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20)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치렁치렁하게 휘감긴 단단한 사슬들이 그가 움직일 수 없도록 꽁꽁 묶어두고 있었다.

심연의 존재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말끔하게 제 몸을 포기했다.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몸체가 떨어져 나가고, 작디작은 몸뚱어리만 남게 되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쌓아 올린 힘을 내던졌음에도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쉬움을 느끼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그저 묵묵히 거리를 좁혀나갈 뿐.

느릿하지만 우직한 걸음.

만남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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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면식이 있고 난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수업이 있어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캉캉캉!

문 두드리는 느낌만으로도 누군지 알겠다.

저렇게 발로 거칠게 찰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지.

“야, 문 열어!”

역시 신유정이다.

쟤가 아침부터 웬일이람.

오늘 입으려고 꺼내둔 셔츠를 대충 걸치고 걸어가 문을 연다.

“뭐 하는데 이렇게 늦게 문을 열….”

습관적으로 짜증을 토해내려던 녀석의 말이 끝으로 갈수록 느려지더니 이내 말문이 막혔다.

노골적인 시선이 열린 셔츠 틈새로 전해진다.

목울대가 사정없이 출렁이는 걸 보니, 군침이라도 삼키는 모양.

저거 은근히 변태라니까.

“아침부터 웬일이야?”

일부러 셔츠 단추를 채우며 말하자, 녀석이 입맛을 다신다.

“쩝…, 아침 먹으라고.”

“헤에.”

신유정이 내 아침을 챙기다니, 조금 의외인데.

“뭐냐, 그 눈빛.”

“그냥 좀 신기해서?”

솔직하게 얘기하자 녀석은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잖아. 엄마가 자기 없는 동안 네 아침 꼭 챙겨 먹이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녀석의 말에 내 눈이 살짝 커졌다.

없는 동안…이라면 아줌마가 어디 가셨다는 이야기 같은데.

그것도 며칠씩이나.

“서…, 아니, 아줌마 어디 가셨어?”

이름을 한 번 입에 담으니까 계속 부르려고 하네.

앞의 말을 애써 얼버무리며 당황 섞인 말투로 아줌마의 행방을 물었다.

“몰라.”

“…모른다고?”

“어. 잠깐 바람 좀 쐬고 싶다고 며칠 다녀온대. 어디 갈 거냐고 물어보니까 비밀이래.”

“아, 그래….”

“난 엄마가 너한테도 말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그러게.”

갑작스러운 여행의 결정은 아마 나 때문이겠지.

걸린 게 너무 많은 사람에게 내던져진 강한 돌직구와 같은 고백은 좋음보다 아픔이 컸을까.

나한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떠났음은 분명 시간이 필요해서일 것이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내 고백에 대한 답을 결정할 시간.

그 와중에도 내 아침을 꼭 챙기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다는 말에 새삼 애틋할 따름.

“기다려야겠지….”

“뭘 기다려?”

문득 입밖으로 새어 나온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 신유정.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오늘 아침은 네가 한 거야?”

“반찬이야 뭐, 냉장고에 넘치니까. 그냥 된장찌개만 간단하게 끓였는데…?”

“네가 끓였다니까 엄청 기대되네. 식기 전에 가서 먹자.”

“…기대라는 말이 영 꺼림칙하게 들리는 건 내 착각이냐?”

“그럴걸.”

아줌마…, 서정희가 말없이 여행을 떠난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다.

그저 기다리는 것.

얼마나 걸릴지, 그것으로 생각이 전부 정리가 될지, 또 그렇게 내린 결정이 무엇일지.

전부 알 수 없지만, 그저 믿고 묵묵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지.”

그녀에게 어떤 대답을 듣느냐에 따라 기분은 좀 달라지겠지만, 생각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난 절대 그녀를 포기할 생각이 없거든.

“야, 빨리 안 오고 뭐 해?”

“지금 가.”

아래층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상념을 접어두고 곧장 내려가 둘만의 아침 식사를 끝마쳤다.

신유정이 만든 된장찌개를 맛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서정희를 포기해선 안 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고.

* * *

그녀가 여행을 결심한 것은 사뭇 충동적이었다.

어디론가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문득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

자신이 떠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도 다 컸는데 더 이상 내가 못 떠날 이유는 없지.’

옛날이야 어린 딸을 두고 갈 수 없어 여행을 꿈도 꿀 수 없었다곤 하나,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그날 저녁, 그녀는 곧장 기차표를 예매했다.

딸한테도 잠깐 여행 좀 다녀오겠다 했더니 흔쾌히 받아들이더라.

기차표 예매부터 짐을 꾸리기까지 정확히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무언가 허무한 마음에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쉬운 걸 대체 왜….”

이토록 쉬운 것들을 왜 지금까지 하지 못하고 살았나,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어스름한 새벽.

부푼 마음을 안고 서울역에서 기차에 올라탔다.

그녀의 목적지는 전라북도 정읍.

가을의 그곳이 무척이나 예쁘고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어서였다.

이윽고 도착한 정읍.

그곳에서 본 빨갛고 노란 풍경은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다웠다.

“하아…, 좋다.”

모든 게 좋았다.

아름다운 풍경도, 더없이 홀가분한 마음도.

그녀는 경쾌한 걸음걸이로 곳곳을 오갔다.

내장산 국립 공원의 케이블카를 타고 발밑에 드리워진 풍경을 내려다보고, 단풍 터널이라는 곳에도 가보았다.

빨갛고, 노랗고, 채 물들지 못해 남아 있는 파릇한 녹색까지.

세 가지 색이 한데 모여 어우러져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위를 덮고 있는 단풍잎들이 왜 뻥 뚫린 이곳을 터널이라 부르는지 알게 해주었다.

“사진 찍어서 우리 딸한테도 보여줘야지.”

한껏 신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곳곳의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제 얼굴을 가을의 단풍잎마냥 붉게 물들인 사내가 수줍은 걸음으로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기….”

“어머나!”

난데없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서정희.

그러자 사내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노,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정중한 사과에 서정희는 이내 안색을 회복하고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사진 찍는 데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나 봐요.”

그녀의 너그러운 대응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사내의 얼굴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어쩐 일로…?”

“아, 저, 그게.”

사내는 우물쭈물거리며 대답을 망설이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그녀를 향해 외쳤다.

“저, 저기! 호, 혼자 오셨으면 저랑 같이 주변을 둘러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머.”

서정희는 또 한 번 놀랐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사내의 나이는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많이 쳐줘야 30대 초반쯤일까.

조금 어수룩해 보이긴 하지만, 생김새도 나쁘지 않고 차림새도 썩 괜찮았다.

그래서 조금 의아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곧장 사내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머, 멀리서 보는데 너무 예쁘셔서요. 그, 제가 원래 절대 이런 식으로 말을 거는 사람이 아닌데…, 안 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예쁘단다.

어림잡아 30대 초반밖에 되지 않은 남자가, 40대 중반인 자신에게.

문득 궁금해졌다.

“제가 몇 살처럼 보이세요?”

난데없는 물음에 사내가 당황하며 답하길.

“예? 아, 그…, 한 30대 초반 정도….”

“호호, 그래요?”

가슴에 서서히 차오르는 기쁨.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제안은 정말 고맙지만, 거절할게요.”

“아….”

그렇게 말하며 서정희는 사내에게 보이지 않았을 제 오른손을 들어 보여주었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사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유부녀이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니에요. 덕분에 기분 좋았어요.”

실제로 그러했다.

아직 여자로서 매력이 떨어지지 않았구나 싶어 기쁨과 동시에 안도했다.

기분 좋은 해프닝을 겪은 뒤, 그녀는 저녁쯤에 예약해둔 호텔 방에 들어왔다.

조금 더 비싼 돈을 들여 야경이 좋은 방을 잡은 보람이 있었다.

위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룸서비스로 와인과 간단한 안주를 받아 한 잔 들이켰다.

“하아…!”

술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느낌.

바쁘게 돌아다니며 쌓인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그녀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후후….”

다시 생각해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약간 의아한 점도 있었다.

사내의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 약지에 낀 반지를 보여줄 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는 남편이 아닌, 김도진이었다.

“밥은 잘 챙겨 먹었으려나….”

자꾸만 마음이 간다.

이제는 남편의 끼니보다 김도진의 끼니를 더욱 걱정하고 있다.

예전에는 오래도록 전화가 안 오면 궁금해서라도 먼저 전화를 걸곤 했는데, 이제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자신이 조금씩 두려워진다.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불륜에 빠진 나쁜 여인이 되는 것만 같아서.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헤어 나올 수가 없다.

그는 무서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더욱 자신을 뒤흔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쪽이었고.

“어떻게 해야 하지….”

시름에 잠기는 서정희.

그의 혈기 넘치는 고백은 그녀를 행복에 잠기게 만들었다.

마음 같아선 그의 품에 안겨 함께 가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한들, 그녀에게는 남편이 있으니까.

사실 그녀가 진정으로 두려운 건 남편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김도진이 마음을 부딪쳐 오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명절에나 겨우 보는 게 부부 관계라고 말할 수는 있나.

이렇게 떨어져 사는 거나, 아예 헤어져서 남남으로 사는 거나.

대체 달라질 건 또 무엇일까, 하고.

기나긴 밤 동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혼은…, 망설여진다.

그러나 김도진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도 이제는 쉽지 않음을 안다.

혼자서 시름하던 그녀는 여행의 행선지를 바꾸었다.

땅끝마을 해남.

남편이 바삐 일하고 있을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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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가 가까워짐에 따라 우리는 더 자주 만나게 되었다.

어느 대학이 안 그렇겠냐만, 한국 대학교의 성적은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매년 3월이 되면 대형 길드에 수없이 많은 가입 신청이 쏟아진다.

그 수는 어림잡아 수천에서 수만.

제아무리 인재를 뽑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그들 전부를 만날 수는 없는 법.

결국 그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건 이력서다.

특성은 무엇이고, 기본 능력치는 어느 정도고, 던전 공략 이력은 어떻게 되는지 등.

거기에 한국 대학교 학생은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성적.

한국 대학교 학생들은 내로라하는 재능들이 모인 곳.

그곳에서 숱한 경쟁자들을 이겨내고 높은 성적을 차지했음은 그 자체로 훈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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