 조절을 잘한 공로를 인정하여 한 번만 봐줄 테니, 다시는 그러지 말도록 해라.”

“예, 감사합니다.”

커피 덕분에 목숨 하나 벌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구나.”

갑자기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선글라스 너머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한다.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이…, 더없이 익숙하더란 말이지.”

심장이 조여온다.

“네놈, 혹시….”

혹시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건 아니겠지.

“여동생이 있는 게로구나!”

“…….”

어휴, 저 똥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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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좁은 방에서 여동생과 둘이서 살다니…,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겠구나!”

안쓰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정시아.

자기 멋대로 단정 짓고, 상상하는 버릇은 여전하구먼.

하긴…, 여전하다고 말하기에도 좀 이상하지.

고작해야 몇 개월 지났을 뿐인데, 사람이 확 바뀔 리가 있나.

이 이상 멋대로 상상하다간 없던 여동생이 진짜가 될 것 같으니, 이쯤 해서 끊어내자.

“저 여동생 없는데요.”

“뭐, 뭣…! 내 추측이 틀렸단 말이냐…?”

“예, 완전히.”

“그, 그렇구나….”

고작 추측 하나 틀렸을 뿐인데 전재산이라도 잃은 것처럼 금세 시무룩해지는 시아.

녀석을 가장 많이 겪어온 나는 금세 기운을 차리게 할 방법을 알고 있다.

“커피 한 잔 더 타드릴까요?”

“오오, 그래주겠느냐!”

이거 봐라, 이거.

자기 좋아하는 거 하나 던져주면 금세 또 기운이 살아나요.

아직 채 식지 않은 물을 조금 더 끓여 믹스 커피 한 잔을 더 타서 주었다.

그랬더니 또 금세 싱글벙글 웃으면서 커피를 호로록 마셔댄다.

이대로 가다간 끝이 안 날 것 같아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여기 오신 이유가…, 저를 길드로 영입하기 위해서인 거죠?”

“음, 그렇다. 길드 내의 스카우터들이 전부 입을 모아 너를 영입 1순위로 둬야 한다고 말하더구나.”

“아, 그래요.”

그것 참 이상하네.

스카우터들이 영입 1순위로 올리는 거야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한데, 짭시우가 그걸 허락했을 리가 없는데.

놈은 나와 마주하는 걸 굉장히 꺼려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래서 물었다.

“그…, 길드장님도 저를 영입하고 싶으시대요?”

그러자 녀석이 답하길.

“모른다!”

“…….”

모르는데 왜 이렇게 당당해, 이거.

“…보통 길드에서 영입을 하려면 길드장의 승인이 떨어져야 가능한 거 아닌가요?”

말을 덧붙이자, 녀석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길드장이 자리를 비운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길드장이 자리를 비워요?”

짭시우 이 새끼, 안식년이니 뭐니 하면서 핑계 대더니 설마 길드 운영에까지 손을 뗐나?

그러는 사이, 시아가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래! 그럴싸하게 생긴 가짜를 그 자리에 앉혀두고 길드장이 사라졌단 말이다!”

“엑.”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가짜…라고요?”

“그래, 가짜! 아주 그럴싸하여 다른 사람들은 전부 속고 있는 듯하다만, 이 몸까지 속이지는 못하였느니라!”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다.

시아가 지금의 손시우가 가짜라는 걸 정말로 눈치챈 듯하다.

아니, 근데 어떻게?

“가짜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척 보면 척이니라!”

…거짓말 같은데.

“진짜로요?”

“어허, 진짜래도. 본 공주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믿어야죠, 예.”

거짓말인 것 같기는 한데, 저렇게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면 더 묻기 힘들다.

여기서 더 추궁했다간 녀석이 토라질 수도 있거든.

“아무튼! 길드장은 본 공주를 매우 아낀다. 본 공주가 너를 천거했다고 하면 별문제 없을 테니 걱정 말거라.”

으음.

내가 시아를 많이 아낀 건 사실이다.

어려서 이런저런 일 겪으며 힘들게 큰 녀석이 안쓰럽기도 했고, 하는 행동이 워낙 어리다 보니 얘랑 있으면 꼭 둘째 딸이 생긴 것만 같아서 흐뭇하기도 했거든.

근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죄송하지만, 전 아직 길드에 가입할 생각이 없어요.”

“뭣…!”

내 말을 들은 녀석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아무래도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

“이, 이유가 무엇이냐!”

“어…, 딱히 이유는 없는데, 굳이 말하자면 아직 어딘가에 소속되기 싫다는 거?”

그마저도 쥐어 짜내서 만든 변명 아닌 변명이다.

진짜 이유를 입밖으로 꺼냈다간 그대로 목숨을 잃고 말 테니까.

“고, 고작 그런 이유로 본 공주의 선택을 물리려 하다니…!”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아.

“내 이 치욕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제법 당차게 말은 하는데, 얼굴은 하염없이 울상이 되어선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기세다.

저거 보니까 또 괜히 마음 약해지네.

그래도 아직은 어쩔 수 없다.

발설 금지 조항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상, 그 무엇도 꺼내 놓을 수 없으니.

“어, 언제고 이 결정을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서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한 방에 입에 때려 넣는다.

빵빵해진 볼을 우물거리며 등을 돌리는 시아.

현관으로 쿵쿵거리며 걸어 나가는데, 그 속도가 영 시원치 않다.

자기가 나가기 전에 붙잡아주길 바라는 눈치다.

“저기, 공주님?”

부르기가 무섭게 뒤를 돌아본다.

“마음이 바뀐 것이냐?!”

“아뇨. 그건 아니고요.”

“이이…! 그럼 무엇이냐!”

“길드장님이 가짜라는 얘기, 다른 사람한테는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이거 떠벌리고 다녔다간 여러모로 골치 아파질 수도 있다.

애가 워낙 어려 보이고 컨셉이 특이해서 믿는 사람이 별로 없기는 하겠다만…, 말이라는 게 언제 또 신빙성을 얻어 불거질지 모르는 거라.

내 말에 녀석이 더욱 볼을 부풀렸다.

“너는 본 공주가 바보로 보이느냐?! 그런 말을 아무에게나 해선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

그리도 잘 아는 애가 왜 나한테는 다 얘기한 거래.

“…그럼 저한테는 왜?”

궁금해서 물으니, 녀석이 고개를 젓는다.

“넌…, 뭔가 다르다. 아까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그렇고, 커피 물이 내 취향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도 그렇고…, 꼭 처음 본 낯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

어쩌면 녀석이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나를 알아보고 있기라도 한 걸까.

“네놈이나 조심하거라. 내가 한 얘기를 남에게 잘못 떠벌리는 순간, 본 공주가 친히 너를 벌할 것인즉!”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예, 조심할게요.”

그러자 녀석이 조금 전까지 당당한 태도 대신 쭈뼛거리는 모습으로 말을 잇는다.

“그리고, 그…, 가끔 커피를 마시러 오고 싶다만.”

얘 혹시 짭시우가 커피 안 타 줘서 가짜라고 확신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 * *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것 또는 사람과 맞닥뜨리게 되는 그런 때.

그저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모를 정도로 절묘하고 또 신묘한 순간.

김도진에게는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평소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깨는 단단한 돌 하나가 날아드는 그런 날.

지루한 수업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헌터들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헌터사’ 시간.

자장가에 가까운 노교수의 느긋한 음성으로부터 잠을 일깨워준 것은 다름 아닌 뒷좌석에 앉은 두 학생의 대화였다.

“야, 너 그거 아냐?”

“그게 뭔데.”

“우리 대학교 학생 중에 야노녀가 있대.”

“야노녀? 그게 뭔데.”

“병신아, 그것도 모르냐? 야외 노출하는 여자!”

“…한국대 다니는 여자애 중에 그런 여자가 있다고?”

“어, SNS 뒷계정으로 야노 사진 올리는 여자애가 있는데, 사진 찍은 곳 중에 우리 학교 화장실이랑 강의실도 있었다더라.”

“미친.”

그들의 대화는 김도진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국 대학교 학생이면 일단 기본적으로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수재들.

그런 수재들 중에 야외 노출을 즐기는 변태가 있다니, 재밌지 않은가.

‘야외 노출이라….’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하는지, 또 왜 그걸 SNS에 올려서 남들에게 보이는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지만, 그만큼 궁금했다.

그런 걸 하는 여자는 어떤 생김새를 하고 있을까.

흉악한 연쇄 살인마들의 실제로 보게 되면 정말 그런 짓을 할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범하고, 순하게 생겼듯이 야노녀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가끔 한 번씩 순찰이나 돌아볼까…?’

덧없는 생각을 이어가며 두 시간 내내 이어진 노교수의 수면 공격을 버티는 데에 성공하고, 조원들과 모여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소화도 시킬 겸 다음 수업이 시작되는 마법학과 강의동까지 천천히 걸어가고 있을 때, 문제의 순간은 다가왔다.

“학생! 미안한데 잠깐 길 좀 물어도 될까?”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음성.

걸어가는 길에 자신밖에 없음을 확인한 김도진은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어디 찾아가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어오고 있는 여인을 본 순간, 김도진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 여인이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이었기에.

날렵한 눈매를 지녔지만, 그 눈빛이 한 번도 따사롭지 않은 적이 없었던 온화한 눈동자.

피부가 조금 까무잡잡하게 변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6년 전 그대로였다.

“혹시 의무실 건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그녀의 물음에 김도진은 허둥대다가 가까스로 의무실 건물이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건물이 눈에 보여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꼴사나운 모습만 보이다가 끝나버릴 뻔했다.

“고마워, 학생! 나 다음 주부터 의무실에서 근무하게 된 치유사야! 혹시 헌터 지망생이니?”

“어…, 네.”

“혹시 다치면 나한테 찾아와! 다른 학생들보다 더 정성스럽게 치유해줄게.”

“감사합니다…?”

“호호! 귀여워라. 그럼 다음에 보자?”

시종일관 명랑한 분위기로 손을 흔들며 멀어져가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는 김도진.

이내 그의 머릿속에 거대한 혼란이 찾아왔다.

“대체 주연이가 왜…?”

한주연.

6년 전에 미국으로 떠난 처제가 돌아왔다.

그것도 자신이 다니는 한국 대학교 의무실의 치유사로.

미국 대형 길드에게서 거액의 오퍼까지 받을 정도로 능력 좋은 아이가 대체 왜 이곳에서 근무하게 됐는지.

김도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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