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20)

엘레나한테 체력으로 밀리기 싫다고 죽기 살기로 뛰고 있다더니, 엄청 빠르게 뛰어간다.

“자, 이제 들어가요.”

녀석이 사라진 걸 확인한 뒤에야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앞에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어땠어요?”

“…좋았어. 날이 새는 것조차 까맣게 잊었을 정도로.”

뾰로통한 그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오른다.

참지 못하고 또 한 번 그녀의 입술을 훔친다.

“하웁…, 흐응….”

서로의 혀를 강하게 얽는 애틋한 키스를 잠시 나눈 뒤, 떨어졌다.

그녀는 야릇한 암컷의 표정을 지워내지 못한 채로 내 하루를 걱정했다.

“지금 시간이면 잘 수도 없을 텐데…, 괜찮니?”

“하루 정도는 안 자도 거뜬해요.”

“후후…, 조금 있다가 내려오렴. 아침 맛있게 차려줄게.”

“넵.”

“그리고, 다음에도 기대할게…?”

“…….”

혀로 입술을 핥으며 다음을 기약하는 그녀의 얼굴이 어제보다 젊어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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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알리는 해가 이제 막 떠오를 준비를 하는 새벽 여섯 시.

무엇 하나 거슬리지 않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번뜩인다.

사내, 짭시우는 익숙하다는 듯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 시간만 되면 누가 깨우지 않아도 어김없이 눈이 뜨인다.

“더 자고 싶다.”

눈이 뜨였으면 다시 감고 자면 되는 거 아니냐고?

됐으면 진작에 했겠지.

이 강인한 몸뚱어리는 절대 그런 꼼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한 번 뜨인 눈과 정신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절대 허물어지지 않는다.

“언젠간 마음껏 잘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이 몸의 원래 기상 시간은 사실 새벽 여섯 시가 아닌, 다섯 시였다.

게을러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한 시간이나마 더 잘 수 있게 된 것.

그러니 언젠가는 느지막한 오전에 깨어나는 것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방 밖으로 나서려던 짭시우는 문고리를 돌리다 말고 뒤로 물러났다.

“아, 먼저 씻어야지.”

이 몸을 빼앗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스스한 상태로 나갔다가 한주희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단정되지 않은 모습으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그런 해이한 모습 하나하나가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꼴이라고 했던가.

그때의 서슬퍼런 잔소리를 잊지 못한 그는 방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가 꼼꼼히 몸을 닦은 뒤, 제 몸에 딱 맞게 제작된 정장 바지와 셔츠를 입고 방을 나선다.

‘오늘 아침은 뭐지?’

그의 생각은 대체로 그렇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생각 따위는 일절 없고, 근시안적 사고에만 집착한다.

오늘 아침은 뭐지, 먹고 나서 뭐 하지 등.

그저 하루하루 넘기고, 버티는 데에 집중되어 있기만 했다.

느릿한 걸음으로 복도를 거니는데,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서 서재로 향하는 한주희와 마주친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예쁘다.’

사진은 언제나 실물을 뛰어넘는다.

지금까지 이 몸으로 만난 여자들은 전부 그랬다.

사진과 실물 간에 격차가 어느 정도냐만 다를 뿐, 그 누구도 실물이 사진을 이긴 적이 없다.

눈앞의 한주희만 빼고.

‘어떻게 사진보다 더 예쁠 수가 있지?’

짭시우의 눈에 그녀는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윤기 나는 붉은색 머리칼도, 날카로운 눈매와 냉철한 눈도, 매끄러운 콧날과 붉은 입술도.

거기에 서양인마저 기를 죽여버릴 것만 같은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까지.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음심이 마구 솟는다.

닿을 수만 있다면 한평생 침대 위를 떠나지 않고 그녀와 뒤엉켜 있을 자신이 마구 솟는다.

그래.

‘닿을 수 있다면 말이지….’

김도진일 때 모니터를 통해 바라본 그녀는 그림의 떡, 못 먹는 감이었다.

찌르는 건 고사하고, 감히 실제로도 볼 수 없는 그야말로 하늘에 뜬 별과 같았다.

그래서 젊음까지 포기하고서 그녀 하나만을 보고 손시우의 몸을 빼앗았는데.

남편의 몸으로도 닿지 못할 정도로 멀리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쇼윈도 부부라니, 이게 무슨….’

누가 알았겠나.

대한민국 대표 잉꼬부부 중 하나로 알려진 손시우와 한주희가 쇼윈도 부부라는 걸.

덕분에 손시우의 몸으로 산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아니, 사적인 대화 자체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짭시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 좋은 아침.”

“…네.”

그녀는 그 말 한마디만 남긴 채 서재로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배고프네.”

허기를 느낀 손시우는 울적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널따란 주방에 사용인 세 명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예상 밖의 인물도 보고 말았다.

‘윽, 손서연.’

딸 손서연이 식탁에 앉아 밥알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다.

제 엄마를 닮아 날카로운 눈매가 당장에라도 온몸을 찌를 듯이 다가온다.

“자, 잘 잤니?”

“…응.”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시작한다.

하나 같이 최상의 재료만을 사용하여 맛을 낸 음식들이 입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신나게 식사를 이어가던 짭시우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손서연이 보인다.

“…할 말이라도?”

“아니, 없어.”

…없으면 제발 쳐다보지 마.

차마 밖으로 내뱉진 못하고 속으로 삭인다.

최근 항상 저런 식이다.

처음에는 얼굴조차 보기도 힘들었는데, 요즘엔 자꾸 자신이 아침을 먹는 시간에 맞춰 나와 함께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거기까지라면 다행이겠는데, 근래에는 자꾸 식사를 하다 말고 자신을 빤히 쳐다본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밖에 안 하고, 자기 혼자 만족할 때까지 지켜보다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곤 사라져버린다.

‘원래의 몸이었으면 벌써 한 300번은 체했을 거야.’

다행히 S급 헌터의 몸은 위장도 강철만큼 튼튼해서 체하지 않더라.

아침을 양껏 먹은 뒤, 그는 방으로 돌아가 정장 자켓을 걸치고 스마트폰과 지갑을 챙겼다.

때마침 울리는 진동에 그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차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어, 이제 나가.”

지옥 같은 출근 시간이 다가왔다.

“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서는 짭시우.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서재의 문이 열린다.

그의 얼굴이 금세 살아났다.

‘오늘 무슨 날인가?’

아침에만 그녀의 얼굴을 두 번이나 볼 수 있다니, 무슨 날이라도 되는가 싶다.

그녀의 냉철한 시선이 짭시우에게로 향한다.

“…최근 걸음이 둔탁해졌네요.”

“응? 아….”

발소리 죽이고 다니라는 뜻인가.

“하, 하하, 미안….”

어색하게 웃으며 건네는 사과에 잠시간 그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린다.

“오늘 저녁, 잊지 않았죠?”

동시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오늘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머릿속을 뒤져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릿속의 기억들이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는 것 같다.

간헐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기억들이 깜깜하다.

이럴 때면 보통 깜빡이는 전구처럼 생각이 번뜩이곤 하는데, 오늘은 깜깜무소식.

하는 수 없이 그는 그녀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저녁이라면…?”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쏟아진다.

“주연이 귀국하는 날이니까 일찍 퇴근하라고 며칠 전에 얘기했잖아요.”

“아, 아아, 그랬지!”

언제 그랬었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일단 뒤늦게 기억난 척하며 위기를 넘긴다.

“요즘 당신, 좀 이상해요.”

“무, 무, 뭐가?”

“전부 다요. 평생 쉬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안식년을 갖겠다고 하질 않나, 아침마다 훈련을 안 하면 몸에 가시가 돋친다고 했던 사람이 훈련을 빼먹질 않나….”

하나둘씩 거론될 때마다 위가 조여온다.

이것이 S급 헌터가 내뿜는 압박감인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그녀가 등을 돌려 문고리를 잡는다.

“뭐, 당신도 이제 젊은 나이는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웬만하면 스케줄 같은 건 잊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 그래. 앞으로 내가 좀 더 신경 쓸게.”

“…그래요, 그럼.”

쿵-

서재의 문이 닫힌다.

“후우….”

위기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짭시우.

주머니 속에 넣어둔 스마트폰이 재차 요란하게 울린다.

뻔하다.

출근할 시간이라고 재촉하는 걸 테지.

“간다, 가….”

조금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현관을 나선다.

“오셨습니까, 마스터!”

“응, 좋은 아침.”

운전기사와 짧게 아침 인사를 나눈 뒤, 마당 한쪽에 정차해 있는 고급 세단에 올라탄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부드럽게 나아가는 세단.

널찍한 뒷좌석에 앉은 짭시우는 쌩하니 지나쳐가는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남도 식당, 조강 인테리어, 박가네 순대국….’

시속 80Km로 달리고 있음에도,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느리게만 보인다.

‘진짜 괴물 같은 몸이야.’

벌써 몇 달째 하고 있는 짓인데도 새삼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좌절한다.

손시우의 몸을 빼앗을 때 그가 가장 바랐던 것은 한주희였다.

그러나 그것만을 바랐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S급 헌터.’

대한민국에 딱 다섯밖에 없는 초인.

그 강대한 힘 또한 가지고 싶었다.

남이 평생을 일구어놓은 힘을 조금의 고생도 없이 홀라당 가로채 제 것으로 사용하면 얼마나 짜릿할까!

“에효.”

그러나 그것마저 이루지 못했다.

초고사양의 하드웨어를 가지고 있으면 뭐 하나.

그걸 다룰 소프트웨어를 전부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간혹 떠오르는 것도 있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부 잃어버린 건 아니다.

간단한 기술 몇 가지는 머릿속에 남아 있으니까.

문제는 그마저도 펼치고 나면 무언가 이상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완벽하게 따라 했음에도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초기에는 아직 익숙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연습도 많이 했는데, 그래도 똑같았다.

뭐라도 발전하는 모습이 보여야 탄력을 받아 더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하고 할 텐데 그런 게 없자 짭시우는 금세 포기했다.

그는 애초에 그런 인간이니까.

“도착했습니다.”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길드 건물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된다.

“와…, 손시우 헌터야!”

“대박, 사진 찍어야지.”

때마침 길을 오가는 시민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와 카메라 셔터 소리에 어깨가 솟는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길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알 수 없는 압박감이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만 하자….’

이곳에 있는 시간은 1분 1초가 긴장의 연속이다.

왜냐고?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가 떠오르는 거라곤 딱 하나뿐이다.

“자잘한 건 유 실장이 알아서 처리해줘요.”

손시우가 비서 실장에게 귀찮은 일을 떠넘길 때 자주 하던 말이었다.

저 말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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