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서연이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딱딱하다는 말이 가지는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한 걸까.
그러다 녀석이 다시 내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
이거 아주 웃기는 애네.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아….”
“말했다시피 저는 검술에 대해선 문외한이라 감상을 말하는 게 전부에요. 그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는 건…, 어디까지나 선배 몫이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두루뭉술한 감상으로 문제점이 무엇인지 찾고, 해결하는 건 온전히 녀석의 몫이다.
그리고 그걸 해결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녀석의 실력은 위아래로 크게 요동치겠지.
“미안, 네 말이 맞아. 해결은…, 나 스스로 해야 하는 문제겠지.”
녀석의 말투가 참 미묘하다.
마치 세상에 홀로 덩그러니 놓인 사람처럼 말을 하네.
“…손시우 헌터에게 봐달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자 녀석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 정도는…, 나 스스로 해결해야지.”
글쎄.
자립심 강해보이는 말과 달리, 말투는 씁쓸하기 짝이 없는데.
대체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나 싶다.
제 아빠가 말 걸 때마다 찬바람 쌩쌩 불던 녀석과 눈앞에 있는 녀석이 동일 인물이 맞는지 의심하게 될 정도.
“아무튼…, 조언 고마워. 그럼 가볼게.”
“네.”
어두운 표정을 수습한 뒤, 녀석이 지나쳐간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신유정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너 그거 아냐?”
“뭐가.”
“네가 팀원 중에 유독 서연 선배한테만 쌀쌀맞게 구는 거.”
“내가 그랬나…?”
얼추 맞는 말이다.
지금의 나는 선을 찾고 있다.
녀석을 어떤 식으로 대해야 적당한지.
이유 없이 쌀쌀맞게 구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친근하게 대하는 것도 이상하고.
어쨌든 엮이게 되었으니 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깝다고는 볼 수 없는 그런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흐흥.”
그리고 녀석은 그런 내 노력이 다른 의미로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걸 보면.
진짜 알기 쉬운 애라니까.
* * *
“왜 집에 안 가냐고…?”
언제부터 마셨는지 살짝 꼬부라진 혀로 그가 말을 내뱉기 시작했을 때.
뒤편에 숨죽이고 앉아 있는 서정희의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이어질 말에 한껏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예의 종업원이 그녀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맛있게 드세요.”
“아, 네.”
주문했던 맥주와 골뱅이 무침이 그녀의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서정희는 무엇 하나 손에 쥘 수 없었다.
오직 신효섭의 입에서 나올 말만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궁금증은 뒤로 미뤄지고 말았다.
제 테이블 위에 술과 안주를 올려놓았던 종업원이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가면서.
“세 분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계세요?”
그녀에게 말을 걸 때와는 사뭇 다른 교태어린 말투.
이에 세 사람이 한껏 녹아내린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가장 적극적인 태도로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신효섭이었다.
“어, 미스 김! 시간 괜찮으면 앉아서 한잔 하고 가. 응?”
“후후…, 그럼 잠깐만 있다 갈게요.”
“우리 마돈나가 왔는데 식어 빠진 안주를 대접하면 쓰나. 미스 김이 먹고 싶은 안주 다 시켜. 오늘은 내가 쏜다!”
“와아, 정말요?”
“아, 그럼!”
외간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려둔 채 술잔을 기울이는 신효섭.
그 모습을 본 서정희는 제 눈과 귀를 의심했다.
지금껏 살아오며 본 적 없는 남편의 새로운 면모에 좀처럼 정신을 수습하기가 힘들었다.
한껏 신이 난 신효섭의 주도하에 테이블이 풍성하게 채워졌다.
술도 달라졌다.
소주에서 값비싼 양주로.
미스 김이라 불린 종업원 여인에게 싸구려 술을 마시게 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
허탈함 가득한 외마디 웃음이 서정희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럼에도 한 번 차오른 열기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맥주잔을 쥔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난….’
처음 남편의 근무지가 해남으로 정해졌을 때.
그녀는 매일 같이 가슴을 졸였다.
단순히 해역을 감시하는 일이지만, 아예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감시대원의 감시 소홀 또는 예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균열이 등장하면 가장 먼저 휩쓸리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었기에.
그 마음은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전화를 끊을 때면 언제나 조심하라는 당부를 마지막으로 전하곤 했다.
그랬는데.
“아, 아까 전에 무슨 얘기들 하고 계셨어요?”
“아~ 그거? 효섭 형님이 워낙 집에 안 가시니까 왜 안 가시는가, 하고 물어봤었지.”
“그러고 보니 아직 대답 안 해주셨잖아요, 형님.”
“아…, 그랬나?”
이미 취할대로 취한 남편은 조금 전의 일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마누라가 말이야… 참 좋은 사람이거든. 예쁘지, 음식 솜씨 좋지, 서울에 건물도 있지….”
손가락 하나씩 접어가며 말을 잇는 신효섭.
거기까지만 듣는다면 그저 제 아내를 칭찬하는 팔불출 남편의 자랑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속내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정말…, 완벽한 여자야. 나한테는 과분하다 싶을 만큼. 그래서…, 그 여자 옆에 있으면 내가 너-무 작아져.”
두 사람이 대학교 커플로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갈 무렵.
한 번의 실수로 아이를 갖게 되었다.
두려웠지만, 상관없었다.
그때는 서로를 너무도 사랑했고, 젊은 날의 패기는 사랑만 있다면 어떻게든 둘이서 인생을 꾸려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모아둔 돈도, 변변찮은 직장도 없는 상태에서 부부가 되었다.
“내가…, 그때 정말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 참 많이 애썼거든? 근데…, 삶이란 게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더라고.”
그때의 그는 젊고, 의욕이 넘쳤다.
어떻게든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 일, 저 일 다 해가며 돈을 벌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벌어도 빠듯했다.
간신히 한 달 벌어, 한 달 겨우 먹고 사는 인생.
그러다가 유정이가 다섯 살이 되었을 즈음인가.
서정희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남기고 간 유언장의 내용대로, 그녀는 빌라의 건물주가 되었다.
낡고 허름한 건물.
그러나 그곳에서 다달이 나오는 월세는 세 가족이 풍족하게 먹고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더 이상 월세 걱정, 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더없이 기뻤지만…, 그는 어쩐지 스스로가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차피 빌라에서 나오는 월세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생각이 그를 좀먹었다.
점점 유약하게 변했고, 의욕은 잃어갔다.
자괴감에 빠지고, 스스로를 못난 인간이라고 여기게 됐다.
그럼에도 아내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름답고, 헌신적인 그때 그대로 자신을 보살펴주었다.
편하고, 안락했지만…, 남자로서의 중요한 무언가를 거세당한 것처럼 허전했다.
그렇게 빈 껍데기처럼 살아가다가, 그에게 축복이 찾아왔다.
뒤늦은 나이에 각성자가 된 것.
비록 나이가 많고, 특성이 전투에 적합하지 않아 헌터가 될 수는 없었지만 운 좋게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해남 감시대대 대원으로서의 삶.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이 들었게?”
“흐응…, 글쎄요. 우리 신 대원님께선 어떤 생각을 하셨으려나.”
제 말에 적절한 조미료를 뿌려주는 미스 김의 사근한 태도에 속절없이 웃는 신효섭.
“흐흐…, 기뻤어.”
해남 감시대대의 대원이 된다는 것은 곧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함을 의미했다.
분명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는 기쁜 마음이 더 컸다.
나태하게 살아오면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한량 기쁜 마음으로 가족들과 멀어졌다.
처음에는 서울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이 걱정되어 자주 집을 찾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 잘나신 마누라는 나 없이도 애 잘 키우고, 잘 살더라고.”
아내는 언제나 집에 오면 기쁜 마음으로 반겨주었지만, 그는 점점 생각이 달라졌다.
자신은 이제 없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때부터 집에 가는 주기를 천천히 늘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집을 찾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더라.
그는 확신했다.
자기는 이 집에 없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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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술에 취해 넋두리처럼 내뱉는 신효섭의 말에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며 눈을 껌뻑였다.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난감했기 때문.
일반적인 반응이라면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음에 기뻐해야 옳은 것 아닌가.
그간 힘들게 살아온 데에 대한 보상이라며 말이다.
그러나 취기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잔뜩 드리운 것은 자격지심과 열등감이었다.
어떤 말로 이 화제를 전환해야 좋을지, 두 사람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신효섭과 몸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앉아 있던 미스 김이 그를 옹호했다.
“어머나…, 우리 신 대원님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안타까움으로 가득한 음성.
그녀는 그의 빈 잔에 양주를 가득 따라 넣었다.
“우리 이렇게 생각해요.”
“응…?”
눈 뜨는 것조차 힘겨워진 그의 귓가에 은밀한 속삭임이 전해졌다.
“지금까지 힘들었던 시간은 전부 지금이라는 시간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말이에요.”
따스한 위로와 다정한 말 한마디.
그의 입가에 음험한 미소가 그려졌다.
“역시 미스 김밖에 없다니까.”
그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제 지난날의 서러움과 힘든 마음을 이해해주는 건 오직 그녀뿐이라고.
신효섭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못 이기는 척 끌려온 그녀의 목덜미에, 그는 제 얼굴을 파묻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미스 김의 입에서 야릇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앙…, 간지러워요….”
이 모든 장면을 귀로 듣고, 눈으로 담고 있던 서정희는 쿵쾅거리는 심장이 당장에라도 입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아, 하아….”
머리가 어지럽다.
숨을 양껏 들이마시고 있음에도 온몸에서 산소를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듯하다.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건물이 양도되고, 가난했던 삶이 윤택해졌을 때.
도리어 남편은 열등감에 시달려 한없이 위축되었음을.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 또한 노력했고 그로 인해 힘들어했다.
‘자기만 힘들었는 줄 알아…?! 나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행동거지, 말투 하나하나에 신경 썼다.
혹여 남편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오해할 만한 행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바닥까지 떨어진 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가 조금이라고 관심 보이는 건 무엇이든 하게 했고, 응원해주었다.
그 모든 시간이 그녀에겐 스트레스였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는 건 없었고, 자그마한 행동에도 그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래도 그녀는 참았다.
남편을 사랑했으니까.
그가 아내와 딸을 위해 헌신했던 순간들이 여전히 기억에 또렷했으니까.
또 언제고 그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래서였다.
혼자 해남으로 가겠다는 남편을 만류하지 않은 것은.
마음 같아선 가족 전체가 이사해서 함께 살고 싶었지만, 남편의 뜻을 존중했다.
후련함?
그런 건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먼 곳에서 홀로 지내는 남편을 걱정했고, 그리워했다.
그의 전화가 오지 않는 날이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그가 오는 날만을 기다렸다.
그랬는데.
“아응…, 정말.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뭐 어때.”
서로의 몸에 스스럼없이 손을 대는 걸로 봐선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그리 지내온 듯했다.
그녀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 이상의 정보는 필요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