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나 보군요.”
“네. 집에 일이 좀 생겨서요.”
집이라는 말에 윤지안이 살짝 굳어진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혹시 안 좋은 일이신 건…?”
날 걱정하는 말투에 곧장 손사래를 치며 그녀의 불안을 불식시켰다.
“그건 아니에요. 아마도….”
지금 당장 집으로 가면 안 좋은 일까진 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빡 든다.
그래서 라면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내린 거고.
나는 위에 걸치고 있는 티셔츠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 티셔츠, 제가 입고 가도 될까요?”
“예,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다음에 깔끔하게 빨아서 돌려 드릴게요.”
“그럼 화장실에 걸려 있는 셔츠는 제가 세탁해서 다음에 만날 때 돌려 드리겠습니다.”
“굳이 안 그러셔도….”
“제가 실수한 거니까, 제가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강력한 발언.
“…그럼 그래 줄래요?”
“네, 맡겨 주십시오.”
사명감마저 엿보이는 대답에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럼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봅시다.”
“네, 말씀 드렸듯이 언제든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허락 받았으니 앞으로 열심히 귀찮게 해볼게요.”
웃으며 말하자, 윤지안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한사코 마중 나가겠다는 그녀의 머리를 붙잡고 안으로 밀어 넣은 뒤, 건물을 빠져 나와 대로변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차가 별로 없어서 그런지, 택시 기사 아저씨가 레이싱 게임 하듯이 차를 몬다.
“도착했습니다, 손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일찍 도착해서 좋기는 하네.
계단을 오르며 문득 아줌마 생각이 났다.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는데, 설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생각이 들어 걸음을 재촉해 옥상으로 올라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왔니?”
더위가 확 꺾이는 바람에 이제 밤이면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아줌마는 얇은 옷차림으로 평상에 앉아 있었다.
나는 황급히 아줌마의 어깨를 끌어 안고 집으로 이끌었다.
“추운데 왜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핀잔을 주듯 말하자 아줌마가 묘한 시선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는다.
그러더니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기색이 팍팍 드러나는 새초롬한 표정.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이려는데, 아줌마가 내 팔을 풀어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평상 위에 반찬통 있으니까 그거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으렴.”
“아줌마…?”
아줌마는 내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등을 돌렸다.
“아줌마는 이만 내려갈 테니까 얼른 자렴. 내일 학교 늦지 말고.”
“…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터덜터덜 걸어 내려가는 아줌마.
“뭐지….”
아무래도 아줌마가 삐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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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서서히 추워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야금야금 먹어가다 보니 어느덧 중간고사가 가까워졌다.
그동안 우리는 착실하게 팀워크를 다졌다.
겹치는 수업은 항상 같이 듣고, 별다른 일 없으면 점심도 같이 먹고….
합도 맞출 겸 매주 C급 던전을 돌며 돈도 짭짤하게 벌었다.
덕분에 제법 움직임이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냉정하게 말하면…,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움직일 수 있게 된 정도?
그리고 우리의 팀워크가 향상되었음은 또 하나의 현상으로 증명되었다.
바로 엘레나의 특성으로 말이다.
“발이 조금 덜 느려진 것 같은데…?”
“나만 그렇게 느낀 거 아니지?”
“나도 그렇게 느꼈어.”
그녀가 만들어낸 장판의 감속률이 우리에게만 완화되어 적용되기 시작한 것.
전체 속도의 30%를 느리게 만들었던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대략 15% 정도.
여전히 발이 무겁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움직이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말인즉, 그녀가 우리를 점점 적이 아닌 동료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럼에도 엘레나는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난 팀원들을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이 정돕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특성은 내면을 통해 피아를 구분하고 있는 상태.
그 말은 완벽하게 아군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우리의 존재가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야 한다는 건데, 그게 쉬울 리가 있나.
특성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면 의지만으로 피아 구분이 가능하게 될 테지만, 그건 한 사람의 마음에 녹아드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해서 당장은 무리고.
“괜찮아. 이 정도만 해도 어디야?”
“뭐…, 친해진다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내 말에 덧붙여 위로를 건네는 신유정.
그런데 저 말을 하면서 내 눈치를 힐끔 살피는 건 왜일까.
“고맙습니다, 다들. 나, 앞으로 더 열심히 합니다!”
엘레나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말했다.
최근 그녀의 표정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유는 아마 돈 때문이겠지.
매주 C급 던전을 공략하고 벌어들인 돈으로 가족들에게 송금도 하고, 본인 식사에도 약간이지만 유의미한 변화를 주지 않았을까.
저번에 체단실에서 보았을 때 단백질 쉐이크를 샀다며 내게 한 병 말아준다고 했던 걸 생각하면, 아마 맞을 거다.
“그럼 이제 돌아가자.”
정리를 끝마치고 던전 밖으로 나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환전소로 향했다.
이번에 벌어들인 수익은 대략 800만 원 정도.
C급 던전의 수익은 대체로 이 정도다.
개미굴이 C급치고 많았던 거지.
세금을 제외한 수익을 공평하게 분배하고서 신유정과 함께 귀갓길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댄 채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내가 자기 베개인 줄 아나.
“유정아.”
“왜.”
“네가 그렇게 머리를 대고 있으면 내 어깨가 아플 거란 생각은 안 해봤니?”
정중하게 묻자, 녀석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어.”
“…….”
“이 정도로 어깨 아프면 헌터 때려치워야지.”
맞는 말이라 더 열받네.
잠깐 꽁해 있는 사이, 신유정이 자기가 보고 있던 스마트폰을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야, 이거 어때?”
뭔가 싶어서 보니 석류즙을 검색해서 보고 있었다.
“갑자기 웬 석류?”
그러자 녀석이 제 머리를 헝클이며 말하길.
“아니, 요즘 엄마가 좀 날카로워진 것 같아서 내가 검색을 좀 해봤거든?”
“…그런데?”
“40대 중반쯤부터 슬슬 갱년기가 올 수 있다고 하더라고. 혹시 그래서 그런 건가 싶어서 돈도 벌었겠다, 갱년기에 좋은 것 좀 엄마 사주려고.”
갱년기라….
최근 아줌마의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기는 했다.
근데 이거 갱년기가 아니라 나 때문일 텐데.
겉으로 보이는 건 평소와 같다.
매 끼니 챙겨주고, 반찬도 가져다주고, 이것저것 신경 써주는 건 똑같은데….
분위기가 약간 냉랭해졌다고 해야 하나.
뭔가 삐졌거나, 화가 난 건 확실하다.
그런데 이게 뭐 때문인지 정확히 모르겠단 말이지.
이런 건 서로 빨리빨리 푸는 게 좋은데.
“석류가 갱년기에 그렇게 좋다더라고. 그래서 이거 살까 하는데, 네 생각은?”
“음…, 글쎄.”
석류가 갱년기 여성에게 좋다는 건 안다.
그런데 아줌마는 갱년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니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게 문제지.
“내 생각엔 다른 선물이 낫지 않을까 싶어.”
“무슨 선물?”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그러게.
무슨 선물이 좋으려나.
아줌마가 삐진 원인을 안다면 그와 관련된 선물이 가장 좋을 텐데….
“그건 차차 생각해 봐야지.”
“흠…, 그럼 나도 검색 좀 더 해볼 테니까 너도 생각 좀 해봐. 솔직히 엄마가 널 얼마나 신경 써줬냐? 이쯤 되면 내 엄마가 아니라, 우리 엄마라고 해야 됨. 인정?”
보육원을 도망쳐 나온 시점에서 찐도진은 반쯤은 죽을 운명이었다고 봐야 한다.
추운 겨울에 땡전 한 푼 없이 맨몸으로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는데 안 얼어 죽고 배겨?
그러니까 아줌마는 죽을 목숨 건져서 살린 거나 다름없는 셈이다.
거기에 더해 지금까지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기까지 하지 않았나.
이 정도면 이름만 엄마인 사람들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 엄마답게 해줬다고 보는 게 맞다.
“그래, 인정.”
“흐흐흥…, 장모님도 엄마는 엄마지, 그럼.”
“…….”
이 녀석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집으로 올라와 옷을 갈아입고 곧장 매트리스 위에 드러누웠다.
뒤에서 마법만 갈겨서 딱히 힘든 건 없는데, 던전에 다녀온 날이면 그 뒤로는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지더라.
약간 그런 느낌이다.
시원하게 한 발 빼고 나서 찾아오는 현자 타임 같은?
아무런 생각 없이 대 자로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허전한 느낌이 든다.
“뭔가…, 휑해.”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뭐든 꽉 끌어안고 온몸을 붙여 웅크리고 싶은 느낌.
근데 이 방에는 그런 게 없단 말이야.
“…베개라도 하나 더 사둬야 하나.”
기다란 쿠션이라도 사서 매트리스 옆에 하나 놔둬야 하나 싶다.
하는 수 없이 이불이라도 돌돌 말아서 가슴에 끌어안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누군가 확인해 보니, 아줌마다.
“여보세요.”
-도진아, 저녁 먹으러 내려오렴.
무미건조한 말투.
근데 이게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아서 무미건조한 게 아니라, 들어있는 걸 억지로 빼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다.
“어…, 오늘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 피곤해서 그런가, 배가 별로 안 고프네요.”
-…그러니? 그럼 푹 쉬렴.
“넵.”
통화를 끝낸 뒤에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은 그때부터였다.
오늘따라 무기력감이 심하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까지 이 몸뚱어리로 몇 번이나 던전을 돌았지만, 지금 같은 느낌은 처음이다.
그렇다면 지금 느끼는 감각은 비단 던전 공략 후의 무기력감만은 아니란 얘긴데.
혹시라도 몸에 이상이 생겼나 싶어 눈을 감고 천천히 체내를 관조해 보았다.
코어를 중심으로 원활하게 흐르는 마력들이 눈이 되어 몸속 곳곳을 들여다보았지만, 신체는 이상하리만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 중이었다.
일단 원인이 몸에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마력을 코어 안으로 다시 밀어 넣으며 서서히 눈을 뜰 때쯤.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우여곡절 끝에 스스로를 증명한 504명의 ‘자질을 지닌 자’ 여러분께 알립니다.]
[오늘 밤 자정, 대면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자질을 지닌 자’ 분들께선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랍니다.]
[만약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참석이 불가하신 분은 특성이 회수될 예정이오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그럼 자정에 뵙겠습니다.]
“…뭐야, 이건.”
뜬금없이 대면식이라니.
메시지를 보는 순간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무기력감 또한 서서히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조금 전의 그 증상은 이 메시지 때문이었나 보다.
“대면식….”
간단히 말하면 얼굴 맞대고 인사하는 행사 정도인데.
메시지의 서두를 보면 ‘자질을 지닌 자’ 특성을 지닌 504명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자리가 되진 않을 것 같은데.”
특성의 이름 ‘자질을 지닌 자’.
그 자질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태라는 뜻.
보통 이런 경우에 500명 전부가 사이좋게 하하호호 웃으며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가능성이라는 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설수록 그 자리가 좁아지기 마련이거든.
만에 하나 500명 전원이 손잡고 올라갈 수 있을 만큼 발판이 넓다고 해도…,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올라서는 건 불가능할 거다.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울 텐데, 그게 될 리가 있나.”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나와 같은 힘을 지닌 존재가 수백 명씩 살아서 돌아다니는 꼴을 못 보는 존재.
왜냐고?
나 혼자서 힘을 가지고 있으면 더 큰 권력으로 이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