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다급하게 행동한 게 아닌가 싶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중간고사 끝나고 해도….
“아, 그러면 늦는구나.”
중간고사가 끝나려면 최소 닷새는 지나야 하는데, 그러면 늦는다.
그때면 이미 그것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말 테지.
“일단 밥 좀 먹고….”
산 아래에서 챙겨온 육포랑 물로 적당히 배를 채웠다.
가격은 더럽게 비싼데 맛은 완전 싸구려네.
적당히 쉬다가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이르게 내려앉은 어둠과 추위 때문에 라이트 마법으로 주변 시야를 확보하고, 보온 마법으로 몸에 열기를 보충한다.
그렇게 한 시간쯤 더 헤맸을까.
마침내 단서를 발견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발견할 수 있는 단서를.
“어.”
어느 지점을 기점으로 마력의 흐름이 급격하게 뒤바뀌고 있다.
사방팔방 제멋대로 흘러가야 마땅한 마력들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 방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흘러가는 마력의 흐름이 점차 빨라지고 있다.
5분 정도 더 걸어 도착한 곳은 평범한 야산 한복판.
마력은 커다란 나무 아래의 땅 밑으로 꾸역꾸역 스며들고 있다.
“…드디어 찾았네.”
주변의 나무와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나무에는 작은 표식이 남아 있다.
밑동 부근에 난 자그마한 네모 표식.
마력이 흘러 들어가는 땅 밑을 향해 마법을 사용했다.
「디그(Dig).」
일정 반경의 땅을 파 구멍을 만드는 대지 속성의 기초 마법.
낙엽으로 뒤덮여 있던 땅이 움푹 파인다.
이윽고 드러난 것은 커다란 바위.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아무도 발견 못하게 하겠답시고 주변을 샅샅이 뒤져 찾은 커다란 바위를 저기다 던져뒀었지.
“저거를…, 으음.”
저걸 어떻게 부술까 고민이다.
옛날 같았으면 그냥 주먹질 한 방이면 산산조각을 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노가다를 좀 하는 수밖에.
대지의 마력을 이용해 연장 하나를 뚝딱 만들어냈다.
「어스 해머(Earth Hammer).」
바위로 이루어진 투박한 형태의 망치가 손에 쥐어진다.
내 전용으로 만들어서 그런가, 손잡이가 손에 착착 감기네.
“퉤!”
마력을 넓게 뿌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차단한 뒤, 손바닥에 침을 발라 그립감을 더욱 밀착시킨다.
그다음에 전신을 이용해서 힘차게 내려치면…!
콰앙!
스프링을 연상케 하는 탄력 넘치는 근육의 힘으로 손에 쥔 망치가 바위 안으로 파고든다.
쩌적!
움푹 파인 곳을 중심으로 기다란 균열이 그어졌다.
이 정도면 몇 번만 더 내려치면 되겠는걸.
다시 한번 망치를 휘두른다.
콰가각!
콰직!
대략 열 번쯤 정신없이 망치를 휘두르니 마침내 바위가 산산조각이 났다.
큼지막한 파편들을 구덩이 밖으로 던져 통로를 확보한다.
마침내 기어서 오갈 만한 토굴 하나가 나타났다.
몸을 최대한 숙여 기어간 끝에는….
“찾았다.”
자그마한 균열이 있다.
던전으로 향하는 그 균열 말이다.
던전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생성된다.
대부분의 던전은 주변에 설치한 마력 농도 측정기를 통해 전조 현상을 발견하여 찾아내지만, 이따금 마력 수치가 작은 던전은 측정기에 걸리지 않을 때도 있다.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다.
균열의 크기가 작아서 측정기의 경보가 울리는 기준치에 도달하지 못해 신고되지 않은 통칭 ‘미확인 던전’.
본디 미확인 던전은 발견 시점에서 즉각 협회에 신고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거대한 이익 앞에 사소한 법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있나.”
대형 길드들은 저마다 미확인 던전 서너 개쯤은 몰래 가지고 있다.
이유야 당연히…, 길드에 여러모로 보탬이 되기 때문.
소속 헌터들에게 공략을 맡겨 성장을 뒷받침할 수도 있고, 여기에서 나온 부산물들은 암시장을 통해 거래하기 때문에 세금도 안 내거든.
우리 길드도 당연히 이런 미확인 던전을 몇 개 보유하고 있다.
사실 뒤에서 몰래몰래 움직이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 그냥 신고하자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안 먹혔다.
길드는 길드장의 독단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니니까.
이곳은 우리 길드가 소유하고 있는 미확인 던전 중 하나다.
심지어 오직 나를 포함한 몇몇 간부만이 알고 있는 극비 중의 극비인 곳.
이름은 ‘달맞이 동굴’.
출몰하는 몬스터는 ‘달빛에 잠식된’ 오크나 고블린 등의 강화된 개체들.
저런 수식어가 붙은 녀석들은 일반 몬스터에 비해 1.5배 정도 강하다고 보면 된다.
사실 크게 돈벌이가 되는 곳은 아니다.
몬스터는 1.5배 강한데, 녀석들에게서 얻는 부산물은 일반 몬스터와 전혀 다르지 않으니까.
말하자면 힘은 더 드는데, 얻는 건 그대로인 계륵 같은 곳이라는 것.
그럼에도 이 던전을 신고하지 않고 미확인 던전으로 남겨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나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곧장 균열에 손을 가져가 던전 안으로 이동한다.
[달맞이 동굴에 입장하셨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의 풍경을 확인한다.
어두컴컴한 벽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이곳이 달맞이 동굴이라 불리는 이유 중 하나다.
보스 룸에서 내리쬐는 달빛이 동굴 전체에 스며들어 은은한 달빛을 내뿜고 있거든.
“몬스터는…, 없네.”
던전은 보스 룸에 있는 보스 몬스터까지 죽인 뒤에야 일정 시간을 거쳐 재구성된다.
동굴 내에 몬스터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일반 몬스터는 전부 처리하고 보스만 남겨두었다는 뜻.
나에겐 더없이 좋은 일이다.
뚜벅뚜벅 걸어가서 보스 모가지만 따면 끝이라는 얘기니까.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들어간다.
제법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데도 보스 룸으로 향하는 문 앞까지 당도하는 데에 무려 30분이나 걸렸다.
“길다, 길어….”
만약 곳곳에 몬스터까지 배치되어 있었으면 두세 배는 족히 더 걸렸을지도.
문을 열기 전, 이곳에서 나오는 보스 몬스터에 대해 잠시 떠올렸다.
“뭐가 나왔더라….”
벌써 10년 전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법 징그러운 녀석이었던 것 같은데.
“…들어가보면 알겠지, 뭐.”
정확히 어떤 녀석인지는 모르겠는데, 하나만큼은 확실히 기억난다.
랭크가 그리 높지 않은 녀석이었다는 것.
그러니 크게 부담 갖지 않아도 되겠지.
가벼운 마음으로 거대한 문을 힘껏 밀어 열었다.
크그그긍….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은은한 달빛이 가득 들어찬 내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응?”
거대한 공동.
그곳에 응당 있어야 할 보스가 보이지 않는다.
“…뭐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혹시 놈들이 한발 앞서 던전을 공략하고 그것을 가져간 건 아닐까.
“제발, 제발, 제발.”
연신 ‘제발’이라는 단어를 되뇌며 공동을 가로지른다.
공동의 가장 끄트머리에는 은빛 마력을 머금은 달빛이 하염없이 쏟아지는 작은 구역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송이 꽃이 피어 있다.
99년 하고도 360일 동안 달빛을 자양분 삼아 꽃봉오리를 활짝 열어젖히기 일보 직전인 연노란빛 꽃 한 송이가.
“휴우!”
꽃의 존재를 확인하기가 무섭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행히 녀석들이 먼저 채간 건 아닌 듯했다.
어라.
그럼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꽃도 있는데 보스가 왜 없는….”
바로 그때.
머리 위에서 강렬한 인기척이 전해졌다.
키이이!
불길한 소리.
황급히 몸을 틀며 고개를 들어 올린다.
천장에서 이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리는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온다.
“아, 생각났다.”
얼굴 보니까 이제야 생각난다.
“월광지주.”
예쁘게 피어난 연노란 꽃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하염없이 달빛을 먹고 자란 거대한 거미.
녀석의 날카로운 발이 이쪽을 향해 쇄도했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은은한 달빛에 번들거리는 검은색 다리가 날카로운 창끝이 되어 날아든다.
창졸간의 습격.
그러나 위험하단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이쪽을 향해 쇄도하는 놈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기 때문.
“읏차.”
다리에 힘을 주어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원래 자리에 녀석의 육중한 체구가 떨어져 굉음을 자아낸다.
꽈앙!
피어오르는 흙먼지.
키이이익!
그 속에서 녀석이 분하다는 듯 울부짖으며 다리를 곧추세워 몸을 일으킨다.
가볍게 바람을 일으켜 흙먼지를 날렸다.
마침내 마주하게 된 녀석의 모습.
“어라, 더 커졌네.”
10년의 세월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듯, 커진 몸뚱어리가 눈에 들어온다.
온몸을 뒤덮고 있는 외골격 또한 한층 더 강해졌는지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있다.
“옛날에 봤을 때는 C급이었는데….”
측정기가 없어 정확한 측정은 무리지만, 그간의 숱한 경험을 살려서 추측하건대 지금은 대략 B급 턱걸이 수준은 되지 않을까 싶다.
“제법 매섭네.”
C급 최상위와 B급 턱걸이.
얼핏 보면 계단 한 칸 겨우 올라선 것 같은 느낌인데, 실상은 다르다.
몬스터에게 C급에서 B급으로 넘어간다는 건 한 차례 진화를 거쳤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한 계단 겨우 올라선 게 아니라, 한 층을 단숨에 올라 선 거라고 봐야 한다.
수치로 따지면 적어도 1.3배에서 1.5배는 강해졌겠지.
푸쉬잇!
놈이 실젖에서 거미줄을 뿜어낸다.
허공에서 넓게 퍼져 그물망처럼 날아드는 거미줄을 피해내기 위해 움직임을 크게 가져간다.
철썩!
목표를 잃고 떨어져 내린 거미줄이 땅바닥에 달라붙는다.
딱 봐도 밟으면 쉽게 안 놔줄 것처럼 끈적거린다.
녀석이 거미줄을 계속 쏘게 두면 그건 그것대로 성가셔지겠는걸.
“그럼 빨리 끝내야지.”
거미, 전갈 같은 몬스터는 단단한 외골격으로 제 몸을 둘러싸고 있다.
덕분에 높은 방어력을 지니고 있어 뚫어내기가 쉽지 않은 게 특징.
그렇다면 이러한 녀석들을 사냥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미 팀원들과 함께 간 개미굴에서 선보인 바 있듯, 마디를 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곧장 마력을 끌어모아 예기를 머금은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낸다.
「윈드 커터(Wind Cutter).」
외골격과 외골격 사이에 드러난 곳곳의 얇은 마디를 정확하게 노리고 들어가는 칼날.
이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개미들과는 달리, 녀석은 제 다리를 차례로 휘둘러 약점을 노리고 들어오는 칼날들을 모조리 없애버렸다.
생각보다 가드가 단단하네.
키키키키!
기세등등하게 웃는 게 꼭 옛날에 한 번 당하고 나서 칼을 간 듯한 느낌이….
“아.”
나 때문이구나?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꽃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조사 중인데 하도 귀찮게 굴길래 검기 다발을 날려 다리 마디마디를 전부 끊어놨었지, 참.
“…뒤끝 쩌네, 이 자식.”
설마 내가 그때와 동일 인물이라는 건 모르겠지만, 어쨌든 벼르고 있었던 모양.
푸쉿! 푸쉬쉿!
다시 한번 거미줄 뭉치가 쏟아진다.
녀석과의 거리를 좁히며 거미줄을 피해낸 뒤, 양손에 마력을 끌어모은다.
멀리서 쏘아내는 공격이 통하지 않으면 관절 마디마디에 직접 박아 넣는 수밖에.
시리도록 푸른 마력이 양손에 순백의 단검 한 자루씩을 만들어낸다.
「아이스 대거(Ice Dagger).」
얼음을 날카로운 송곳처럼 뽑아내 쏘아내는 아이스 니들에 변형을 가한 마법.
키아악!
순식간에 적잖은 양의 마력을 한데 모아 손잡이부터 칼끝까지 한 땀, 한 땀 직조해낸 단검의 내구도는.
카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