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120)

“그래, 그럴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녀가 자아내는 명랑함에 짭시우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사람 한 명 있고, 없고가 이렇게 차이 나다니.’

지금까지 딱 한 번.

짭시우는 한주희, 손서연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30여 분가량 이어진 식사 시간 동안 몇 번의 대화가 오갔는지 아는가?

딱 한 번이었다.

의미는 정확히 모르지만, 내용은 기억난다.

이제 고집 꺾고 돌아오라는 한주희의 말에 그럴 생각 없다며 받아쳤던가.

그 이후로 두 사람 모두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식사를 끝마치고 휙 가버리더라.

그랬던 두 사람이 한주연의 질문에 이끌려 벌써 몇 번이나 말을 했는지.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덕분에 그는 처음으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한 시간에 걸친 식사가 끝나고, 손서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앙, 조금만 더 있다 가지이!”

“죄송해요. 곧 시험이라….”

“아,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공부 열심히 해, 우리 조카!”

“네.”

자리에 남은 세 사람은 가볍게 차려진 안주에 와인을 한 잔씩 나누었다.

짭시우는 두 사람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며 와인을 마셨다.

시고 떨떠름한 맛이 입에 맴돈다.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 거야?’

물론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시큰둥한 자신과는 달리, 두 사람은 썩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하니, 장단에 맞추는 수밖에.

“헤…, 오랜만에 언니, 형부랑 술 마시네.”

와인 한 잔에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말했다.

“네가 미국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한주희가 가시 돋힌 말투로 그녀를 나무라자, 한주연이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앙탈을 부렸다.

“아이, 언니 미안해~! 그래도 이제 돌아왔으니까 자주 보면 되잖아, 응? 응?”

“알았으니까 그만 떨어져.”

비슷하지만 다른 분위기를 지닌 두 사람이 저리 껴안고 있으니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사진으로 찍어 평생 간직하고 싶을 정도.

비싼 와인 한 병이 바닥을 드러냈을 즈음, 한주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언니 어디 가아!”

살짝 취한 한주연이 달려들었지만, 먹히지 않았다.

“아직 할 일이 남았어.”

“히잉….”

결국 한주희도 서재로 떠나가고, 주방에 남은 사람은 한주연과 짭시우 뿐.

제법 두근거리는 전개였으나, 제아무리 짭시우라도 지금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자신은 그녀에 대한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상태.

자칫 옛날 이야기라도 꺼내는 날엔 그야말로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기에.

“그, 그럼 우리도 이만 일어날까?”

“에엑, 형부까지?!”

“미안해. 나도 내일 아침 일찍 나가봐야 해서 말이야.”

“히잉…,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울적해진 분위기의 그녀로부터 등을 돌려 쉬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가까스로 제 방에 도착한 짭시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큰 위기 없이 잘 마무리된 하루에 오랜만에 웃는 분위기에서 식사까지.

오늘이 손시우로 살아온 날 중에서 가장 좋았다고 자평하고 있을 때.

똑똑똑!

“형부~ 저 잠깐 들어가도 돼요? 할 얘기가 있어서요!”

“……?”

한주연이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지금까지 봐온 수없이 많은 야동이 그에게 야릇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형부와 처제.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의 격렬한 정사.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도, 그는 은근슬쩍 기대를 품으며 방문을 열어젖혔다.

“무슨… 일이야?”

“할 얘기가 있어서요! 잠깐 안으로 들어가도 되죠?”

“아….”

“그럼 실례할게요!”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안으로 쏙 들어오는 한주연.

짭시우는 긴장된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

‘설마, 설마, 설마….’

야동에서나 본 일이 정말 실제로 일어나려는 건가?

과도하게 긴장한 탓에 뻣뻣한 걸음으로 방 곳곳을 둘러보는 한주연에게로 향하는 짭시우.

“그…, 할 얘기란 게 무, 뭔데?”

결국 혀까지 꼬여 말을 더듬고 말았다.

이를 들은 한주연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핫! 형부 뭐예요~ 완전 웃겨!”

“하, 하하.”

이런 걸 보고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걸까.

즐겁다는 듯이 웃는 그녀를 보니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이내 웃음을 거둔 그녀가 옅은 미소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잠깐 들렀어요.”

“아…, 물어볼 거.”

짭시우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럼 그렇지.’

헛된 상상을 품었다가 괜히 실망감만 떠안고 말았다.

급속도로 흥미를 잃어버린 그는 시큰둥한 말투로 물었다.

“뭔데?”

“음, 그게요.”

잠깐 망설이는 듯하던 그녀가 별안간 눈을 번뜩인다.

“누구신데 우리 형부 몸에 들어와 계신 건가 해서요!”

“……!”

짭시우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제대로 좆된 것 같다고.

다음화 보기

중간고사 던전 실습 성적이 공개된 이후, 우리 팀은 화제의 중심에 올라섰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가 1등이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1등.

덕분에 잠깐 소란이 일었다.

일부 학생들이 개미굴의 공략 시간을 납득할 수 없다며 이의를 제기한 것.

뭐…,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현역 헌터들의 개미굴 공략 시간은 평균 다섯 시간 정도.

그에 반해 우리는 고작 세 시간 만에 던전을 주파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그만큼 자신과 우리 사이에 격차가 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 우리가 부정행위를 저질렀다고 믿고 싶었겠지.

물론 그들의 이의제기는 단숨에 불식됐다.

거창한 거 없이 던전 실습 당시 심사관이 찍은 영상을 공개하면 그만이니까.

유기적으로 들어맞는 팀워크와 개개인의 뛰어난 능력이 결합되어 펼쳐진 최상의 퍼포먼스.

부정행위가 끼어들 틈 따위는 조금도 없는 영상에 학생들은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전부 다 쇼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압도적으로 1등을 거머쥔 우리 팀의 실력을 직접 보고 싶어서 일부러 이의를 제기한 거지.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그 영상이 이의제기한 학생들에게 공개된 이후로 날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거든.

잘못된 이의제기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

“김도진 씨 맞으시죠? 저는 팬텀 길드에서 나온….”

“안녕하세요, 도진 씨! 혹시 아직 생각해둔 길드가 없으시다면 저희 길드로…!”

인재 영입에 혈안이 되어 있는 길드 스카우터들이 앞다투어 내게 달려든다.

동시에 손바닥 위에 점점 명함이 쌓여 간다.

이름 있는 대형 길드부터 유망주 하나 잘 꾀어내 빨아먹으려는 소형 길드까지.

“이야…, 골고루 잘도 받았네.”

옆에 있던 신유정이 손에 쥔 명함을 한 장, 한 장 확인하더니 웃는다.

“흐흐, 그러게.”

내가 생각해도 좀 웃기기는 해.

어떻게 이렇게까지 다양하게 명함을 받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한바탕 난리를 겪은 뒤 식당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이번엔 다른 무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도진아, 점심 먹었어?”

“어…, 이제 먹으러 가려고요.”

“그럼 누나랑 같이 먹으러 갈까? 맛있는 거 사줄게!”

다름 아닌 선배들이었다.

슬슬 나에 대한 계산이 끝났는지, 최근들어 부쩍 밥 사준다는 인간들이 많아졌다.

근데 그런 녀석들 중에 진짜로 내게 밥을 사는 데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얘 저랑 밥 먹으러 가는 길이니까 비켜요.”

내 옆에 최종병기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지.

“아하하…, 그, 그렇구나.”

“그럼 우린 다, 다음에 먹자! 안녕!”

보디가드처럼 내 앞을 가로막은 녀석의 말 한마디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선배들.

아무리 얘가 매섭게 생겼기로서니 그래봐야 후배인데 이렇게 겁먹는 게 맞는 건가 싶었는데, 최근에 그 이유를 알게 됐다.

1학기 때 녀석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었다가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선배의 수가 거의 스물이 넘는다나, 뭐라나.

“쳇.”

멀어져가는 선배들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차는 신유정.

“넘볼 걸 넘봐야지.”

최근 내 주변에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니까 녀석은 더욱 내 옆에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엄한 년이 자기가 침 발라둔 사람 채갈까 봐 어지간히도 걱정인 모양.

그걸 보는 게 썩 즐겁다.

의도치 않은 철벽으로 떠나보내는 여자들이 아쉽지 않냐고?

그런 감정은 딱히 들지 않는다.

이제 와서 아무나 먹기엔 지금 내가 노리는 상대들이 워낙 뛰어나야 말이지.

신유정의 패기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나약한 이들까지 신경 쓰기엔 지금도 바쁘다.

“야, 빨리 가자. 또 파리들 꼬이기 전에.”

“그래.”

인의 장벽을 두 번이나 뚫고 마침내 도착한 식당.

오늘의 메뉴는 돈까스 덮밥.

바로 곱빼기로 주문하고, 거기에 카레까지 추가해서 받아왔다.

“너 점심 먹고 바로 집에 갈 거냐?”

“어, 그래야지.”

오늘은 수업이 오전에만 두 개 있고, 오후에는 하나도 없는 날이다.

정확히는 원래 하나 있었는데 갑자기 교수에게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휴강 됐다.

나야 좋은 일이지, 뭐.

“그…,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라?”

“…….”

이래서야 누가 남자고, 여자인지.

보통 예쁜 여자랑 사귀고 있는 남자가 저렇게 불안해하는 거 아닌가.

우리는 어째 반대로 돼 있는지, 원.

식사를 끝마친 뒤, 우리는 곧바로 헤어졌다.

나는 집에 가야 하고, 녀석은 또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하거든.

“집에 바로 들어가, 꼭!”

“알았다니까!”

신신당부를 하는 녀석의 말에 이젠 귀에서 피가 날 지경.

불안한 것도 이해는 간다.

지금 우리 사이만큼 애매한 사이도 없으니까.

“진짜 애매하네.”

섹스한 사이라고 보기엔 넣었다 뺀 게 전부고, 그렇다고 친구라고 하기엔 서로의 중요한 곳이 마주 보고 인사까지 나눴고.

“조만간 자리를 한번 만들어야겠다.”

뜸은 들일만큼 들었다.

이제 맛있게 떠먹을 차례.

원래는 이미 한 번 떠먹어 보려고 했는데, 괜히 입방정을 떠는 바람에 실패했다.

“에휴.”

어쩌겠나.

내가 싼 똥인데, 내가 치워야지.

녀석이 충분히 만족할 만한 하루를 꾸미고, 밤에는 내가 만족할 때까지 괴롭히면 되지.

짧지만 강렬하게 남았던 유정이의 안이 생각난다.

질도 성격따라 가는지, 일말의 자비도 없이 난폭하게 조여대던 그 빡빡한 느낌.

그래.

그걸 위해서라면 얼마든 수고로움을 감수할 수 있지.

음심을 서서히 가라앉히며 버스에서 내려 골목길로 접어든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건물 앞에 서 있는 낯선 차량과 새까만 선글라스를 쓴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공주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고딕 양식의 검은색 드레스와 굽 높은 하이힐.

손에 쥔 양산의 끝을 바닥에 콕콕 찍으며 촐랑대고 있던 여인이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든다.

새까만 선글라스 아래 드러난 하관이 무척이나 낯이 익다.

아니라고 치부하고 싶지만….

“그대가 김도진인가?”

“…….”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또각- 또각-

좁은 골목길에 녀석의 하이힐 소리가 미약하게나마 울려 퍼진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