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명의 절대자와 한 명의 절대자.
어느 쪽이 되고 싶은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겠지.
“자정이면…, 얼마 안 남았네.”
딱히 어디로 오라고 하진 않았으니, 그냥 그 시간까지 기다리면 되겠지.
무기력감도 사라지고, 생각을 길게 이어가다 보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아, 그냥 저녁 먹을걸.”
냉장고에 반찬도 많으니까 혼자 차려 먹어도 그만이긴 하지만, 혼밥은 영 싫은데.
차려 먹을까, 아니면 그냥 굶을까.
드러누운 채로 고민하는 사이, 갑자기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도진아, 아줌마야. 문 좀 열어볼래?”
“어.”
갑자기 이 시간에 웬일이시지.
곧장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언제나와 같은 딱 달라붙는 원피스 차림의 아줌마.
손에는 작은 냄비를 들고 계셨다.
“잠깐 실례할게.”
“네? 아, 네….”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안으로 들어선 아줌마는 곧장 냄비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 불을 켜놓고선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반찬들을 모두 꺼내더니 냉장고 옆에 세워둔 작은 식탁의 다리를 펴 그 위에 모두 올려놓았다.
“아줌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줌마를 부르자, 아줌마는 작은 전기 밥솥에서 밥을 한가득 퍼올리며 내게 대답했다.
“오늘 던전 다녀왔다며.”
“…네.”
“그럼 힘도 많이 썼을 텐데 저녁 거르면 못써.”
아무래도 던전까지 다녀와 저녁을 거르려는 내가 걱정돼서 올라오신 모양.
여전히 평소보다 딱딱한 말투지만, 그 안에 걱정 한가득 녹아들어 있다.
멍하니 아줌마의 뒤태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달라진 점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아줌마.”
“왜.”
“살 빠지셨네요?”
“…….”
잠깐이지만 보였다.
옆으로 살짝 드러난 아줌마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헤에.”
아무래도 내가 정답을 고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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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는 동안 아줌마는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최근 혼자 밥 먹는 게 너무 외롭고, 지겹다고 몇 번이나 어필한 게 먹힌 모양.
먹는 내내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숟가락에 반찬도 올려주고 해줄 건 다 해주더라.
고작 어제까지만 해도 단절되었던 일이 돌아왔음은 분명 기분이 조금은 누그러졌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지.
빈 접시들을 싱크대로 가지고 가 설거지를 하는 아줌마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아줌마.”
“응…?”
설거지에 열중하고 있던 아줌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사이, 나는 팔을 뻗었다.
왼손은 어깨와 목 주변에 가볍게 두르고, 오른손은 안으로 파고들어 배와 허리를 감싼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아줌마의 몸이 흠칫 떨리는 게 팔을 타고 전해져 온다.
“얘, 얘…!”
놀란 아줌마가 몸부림을 치지만, 그렇게 강렬한 느낌은 아니었다.
뿌리치려고 했다면 더 확실한 행동이 뒤따랐겠지.
한동안 말없이 양팔로 아줌마를 끌어안고 있었다.
“스으읍.”
깊게 숨을 들이실 때마다 콧속으로 사정없이 스며드는 그윽하고 농밀한 향기.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난감하다.
정확히 어떤 과일이나 꽃이라기보다, 아줌마 특유의 살냄새가 섞여서 만들어지는 듯.
흠칫흠칫 떨리던 몸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설거지를 이어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스킨십을 받아들였다는 건 그만큼 분위기가 누그러들었다는 뜻.
물론 아줌마가 잠시나마 냉랭해진 원인은 찾지 못했으니 완전히 봉합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분위기라면 막혀 있던 말문을 다시 틀 수 있겠지.
“아줌마.”
“…응.”
홍조 띤 얼굴에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
아줌마도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말해줄 수 있어요?”
“뭘…?”
“지난 며칠간 냉랭했던 이유.”
새하얀 거품으로 접시를 물들여가던 손이 일순 굳었다.
그리고선 그런 적 없다는 듯, 다시 설거지를 이어가며 아줌마가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아줌마는 평소랑 똑같았는데…, 도진이 네가 뭔가 착각한 거 아니니?”
사람은 피하기 힘든 상황에도 그걸 애써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마침내 궁지에 다다르고 나서야, 숨기고 숨겼던 이야기를 꺼내곤 하지.
나는 조금 더 아줌마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조금 더 강한 어조로 말했다.
“뭐 때문인지 얘기해 봐요.”
“…….”
아줌마의 몸이 살짝 떨리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이윽고 꺼낸 첫마디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약속하렴.”
“약속할게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약속부터 하고 봤다.
아줌마가 상식 밖의 요구를 해올 사람도 아니고, 내게 불리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을 테니.
그러자 아줌마가 살짝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돌아본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잖니.”
“아줌마를 믿으니까요.”
“너는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젓는 아줌마.
일단 약속부터 박고 보자는 전략은 제대로 먹힌 것 같고.
“아줌마가 한 말 듣고…, 절대 웃지 않겠다고 약속하렴.”
대체 무슨 말이기에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는 걸까.
“약속할게요.”
나는 다시 한번 흔쾌히 약속을 받아들였다.
“그…, 2주 전 주말 기억하니?”
“2주 전 주말이면….”
“토요일 말고 일요일.”
“아.”
기억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날은 윤지안과 데이트를 했던 날이니까.
아줌마가 그때를 콕 집어 거론한 순간, 머릿속에 퍼즐이 하나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때 우연히 봤거든. 도진이 네가…, 여자랑 같이 차 타고 가는 거.”
예상이 맞았다.
내가 왜 몰랐을까?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는 답이었는데.
그때 전화부터 부자연스러웠다.
갑자기 자정에 전화가 와서는 잠은 무조건 집에서 자야 한다며 빨리 오라질 않나, 그 시간에 평상 위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찬통만 건네주고 가지를 않나.
그게 전부 그것 때문이었구나.
“솔직히 혼란스러웠어. 도진이 네가 또래의 여자와 만나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일인 건데…, 주책맞게 화가 나지 뭐니.”
아줌마가 처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했어.”
“무슨 생각이요?”
“우리 둘 사이…, 멈추려면 지금이 적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
속으로 이별까지 생각했었나 보다.
우리 사이에 낀 장애물은 수도 없이 많다.
나이 차이가 빚어낼 사회의 인식도 문제일 테고, 아줌마가 유부녀라는 사실 또한 걸림돌이다.
심지어 나와 친구인 신유정까지….
아, 이거는 오히려 장점인가.
아무튼.
여러모로 며칠간 아줌마의 속이 복잡했을 거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겠다.
우리의 관계가 애매하기 짝이 없는 상태라는 것도.
아줌마와 나,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현재 ‘불장난’일 거다.
급진적으로 나아간 것은 육체관계에 불과했고, 정신적인 교감은 그에 미치지 못했으니 이보다 맞는 표현은 찾기 힘들겠지.
그리고 이건 전부 내 탓이다.
“아줌마.”
“응.”
나는 잠겨 있던 수도꼭지를 열어 아줌마의 손에 묻어 있는 거품들을 깨끗이 씻겨냈다.
그리고 옷으로 손을 감싸 물기를 닦아낸 뒤, 서로를 마주 보았다.
오해 아닌 오해가 쌓였다.
관계가 얕고도 얕은 탓에, 아줌마에게 불안감을 가지게 한 것.
그것이 내 잘못이고, 오해였다.
어쩌면 매듭을 묶는 데서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애틋한 서사 대신 욕망을 켜켜이 쌓아 올린 관계의 불안정함이 이렇게 드러나는가.
아니,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엮이는 과정은 한 가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잘못된 게 아니고, 애틋한 서사로 시작했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듯.
다만 엮은 관계를 어떻게 가꾸어 나가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음….”
화두를 꺼내는 것이 어렵고도 어렵다.
아직 내 마음 정리가 덜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매우 애매하게 욕망을 표출하며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조금 더 확고하게 마음을 정리할 때.
아줌마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진다.
“괜찮아. 뭐든 편하게 말하렴.”
체념한 듯한 눈빛.
지금 내가 힘겹게 꺼내려는 말이 이별을 고하기 위함이라고 착각하는 걸까.
나는 내 볼을 만지는 아줌마의 손을 꼭 붙잡으며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줌마가 편하게 말하라고 하셨으니까, 그렇게 할게요.”
다른 한쪽 손으로 아줌마의 허리를 휘감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가까워져 오는 당황 섞인 아줌마의 얼굴.
“우리 끝까지 가요.”
“…에.”
귀여운 탄식과 함께 아줌마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간다.
나는 말을 이었다.
“난 가볍게 시작한 적이 없어요. 아줌마한테 손을 댄 그 순간부터, 함께 끝을 보기로 결심했었으니까.”
난 앞으로 더 많은 욕망을 표출하고 살 거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얼마든지 섹스할 거고, 신유정과 아줌마의 모녀 덮밥도 달성하고 싶고,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거라면 최대한 해볼 요령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책임하게 살겠다는 말은 아니다.
내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일은 뭐가 됐든 온몸으로 받아들여야지.
아줌마 또한 마찬가지.
넘기 힘든 벽들이 많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아줌마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또한 우리의 관계로 인해 아줌마를 힘들게 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
“우리 섹스할 때, 내가 얘기했었죠.”
“…응?”
“우린 이미 늦었다고.”
“아.”
선은 넘어선 지 오래다.
지금에 와서 돌아간다고 한들, 예전과 같은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
만에 하나 내가 손시우의 몸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한들, 그때처럼 살 수 있을까.
뭐든 억누르고, 참아가고, 절제하면서?
절대 불가능하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나.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에 빈대 한 마리도 안 남는다고.
아줌마도, 나도 이미 맛을 알아버렸다.
서로의 몸이 얼마나 뜨겁고, 또 얼마나 서로에게 반응하여 달아오르는지.
난 그 몸을 포기할 수 없다.
“지금부터 내게서 멀어지겠단 생각, 여기서 멈춰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요.”
“…….”
명령에 가까운 어조에 아줌마의 눈이 살짝 풀렸다.
몽롱한 시선, 그러나 아직 잃지 않은 온전한 정신이 이를 수습하여 내게 묻는다.
“나이 많은 아줌마, 그것도 유부녀한테 뭘 바라는 거니.”
“전부요.”
나는 즉답했다.
“아줌마…, 아니, 당신의 전부를 내게 줬으면 좋겠어.”
우리의 관계는 지금부터 더없이 많은 변화를 거쳐야만 한다.
그중 가장 바꾸기 쉬운 것이 호칭.
아줌마라는 호칭이 나를 믿음직하지 못한 어린애로 보이게끔 하기에.
더욱 대등한 관계로서 나아가기 위해선 파격적이어야만 한다.
“이것 하나만은 약속할게.”
내 반말에 아줌마… 아니, 서정희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도진이 너…?”
다행히 화가 난 건 아닌 듯하다.
갑작스러운 반말에 놀란 마음이 더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