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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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가 하루 앞까지 다가온 날.

우리는 마지막 점검을 위해 밤 늦게까지 훈련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들어가.”

“오냐.”

한껏 지쳐있던 우리는 아래층에서 쿨하게 헤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신유정을 바라보다가 나도 몸을 돌려 옥상 계단을 밟아나간다.

“어우, 피곤해.”

오늘은 나에게도 제법 피곤한 날이었다.

오전 수업 이후 체단실에서 아주 강하게 몸을 혹사시키고, 모든 수업이 끝났을 즈음부턴 팀원들과 함께 포지션 훈련과 연계 훈련을 병행했다.

제아무리 회복력이 괴물 같은 몸도 이 정도 혹사는 버틸 수 없다는 듯, 회복이 더디다.

그래서 그런지, 발걸음이 축축 처진다.

내일은 중간고사의 시작인 만큼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빨리 씻고 자자.

생각을 정리하며 마침내 옥상으로 올라섰을 때.

“왔니?”

익숙한 목소리에 처져 있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옥상 한쪽에 놓인 평상.

그곳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아줌마.”

이제 막 여행을 마치고 온 듯했다.

평상 옆에 캐리어 가방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제법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표정은…, 오묘했다.

피곤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안정된 표정 속에 일말의 위화감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느낌.

“잘 지냈니?”

“네, 뭐….”

“밥은 잘 챙겨 먹었고?”

“유정이가 잘 챙겨줬어요.”

“그랬구나.”

무미건조한 대화가 오간다.

진짜 궁금했던 것들, 핵심적인 내용은 배제하고서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질문들만을 주고받는다.

여행 가방조차 집에 두지 않고 곧장 이곳에 있음은 그녀도 나름대로 각오를 굳혔다는 뜻.

그 결말이 어떨지는 몰라도 내가 시작한 이상, 여기서도 내가 이끄는 게 맞겠지.

“여행은 어땠어요?”

“…좋았어.”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 그녀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피어오른다.

“지금까지 안 가본 게 후회가 될 정도로 좋더라.”

그리고 거기에 미약한 아쉬움이 섞여 들어갔다.

“도진아.”

“네.”

“아줌마…, 해남에도 다녀왔어.”

“해남…이라면.”

어렴풋이 기억난다.

해남이라면 분명…, 아저씨가 근무하고 있는 곳이었지.

목적이야 어쨌든 그곳까지 가서 관광만 하고 오지는 않았을 거다.

아마 남편과도 만나 시간을 보내고 왔을 테지.

“아저씨는 잘 지내요?”

둘이서 어떤 시간을 보냈냐고 물으면 너무 직설적일 것 같아 조금 에둘러 표현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주 잘 지내고 있더라.”

그 말이 그냥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건 줄 알았다.

뒤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남편이 왜 집에 돌아오지 않는지, 그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힘없이, 조금은 처량한 표정으로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냥 나왔어요?”

“무슨 말이니?”

“그런 얘기를 들어놓고서 왜 화도 내지 않고 그냥 나왔냐고요.”

가정을, 남편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서 그런 취급을 받았는데, 어떻게 그 자리를 그냥 빠져나올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쌍욕을 퍼붓든, 두 년놈의 머리채라도 잡아 뜯든.

뭐라도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화가 난 마음에 잔뜩 짜증 섞인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아줌마는 말했다.

“그런 취급을 받은 것에 대해선…, 뒤늦게 화를 내봤자 달라질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단다.”

“…….”

“그이의 진심을 알게 된 순간, 이미 관계는 깨진 거나 다름없는 건데 얼굴 붉혀봤자 뭐 하겠니. 그나마 남은 추억이라도 기분 좋게 기억하려면…, 여기서 매듭을 마무리 짓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그랬어.”

아줌마는 평상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이가 외간 여자를 마음껏 주물러대는 모습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던 건…, 나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아.”

내 탓이었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화도 내지 못하고 자리를 뜨게 만든 것은.

내가 다가갔고, 그녀는 속절없이 말려드는 바람에 정당성을 잃고 말았다.

미안한 마음에 힘겨운 눈빛으로 쳐다본 그녀는 나를 똑바로 응시한 채 고개를 젓고 있었다.

“널 탓하는 게 아니야.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거잖니. 아줌마가 네가 내민 손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테니까…, 우리 두 사람의 잘못이라고 봐야겠지?”

“…그런가요.”

그녀는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려준 뒤, 그 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와 내게 오고 싶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단다.

홧김에 다른 선택을 하는 여자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홀로 딸을 키우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실컷 보고, 즐기며 한편으론 마음의 정리하고.

“이제 네게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아 널 기다렸어.”

그녀는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도진아, 네가 보기에 아줌마가 예쁘니?”

“네.”

나는 즉답했다.

이런 물음에 시간을 끄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없기에.

“그럼…, 그러면 있잖니.”

내 뺨을 살포시 덮고 있는 그녀의 손과 목소리가 동시에 떨리기 시작했다.

애처롭게 바라보는 눈빛에선 당장에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줌마는…, 끝까지 가지 않아도 좋아. 그냥 아줌마가 늙고, 병들어 여자로서 쓸모가 없어질 때까지…, 아니, 네 눈에 내가 예뻐 보이는 그 순간까지만이라도 좋으니까…, 그때까지만 날 사랑해주겠니?”

애써 눈물을 참으며 여행 도중 홀로 기나긴 밤을 지새우고, 또 지새우며 고민한 끝에 내렸을 답이, 간절한 마음이 내게로 전해졌다.

그녀와 나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젊고, 각성자인 내 신체는 세월의 흐름에 느리게 반응할 테고, 이미 40대 중반에 접어든 아줌마는 아무리 노력해도 빠르게 신체의 탄력을 잃어갈 테지.

그녀 또한 그것을 알고 있고, 염려하기에 이런 절충안을 내놓은 거고.

나는 눈앞에서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 그녀를 잡아당겨 품에 집어넣었다.

그녀의 말대로, 할머니, 할아버지와 관계를 꿈꾸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줌마를 때가 되면 버리겠다는 뜻은 아니고.

“아줌마.”

품에 안겨 있던 그녀가 주먹을 들어, 내 팔을 툭 때린다.

귀여운 불만의 표시.

“…정희야?”

“…….”

달라진 호칭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좋아하는 듯하다.

나는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네 말대로 할게. 네가 내 눈에 더 이상 예뻐 보이지 않으면…, 네게 솔직하게 말할게.”

그런데,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앞으로 넌…, 주변에서 마녀 소리를 들을지도 몰라.”

뜬금없는 마녀 소리에 내 가슴팍에 묻혀 있던 그녀의 얼굴이 빼꼼 드러난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그런 그녀의 얼굴에 한없이 다가가 끊임없이 속삭였다.

“넌 앞으로 훨씬 더 예뻐지고, 젊어질 테니까.”

언제까지?

“나와 함께하는 한 평생.”

남들 다 늙어가는데 계속 젊어지면 그게 마녀지, 별건가.

내 두 번째 삶의 목표는 이미 정해졌다.

원하는 건 뭐든 하고, 가진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이 갖고 싶으면 그걸 떨어뜨려서라도 가질 거다.

…물론 진짜 별이 가지고 싶다는 건 아니고, 불가능한 일도 되게 한다는 거지.

서정희도 마찬가지.

마침내 내 품에 안은 이상, 절대로 홀로 쓸쓸하게 늙어가게 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근데 당장 시간을 돌릴 능력은 안 되니까….

조만간 도둑질이라도 한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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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가 시작되었다.

기간은 5일.

첫째 날은 전부 이론 시험이라 쉽게 넘어갔다.

“시험 잘 봤어?”

나와 비슷한 시간에 시험을 끝마치고 나온 임나은이 물었다.

“으음, 글쎄.”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했고, 답도 꼼꼼하게 적어 넣기는 했는데 결과는 모르겠다.

오랜 시간 헌터로서 생활하다 보면 정석과는 다른 꼼수가 더 편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것들이 워낙 굳어진 게 많다 보니, 배운 대로 써야 하는데 자꾸만 거기다가 개인적인 방식을 덧붙여 쓰게 되더란 말이지.

결국 채점하는 교수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내 점수는 조금 달라질 예정이다.

“너는 잘 봤…구나.”

“응? 헤헤.”

굳이 묻지 않아도 얘 표정만 봐도 알겠다.

남들 다 울상인데 혼자 방긋방긋 웃고 있으면 둘 중 하나다.

시험은 애초에 안중에도 없거나, 너무 잘 봐서 걱정할 필요가 요만큼도 없거나.

나은이의 성격상 전자는 절대 불가능하니까 후자겠지.

“우리 점심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얼마나 기쁜지 점심까지 산단다.

평소 같으면 기꺼이 함께 점심을 먹었을 테지만….

“미안.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빨리 가봐야 돼.”

“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임나은.

나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안함 가득한 말투로 대답했다.

“미안. 대신 내일 내가 점심 살게.”

“응, 약속이다?”

“그래.”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나서야 표정이 밝아지는 임나은.

나는 곧장 그녀와 헤어져 교문 앞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택시에 올라탔다.

“아저씨, 동서울 터미널이요.”

“예에.”

동서울 터미널로 향하는 이유는 뻔하다.

오늘 볼 일이 서울이 아닌, 서울 밖에 있기 때문.

곧장 택시를 타고 동서울 터미널로 가 버스표를 구매했다.

목적지는 강원도 태백.

목적은 그곳에 숨겨둔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김밥 세 줄로 적당히 배를 채우고 시간에 맞춰 버스에 올라탔다.

태백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가는 데에 걸린 시간은 두 시간.

새삼 시대가 많이 발전했음을 느꼈다.

“태백까지 두 시간이라니, 세상 참 좋아졌네.”

마정석을 동력원으로 삼는 고속버스의 속도가 일반 버스에 비해 월등히 빨라진 덕분이었다.

대기 중인 택시를 타고 다시 어디론가 향했다.

마침내 당도한 곳은 태백산 입구.

바로 이곳에 여기까지 온 목적이 숨어 있다.

“어휴, 고생 꽤나 하겠네.”

험난한 하루가 예상된다.

대략적인 위치만 기억이 나서 조금 헤맬 가능성이 높기에.

그럴 일은 없으면 좋겠지만, 산속에서 저녁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으니 간단한 식량을 좀 챙겼다.

육포도 챙기고, 물도 챙기고.

준비를 마친 뒤, 곧장 산길에 발을 들였다.

이따금 마주치는 등산객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지나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등산과는 거리가 먼 차림새라 그렇겠지.

적당히 등산로를 따라 걷다가 주변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곧장 방향을 틀었다.

정해진 등산로가 아닌, 좀 더 야생의 기운이 넘치는 길로 들어선다.

“어디였더라…, 이쪽인가?”

흐릿한 옛 기억을 이정표 삼아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더 위로 향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난항에 부딪힌다.

“쓰읍…, 여기가 아닌가.”

세월도 제법 오래 흐른 데다, 계절까지 달라 영 갈피를 잡기 힘들다.

“아예 엉뚱한 곳으로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아주 희미하게나마 살아 있는 감각이 방향이 크게 틀어지진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허나 딱 거기까지라 지금부터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몸이 고생을 좀 해야 할 듯싶다.

어렴풋이 기억이 남아 있는 곳에 마력으로 마킹을 해둔 뒤, 그곳을 중심으로 주변을 살폈다.

전혀 아니다 싶은 곳이면 돌아오고, 조금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곳이면 마킹 남기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찾아왔다.

“쓰읍…, 슬슬 아슬아슬한데.”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되면 오늘 서울로 못 돌아갈 수도 있는데….

“너무 성급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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