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20)

대형 길드 중 일부는 대학교 성적 상위 20% 이내인 학생은 무조건 채용하는 전형을 따로 만들어두기까지 했을 정도.

던전 실습은 시험 중에서도 성적 비중이 높은 것 중 하나다.

여기서 말아 먹으면 다른 곳에서 복구가 힘들 정도.

그러다 보니 이 지경이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만나다가 지금은 거의 평일 내내 모여서 훈련도 하고, 던전도 가고.

“엘레나! 커버가 조금 늦어.”

“미안합니다!”

가장 열의를 보이는 사람은 누구도 아닌 신유정이었다.

얘는 진짜 헌터라는 직업에 진심이라는 게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하게 전해진다.

나름대로 전술 공부도 하고 있는지, 내 눈에 열 가지가 거슬린다면 그중 셋에서 넷 정도는 알아서 조원들에게 조언하고, 고쳐나간다.

“서연 선배, 지금 포지션에선 검보단 마법이 나았어요.”

“아…, 그래?”

“…….”

내가 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건 서연이와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말도 된다.

처음에는 마주치고 대화하는 게 너무 어색하고, 불편해서 걱정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괜찮다.

뭐랄까…, 여전히 신경이 쓰이고, 눈길이 가지만 손시우일 때처럼 과하진 않은 느낌?

그래서 최근에는 감정 대신 다른 부분이 더 신경 쓰인다.

“쓰읍…, 저거 저렇게 하는 거 아닌데.”

서연이가 멋대로 보고 배운 검술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제법 맛도 잘 살리고,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듯하지만 부족한 게 너무나도 많다.

예상컨대, 녀석은 제 눈으로 보고 익히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을 거다.

아마 저 검술들도 내 모습을 보고서 스스로 깨우친 거겠지.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손시우는 내가 아니라는 것.

그 말인즉, 녀석에게 깨달음의 단초를 얻게 해줄 손시우의 검술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했다.

물론 우리 짭시우가 내 몸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내가 정말 웬만해선 이런 말 안 하는데, 그건 글러 먹은 놈이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오직 편한 길만 고집하는 돼먹지 못한 인간.

뭐…, 각자에게 개성이 존재하듯 그러한 삶도 최대한 존중하기는 한다.

그런데 내 몸으로는 그래선 안 된다.

내 몸뚱어리는 편한 길 대신 가시밭길을, 게으르지 않고 성실해야만 하거든.

말하자면 녀석의 성격과 내 몸은 상극 중에서도 상극이라는 뜻.

최근 인터넷에서 녀석에 대한 기사를 읽은 게 있다.

지쳤다는 핑계를 대며 안식년을 갖겠다고 했던가.

지금까지 손시우가 해온 업적들이 있어서 여론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편이기는 한데.

“고작해야 1년 도망쳐서 될 게 아닐 텐데.”

놈의 안 좋은 성격이 안 좋은 방향으로 발휘되었을 확률이 높다.

일단 도망치고 보자는 식으로 안식년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겠지.

그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놈은 그렇게 번 시간을 알차게 사용하지도 않을 거고.

“다시 바꿀 생각이라도 하고 있으려나.”

아마 녀석은 자기가 마음대로 내건 상호불가침 조약이 끝나는 3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 한주희와 쇼윈도 부부라는 것도 알아차렸을 테고, 내 삶이 마냥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을 테니까.

어떻게든 버티고 버틴 다음, 나와 다시 몸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쩌지.

“내가 싫은데.”

놈과 달리, 나는 이 몸뚱어리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거든.

얼굴도 잘생겼고, 키도 슬슬 원래의 몸에 근접해가고 있는 상황.

부? 명예? 그딴 건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손에 들어오게 돼 있다.

이 몸뚱어리가 가진 재능은 그만큼 대단하거든.

아마 상호불가침이 끝나고 서로를 마주할 수 있게 되는 3년 뒤쯤이면 녀석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수준까지는 충분히 가능하지 싶은데.

“기대되네.”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걸 억지로 참았다.

궁금하고, 기대된다.

본인이 쓸모없고 비루하다고 버린 몸뚱어리의 가치가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천고의 가치를 지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과연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야, 김도진! 마법 안 쏘고 뭐…!”

콰앙-!

“응? 왜?”

“…아니, 잘했다고.”

싱겁기는.

.

.

.

.

.

.

.

오늘 일정이 모두 끝났다.

던전 공략도 실수 없이 잘 해냈고, 엘레나는 돈 벌어서 기뻐하고, 합은 더 견고해졌고.

옷을 갈아입고 신유정과 함께 집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앞에 익숙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는다.

“하실 말씀이라도?”

“응, 있어.”

서연이다.

녀석의 시선은 신유정이 아닌 나에게로 향해 있었다.

아무래도 볼일은 나한테 있는 모양.

“아까 들었어.”

“…뭐를요?”

“내가 검 쓸 때, 네가 그랬잖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순간 소름이 돋을 뻔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임나은도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는데, 그걸 들었다고?

소머즈야, 뭐야.

“그렇게 말을 했다는 건 뭔가 더 나은 방법을 알고 있다는 뜻이잖아.”

“…….”

“그러니 알려줘. 내 검술을 보면서 네가 느낀 바를, 내게 전부.”

언제나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를 비추고 있다.

그것도 아주 강렬한 열의를 품고서.

* * *

서정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늦은 오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여행 중이니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다는 게 첫 번째요, 지난밤 깊은 고민으로 시름하다 연거푸 들이켠 와인으로 인한 숙취가 두 번째 이유였다.

“아, 머리야….”

지끈거리는 두통마저도 그녀는 썩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이토록 술을 마셔본 것도 정말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기에 그마저도 좋았다.

말끔하게 씻고, 화장하고, 조식을 끝마친 뒤 그녀는 아쉬움 가득한 시선으로 호텔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쉽네. 정말 좋았는데….”

원래는 이곳저곳 더 길게 이어가고 싶었는데, 마냥 즐길 수만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체크 아웃을 하고 나온 서정희는 곧장 버스표를 예매했다.

목적지는 해남.

남편이 일하고 있는 곳이었다.

‘일단 가서 만나자.’

솔직히 아무것도 모르겠다.

남편을 마지막으로 본 건 올해 설날.

반년이 넘도록 만나지 못한 남편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어떤 감정이 들지.

또 남편은 불쑥 찾아온 자신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지금까지는 모르는 채로 두었지만, 이제는 알고 싶어졌고, 알아야만 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세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해남에 도착했다.

한반도의 최남단.

남편의 직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전망대였다.

관광객들이 찾는 전망대가 아닌, 바다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한 전망대.

던전은 땅 위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바다 위 허공에서도, 균열은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을 몰랐던 과거에 바다에 인접한 도시들이 커다란 피해를 떠안았다.

그때 이후로 바다와 인접한 도시에는 특수한 전망대가 생겨났다.

해상을 감시하는 해역 균열 감시대의 터전으로서.

남편은 그런 감시대의 일원이었다.

7급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감시대의 감시대원.

“아직 일하고 있겠지….”

남편은 말했다.

최근 감시대원의 수가 줄어드는 바람에 업무 시간이 크게 늘어났다고.

덕분에 주간, 야간 가리지 않고 눈이 빠져라 바다만 들여다보고 있다던가.

전망대 근처로 다가가자, 철조망으로 이루어진 입구 앞을 막아서고 있던 무장 군인이 그녀에게 정지 신호를 보내왔다.

“이곳은 통제 구역입니다.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아…, 저 남편을 만나러 왔어요.”

“남편 성함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신효섭이에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기기에 무언가를 입력하던 군인이 난색을 표했다.

“신효섭 씨는 오늘 퇴근하신 걸로 나와 있는데, 혹시 연락을 안 하시고 오셨습니까?”

“아…, 벌써 퇴근했나요?”

“예, 오늘은 주간 근무셔서 한 시간 전에 퇴근하신 기록이 남아 있네요.”

일순 그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군인이 건넨 말은 남편이 항상 하던 말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했는데….’

하루도 제시간에 퇴근하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고 했다.

주말에도 매일 같이 근무에 불려 나가는 바람에 죽을 맛이라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군인이 그녀에게 아는체하며 다가왔다.

“효섭 씨 아내 분이십니까?”

“아, 네….”

“이야…, 효섭 씨한테 이런 미인 아내 분이 있으셨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서정희의 귀가 살짝 쫑긋거렸다.

그의 말투를 보아하니 남편과 제법 친분이 있는 사이인 듯했다.

“호호, 감사해요. 퇴근했다고 하니, 남편 숙소로 가봐야겠네요.”

그녀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할 때, 사내가 그녀의 걸음을 제지했다.

“어, 지금 효섭 씨 주점에 계실 겁니다.”

“주점…이요?”

“예. 근처에 저희가 자주 가는 주점이 있는데, 효섭 씨가 저희 중 최고 단골이거든요.”

서정희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애써 차분한 표정을 가장하여 사내에게 물었다.

“그 주점 위치 좀…, 알려주시겠어요?”

“예, 이 길로 쭉 가신 다음에 우측으로….”

상세하게 길을 안내해준 사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뒤, 서정희는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요동친다.

사내가 말한대로 주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애초부터 전망대에서 근무하는 감시대원들을 주 고객층으로 삼고 오픈한 가게인 듯하다.

그녀는 천천히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진하게 내려앉은 어둑한 분위기 속에서 미약한 전구가 빛을 뿜는다.

서정희는 어렵지 않게 남편을 찾아냈다.

그리 멀지 않은 테이블에 동료로 보이는 사내 둘과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기에.

울화가 치밀었다.

‘나한테는 바빠 죽겠다고 했으면서…!’

곧장 달려가 따져 물으려던 그녀는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남편의 진짜 생활은 어떤 모습인지.

따지기보다, 오늘은 그것을 더 알아봐야겠다고, 그녀는 생각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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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는 썩 마음에 든다.

그저 후배가 장난삼아 던진 말일 수도 있는데 이토록 열의를 내비치는 건 그만큼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자세가 잘 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으음….”

근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얘를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일단 명분이 없다.

서연이가 다루는 검술은 손시우가 창안했고, 손시우만이 사용하는 검술.

그걸 삼자에 불과한 내가 가르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좀 뭐랄까…, 좀 괘씸하다는 생각도 살짝 든다.

내가 예전에 검술 가르쳐준다고 했을 때는 그렇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면서 갑자기?

결과적으론 한주희의 만류에 부딪히는 바람에 검술을 가르치지 못한 게 맞다.

그러나 그때 서연이의 태도가 지금과 같았으면 어땠을까.

제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딸내미의 열의를 가로막지는 못했겠지.

아무튼.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검에 열의를 보이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서연이를 가르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배가 아시다시피 전 마법사라 검술 같은 건 잘 몰라요. 근데.”

다만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아비와 딸의 관계를 벗어두고, 딱 팀원으로서 해줄 수 있는 조언만 해주기로 했다.

“저도 손시우 헌터 팬이라 영상을 많이 찾아봤는데, 선배랑은 느낌 자체가 달라요.”

“느낌이…, 달라?”

영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이다.

그렇겠지.

본인은 제 아빠 검술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녀석은 무언가 크게 오해하고 있다.

빠르고 날카로워야만 검이 비로소 상대를 베어 넘길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손시우 헌터에 비해 선배의 검은 뭐랄까…, 딱딱하게 굳어 있는 느낌이랄까.”

“딱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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