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120)

내 혼잣말을 용케 들은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뭔데. 뭐 고민 있냐?”

음.

얘한테 물어보면 답을 얻을 수 있으려나.

“요즘 젊…, 아니, 인싸 커플들은 데이트를 어디서 즐길까?”

젊은 애들, 이라고 말하려다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볼 것 같아 황급히 말을 바꿨다.

“흐흥…, 뭐야, 데이트 코스 짜냐?”

“어….”

녀석의 웃음이 심상치가 않다.

아무래도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내 물음이 본인이랑 데이트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그렇지?”

음, 나쁘지 않은 착각이야.

이러면 자연스럽게 데이트 코스에 대해 얘기도 듣고, 녀석의 니즈도 파악하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잖아?

“뭐…, 인싸들이라고 다를 거 있냐? 똑같지. 영화 보고, 밥 먹고, 카페 같은 데 가고.”

“아, 그래.”

어쩜 가는 곳들이 옛날 나 젊었을 때 데이트 하는 거랑 달라진 게 없냐.

하긴…, 도심 속에서 하는 데이트라고 해봤자 저게 전부지 뭐가 더 있겠나 싶기도 하다.

우리 정희 씨가 젊은이들의 데이트를 기대하고 있을 텐데, 이를 어쩐다….

“아, 나 그거 해보고 싶다.”

“어떤 거?”

녀석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띄엄띄엄 대답했다.

“그…, 사람 많은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거. 그 왜, 있잖아. 홍대라든가, 신촌이라든가.”

“오.”

순간 머릿속을 번뜩이는 아이디어.

그거라면 충분히 젊은이들의 감성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고맙다, 유정아!

너희 엄마랑 먼저 잘 써먹어 볼게!

.

.

.

.

.

.

.

수업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데이트를 준비한다.

과거 내 코디를 담당하던 이가 말하길, 옷이라는 건 계절에만 맞게 입어도 최소 못나게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지금은 가을이니까….”

그러니 가을에 걸맞은 컨셉으로 옷을 입자.

개인적으로 가을 하면 떠오르는 가장 대표적인 옷은 코트다.

검은색 슬랙스에 니트, 거기에 베이지색 코트를 걸친다.

“음, 좋아.”

이렇게 차려입으니까 젊은 얼굴에 약간의 무게감이 더해진다.

이 정도면 조금 더 나이대에 걸맞는 커플처럼 보일 수 있겠지.

마지막으로 왁스로 머리를 넘겨 고정시킨 깐도진 모드까지.

지갑과 스마트폰을 챙긴 뒤, 로퍼를 신고 현관을 나선다.

약속 장소는 집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무래도 서로 꾸민 채로 집앞에서 만나 나가기에는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게 많았던 모양.

조금 일찍 집을 나와 다음 정류장을 향해 걷는데,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아…, 면허 따둘걸.”

미리 면허를 따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랬으면 오늘 하루 버스나 택시 같은 걸 타지는 않아도 됐을 텐데.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지나쳐가는 여자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다.

손시우 때 받았던 시선과는 조금 다른 끈적함이 들어가 있는 눈빛.

저런 눈빛을 받을 때마다 새삼 즐거워진다.

마침내 다다른 다음 정류장.

근처 담벼락에 등을 살짝 기댄 채 아줌마가 오기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익숙한 음성이 귀에 꽂힌다.

“도진아! 많이 기다렸니?”

밝고 고운 음성에 자연스레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다.

“…….”

난 오늘 하루 놀랄 양을 아침에 다 썼다고 생각했는데.

“어, 어떠니? 좀 이상한가…?”

아무래도 그건 약과에 불과했나 보다.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블랙 스커트에 상체 굴곡이 전부 드러나는 딱 달라붙는 니트.

거기에 품이 넉넉한 짙은 회색의 코트까지.

“오늘 데이트 생각해서 낮에 급히 나가서 산 건데….”

수줍어하는 말투에 확 끌어안을 뻔한 마음을 애써 참으며 그녀의 손을 꼭 붙잡는다.

“너무 예뻐요.”

“호호…, 네 마음에 든다니까 다행이네.”

달라진 점은 그녀의 옷뿐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단정히 묶여 있던 머리도 과감하게 풀어 헤쳤다.

거기에 평소 안 하던 옅은 화장까지.

감격에 마지않는 내 표정을 본 그녀가 내게 물었다.

“표정이 왜 그러니? 어디 아파…?”

그 물음에 난 참지 못하고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솔직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데이트고 뭐고 당장 둘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얘, 얘가 정말….”

노골적인 말에 정희 씨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그러면서 충격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도, 도진이 네가 원한다면 그래도 되고…?”

이를 거절하지 않겠다는 것.

순간 마음이 혹해서 정말 이대로 어디 가까운 호텔이라도 찾아볼까 싶었으나, 애써 참았다.

단순히 욕망만을 터뜨리기엔 오늘은 너무나도 좋은 날이니까.

그리고 오늘 하루는 이제 시작이니, 조급해 할 필요는 없겠지.

“우리 정희 씨랑 첫 데이트부터 그럴 수는 없죠.”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이끈다.

“그럼 갈까요.”

“그래,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문득 궁금해졌다.

“유정이한테 뭐라고 하고 나온 거예요?”

“그냥…, 오랜만에 친구들 만난다고 했어.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가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오늘 많이 늦을 수도 있다고도 말했단다?”

왜 내게는 이 말이 오늘 네가 원하는 건 전부 해줄 테니 조급해하지 말라는 얘기처럼 들리는 걸까.

“후우.”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서 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라탄다.

2인 좌석에 둘이 나란히 앉아서 가는데, 괜히 미안해졌다.

“다음 데이트 전까지는 꼭 면허 따둘게요.”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으응…, 급하게 하지 않아도 돼. 아줌마는 이것도 좋아. 젊은 시절에 데이트 할 때 생각도 나고.”

아련한 눈빛으로 추억에 잠기는 그녀.

젊을 때라면…, 남편과의 데이트를 말하는 건가.

약간의 질투심이 올라온다.

그러나 이를 밖으로 표출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오늘을 시작으로 그녀의 속은 나로 가득 차오를 것이기에.

버스를 타고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대학로.

젊은 친구들의 데이트는 잘 모르겠고, 일단 젊은이들이 가득한 곳이니까 이곳을 데이트 장소로 정했다.

버스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수많은 인파가 눈에 들어온다.

하나 같이 젊은 남녀들.

“여기라면 젊은 사람들 데이트하는 느낌 나겠죠?”

“호호! 벌써부터 젊어진 것 같다, 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표정은 상당히 들떠 있었다.

온갖 젊음으로 가득한 이 거리를 썩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

일단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이것 좀 봐! 너무 귀엽지 않니?”

길거리에 내놓고 파는 액세서리나, 음식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여느 젊은 사람들과 비교해 봐도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사실 예쁜 걸로만 따지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

이렇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으니 겉모습뿐만 아니라, 마음속까지 젊어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젊어질수록 무뎌졌던 감정과 솔직한 표현 방법이 더욱 살아났다.

그녀와의 거리는 점점 더 좁혀졌다.

처음에는 손을 잡고 있다가, 중간에는 어깨에 손을 둘렀고, 조금 더 밤이 깊어질 즈음에는 잘록한 허리에 팔을 휘감고 길을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한 곳에 멈춰 선 그녀가 내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게 물어왔다.

“도진아. 저녁으로 먹고 싶은 거 있니?”

“어…, 아뇨? 딱히.”

내 말이 정답이었는지, 그녀가 더욱 기뻐하는 얼굴로 어느 한 곳을 가리킨다.

“그럼 저기 어떠니?”

그곳은 맥시칸 음식 전문점이었다.

의외의 선택.

“맥시칸 음식 좋아해요?”

“으응…, 아니. 한 번도 못 먹어봐서.”

젊어진 신체는 강한 호기심과 모험심을 동반하는 걸까.

그녀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것에 대해 강렬한 끌림을 느끼고 있나 보다.

“그래요, 그럼.”

나야 맥시칸 음식을 몇 번인가 접해보았고, 입에 썩 맞았기에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어둑한 분위기의 음식점에 앉아 메뉴들을 주문한다.

얇게 구운 또띠아에 함께 나온 각종 고기와 새우, 소스들을 취향껏 넣어서 돌돌 말아 먹는 스타일이었는데, 그녀는 썩 마음에 든 것 같다.

“으음…! 너무 맛있어! 도진아, 아~”

내 입에도 자기가 먹은 것들을 그대로 넣어주는 걸 보면 말이다.

맥주도 한 잔 곁들이며 느긋하게 식사를 끝마쳤다.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향하는데 자기가 내겠다며 내 팔을 붙잡는다.

“오늘 정희 씨가 계산할 곳은 딱 한 군데뿐이에요.”

야릇한 농담을 장전하고 발사하려는데,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어디…, 모텔?”

“…….”

잠시 망각했다.

그녀 또한 얼굴만 젊다 뿐이지, 속에는 능구렁이 수십 마리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 뒤로도 여러 곳을 오갔다.

오락실에도 들렀고.

“꺄악! 도진아, 저기 쏴, 저기!”

방탈출이라는 것도 해봤다.

“우, 우리 여기서 영영 못 나가면 어떡하니?”

마지막에는 젊은 학생들이 즐겨 찾는 가성비 좋은 술집까지.

안주를 시켜놓고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술에 취한 대학생들이 그녀에게 헌팅을 시도하는 해프닝도 잠깐 벌어지기는 했는데.

“너희들! 그런 식으로 여자한테 성희롱하라고 누가 가르쳤어! 이러면 집에 계신 너희 어머니가 얼마나 가슴 아파하실지 생각도 안 해봤니?!”

“죄,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

그녀의 전투력은 술에 취한 사내놈들 한둘 따위는 한 손으로 물리칠 수 있을 정도였다.

값싼 안주들을 여러 개 시켜놓고 술잔을 기울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하루 어땠어요?”

“응…, 좋았어. 이제야 좀 실감이 나는 것 같아.”

“젊어졌다는 거요?”

“호호…, 그래.”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소주를 들이켰다.

“매일 뻐근하던 몸은 깃털처럼 가볍고, 거울 볼 때마다 늘어가는 게 신경 쓰이던 주름살도 없어지고…, 정말 꿈만 같아.”

그 기분, 알 것 같다.

나도 처음 이 몸뚱어리를 얻게 되었을 때 느꼈으니까.

물론 몸 자체는 한없이 무겁고, 둔중했지만…, 기분이 다르더라.

당장 무엇을 새로 시작해도 완벽하게 끝을 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 같은 게 생기더라고.

그러니까 새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할 수도 있었던 거겠지.

만약 손시우의 몸이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생각까지는 못 했을 터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은 자신에게 급격한 변화가 생기는 걸 두려워하거든.

“도진이 너한테 어떻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는 알 것이다.

내가 먹인 게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쯤.

그렇기에 더욱 고마워하는 거겠지.

“그거 굉장히 쉬운데.”

나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쭉 내 곁에 있어요. 세상 전부가 내게 등을 돌릴 때도, 내가 크게 다쳐서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흉측하게 변해도, 내가 큰 잘못을 저질러도.”

어쩌면 한없이 무거울 수도 있는 내 말에도, 그녀는 테이블 위에 턱을 괸 채로 내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거 아니?”

“어떤 거요?”

“아줌마는…, 네가 그렇게 날 옥죄려 들 때마다 더없이 기분이 좋더라.”

“…이런 게 좋아요?”

“응. 더없이 사랑받고 있단 느낌이 들어서…,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축축하게 젖어버릴 만큼.”

“…….”

어디가 젖었다고도 말을 안 했는데, 나도 모르게 테이블 아래로 자꾸만 시선이 간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게 느껴진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익히려고 하기도 전에 반대쪽에서 익혀버린 듯한 느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