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20)

번진 화장기를 말끔하게 지우고, 손으로 머리를 최대한 빗은 다음 벽에 걸린 머리 끈으로 동여맸다.

편해도 너무 편한 얼굴.

조금 전의 모습보다 이게 더 낫다는 사실이 그녀를 절망케 했다.

덜컥

문을 열고 나가자, 김도진이 거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여전히 상반신을 훤히 드러낸 채로.

‘세상에….’

겨우 식힌 얼굴에 다시 열이 오른다.

조금 전에도 보았지만, 도저히 말이 안 됐다.

마법사의 몸이 저렇게까지 완벽할 수 있는 걸까?

넋을 놓고 그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김도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 왔어요?”

“예? 아, 예! 그…, 입을 만한 옷이 있나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녀는 황급히 말을 쏟아내고 옷방으로 들어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들 중 가장 큰 티셔츠를 꺼내어 펼쳐보았다.

집에서 늘어지게 쉴 때 사려고 일부러 크게 산 옷인데, 그에게 얼추 맞을 듯했다.

“후우….”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쉬며 다시 거실로 향했다.

마음의 정리를 한 덕인지 상반신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게 조금 수월해졌다.

“여기….”

“고마워요.”

김도진은 윤지안이 건네는 옷을 받아 그 자리에서 바로 껴입었다.

어깨 부분이 살짝 끼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입고 있기에 불편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 뒤로 찾아온 어색한 침묵의 시간.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서로 고민하고 있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윤지안이었다.

“저…, 그, 괜찮으시면 라면…, 드시겠습니까?”

‘우리 집에서 고양이 보고 갈래?’, ‘우리 집에서 넷플러스 보고 갈래?’ 양대산맥에게 밀려버린 과거의 최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녀는 고양이를 키우지 않았고, 넷플러스도 구독하지 않았기에.

더군다나 지금은 양쪽 모두 술을 마신 상황.

야심한 밤에 해장라면은 그야말로 참기 힘든 유혹 아닌가.

이를 증명하듯 김도진의 입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럼 그럴….”

긍정의 대답이 떨어지기 직전.

우우웅-!

요란한 진동 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했다.

그것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김도진의 스마트폰이 내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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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정희는 거울 앞에 서는 횟수가 부쩍 많아졌다.

“살이 좀 찐 것 같은데….”

이 정도면 40대라는 걸 감안하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마음가짐이 달라진 탓이었다.

예전에는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전부 불만족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거기에 지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더랬다.

아침이면 산책로를 따라 걷고, 오후 한가한 시간에는 헬스장에서 운동도 하고.

부족한 운동량을 어떻게든 채워 몸매를 가꿨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녀는 제 몸매를 가꾸는 데에 회의적으로 변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몸매를 가꾼다고 한들, 이를 칭찬해줄 사람 하나 없는데 대체 뭐 하러 사서 고생하고 있는지.

세상에 자신을 여자로 봐줘야 할 하나뿐인 남편은 지방으로 내려가 1년에 한두 번 보는 게 전부인데 말이다.

한 풀 꺾인 마음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걷는 건 나름대로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어 계속하기는 했지만, 헬스장은 더 이상 다니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더 나아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하나둘씩 나이를 더 먹어가면서 다른 아줌마들과 똑같이 변해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일은 모르는 거라고 했던가.

“도진이는 괜찮다고 하긴 했는데….”

그녀를 여자로 대하는 남자가 한 명 더 생겨버렸다.

그것도 제 딸과 같은 나이의 젊은 사내였다.

그에게 여지를 내어준 것은 어쩌면 본인의 만족감 때문이었다.

젊은 아이가 자신을 더없이 성적인 눈빛으로 보고 있음을 느낀 순간, 그녀는 형언할 수 없는 충족감을 느꼈다.

약수터에, 공원에 앉아 헤벌쭉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노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뜨거운 눈빛은 지난 몇 해 동안 꾸준히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던 그녀의 자존감을 위로 끌어당겼다.

처음에는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러한 마음이 김도진에 한해서 너그럽게 반응하게 했다.

거기에 제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그가 구해주는 사건까지 겹치게 되면서 자신을 보고 그곳을 부풀린 아이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한 게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속절없이 휘말렸다.

젊은 사내의 열기에 닿을 때마다 변변찮은 저항조차 못 해보고 녹아내렸다.

마음속으론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점점 더 그를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역시 안 되겠어. 다시 운동을 시작해야….”

김도진은 모든 게 좋다고 했지만, 그녀로서는 신경이 쓰였다.

한 번씩 붙잡히는 얇은 뱃살도, 살이 맞닿을 때마다 거친 소리를 내는 커다란 엉덩이와 허벅지도 모두.

그래서 오랜 시간 포기했던 몸매 관리를 다시 하기 위해 헬스장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김도진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를 위해 몸매를 가꾸기 시작했다는 말을 하기가 창피하기도 했고, 어느 날 달라진 자신을 보았을 때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기도 해서.

그리고 그날은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날이었다.

“좀 티가 나려나…?”

식단까지 조절해가며 운동에 매진한 결과, 무려 7kg이나 감량하는 데에 성공한 날이었다.

눈썰미가 좋은 김도진이라면 조금만 힌트를 줘도 금세 알아차릴 거라는 설레는 생각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보았다.

김도진이 집 앞에 서 있던 차에 올라타는 것을.

그리고 운전석에 앉은 이가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젊은 여성이라는 것도.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며 조수석에 올라타는 김도진의 모습을 본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래, 원래는 저게 맞는 거야.’

첫 감정은 수긍과 체념이었다.

자신과 김도진의 나이 차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스무 살 이상.

이제 주름살만 늘어갈 일만 남은 자신보다 같은 또래의 젊은 여자와 만나는 게 맞겠지.

잠깐의 꿈을 꾸었을 뿐이라며, 이제 깨어날 시간이라고 자위하던 그녀는 어느새 다른 감정과 마주하게 되었다.

“정말 웃기는 애네!”

갑자기 화가 났다.

자신을 보며 애틋하게 바라보고 벌떡벌떡 세울 때는 언제고 금세 다른 여자랑 놀아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억울했다.

그를 위해 몇 년간 발길을 끊었던 헬스장마저 다시 다니게 됐는데, 정작 알아줘야 할 사람은 다른 여자의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선 신나게 놀고 있지 않은가.

“엄마, 나 왔어. 밥은?”

“…오늘 엄마 컨디션 안 좋으니까 네가 차려 먹든, 시켜 먹든 하렴.”

그렇게 말하고서 방으로 휙 들어가는 서정희를 허망하게 쳐다보는 신유정.

“…오늘 그날인가?”

애꿎은 신유정만 저녁밥을 압수당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서정희의 마음은 여전히 들쭉날쭉했다.

체념했다가, 화가 났다가, 서글퍼졌다가, 다시 체념하고.

“하아….”

바짝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주방으로 향한 그녀는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진 시각.

차갑게 식힌 마테차 한 잔을 들이켠 그녀는 냉장고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반찬통들을 보았다.

“…….”

김도진에게 가져다줄 반찬들이었다.

미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작게 숨을 내쉬며 반찬통들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주려고 만든 거니까….’

버리는 게 아까울 뿐이라며 자기 자신을 합리화한 채 계단을 올라섰다.

이윽고 도달한 옥상.

창문에서는 빛 한 줄기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자는 걸까, 아니면….

평소 같았으면 발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서정희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도진아…, 자니?”

그녀는 바랐다.

차라리 일찍 잠들었으면 하고 말이다.

“도진아?”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방 안에서는 그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만 했다.

김도진이 그 여자의 차를 타고 떠난 이후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

머리가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조금 전 보았던 운전석의 여자와 김도진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서로 뒤섞이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최근에 더 커진 듯한 그 물건을 맛보게 되는 순간 그 여인도 결국….

“내, 내가 무슨 생각을…!”

세차게 고개를 내젓는 서정희.

반찬통을 평상 위에 내려놓고서 옆에 앉은 그녀는 스마트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잠깐 상상만 한 것 같은데 어느덧 자정이 넘어가 버렸다.

그녀는 최근 통화 기록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를 잘 받지 않는 남편보다 잦아진 김도진과의 통화 횟수가 고스란히 그곳에 남아 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내일 월요일인데….”

오전 수업이라 아침 일찍 나가야 하는데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어쩌자는 건지.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것은 순전히 그의 다음 날이 걱정되기 때문일 뿐, 다른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아마도.

* * *

씻기 위해 잠시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스마트폰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말을 끊고 울린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구지?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은 다름 아닌 아줌마.

아, 이건 어쩔 수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줌마 전화를 안 받기는 좀 힘들지.

“미안해요, 지안 씨.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아, 네. 저쪽 방에 들어가서 편히 하세요.”

“고마워요.”

배려하는 마음씨가 어쩜 저리도 착한지.

그녀가 가리킨 방 안은 옷방이었다.

화려한 색이라곤 단 하나도 없는 단정하고, 깔끔한 디자인의 옷걸이들만 봐도 그녀의 평소 스타일을 알 것 같다.

나는 방문을 닫고서 아줌마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도진이니?

“네, 아줌마. 무슨 일이세요?”

-저기…, 잠깐 볼일이 있어서 올라왔는데 네가 없길래 어딘가 궁금해서 전화해 봤어.

잠깐 수화기를 떼고 지금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이 시간에 볼일이라니, 뭔가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지금 그…, 친구 집에 와 있어서요.”

-친구 집…. 그러면 혹시 거기서 자고 올 거니?

“어…, 글쎄요.”

그건 나도 모르겠다.

라면을 먹고 가라고 했지, 여기서 자고 가라는 말은 안 했으니까.

마음 같아선 엉겨붙고 싶지만 섣불리 거리감을 좁히려 들다가 오히려 더 멀어질 수도 있으니 신중해야지.

-도진아.

“…네?”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아줌마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였을까.

-잠은 집에 와서 자야 하지 않을까? 친구도 은근히 불편해할 텐데.

딱히 불편해하진 않는 것 같은데…?

“아뇨, 그렇게 불편해하진 않….”

-응?

갑자기 입이 턱 막혔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지금 내뱉으려는 말은 정답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완벽한 오답이라고.

“확실히 좀 불편해하던 것 같기도….”

-그렇지?

아줌마의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든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얼른 집에 오렴. 내일 학교도 가야 하잖니?

“아, 저기, 아줌마, 저 라면 한 그릇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얼른 오렴?

…끊겼다.

“이게 대체 뭔 일이래.”

라면 한 그릇만 하겠다는 말도 깔끔하기 무시 당한 것 같다.

“…어떡하지.”

머릿속에선 그까짓 라면 먹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냥 먹고 가자고 말하는데 마음은 절대 그래선 안 된다고 도리질을 치고 있다.

이는 이성과 육감의 싸움.

나는 빠르게 답을 내리고서 옷방을 나섰다.

“지안 씨?”

거실을 서성이고 있던 윤지안이 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요. 라면은 다음에 먹어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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