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120)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녀석의 앞발을 막아내고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수준.

곧장 녀석과의 근접전을 시도한다.

이 몸으로 날붙이를 잡아본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라 약간의 생소함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문제없다.

평생을 휘둘러온 무기와 다시 친해지는 데에는 몇 번 휘둘러보는 정도면 충분했다.

육중한 체구를 지탱하고 선 네 개의 다리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개의 다리가 비처럼 쏟아진다.

빠르고 날카로워 한 방, 한 방이 거대한 구경의 탄환처럼 느껴진다.

맞았을 때는 제아무리 헌터의 몸이라도 위험할 정도로 치명상이 될 테지만….

그건 맞을 때의 얘기고.

빠르기는 하지만, 직선을 벗어나지 못하는 단순한 공격.

다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부터 어디로 쏘아질지 파악이 되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공격에 맞아주려면 억지로 몸을 멈추지 않는 이상 쉽지 않지.

“흡!”

순식간에 더해진 가속도를 이용해 몸을 회전하여 녀석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손에 쥔 단검을 눈앞에 놓인 다리 관절 사이에 박아 넣는다.

콰직!

콰득!

다리 하나에 하나씩 깊숙하게 파고드는 단검.

끼히이익!

녀석의 비명이 뒤따른다.

우리로 따지면 허벅지와 정강이 사이를 잇는 무릎에다가 단검을 깊게 쑤셔박은 거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아프지 않을 리가.

움직임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발악하듯 뒤따라 날아드는 녀석의 공격을 피해 다니며 계속해서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단검을 만들고, 관절 사이에 박아 넣고.

녀석의 거대한 몸통을 기점으로 한 바퀴를 온전히 다 돌고 났을 때.

쿠웅!

거대한 몸통이 땅바닥에 내려앉았다.

성치 않은 다리로 저 거대한 몸뚱어리를 지탱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제 끝내자.”

힘겹게 바들거리는 녀석의 목에다 대고 손바닥을 조준한다.

녀석의 목을 중심으로 마력이 뭉치고 나뉘기를 반복한다.

이윽고 생성되는 새하얀 얼음의 창 여덟 자루.

「아이스 스피어(Ice Spear).」

상대를 날카롭게 꿰뚫음과 동시에 피 한 방울 새어 나오지 못하게 얼려버리는, 얼음 속성의 중급 마법.

한기로 벼려진 날카로운 창끝은 놈의 갑각을 뚫고 숨통을 끊어내기에 충분할 터.

“잘 가라.”

작은 손짓과 함께 허공에 떠 있던 여덟 자루의 창이 동시에 녀석의 머리를 꿰뚫었다.

푸욱! 푸욱! 퍼걱!

녀석의 머리에 난 여덟 개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 나간다.

삶의 회한처럼 피어오르는 검은색 마력의 안개.

“아쉽네.”

마력 흡수가 있었더라면 저것도 전부 흡수했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등을 돌린다.

녀석의 시체가 사라지기 전에 필요한 것들 몇 가지를 떼어내 챙긴 뒤, 진짜 목적으로 향한다.

99년 360일째, 같은 자리에서 자라고 있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

저 꽃이 던전을 숨겨두게 만든 이유다.

대체 무슨 원리로 쏟아지는지 모를, 저 달빛만을 양분으로 삼는 데다 100년을 꼬박 채워야만 비로소 만개해서 꽃이 가진 효능이 극대화되기 때문.

그때는 저 마력을 대체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하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몸이 가진 재능은 마력이라면 그 무엇이든 될 수 있게 하니까.

대지 마법으로 모종삽을 만들어 주변부터 서서히 흙을 파낸다.

뿌리 하나도 상하지 않게 조심, 조심….

“됐…다!”

섬세한 작업 덕분에 뿌리 하나까지 온전하게 꽃을 파내는 데에 성공했다.

모종삽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대지 마법을 이용해 자그마한 화분을 만든다.

미리 파둔 흙을 곱게 깔고, 중간에 꽃을 조심히 내려놓는다.

그다음, 다시 흙으로 덮는다.

“휴우!”

이제 마지막 과정만이 남았다.

공동 한쪽에 하염없이 내리쬐는 달빛에 스며든 마력.

그 형태와 배열을 그대로 가져와 내 마력에 심는다.

이걸 뽑아내서 꽃과 흙에다 내리쬐면….

“오…!”

아직 채 펼쳐지지 않은 꽃잎이 기분 좋다는 듯, 몸을 가볍게 떨어댄다.

아무래도 제대로 성공인 듯하다.

“흐흐, 그럼 야무지게 챙겼으니까….”

마지막으로 닷새 뒤에 우리 길드원들 놀라지 말라고 쪽지 한 장 남겨두고….

“됐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이른 새벽.

강남에 자리한 고층 빌딩으로부터 검은색 세단 한 대가 길을 나섰다.

탑승 인원은 운전자를 포함해 총 세 명.

출근길에 도로가 꽉 막히기 전에 서울을 벗어나는 데에 성공한 그들의 목적지는 태백산.

차에서 내린 세 사내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 이야! 오늘 사모님께서 좋아하시겠네요!”

그 말을 다른 사내가 받았다.

“음…, 확실히 사모님이라도 이만한 물건을 쉽게 얻으시긴 힘드실 테니….”

두 사람이 열심히 분위기를 띄우자, 묵묵히 걸어가던 사내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랬으면 좋겠네.”

일말의 희망이 생겼다.

어쩌면 오늘을 기점으로 답답한 관계에 혈을 뚫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

그의 걸음이 덩달아 빨라졌다.

극에 달한 신체는 높다란 산을 평지 걷듯 내달리게 했다.

“마스터! 그쪽이 아닙니다.”

“아….”

너무 신을 냈나.

그는 애써 뻘쭘한 표정을 숨기며 다른 쪽으로 길을 트는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대략 30여 분쯤 걸었을까.

그들은 무사히 표식을 남겨둔 나무 아래에 도착했다.

“시작하지.”

“예, 맡겨만 주십쇼!”

젊은 사내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땅에다 대고 주먹을 냅다 휘둘렀다.

콰앙-!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평평했던 땅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어찌나 강력했는지, 그 밑에 막아두었던 바위까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졸지에 먼지를 뒤집어쓴 사내가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으며 젊은 사내를 노려보았다.

“…힘 조절 좀 하지.”

“하하…, 죄송합니다.”

겸연쩍게 사과의 말을 건네는 젊은 사내.

시간이 지나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은 뒤, 세 사람은 구덩이 밑으로 내려갔다.

눈앞에 난 작은 토굴.

젊은 사내는 가장 앞장 서서 주변을 온통 헤집으며 나아갔다.

남은 두 사람은 그가 넓히고 간 길을 따라 천천히 뒤따라 들어섰다.

이윽고 나타난 균열에 손을 가져다 대는 세 사람.

삽시간에 뒤바뀐 분위기에도 놀라지 않고 그들은 묵묵히 길을 따라 걸었다.

“보스는 살아 있다고 하셨죠?”

“그래. C급이라 위험할 건 없을 거다.”

“하하! 그럼 한 방이면 끝나겠네요.”

젊은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바로 진입하겠습니다!”

당찬 걸음으로 나아가 보스 룸의 문을 열어젖히는 젊은 사내.

빠르게 안으로 스며든 그는 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뒤를 돌아보았다.

“…없는데요?”

여유 있에 뒤따라 들어오던 두 사내의 얼굴에 다급함이 서렸다.

보스 몬스터가 없다는 말은 누군가가 이미 공략을 끝마쳤다는 뜻일 터.

거대한 공동을 가로질러 끝에 다다른 두 사람의 앞에 들어온 것은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은은한 달빛이 내리쬐는 자그마한 공간이 움푹 파여 있다.

“아, 아니…!”

“…….”

움푹 파인 흙더미 위에는 자그마한 쪽지가 고이 접혀 있었다.

중년의 사내는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 펼쳐 보았다.

[잘 먹고 갑니다.]

낄낄낄낄!

쪽지에 적힌 글자를 읽는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환청에 그는 귀를 기울였다.

자신을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

중년의 사내는 말 없이 인상과 종이를 동시에 구겼다.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사내가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떡할까요? 지금이라도 추적을….”

“…됐어.”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범인은 대충 누군지 파악했다.

다만…, 그를 추궁하기엔 여러모로 걸리는 게 많았다.

엄밀히 말하면 결국 꽃이 주인을 찾아간 셈이기에.

그저.

“인생이 쓰다….”

고된 삶으로부터 전해지는 입안 가득한 쓴맛에 그저 고개를 젓는 수밖에 없었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중간고사가 5일 차에 접어들었다.

그동안은 별다른 일 없이 순탄했다.

이론 시험 세 가지 과목, 포지션별 실기 두 가지를 무사히 넘겼다.

정확히 말하면 이론은 무사히 넘기고, 실기는 압도했다고 봐야겠지.

아무튼.

오늘로 마지막 5일 차.

시험은 팀별로 치러지는 던전 실습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

특례 입학한 마법사 둘에 마탑에서 편입한 2학년 하나, 상위 성적 탱커 하나에 하위권 탱커 하나까지.

마이너스 요소가 엘레나 한 사람뿐인 우리 11팀에 할당된 던전은 놀랍게도 우리가 이미 한 번 공략한 바 있는 곳이었다.

“개미굴이네?”

“윽….”

“오오!”

11팀의 이름 옆에 쓰인 ‘개미굴’을 확인한 팀원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엘레나의 눈동자는 달러로 변했고, 임나은은 여전히 개미가 거북한지 싫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서연이나 유정이는…, 반응이 크지 않아서 애매하지만, 잘 됐다는 표정인 듯하다.

좀 더 정확히는 이미 수월하게 공략한 경험이 있으니 나쁘지 않다는 느낌?

“안녕하세요, 여러분!”

버스 탑승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온 이는 다름 아닌 백현아였다.

던전 실습에는 심사와 더불어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교수 또는 조교가 함께 입장하게 되어 있다.

아무래도 우리 담당은 그녀가 뽑힌 모양인데….

“오늘 여러분의 던전 실습 심사를 맡게 된 백현아 교수에요. 반가워요?”

은근슬쩍 내 쪽을 향해 윙크를 하는 걸 보면 일부러 우리를 맡았다는 느낌이 든다.

목적은…, 아무래도 나겠지.

잠깐의 접점만 생겼을 뿐, 그 이후로 아무런 진전도 없었으니 애가 좀 탔나 보네.

던전으로 향하는 오늘도 그녀의 차림새는 적나라했다.

짧은 스커트에 검정 스타킹, 거기에 온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타이트한 셔츠에 자켓.

다리를 슬쩍 움직일 때마다 검정 스타킹 위로 연결된 가터벨트의 끈이 언뜻 보인다.

…이건 뭐, 너무 노골적이라 도리어 할 말이 없게 만드네.

이를 함께 지켜보고 있던 신유정이 귀에다 대고 투덜거린다.

“교수나 되는 사람이 왜 저렇게 입는대?”

그러면서 내 쪽을 곁눈질로 살피는 모습에 갑자기 장난기가 동했다.

“보기 좋은데, 뭐.”

“아~ 그러셔?”

즉각 반응이 뒤따른다.

이대로 두면 토라질 게 뻔하니까….

“네가 입으면 더 보기 좋을 것 같다.”

“…뭐, 뭐래.”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휙 돌리는 신유정.

저런 반응이면 뒤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자, 그럼 출발할게요!”

그녀의 출발 신호에 버스에 올라탔다.

뒤쪽 창가 자리에 들어가 앉는데 옆에 신유정이 아닌 백현아가 살포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허.”

당연히 내 옆자리가 비어 있을 줄 알고 걸어왔던 신유정의 표정이 삐죽 솟는다.

화가 꽤 많이 난 것 같은데 차마 교수한테까지 들이받을 순 없었는지 조용히 뒷자리에 가 앉는 녀석.

“아웅…, 버스가 너무 좁다. 안 그래요, 도진 학생?”

노골적으로 내 어깨에 제 살을 비비는 그녀.

이 버스는 한국 대학교에서 특별히 제작한 버스다.

습격에 대비하여 방어력이 매우 뛰어난 건 기본이고, 일반적인 버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넓은 좌석과 편안한 승차감으로 모두에게 호평받는 한국대의 자랑거리 중 하나.

비행기로 비유하면 일반 버스는 이코노미석이고, 한국대 버스는 퍼스트 클래스인 셈.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남자들이 예쁜 여자라면 환장하는 족속들이니, 이게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겠지.

나도 이를 부정하진 않는다.

지금도 셔츠 안에 답답하게 갇힌 가슴이 언제 단추를 뚫고 튀어나올지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런데 앞서 말했듯, 적어도 바라는 게 뭔지는 알아야 먹든가, 말든가 결정할 것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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