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일을 모조리 떠넘긴 그는 축구공을 차고 놀아도 될 정도로 넓은 길드장실에서 숨 죽인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통으로 된 유리창 너머로 사람을 지나다니는 것도 보고, 소파에 드러누워 있기도 하고.
길드에서의 목표는 오직 하나.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어떤 꼬투리를 잡힐지 알 수 없으니,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살아남는 길이었다.
그러다 보면 탈력감이 몰려온다.
“씨발….”
대체 이게 뭐 하고 있는 짓인가 싶다.
S급 헌터의 몸을 얻어서 한다는 짓이 고작 숨어 지내는 일이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막 살아버려?’
비록 한주희를 안지는 못했지만.
또 S급 헌터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안식년이라는 변명까지 해가며 일을 쉬고 있지만.
돈과 명성은 여전히 그의 손아귀에 있다.
이걸 이용해서 온갖 미녀들을 마음껏 따먹고 다니면….
“바로 나락 가겠지….”
명예는 실추될 거고, 이미지는 폭망할 거다.
그뿐만이라면 말도 안 한다.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갑자기 고문이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냥 이대로 살자.”
평생 이렇게 사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딱 3년만.”
이상과는 한참 동떨어진 삶에 현타가 아주 세게 찾아왔을 때, 그는 사람을 시켜 제 원래의 몸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조사를 해보았다.
‘처음엔 잘못 조사한 줄 알았지.’
흥신소 직원이 찍어온 사진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살이 덕지덕지 붙은 돼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웬 훤칠한 훈남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
심지어 각성까지 해서 한국 대학교 입학까지 했다던가.
그것을 보자마자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그럼 저게 원래 전부 내 거라는 거잖아!’
억장이 무너졌다.
그리고 다시 갖고 싶어졌다.
그때부터 그는 행복 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손시우는 아내와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아내와 냉랭한 딸.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손시우는 그 두 사람을 변함없이,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는 확신했다.
3년이 지나면 손시우 쪽에서 먼저 자신을 찾아와 몸을 도로 바꾸려고 들 것임을.
‘모두가 좋은 결말이잖아?’
손시우는 아내와 딸을 다시 만나서 좋고, 자신은 스무 살 훈남의 한국대생이 되어서 좋고!
‘그래, 이게 맞아.’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그의 명성을 보존해둘 필요가 있다.
혹시나 제 이미지를 박살 냈다고 몸을 안 바꾸겠다고 튕기면 곤란하니까.
‘그러니 딱 3년만.’
자신이 걸어둔 ‘상호불가침’과 ‘발설 금지’가 끝나는 날까지만 존버하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였다.
인간을 벗어난 그의 감각이 제멋대로 문밖의 기척을 읽어냈다.
당찬 걸음걸이.
“아.”
오늘 하루를 무사히 끝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가장 만나기 싫었던 인물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쿵!
거세게 문이 열리고, 차가운 인상의 미녀가 안으로 들어선다.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블랙 이브닝 드레스, 해가 그리 세지도 않은데 검보라색 양산을 한손에 꼭 쥐고 있는 여인이 당당한 보무로 걸어 들어와 그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모시는 여왕을 눈앞에 두고도 예를 차리지 않다니, 참으로 오만방자한 놈이로구나.”
“…….”
“어서 본 여왕에게 예를 갖추지 못할까!”
또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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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한 시간을 남겨두고 가장 만나기 싫었던 사람을 마주하고 말았다.
정시아, 26세, A급 헌터.
이름보다는 이명인 ‘프린세스’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하는, S급 헌터에 올라 ‘퀸(Queen)’으로 불리는 것이 목표인 중증의 중2병 환자.
그녀는 여러모로 성가시다.
왜냐면.
“흐음…, 오늘도 가짜로구나.”
정시아는 자신이 진짜가 아닌 가짜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챘기 때문에.
“…또 그 소리. 슬슬 질릴 때도 안 됐냐.”
그는 따끔거리는 속내를 애써 감추며 최대한 손시우의 말투를 가장해 그녀의 말을 반박했다.
티만 내지 않으면 된다.
그녀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자신을 가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때는 정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줄 알았는데, 다행스럽게도 모두에게 내몰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모두를 속여도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가짜.”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은 덕분이었다.
워낙 특이한 컨셉을 지닌 탓인지 이번에는 탐정 놀이에 빠졌나 보다 하고 넘어갈 뿐, 누구 하나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불쑥불쑥 찾아와 자신을 꾸짖기 시작했다.
“당장 진짜를 데리고 와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을 엄벌에 처할 것이야!”
“…하아.”
몇 달간 겪어오며 그는 깨달았다.
조금이나마 그녀를 빨리 돌려보내기 위해선 대꾸를 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그러다가 고래고래 질러대는 그녀의 소리를 듣고 누군가 찾아오면.
“얘 좀 데리고 나가줘요.”
“예, 죄송합니다.”
“아, 아앗!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저 가짜 녀석이…!”
이렇게 함께 보내버리면 끝.
참 쉽죠?
“죽는 줄 알았네.”
사실 그녀가 성가신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그녀의 특성 때문이었다.
“으…, 뻐근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압박하여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말도 안 되는 특성 탓에 그녀와 마주하고 있으면 손끝과 발끝부터 서서히 뻣뻣하게 굳기 시작한다.
스트레칭 하듯 손발을 돌리고 몇 번 주물러주면 금세 나아지기는 하지만, 굳어가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몹시 별로라 웬만하면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휴우.”
손발의 감각이 온전히 돌아온 것을 느낀 짭시우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길드장님.
“지금 퇴근할 거니까 차 대기시켜줘.”
-알겠습니다.
오후 4시 30분.
한주희의 당부를 잊지 않은 그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지만,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집에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다는 말과 함께 건물을 나선 그는 건물 앞에 서 있는 세단에 곧장 올라탔다.
“집으로 모실까요?”
“응.”
아침에 왔던 길을 고스란히 거슬러 올라가는 차 안.
짭시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주희가 그랬다.
주연이가 귀국하는 날이니까 일찍 퇴근하라고.
말하는 걸로 봐선 반가운 손님임과 동시에 가까운 사람인 것 같은데.
‘주연이가 누구지?’
머릿속에 주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김도진으로서의 기억에는 어느 정도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떠오르지 않는다.
‘주연, 주연, 주연…, 주희, 주연….’
주연과 주희의 이름을 번갈아 부르다 순간 무언가가 번뜩였다.
“아!”
기억났다.
한창 한주희에 대해 알고 싶어 이것저것 검색할 때 보았다.
한주연.
한주희와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늦둥이 동생.
5년 전인가, 6년 전인가.
해외 길드로부터 어마어마한 액수의 오퍼를 받고 한국을 떠났다고 하던데, 오늘 귀국하는가 보다.
“잠깐만, 그러면….”
한주연은 아내의 동생.
‘아내의 동생을 뭐라고 부르더라?’
그는 조용히 스마트폰을 꺼내어 아내의 여동생을 쳐보았다.
지식의 전당 나무위키가 그에게 새로운 지식을 선사한다.
‘아, 처제.’
긴장됐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심지어 검색해 보니 6년 전에 해외로 떠나 한 번도 들어오지 않은 걸로 나와 있다.
말인즉, 지난 6년간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는 뜻.
6년간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형부와 처제의 사이.
뻔하지 않은가.
‘할 말만 하고 입 꾹 닫고 있으면 큰 문제 없겠네.’
서로 친했다면 6년씩이나 얼굴을 보지 않고 살지는 않았을 테지.
그는 조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창밖의 풍경을 읽어 내려갔다.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게 허락된 가장 마음 편한 순간 중 하나였다.
“도착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순식간에 끝나버린다.
“하아, 고생했어.”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싫은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내며 차에서 내린 그는 느릿하게 집으로 들어섰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이 인사를 건네온다.
짭시우는 듣는 체, 마는 체하며 제 방으로 올라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흰색 카라티.
언제나 반바지에 반팔티 차림으로 집에 처박혀 있었던 짭시우에겐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차림새였다.
“집인데 좀 편하게 입으면 안 되나….”
작게 불만을 토로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침대에 누우려던 그때.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사장님, 사모님께서 내려오시래요. 처제 분께서 오셨다고….”
“아, 예. 지금 갑니다.”
아무래도 쉴 시간은 없는 듯했다.
그는 곧장 문을 열고 나가 현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세 여인의 상봉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아, 형부!”
조금 전까지 손서연과 끌어안은 채 방방 뛰고 있던 여인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든다.
단발머리에 태닝이라도 한 듯,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
그걸 제외하면 제 언니와 거의 흡사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이지적이고, 냉철해 보이는 한주희와는 달리, 그녀는 밝고, 명랑해 보인다.
분위기만 놓고 보면 두 사람이 자매인 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
“형부 진짜 오랜만이네요! 얼마 만이지, 6년 만인가?!”
“어, 응, 그렇지.”
“잘 지내셨죠? 안식년 가지신다고 하던데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난 다 괜찮아. 처제는 지금까지 잘 지냈어?”
“헤헤, 저야 잘 지냈죠! 초창기에는 말 배우는 게 조금 힘들긴 했는데, 지금은 다 좋아요! 아! 음식이 느끼해서 조금 먹기 힘들다는 것도 빼고요!”
조잘대는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한참을 떠들어대는 그녀를 제지한 것은 옆에 있던 한주희였다.
“현관 앞에서 계속 떠들 거니?”
“아차, 내 정신 좀 봐. 죄송해요, 형부!”
“하하…, 아니야.”
네 사람은 마침내 현관에서 벗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펼쳐진 진수성찬.
“잘 먹겠습니다!”
그녀의 밝은 인사와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으응…, 이거야, 이거! 한국 음식이 너무 그리웠던 거 있지!”
식사 내내 이어진 그녀의 명랑함은 저도 모르게 짭시우를 미소 짓게 했다.
지금까지는 한주희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한주연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저쪽이 더 쉽지 않을까?’
다가서는 것조차 힘든 한주희와 달리, 한주연은 말 붙이기가 쉬워 보인다.
얼굴도 비슷하니까 차라리 저쪽을 노리는 건….
‘안 되겠구나.’
처제와 형부 사이라는 걸 잠깐 망각하고 말았다.
잘못 건드렸다간 이미지 박살은 물론이고, 가정 자체가 파탄 날 수도 있다.
‘그럼 안 되지.’
짭시우의 목표 1순위는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
정확히는 손시우가 가꿔 놓은 그 몸을 고스란히 돌려받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몸으로 어떤 문제를 일으켜선 안 되겠지.
한마디로 한주희와 마찬가지로 한주연 또한 그림의 떡이라는 얘기다.
‘젠장, 좋다 말았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는 짭시우.
그러자 한주연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어왔다.
“형부,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제가 회복시켜 드릴까요? 저 체한 것도 치료 가능해요!”
“아, 아니야. 별일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헤헤, 그럼 다행이구요. 혹시 불편하신 데 있으시면 제게 말씀해 주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