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120)

나는 그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 동안 당신이 괴로워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어쩌면 간혹 힘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다른 여자의 존재를 눈치챈다던가, 내가 모녀 덮밥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면, 음….

그래도 나는 답을 찾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니까.

“나랑 끝까지 가자, 정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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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가까워져 오는 시각.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내비친 진심을 전해 들은 서정희는 수락도, 거절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현관을 나서기 전, 그녀는 말했다.

자기에게 시간을 좀 달라고.

“…뭔가 헛헛하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진다고 했던가.

난 당연히 그 자리에서 승낙할 줄 알았다.

“너무 내 생각만 했었나.”

풀악셀을 밟다 보니 잠깐 잊고 있었다.

내 대답에 그저 마음 하나로 응하기에 그녀의 삶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나를 선택한다는 건 그녀가 가진 것들 대다수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당장 답을 내릴 수 없는 것도 당연하지.

“으음.”

성급했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한꺼번에 전부 내비치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관계가 설익은 상태에서 그녀에게 너무 무거운 강요를 한 게 아닐까 싶다.

“…에휴, 어쩌냐.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는데.”

분위기에 취해 풀악셀 밟고 할 얘기는 다 했고,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지금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그녀에게 끊임없이 믿음을 주는 것뿐.

어떤 일이 닥쳐와도 나와 함께라면 헤쳐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

적어도 그 정도는 돼야, 그녀도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나를 선택할 수 있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지.”

매트리스 옆에 널브러진 스마트폰 액정 화면에 드리워진 시계가 00:00으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대면식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Y/N]

메시지를 보자마자 처음 든 감정은 어이없음, 이었다.

“웃긴 새끼들이야, 아주.”

우리는 이런 걸 초대가 아니라, 집합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응하지 않으면 자격을 박탈한다고 으름장을 놨으면서 초대는 무슨 얼어 죽을.

대면식이라고 했으니까,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

살짝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시스템 메시지들을 받아 왔지만, 이런 건 처음이다.

초대에 응하는 순간 어떤 힘이 발휘되어 내 몸을 어딘가로 이동시키는 식인가.

직접 확인해 보면 알겠지.

“초대에 응한다.”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연회장으로 이동합니다.]

반투명한 메시지에서 빛줄기가 뿜어져 나와 내 몸 주변을 휘감기 시작했다.

새하얀 빛줄기 사이를 바삐 오가는 입자들, 그것은 마력이었다.

느껴진다.

내 육신이 아주 두꺼운 벽을 넘어서는 감각.

몸 주변을 휘감은 빛줄기는 이를 위한 보호막 또는 운송 수단의 역할을 하는 건가.

[연회장에 도착했습니다.]

[사용자의 안전 확보를 위해 대면식 참여자들의 모든 정보는 비공개 상태로 전환됩니다.]

[부디 안심하시고, 연회를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장막을 해제합니다.]

시야를 봉인하고 있던 빛줄기들이 서서히 사라져간다.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풍경은 말 그대로 연회장이었다.

드높은 천장 위에서 찬란한 빛을 흩뿌리는 샹들리에, 발소리를 말끔히 죽여주는 두꺼운 카펫, 기다란 테이블 위에 놓인 각지의 음식들.

그리고 곳곳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

“잉?”

가볍게 음식물을 섭취하고, 와인을 들이켜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이들의 얼굴이 하얗다.

그냥 피부색이 하얗다는 게 아니라, 모자이크 처리라도 된 것처럼 이목구비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의 말뜻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정보가 비공개 상태라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아마 내 얼굴도 저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처리되고 있겠지.

그렇다면 나라는 사람을 특정할 수 있을 만한 행동을 제외하면, 뭘 해도 정체를 들킬 염려는 없다는 거잖아?

“그럼 안심이네.”

한 가지가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다름 아닌 내가 이곳에 모이는 504명의 ‘자질을 지닌 자’들 중에 꼴찌라는 것.

가장 늦게 특성을 부여 받았다는 건 결국 내가 여기 모인 사람들 중 가장 약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같은 특성을 504명이나 얻게 된 이상, 필연적으로 다툼은 벌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504번째인 나는 그야말로 가장 쉬운 먹잇감.

만약 놈들이 나를 먼저 노릴 상황에 대비해서 몇 가지 수를 생각해 뒀었는데,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된다.

“그러면…, 편하게 연회를 즐겨 보실까.”

테이블에 놓인 와인으로 가볍게 목을 축였다.

그윽한 향과 시큼털털한 맛이 혀끝을 적신다.

와인은 영 젬병이라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짙은 녹색과 적색이 적절하게 사용된 벽지에는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그림들이 걸려 있다.

“다 처음 보는 것들이네.”

한주희를 따라 유명한 화가들의 전시회에도 많이 갔었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전부 생소하다.

단순히 내가 모르는 것들이거나, 아니면 다른 세계의 작품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천천히 벽을 따라 걸으며 아무 생각없이 그림들을 보며 지나치고 있는데.

“오, 당신!”

갑자기 웬 사내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가온다.

“당신이 바로 문을 닫고 들어온 사람이군!”

“뭐요?”

저게 대체 뭔 소리래.

“하하! 이거 말이야, 이거.”

사내는 제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뱃지가 하나 달려 있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색 뱃지의 가운데에는 ‘382’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고개를 밑으로 내려 내 가슴팍을 확인해 봤다.

역시나 가슴팍에 뱃지가 달려 있다.

숫자는 ‘504’.

“사람들이 당신을 그렇게 부르고 있어. ‘문을 닫고 들어온 사람’이라고 말이야. 하하!”

그러니까…, 내가 504번째로 특성을 얻으면서 모든 게 시작됐으니, 문을 닫고 들어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거로구먼.

뭔가 의미심장한 말인 줄 알았더니, 그냥 시답잖은 말이었네.

“하나 충고하자면…, 절대로 정보를 흘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382번이 갑자기 멋대로 충고를 건네왔다.

뻔하다.

504번째인 내가 가장 쉬운 먹잇감이니, 걸려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거겠지.

갑자기 시큰둥해졌다.

“대가리 있으면 다 생각할 만한 사실 가지고 충고 운운하지 말고, 갈 길이나 가슈.”

“오, 제법 매운 말투를 구사하는군.”

다른 건 다 모르겠고, 일단 하나만큼은 알겠다.

382번은 외국 사람이라는 거.

아무래도 각국의 언어를 내가 듣기 좋은 쪽으로 해석해서 들려주고 있는 것 같은데.

말투가 느끼해서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다.

“다음에 또 이런 자리가 있다면 보길 바라지. 그때까지 잘 살아남게, 친구.”

경고인지, 바람인지.

애매모호한 말을 남기고 사라져가는 382번.

누구 마음대로 친구라는지, 원.

천천히 걸어 다니며 주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들의 대화를 훔쳐 들었다.

근데 영양가 있는 대화는 조금도 오가지 않더라.

하하호호 웃으며 얘기하곤 있는데, 하나 같이 핵심과는 거리가 먼 주제들이었다.

서로를 한껏 경계하고 있다는 뜻.

다가오는 몇몇 이들과 대화도 나눠 봤지만, 하나 같이 만만찮은 작자들이라 유의미한 정보를 뽑아내는 건 실패했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을 즈음, 연회장에 묘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연회에 참석하신 여러분께 알립니다.]

[이제 곧 대면식을 진행할 예정이오니, 귀빈들께선 다음 장소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노인인지, 어린애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그야말로 기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음성.

그와 동시에 연회장 한쪽 벽에 나 있던 커다란 문이 스스로 열렸다.

저기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건가.

대이동이 시작됐다.

나를 제외한 503명이 줄지어 열린 문 너머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

차분히 그들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대열에 합류해 문을 넘었다.

이윽고 드러난 곳은 조금 전의 연회장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공간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원형 테이블이 곳곳에 놓여 있다는 것과 단상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단상 위에…, 낡아빠진 의자 일곱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는 것 정도?

저게 뭔가 싶어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저것들이 단순한 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와…, 저게 다 뭐야.”

각각의 의자 주변으로 아주 두꺼운 마력의 장벽이 펼쳐져 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빨강, 파랑, 초록, 노랑, 분홍, 하양, 검정.

의자를 중심으로 흐르는 마력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자니, 머릿속으로 정보가 스며든다.

“주인을 식별하기 위한 장치…, 인가.”

각각의 색마다 천차만별로 다른 마력의 패턴.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으면 묘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예를 들어, 붉은색 마력 패턴을 보고 있으면 문득 살심이 치솟는다던가.

분홍색의 마력 패턴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음심이 피어 오른다던가 하는 식의.

“흐음….”

말인즉, 저 마력들은 전부 고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

동시에 같은 파장을 내뿜는 마력을 가진 사람을 제외한 모두를 배척한다.

이 정도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의자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저거구나.”

이제야 감이 좀 잡힌다.

‘자질을 지닌 자’라는 특성을 얻은 이들이 최종적으로 노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단상 위에 놓인 일곱 개의 의자에게 주인으로 인정받는 것.

여기 모인 이들은 전부 그럴 만한 최소한의 자격을 보유한 이들인 거고 말이다.

궁금하다.

저 의자에 앉으면 뭘 할 수 있고, 뭐가 달라지는지.

이렇게 거창하게 504명을 모아둘 정도면 예사로운 일인 것은 분명한데….

생각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모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단상 위에서 예의 오묘한 음성이 재차 들려왔다.

그리고 어둠이 내려앉은 그늘 속에서 한 벌의 턱시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턱시도가 입은 사람도 없이 자기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 다니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하, 다들 놀라셨나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여기에 존재하니까요.]

턱시도와 떨어져 있던 지팡이가 손사래를 치는 것처럼 흔들린다.

그것으로 알아차렸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누군가가 턱시도를 입고 있다는 것을.

“투명화인가.”

마법…은 아닌 듯했다.

녀석의 주변으로는 그 어떤 마력의 흐름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까.

그러나 대수롭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느낌으로 봐선 우리를 이곳에 모이게 한 주동자 또는 그 하수인쯤 되는 듯하니, 저 정도 능력은 어쩌면 당연하게 봐야 하지 않을까.

턱시도가 연설을 시작했다.

[이르게는 20년도 더 전에, 느리게는 고작 몇 달 전에.]

[시기만 다를 뿐, 여러분은 모두 같은 특성을 손에 넣으셨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자질을 지닌 자’ 라는 특성이죠.]

[다들 궁금하셨을 거예요. 자질이라는 건 대체 무슨 자질을 말하는 걸까, 하고 말이죠.]

[그에 대한 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장연설을 이어가던 턱시도의 손에 쥐여져 있는 지팡이가 제 뒤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저 의자가…, 답이라고?”

“저 낡아빠진 의자로 의자 뺏기 놀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바로 그때, 지팡이가 투덜거린 사내를 정확하게 지목했다.

[바로 그겁니다!]

“힉…!”

사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턱시도는 갈 길이 바쁘다는 듯, 제 말을 이어갔다.

[이건 일종의 의자 뺏기 게임입니다.]

[여러분, 504명이 저 일곱 개의 의자에 앉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는 게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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